00207 28. 출병 =========================================================================
이민호는 1593년 1월 22일에 원정군을 이끌고 고산국을 떠났다. 천자 전선 18척에 대형 외륜선 12척, 서양 범선 6척에 지상군 병력은 기마병 500, 승마보병 5천, 해병 2천이었다. 승마보병들이 탈 말 5천 마리는 제주도로 먼저 보냈다.
기존 보병 4천을 5천으로 증강시키면서 2천을 승마보병으로 전환시키고 나머지 3천은 고산국에 남겨두었다. 이들은 아리수 하구의 요새를 지키거나 교대로 산토 토마스와 바기오 경비대로 차출되기도 했다. 에스파냐에 대한 필리핀 원주민들의 반란이 자주 일어나서 경비 병력도 증강시켰으나 고산국 조차지에서는 아직 반란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원정함대의 첫 기항지는 조선 구원군에 합류하기로 약속한 류큐왕국이었다. 나하 앞바다를 거대한 배들이 가득 메우자 국왕이 슈리성 궁궐부터 선착장까지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류큐왕국은 고산국의 동맹국이지만 꾸준히 힘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쇼네이 국왕전하! 오랜만입니다.”
“고산국 국왕전하! 드디어 출정하시는 겁니까?”
선착장에 급히 앞이 트인 천막이 세워지고 휘장이 쳐졌다. 두 국왕의 인사절차인 다례를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실제 세력 구도가 어찌 됐든 일단은 대명 제국으로부터 고명을 받은 동등한 신분의 국왕이라 동시에 읍을 하며 술잔을 비웠다. 다례가 끝나자 쇼네이(尚寧) 국왕이 시원스레 생긴 청년을 천막 안으로 들였다.
“국왕전하! 마침 대명 황제폐하께 출정을 명하는 칙서도 받았으니 제 양아들을 원정에 데리고 가주시면 좋겠습니다. 세상은 넓고 큰 나라들끼리는 어떻게 전쟁이 진행되는지 봐두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왕자도 반갑소.”
“고산국 국왕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저는 상왕 쇼에이(尚永) 국왕전하의 조카이며 현 국왕전하의 양아들인 쇼호(尚豊)입니다. 아바마마께 졸라서 이번에 원정군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고산국 국왕전하께서 많은 지도 편달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왕자님이 씩씩하시군요.”
그래서 류큐왕국의 병력 400명이 탄 범선 아홉 척이 함대에 합류했다. 류큐왕국은 더 이상 일본과 무역을 하지 않더라도 경제적 타격을 크게 입지 않을 것 같아 이번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결정했다.
류큐왕국의 배는 지난 몇 년 동안 많이 커졌다. 이민호가 시키는 여러 가지 일을 하려다 보니 배 크기를 키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현재 200명 이상 타는 큰 배가 수십 척이었다. 원정군에 참가한 범선들도 뱃사람을 빼고도 전투 병력이 탈 만한 공간이 충분했다.
생각해보니 황제에게 조선에 원군을 보내겠다고 주문을 올려 독립국으로 공인받는 과실만 따먹은 섬라의 병력을 억지로라도 끌고 올 것을 그랬다. 1월의 전쟁에서는 결국 시암이 승리했다. 전쟁에서 패한 버마의 속국들이 독립을 위해 봉기하는 바람에 버마는 곧 망할 지경이었다.
“처음 국왕전하를 뵀을 때 여덟 살이었던 막내 공주가 어느덧 성인이 됐습니다. 아라야! 들어와서 국왕전하께 인사 올리거라.”
류큐 국왕이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화려한 복장을 차려입은 열두세 살 정도 된 소녀가 휘장을 친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명확한 조선말로 인사했다. 오랫동안 이민호에게 시집가기 위해 준비된 신부였다.
“인사 올립니다, 국왕전하. 그 동안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제 저도 다 컸으니 앞으로 국왕전하를 모시겠습니다.”
이민호는 더 이상 놀라지도 않았다. 그리고 출발 전에 혜영이 언질해준 것이 있어서 공주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현재 고산국과 유구국은 전략적 동반관계나 다름없었다. 일종의 세력 결합을 위한 상징이니 신부가 어려서 싫다고 이민호가 투정부릴 수는 없었다.
류큐왕국 사신들이 수시로 고산국 궁궐에 들락거리며 이민호 몰래 혜영과 쑥덕거리더니 어느새 아라 공주를 후궁으로 들여오기로 결정했다. 아라 공주는 왕족 신분이라 처음부터 귀인이었다. 내명부 여학교 초등부 고학년이나 중등부 저학년에 입학시키면 될 것 같았다.
“원정을 떠나는 길이라 안타깝지만 공주를 모셔가기 어려울 것 같소. 그러니 귀환할 때 연락을 해서 따로 모시겠소.”
“저는 이미 전하의 여자입니다. 전하께서 가시는 곳 어디라도 따르겠습니다.”
“어? 어?”
아라 공주가 시녀에게 가위를 달라고 하더니 긴 머리카락을 싹둑 자른 다음 나머지 머리칼을 뒤로 돌려 질끈 묶었다. 그리고 화려하고 치렁치렁한 옷을 벗고 갑옷을 입었다.
이 정도 결심을 보여주었으니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시녀 세 명 중에서 한 명은 낯이 익었다.
“그대는, 혹시?”
“예, 전하. 그때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전에 사쓰마 사무라이들하고 싸울 때 휘말렸던 과일 행상 처녀가 시녀로 일하고 있었다. 이민호는 이 처녀가 계복과 눈이 맞은 줄 알았는데, 나중에 계복과 그 시녀에게 물어보니까 서로 기억도 못했다.
이 처녀는 과일 행상을 할 때 이미 중국어와 일본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새 조선말까지 익힌 대단한 재녀였다. 이민호는 그녀의 재주가 아까웠다. 그러나 만약 혜영에게 이 처녀를 알려주면 얼씨구나 반갑게 부려 먹을 것 같아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기함에서 방 하나를 공주의 별궁으로 내주고 머무르게 했다. 장기간의 원정이 될지도 모르는데 고생시킬 것 같아 미안했다. 시녀들이 공주의 짐을 배로 옮겼다.
그 날은 나하의 슈리성 궁궐에서 묵었다. 아라 공주가 고산국 왕비로 정식 결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다. 다만 왕실 가족과 간단히 식사하는 것으로 결혼식을 대신했다.
첫날밤이라고 아라 공주가 예쁘게 화장하고 침실에 들었다. 꽤나 귀여운 얼굴이라 역변의 시기만 잘 보내면 미인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민호는 어린 공주를 꼭 껴안고 잤다. 공주도 많이 긴장했는지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45척으로 불어난 함대가 간혹 불어오는 남풍을 타고 북상했다. 함대에 범선이 많이 끼어있어 함대 기동에 불편함이 많았으나 아직 큰 사고는 없었다. 나하에서 북동쪽 200km 거리인 아마미오시마에서 하루 정박하고 다음 날 큐슈 남해안에 도달했다.
넓은 바다에 수송선들을 머물게 하고 이민호는 기함을 비롯해 전선 여섯 척만 이끌고 사쓰마 반도와 오스미 반도 사이의 해협 안으로 들어갔다. 해병들과 수병들이 바짝 긴장한 채 사방을 주시했다. 그러나 배란 배는 모조리 조선과의 전쟁에 징발됐는지 이 넓은 바다에 어선 한 척 돌아다니지 않았다.
이민호는 기함의 함교에서 해도를 살폈다. 혜영과 미카가 훈련시킨 간첩들이 큐슈의 정확한 해도를 그리고 위도와 경도까지 정확히 표시한 정밀한 해도였다. 일부 공격 목표로 삼은 지역은 진입로 주변의 수심까지 기록돼 있었다.
“국왕전하! 적지에 들어왔는데 어째서 상륙하지 않습니까?”
“쇼호 왕자! 사쓰마에 포격만 하고 나올 테니 총격전은 없을 것이다. 지금 당장 일본을 정벌하지 않는다. 다만 큐슈 해안지방에 포격을 하여 큰 소란을 일으키는 것이 이번 작전의 목적이다.”
“적의 주력이 조선에 가 있는 동안 큐슈를 점령하면 좋을 텐데, 아깝습니다.”
“북 큐슈 나고야 성에 왜군 10만 이상이 주둔 중이다. 왕자는 경거망동하지 말라!”
고산국의 군사력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겨우 8천밖에 안 되는 병력으로 큐슈 전체를 점령할 수는 없었다. 이민호는 이 용감하고 개념 없는 왕자가 조금 걱정됐다.
그리고 휴가나 오스미까지 공격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인구가 많은 지역을 가볍게 포격 몇 번을 가해 놀라게 해주면 충분했다.
해협을 지나자 활화산인 사쿠라지마의 온타케 산 정상에서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함대가 도시 앞바다에 도달하기 전부터 사쓰마의 거성 도호쿠지 성에서 병력이 움직였다. 망루에서 경고를 했는지 왜군 수백 명이 포구 쪽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함장! 왜성부터 무너뜨려!”
“1, 2, 3, 4번 함포, 북서쪽 왜성을 향해 쏴!”
- 쿵! 쿠쿵!
이민호가 지시하자 함장이 함교에서 함포 4문으로 이어지는 전성관을 통해 포격 명령을 하달했다. 이번에 개량된 부분이었으나 아직 함포에 명령을 전달할 전령은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전기를 이용한 음성통신은 아직 꿈도 못 꿨다. 다른 전선들도 기함을 따라 왜성에 포격을 퍼부었다.
“우와! 말로만 듣던 함포 사격이군요. 박력이 대단합니다. 포탄의 파괴력도 엄청납니다!”
왜성에서 폭발이 일어나는 동안 함포 사격을 참관한 쇼호 왕자가 감탄했다. 왕자의 바지춤이 젖은 것 같았지만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갑옷을 입은 아라 공주가 이민호에게 꼭 달라붙었다. 그러나 왕자와 달리 오들오들 떨 정도는 아니었다.
“공주도 잘 지켜보시오. 침략자의 말로가 어떤지를.”
“대포의 위력이 대단히 강합니다, 전하.”
이민호는 유구국이 당분간 고산국을 앞설 꿈도 꾸지 못하고 자치에 만족하길 바랐다. 그들에게 꿈이 있더라도 현실과 타협해야 한다. 사실 고산국이 유구국을 집어삼키지 않은 것만 해도 유구국 사람들은 이민호에게 감사해야 했다.
“왜선 네 척이 포구에서 나왔습니다.”
“격침시켜!”
“예! 각 함포, 한 척씩 맡아서 포격 시작!”
나머지 다섯 척이 왜성에 대한 함포사격을 지속하는 동안 기함에서 세키부네 규모인 왜선 네 척을 순식간에 격침시켰다. 물에 빠진 왜병들이 살아남겠다고 허우적거렸다.
사쓰마군이 바다에서 포격을 하는 고산국 함대에 저항할 수단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그렇지 않아도 시마즈군의 병력은 사쓰마 전체에 분산되어 있고 특히 시마즈 요시히로는 조선으로 출병하고 없었다. 고산국 함대에 대항하고 싶어도 시마즈군에는 병력도 없고 배도 없었다.
말 탄 무사 몇 명을 따라 왜병들이 해안선으로 몰려왔으나 조총 사거리에서 멀리 떨어져서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멀리서 발작적으로 조총을 쏘는 왜병들에게 기함에서 포탄 몇 발을 선사했다. 왜병들은 시체 수십 구를 해안에 남기고 서둘러 민가 뒤쪽으로 도망가서 숨었다.
“국왕전하! 계속 포격합니까?”
함장이 묻자 이민호가 망원경을 들어서 살폈다. 사쓰마의 거성, 도호쿠지 성의 천수각이 무너진 채 불타오르고 성곽 이곳저곳이 허물어졌다. 내부 건물 수십 채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왜성에 대한 포격 중단. 시가지에 대한 포격 3회 실시. 1회는 연막탄이다.”
함장이 그대로 명령을 수행했다. 신호수가 다른 배들에 깃발 신호를 열심히 보낸 다음 포격이 몇 회 이어졌다. 성 아래 마을 건물 몇 채가 무너지고, 여러 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일본의 전쟁문화에서 특별한 이유가 없을 경우 민간인에 대한 공격을 자제하는 편이었다. 영주끼리 싸우다가 승부가 결정 나면 점령지 백성들을 새로운 영주가 다스려야 하기 때문에 공격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일본인들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 일부러 민간인에 대해서도 공격을 가했다. 나중에 이것에 대해 일본에서 불만을 토로하면 성곽을 공격하려 했는데 포격이 빗나갔다고 핑계를 댈 작정이었다.
“좋다. 퇴각해서 수송 함대와 합류해라.”
불타오르는 사쓰마와 화산을 배경으로 두고 전선 여섯 척이 해협에서 빠져 나왔다. 아라 공주가 이민호에게 함미로 옮겨 구경하자고 했다. 어쩔 수 없이 함교에서 나와 함미로 옮겼다.
“불타는 마을과 화산이라니. 별로 아름다운 장면은 아니오, 공주.”
“하지만 저에게는 전하가 가진 군대의 강력함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에요.”
“앞으로도 자주 볼 수 있을 거요.”
“저는 전하께서 저를 데려가시길 오랫동안 기다렸답니다. 꿈이 이루어진 것 같아요.”
공주의 말을 듣고 이민호는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린 평강공주가 울 때마다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낸다고 왕실 가족들이 얼렀더니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자란 평강공주가 성인이 된 다음 당연하다는 듯이 바보 온달에게 시집갔다. 지난 4년 동안 오직 이민호에게 시집가기 위해 교육을 받은 아라 공주였으니 비슷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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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또 올리겠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