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214화 (163/1,000)

00214  28. 출병  =========================================================================

정주부 관아에 임금의 임시 거소인 행재소가 있었다. 이민호는 군사들을 정주 관아 밖에 숙영지를 치고 주둔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일부러 한참 시간을 보내다가 오후 늦게 유구국 왕자 쇼호와 함께 행재소를 방문했다.

이민호는 호위대를 이끌고 정주 관아의 대문을 넘었다. 대문에는 금군 몇 명이 서 있다가 이민호에게 허리를 숙였다. 중문을 지나니 동헌에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도착하기 전에 미리 연락을 보내서 조선 국왕이 동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여송이 의주에 도착했을 때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멀리 교외까지 마중 나왔다던데 이민호에게는 그런 환영인사가 없었다. 현재 조선 조정에서는 이민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지금도 논쟁과 설왕설래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민호는 분명히 조선국 신하이기도 하고 명목상 조선의 속국인 해중국의 실제 주인이기도 했다. 영역이 불분명한 조선국 고산목의 목사를 겸했다. 그러나 명나라 황제로부터 직접 관작을 받은 고관대작이기도 하고, 조선에서 활동하는 조선과 명나라의 군대 전체를 지휘할 수도 있는 권한을 황제로부터 부여받기도 했다.

또한 이민호는 명나라 황제로부터 고신을 받아 조선과 동등한 제후국의 국왕이었다. 의전을 주도하는 예조 입장에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신분이었다. 결국 난상토론 끝에 조선 조정에서는 명나라 황제의 뜻에 따르기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

“주상전하! 고루거각에 계셔야 할 분이 어이하여 이런 초라한 관아에 계시옵니까? 신 이민호는 왜적을 치느라 바빠 이제야 겨우 근왕을 하게 되었으니 불충한 소신에게 벌을 내려 주십시오!”

이민호가 선조 임금 앞에서 무릎을 꿇고 대성통곡을 했다. 사실 이민호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으나 혜영이 강력히 요구해서 좀 오버했다. 홍삼 중개무역으로 인한 이익이 연간 금 20만 냥이 넘으니 눈 찔끔 감고 선조 임금에게 그까짓 절 좀 하라는 것이 혜영의 요구였다.

이민호가 하는 모든 행동을 양반 관료들뿐만 아니라 팔도의 백성들이 평가하게 될 테니 이민호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단지 선조 임금 기분 좋으라고 하는 행동은 절대 아니라는 뜻이었다. 고산국에 정착한 조선인 출신 백성들, 그리고 앞으로 이민 올 조선인들을 고려해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현실이 몹시 짜증났다.

“어허! 고산국 국왕전하께서는 어서 일어서시오.”

국왕 선조 임금은 물론 조선의 조정 대신들까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그러나 이민호가 취한 예상외의 행동이 조선 임금과 조정 대신들을 안심시켰고, 몇몇은 대놓고 기뻐했다. 이민호가 만약 기고만장하게 나오며 건방지게 굴어도 대응할 방법이 없었는데 처음부터 저자세로 나오자 대신들이 안도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고산국왕 전하! 멀리 이 궁벽한 곳까지 와주셔서 고맙소이다. 어서 일어나시라니까요.”

이민호가 이만큼 양보했으니 선조 임금도 성의를 보였다. 이민호가 원래 조선국 신하였으니 현재 신분이 어떻게 되든 영원히 조선국 신하라고 우길 수는 없었다. 만약 감정대로 했다간 왕위가 위태로웠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명나라 황제가 보낸 칙서에 이민호는 조선 국왕처럼 황제의 제후국왕이라고 분명히 적시되어 있었다. 만약 이민호를 예전처럼 조선의 신하로 대한다면 선조 임금이 황제에게 불충한 제후국왕으로 몰릴 수가 있었다.

선조 임금은 명나라 황제가 임금을 꾸짖는 칙서를 받은 다음부터 걸핏하면 선위 소동을 일으켜 난리를 피우는 게 일상이었다. 물론 지금은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거꾸로 대신들로부터 충성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연극이었지만, 만약 다시 한 번 칙서에서 임금에게 나쁜 소리가 나온다면 진짜로 왕위를 내놔야할지도 몰랐다.

왕권의 정당성을 국내의 지지가 아닌 대국의 황제에게서 얻었으니, 반대 상황이 되어 황제의 지지를 잃으면 당연히 선위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릴 수 있었다. 광해군이 똑똑하다고 소문났으므로 명나라 황제부터 조선의 조정 대신들은 물론 백성들까지 은근히 선조가 퇴위하길 원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를 선조 임금도 알고 있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주상전하! 먼저 옥좌에 정좌하시고 소신이 올리는 절을 받으십시오.”

이민호가 일어나서 권하자 선조 임금이 습관처럼 옥좌에 오르려하다가 움찔했다. 여기저기서 대신들과 내관들이 선조 임금에게 눈치를 주고 있었다. 선조 임금도 실수를 알아차렸다.

“어험! 불곡이 과연 옥좌에 앉아서 고산국왕 전하의 인사를 받아도 될지 모르겠소.”

임금이 스스로를 낮추는 1인칭 대명사로서 과인 외에 <예기(禮記)>에서 칭하는 오랑캐 왕의 자칭으로서 고(孤)와 불곡(不穀) 등이 있었다. 임금도 평소에는 나, 즉 여(予)라고도 흔히 칭했다. 이민호는 주애공이나 제독총병관 신분으로 활동할 때는 본작, 고산국왕으로서 활동할 때는 본직이라고 스스로를 불렀다.

현재 선조 임금은 이민호와 동등한 제후국 왕의 신분으로서 상견례인 주례를 거행하기 위해 옥좌에서 내려와 있었다. 국왕을 포함한 관직을 가진 자끼리 인사할 때는 높은 사람이 북쪽에 앉고 낮은 사람이 북쪽을 바라보는 위치인 남쪽에 서는 북면이 기본이었다. 북쪽은 하늘의 중심인 북극성을 가리킨다.

그러나 서로 동등하게 대할 때는 동쪽과 서쪽에 서서 동시에 읍을 하는 식으로 다례가 이어지는 것이 법도였다. 선조 임금은 명나라 장수들과 상견례를 할 때 그들을 우대하기 위해 동쪽에 서는 경우가 흔했다. 명나라 유격 같은 하급 장수가 선조 임금에게 북쪽에 앉기를 청하면 몇 번 사양하다가 앉는 식이었다. 그러나 오늘 주례의 상대는 같은 명나라의 제후국 국왕 이민호였다.

“주상전하는 소신의 국왕이시기도 합니다. 어서 옥좌에 오르시지요.”

“하지만 동등한 국왕끼리 그럴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소.”

이민호가 몇 번이나 옥좌에 앉길 권했으나 선조 임금은 끝내 옥좌에 오르지 않았다. 황제가 두려운 탓이었다.

“주상전하께서 이러시면 제가 욕을 먹습니다. 소신의 아비가 저를 뭐라고 하겠습니까? 부자의 연을 끊을지도 모릅니다.”

“통제부사께서는 충신이며 명장임을 내 알고 있소. 일찍이 통제사가 되길 권했으나 끝내 오르지 않았소이다.”

이민호가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선조 임금이 아무 생각 없이 부친 이응화가 사는 낙을 빼앗아갈 뻔했기 때문이다. 부친은 중요한 결정은 통제사 이순신에게 맡기고 시키는 대로 열심히 싸우는 것을 더 좋아하는 전형적인 돌격형 무장이었다.

위계 문제에서 이민호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선조 임금이 특별히 조정 대신들에게 하명했다.

“어험! 신하들은 들으시오. 특히 사관들은 명심해서 들어라!”

“예으이~ 전하!”

“고산국 국왕전하는 불곡에게 남면하기를 재삼 청했지만 불곡이 끝내 사양한 것이오. 불측한 자들에게서 다른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고, 혹시나 모르는 사람이 묻거든 오늘 일을 자세히 알려주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인사 한 번 하는데 이렇게 절차가 복잡했다. 그 후에도 이민호와 선조 임금이 서로 몇 번씩이나 사양한 다음 간신히 합의점을 찾았다. 반 북면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같은 높이인 단상에서 선조 임금이 북동쪽에 서고 이민호가 남서쪽에 서서, 선조는 이민호에게 읍을 하고 이민호는 선조에게 절을 했다.

만약 나중에 황제가 이 일에 대해 추궁하더라도 선조가 옥좌에 앉지 않고 같은 층에서 동시에 인사를 했다고 우길 수 있으니 이런 꼼수가 동원됐다. 이민호는 황금 20만 냥을 떠올리며 다시 절을 하려고 자세를 잡았다. 절 한 번에 황금 10만 냥이었으니 어른에게 세배하고 세뱃돈 받는 셈 쳤다.

“재배(再拜)를 하겠습니다.”

“고산국 국왕전하! 과례는 비례라 하였습니다. 이제 읍은 그만 하시고 일작을 하시지요.”

“예의가 아닌 줄 아오나 주상전하의 명이시니 소신은 명을 따르겠습니다.”

몸을 돌려 술을 한 잔 마시니 선조 임금이 내관을 시켜 다시 술을 따르게 했다. 관례에 따라 이민호가 사양했다.

“주상전하! 주례는 이만 하시는 게 어떨지요? 왜적을 물리치고 나서는 밤새 마실 수 있겠지만 지금은 시급히 왜적을 추격해서 왕경을 탈환해야 할 때입니다.”

“과연! 전쟁하기를 여색보다 탐하신다는, 실례했습니다. 조선국의 모든 생령들이 국왕전하의 무위만 믿고 있겠습니다.”

선조 임금이 괜히 이항복에게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를 열심히 하는 것을 여색보다 탐한다는 말은 이항복이 자주 썼다. 그 말이 입에 착 달라붙어 선조 임금의 입에서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탓이었다.

“주상전하! 그럼 이번에는 유구국 국왕전하의 정통 후계자로 내정된 왕세자 상풍이 주상전하께 인사 올리겠답니다.”

인사하다가, 아니 인사절차를 논하다가 어느새 저녁이 되어 가고 있었다. 반나절 동안 서로 극구 사양하는 짓을 구경하다가 하품을 하던 쇼호 왕자가 깜짝 놀라 정색을 했다.

“유구국 세자 쇼호입니다. 조선국 국왕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우방국의 세자께서 이리 헌앙하시니 든든합니다. 원군을 이끌고 오신 세자께 감사드리오. 조선말도 아주 잘 하시는군요.”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인사는 이제 그만 하시지요. 저는 어서 왜적하고 싸우기만 바랄 뿐입니다.”

선조 임금이 당황하고, 조정 대신들은 혀를 찼다. 평소 유구국이 조선에 보내는 국서에는 정성이 가득 담긴 글귀가 적혀 있었는데, 실제로 만나 보니 역시 야만인은 어쩔 수 없다고 수군거렸다.

이때 내관이 새로운 방문자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선조 임금을 비롯해 모든 대신들과 금군이 자세를 바로 했다. 아주 높은 사람이 온 모양이었다.

“영하후께서 입시이옵니다!”

제독 이여송이 부총병, 참장, 유격 같은 수하 장수들과 함께 정주부 관아의 중문을 넘어섰다. 이여송은 선조 임금에게는 살짝 목례만 하고 이민호 앞에서 정식으로 군례를 올렸다. 다른 수하 장수들도 일제히 이민호에게 군례를 했다.

“전하! 드디어 조선에서 존경하는 전하를 뵙게 됐습니다. 소장이 장수들과 함께 인사 올립니다.”

좌협대장 이여백이 전령을 보내 이여송을 비롯한 명나라 장수들을 모두 불러들인 모양이었다. 이때 마침 이여송이 평양성에 있다가 이민호가 정주부에 왔다는 말을 듣고 수하 장수들만 데리고 황급히 달려왔다.

이민호는 이여송에게 직속상관은 아니었다. 그러나 흠차 제독 남북 수륙 관병 어왜총병관 직책을 받은 이민호가 만약 지휘권을 행사하고자 할 경우 약간 무리는 있다 해도 이여송 등을 지휘권 아래에 둘 수 있었다.

이민호가 작전이나 병력 문제로 협의해야 할 상대는 명나라 병부상서 혹은 조선에서 진행되는 명나라의 군무를 총괄하는 경략이나 경리 등의 흠차대신이었다. 현재 병부시랑으로서 경략을 맡은 송응창은 요동에 있으니 이민호가 마음만 먹는다면 조선 땅 안에서 명나라 장수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민호가 이여송의 잠재적인 직속상관인 셈이었다. 물론 이민호가 송응창 등의 반발을 사가면서 명나라 군대를 지휘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 조직생활을 잘하는 비법이었다.

유구국 쇼호 왕자가 이민호를 더더욱 존경하게 되었고, 선조 임금과 대신들의 얼굴 표정이 수시로 변했다. 이민호는 사람들 앞에서 뻘쭘하긴 했으나 오랜만에 명나라 장수들과 인사는 나눠야 했다.

“이 제독이 영하후로 승작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소. 경하 드리오.”

“황공하옵게도 그것은 헛소문입니다, 전하. 하하하!”

“전공을 많이 세워서 금방 공후가 되실 거요.”

“저도 공후의 관작을 받고 싶습니다. 전하께서 이번에도 많이 도와주십시오.”

선조실록 25년 12월에 진주사 정곤수가 북경에서 돌아온 다음 어전에서 이여송이 영하후로 봉작됐다는 발언이 한 번, 선조 29년 2월에 동지사로 북경에 갔다 온 윤근수에게 임금이 사실인지 묻는 내용이 한 번 나온다. 몇몇 자료에는 이여송이 영하후로 되어 있으나 사실이 아니었다. 부친 이성량의 작위인 영원백을 습봉했다는 내용도 있으나, 이여송이 부친보다 먼저 전사했으니 나중에 영원백을 추증한 것뿐이다.

“주상전하! 저는 전우들과 함께 물러나겠습니다.”

“그러시오. 고산국 국왕전하와 이 제독 대인이 친한 것 같아 불곡은 마음이 아주 든든하다오. 어서 왜적을 물리쳐주시오.”

“물론이옵니다. 그럼 하직 인사드리겠습니다.”

============================ 작품 후기 ============================

한글에 문제가 생겨서 오전을 다 날려버렸습니다. 늦게 올려 죄송합니다.

이번 회는 인사만으로 연재분 한 회를 잡아먹을 수 있다는 예시입니다...

한편 더 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