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15 28. 출병 =========================================================================
이민호가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선조 임금에게 절을 했다. 선조 임금은 몹시 당황하면서 얼른 무릎을 꿇고 절을 반쯤 할 때 절을 마친 이민호가 일어섰다. 이민호가 서 있고 선조 임금이 무릎을 꿇은 꼴이라 이민호가 얼른 다시 무릎을 꿇었다.
“주상전하께서는 어찌 신하에게 절을 하십니까?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하오나 두 분은 동등한 황제폐하의 제후 국왕 아니십니까? 과거에 두 분이 어떠한 관계였든 모든 것은 황제폐하를 기준으로 하셔야 합니다.”
이민호가 사양하는데 이여송은 이민호가 예절이 과하다고 말리면서 은근히 선조 임금에게 압박을 가했다. 선조 임금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쩔쩔 매기만 했다. 어쩌다 보니 우연이 겹쳐서 선조 임금을 어르고 달래고 뺨을 친 셈이 되었다.
어쨌든 이민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조 임금에게 예의를 다했다. 만약 임금이 기분이 나빴다면 그것은 황제나 이여송 탓이지, 이민호 탓은 절대 아니었다.
“주인님. 그런데 조선 국왕전하께서 원래 저렇게 뚱뚱하셨어요?”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그 동안 좀 과하게 찌셨네.”
정주부에서 나오는 중에 민희가 묻고 나서야 이민호도 선조 임금의 몸집이 비대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겨우 몇 년 만에 몸무게가 거의 두 배로 불어난 것 같았다. 단순히 나이가 많아서 배만 나온 것이 아니라서 문제였다.
“주인님도 단 것 좋아하시죠? 배불뚝이 되시기 전에 군것질 좀 줄여야겠어요.”
“아! 그렇구나. 위험한데?”
이민호가 직접 왕실에 진상한 것은 주로 열대 과일이었다. 적당히 먹으면 살이 찌기는커녕 오히려 살이 빠질 음식이었다.
그러나 내수사 전수가 이민호가 사는 서소문 집에 들를 때마다 설탕을 잔뜩 버무린 과자를 산더미처럼 가져갔다. 그리고 과자를 만드는 방법을 배워가기도 했다.
아무래도 내수사 전수는 손주들에게 준 것이 아니라 임금에게 과자를 진상한 것 같았다. 설탕만 많이 넣었으면 차라리 괜찮은데 단맛을 극대화하기 위해 소금까지 쳤으니 중년 건강에 좋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설마 과자나 주전부리 좀 바쳤다고 주상전하 시해음모 사건에 휘말리는 것은 아니겠지?”
이민호는 선조 임금이 고혈압이나 동맥경화, 당뇨병으로 쓰러질까 걱정됐다. 아까 선조 임금이 이민호에게 얼떨결에 절을 하고 나서 스스로 일어서지 못하고 내관들의 부축을 받아 일어섰다. 관절을 비롯해 임금의 옥체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조선과 고산국의 관계 설정을 대충 마쳤으니 이제 선조 임금이 죽든 말든 상관없었다. 임금과 왕세자의 관계가 소원한 편이지만 결국 광해군이 왕위를 이어받게 될 것이다.
사실 이민호는 광해군도, 인조도 좋아하지는 않았다. 김응하가 심하전투에서 전사하고 명나라 황제가 그의 가족에게 하사한 은을 착복했다는 혐의를 받는 왕이 광해군이었다.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인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세종대왕과 정조 정도 되는 왕은 세계 어느 나라 역사를 봐도 극히 희귀한 편이었다. 이민호는 자기가 왕이면서도 왕정제를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이민호는 미리 쳐놓은 천막으로 명나라 장수들을 안내했다. 이여송과 장수들이 정주부 관아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기병 지휘관 감동이 지시해 벌써 주안상을 차려놓았다.
이민호는 영하에서 싸운 이야기를 안주로 삼아 명나라 장수들과 함께 실컷 웃고 떠들었다. 유구국 왕자 쇼호가 중국어도 잘해서 술자리에 어울렸다. 그런데 술자리가 행재소에서 가까워 웃음소리가 조선 국왕의 어전까지 다 들렸다.
나머지 장수들은 술을 마시며 크게 웃고 떠들도록 두고 이민호는 몇 사람만 따로 불렀다. 제독 이여송과 좌협대장 이여백, 중협대장 양원, 우협대장 장세작, 그리고 군문찬획인 무고 청리사 원외랑(武庫淸吏司員外郞) 주황상과 직방 청리사 주사(職方淸吏司主事) 원황을 옆 천막으로 안내하고 지도를 펼쳤다.
한성과 한강 주변 지형이 자세히 그려진 정밀 지도를 살피던 이여송이 이민호에게 확인했다. 이민호가 설명도 하기 전이었다.
“전하께서는 한성을 탈환하자는 말씀이시지요?”
“그렇소. 전라순찰사 권율이 수원 독산성에서 왜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현재 김포로 이동했소. 권 순찰사의 공격적인 위치 선정 경향과 방어적인 전투 성향을 봤을 때 이곳 행주의 강변 언덕에 진을 치고 왜적들을 끌어들일 것이오.”
권율은 왜군이 반드시 와야 할 곳에 미리 목책을 두르고 준비한 다음 왜군을 유인해 방어전을 통해 승리했다. 웅치와 이치, 독산성과 행주대첩은 똑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 전투였고, 모두 이겼다. 실제 역사에서 권율이 도원수로서 전투 현장 지휘에서 물러나 명성이 깎인 감이 있으나 전술적 판단만은 뛰어난 편이었다.
“이곳은 서대문에서 20리도 안 떨어져 있군요. 한성에서 너무 가깝지 않습니까? 그리고 화약무기를 쓰는 이 시대에 배수진이라니, 순찰사는 병법을 모르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자가 분명합니다.”
군문찬획 주황상이 어이가 없다면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러나 반대로 원황은 행주의 언덕이 평지보다 약간만 높더라도 목책으로 막으며 대포와 활만으로 적의 대군을 이길 수 있다고 봤다.
금천에 주둔한 전라병사 선거이와 양천에 주둔한 소모사 변이중의 병력이 남쪽으로 우회할 수 있는 왜군을 견제하고 있었다. 통진과 강화에도 조선군 병력이 배치됐다. 한강 남서부는 조선군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군의 주력은 한성 북쪽 파주에 주둔한 도원수 김명원의 군세와 양주에 배치된 경기방어사 고언백의 군세였다. 조선군이 한성을 포위한 듯하지만 병력이 많지 않아 오히려 한성에 몰려든 왜군이 내선의 이점을 이용해 주변 조선군 진채를 하나씩 각개 격파할 수 있는 배치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이곳 행주에서의 전투는 전라관찰사와 본작이 수행하겠소. 내가 천군에게 원하는 것은 이곳에서 싸워달라는 것이 아니요.”
“성동격서입니까?”
“그렇소. 방향이 반대지만, 전라순찰사와 본작이 서대문 쪽에서 시끄럽게 구는 동안 천군은 동대문을 넘으시오. 중간에 한성이 있어서 전령을 보내 연락을 유지하기 어려울 테니 서대문이나 남대문 방향에서 대포 소리가 연속 들리거든 동대문을 부수고 한성으로 돌입하시오. 어떻소?”
“흐음.”
이민호에게 작전지휘권이 없으니 이것은 순전히 명령이 아니라 작전협의였다. 명군 지휘부는 손해 볼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순순히 받아들였다. 행주에서 완벽히 성공한다면 명군의 도움이 필요 없을지 모르지만 실제 작전이 시작되고 나면 전황은 한 치 앞을 바라볼 수 없으므로 가급적 명군의 도움을 받는 편이 나았다.
“좋습니다, 전하! 그래도 조선의 왕경인데 조선군이 먼저 입성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조선군이든 천군이든 같은 편인데 누가 먼저 입성하든 무슨 상관이 있겠소? 도와주러 온 천군이 한성을 탈환한다면 조선에서 체면도 서고 황상께서 더 기뻐하실 것 같소.”
“그건 그렇습니다.”
6.25때 한국군 어느 부대가 서울 시청에 태극기를 게양했는지, 몇 사단이 압록강 물을 떠왔는지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 기억하지 못한다. 그 사실이 중요하지 주체가 누군지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영광의 주인공들, 혹은 그 후계자를 자처하는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로써 작전 협의는 끝냈다. 서대문부터 행주산성까지는 조선국과 고산국의 작전 영역이었다. 명나라 어느 부대가 한성에 최초로 입성하든 왜장의 목을 따든 상관하지 않았다.
이틀 후부터 예비 작전이 시작되고 꽤 오래 진행됐다. 개성으로 진군한 명군 주력은 한성 주변에 정찰대를 수시로 파견해 왜군 정찰대와 맞부딪쳐 활동범위를 점점 줄여나갔다. 그 사이 명군은 크게 동쪽으로 우회해 퇴계원 방향으로 진군했다.
이 시기 제독접반사 류성룡을 비롯해 조선의 고관대작들이 명나라 장수들의 접대를 맡았다. 그러나 작전의 기밀 유지를 위해 접반사나 하인 주둔지에 머물게 하고 명군은 기병과 보병들만으로 이동했다.
이민호는 다시 전선을 타고 바다로 나왔다. 정주에서 한성까지는 겨우 200km 거리였지만 기병은 몰라도 유구국 보병들을 이끌고 5일 넘게 행군하려니 갑갑했기 때문이다.
유구국 병사들은 마치 눈사람처럼 겹겹이 껴입고도 추위에 떨었다. 그러나 이민호 입장에서는 조선이 춥다는 말을 듣고 털외투를 준비한 유구국 사람들이 대견스러웠다.
유구국 군사들은 여러 가지 곡물을 볶아 바짝 말려 가루로 만든 휴대 식량을 이용하고 있었다. 이런 미수가루 종류도 훌륭한 여행용 휴대식량이지만 이민호는 다른 것을 개발할 생각을 해봤다.
이민호가 이끄는 분함대는 계복이 지휘하는 본함대와 합류하기 위해 계속 남쪽으로 항로를 잡았다. 아라 공주가 추위를 워낙 많이 타서 항상 이민호 품안에 들어와 있으려 했다. 이 기회에 혜영이나 혜진처럼 가슴을 키워줄까 하다가 어린애 상대로 죄 짓는 기분이 들어서 포기했다. 혜영과 혜진은 이민호에게 연상이라 부담이 덜했었다.
그 사이에도 기함의 항해사들이 위도와 경도를 측정하고 해도를 그리고 있었다. 동아시아 바다에 퍼져 일하는 유구국 상인들에게도 같은 일을 시키고 일정 기간마다 정보를 교환하다 보니, 그 사이에 정밀한 동아시아 지도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제는 마카오에서 파는 포르투갈 해도보다 훨씬 정확했고, 그들이 모르는 지역 일부도 지도에 포함됐다.
이민호나 고산국 항해자들이 가보지 못한 말래카해협과 섬라, 브루나이, 몰루쿠제도 등도 지도에 이미 기입돼 있었다. 향료제도인 몰루쿠제도 동쪽은 제대로 다 그려져 있지 않았지만 뉴기니 섬인 것 같고, 남쪽 육지로 묘사된 부분은 설마 남극대륙은 아닐 테니 아무래도 호주 같았다.
호주는 언젠가 반드시 이민호가 가져야 할 지역이지만 기억하기로 아직 시간 여유는 많았다. 차라리 유럽 이민자들이 정착 중인 북미가 더 급한 편이었다. 아직은 적당한 농작물이 없어 개척이 실패로 점철되던 시기였다.
“함장! 저 배들은 뭔가?”
“명나라 어선 같습니다, 전하.”
백령도를 지날 때 조선의 배와 형식이 약간 다른 배들이 떼로 몰려다니고 있었다. 명나라 수군이 아직 조선에 오지 않았으니 아무래도 명나라 어선 같았다. 이민호가 산동반도와 발해만을 지나다닐 때도 거의 보이지 않던 명나라 어선이 엉뚱하게 조선 서해안에서 더 많이 돌아다녔다.
대청도를 지날 때도 마찬가지로 명나라 배들이 많이 다녔다. 해병이나 수병, 기마병 중에 이 지역 출신 사람이 없어 저 배들이 무엇을 잡는지 알지 못했다. 아마도 연평도 근해에서 조기를 잡지 않을까 예상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나중에 명나라 배들이 조선 황해도 해역에서 몰래 해삼을 잡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온대와 한대 해삼을 명나라에 거의 독점적으로 판매하는 이민호는 굉장히 분개했다.
그러나 황해도 수군이 활동을 하지 못하니 수시로 침범하는 명나라 어선들을 쫓아낼 수도 없었다. 어서 전쟁을 끝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연합함대가 강화도를 지나 김포에 집결했다. 이때가 2월 11일이었고, 행주대첩이 있기 하루 전이었다. 이미 상륙해서 개성 근처에 주둔한 승마보병들과는 꾸준히 연락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민호는 오후에 기함 한 척만으로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행주산성 밑에서 내렸다. 한강 수심은 해동상단에서 계절마다 측정하지만 이번에 전선들이 활동하기 전에 다시 정밀 측량을 마쳤다.
전라도순찰사 권율이 부하 장수들을 이끌고 마중 나왔다. 권율이 지휘하는 곳이 항상 그렇듯 어수선한 분위기는 전혀 없이 군대에 기강이 제대로 잡혀 있었다.
“이 대감!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순사 영감께서 화가 나신 것 같습니다.”
이민호가 괜히 말해서 전라순찰사 권율의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조방장 조경은 감히 권율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제가 이틀 동안 체찰사의 부름을 받아 자리를 비운 사이에 조방장이 쓸데없는 짓을 해서 나무라던 중이었습니다. 왜군이 쳐들어오지도 않을 텐데 뭐하러 목책을 세웠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압니까? 왜군 3만 명쯤이 내일 새벽에 이곳을 공격하러 올지 모릅니다. 방어시설이란 게 있으면 좋지 않습니까?”
이민호는 권율의 안내를 받아 행주산성을 순시했다. 관군과 의병, 승병들이 방어선마다 배치됐는데 총 4천 명이 안 되는 숫자였다.
병사들의 사기도 높고 화약과 화살 등 물자도 잘 갖춰져 있었다. 이민호가 따로 지원해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이곳에 오기 전에 독산성에서 의외로 대감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산성을 지키는 스님의 말에 따르면 산성에 원래 샘이 없었다는데 대감께서 연못을 세 곳이나 파고 군량도 충분히 비치해 두셨다고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병사들에게 포식을 시키고, 산성을 포위한 왜군들을 여유 있게 물리쳤습니다.”
“잘했소. 아주 잘했소.”
“안타깝게도 대감의 본가는 불탄 채 허물어져 있었습니다.”
“저도 압니다. 상관없습니다.”
기계나 돈 될 만한 것은 미리 다 옮겼지만 어렸을 때부터 살던 집이라 속이 좀 쓰렸다. 내일은 행주대첩이 있을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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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지만 간신히 올렸습니다.
내일부터는 행주대첩과 한성탈환전입니다.
끝나면 또 싸돌아다녀야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