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217화 (166/1,000)

00217  29. 행주대첩과 한성탈환  =========================================================================

양화진에 상륙하자마자 내보낸 기마척후가 왜병들과 거의 함께 돌아왔다. 해병들이 3열 횡대로 길게 늘어서서 사격대열을 갖췄다.

이민호는 조선 초기에 별궁으로 잠깐 썼던 연희궁 서쪽, 현대 지명으로 치면 연희교차로에 도착해 해병 16개 려 2천 명 중에서 4개 려 500명, 기마병 500기, 유구국 보병 400명을 이곳에 집중 배치했다. 행주에서 서대문으로 가려면 이곳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북쪽으로 우회할 수 있는 무악재 쪽에는 얼마 전에 승마보병이 된 흑인 병사 2천 명을 배치해 틀어막았다.

“저놈들 눈이 이상해. 정신 나간 것 같아.”

사실은 승마보병이지만 기마병에 쫓긴다고 착각한 왜병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행주에서부터 고산국 승마보병들이 천여 기씩 나눠 계속 휘몰아쳤기 때문이다.

행주산성에서도 기병 1천 기를 내보내 왜군을 추격하고 있었다. 행주대첩에 참가한 주력 병력이 관군이니 의병과 승병을 제외한 병력 중에서 기병이 5할을 넘었다. 하지만 적이 워낙 많아서 공성전 중에는 기병들도 산성 안에서 하마 전투를 수행했다.

왜군 중에서 가끔 사무라이들을 중심으로 보병방진을 만들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승마보병들이 유탄을 발사하고 총격으로 흩뜨린 다음 짓밟아 버렸다. 승마보병들은 말에서 내려 방진을 갖출 시간이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승마실력이 많이 향상된 덕택이었다.

현재 왜병들은 조직력이 와해된 채로 개별적으로 무작정 동쪽으로 뛰고 있었다. 왜병들은 이동용 방패나 장창 같은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무기는 진작 버리고 투구와 갑옷도 버린 채 짚신이 벗겨진 맨발로 달려왔다.

이민호는 왜병들이 불쌍했으나, 지금은 전쟁 중이었다. 왜군이 조선군에게 이겼을 때는 제대로 저항도 못하는 관군은 물론, 죄 없는 백성들까지 학살했었다.

“사격 준비! 쏴!”

- 타타타타탕!

왜병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도 아니라서 사격에는 여유가 있었다. 왜병들은 정신없이 도망치다가 앞을 가로막은 고산국 해병들을 발견하고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뒤에는 승마보병들이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잠시 우물쭈물하던 왜병들이 다시 움직였으나 그때는 해병이나 승마보병 중에서 어느 쪽이든 사거리 내에 들어온 다음이었다. 이민호가 남북으로 길게 띄엄띄엄 배치한 다른 방진에서도 해병들이 총을 쏘아 왜병들을 잡아 죽이고 있었다.

일본에서 벌어진 전투였다면 다이묘들이 적의 추격을 막을 후위를 지정하고 본진은 대열을 제대로 갖춰서 퇴각할 때의 안전을 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상대인 고산국이 동원한 무기가 조총이 아닌 함포라서 이야기는 전혀 달라졌다.

왜군 각 부대가 뒤에 배치한 후위는 단박에 깨져 나갔다. 그리고 한강을 따라 길게 늘어선 전선에서 왜군 각 부대의 선봉과 본진을 가리지 않고 꾸준히 함포 사격을 가했다. 여기에 5천기, 흑인들이 무악재에 배치된 후에는 3천기의 승마보병들이 추격에 가세했다. 인디언들이 두 줄로 쭉 늘어서서 포로를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면서 양쪽에서 두들겨 패는 인디언 형벌, 또는 곤틀릿이나 다름없었다.

왜군 병력이 열 명 이상 모이면 전선에서 여지없이 포탄이 날아왔다. 산이나 언덕에 가린 곳에서 한숨 돌리려고 하면 승마보병들이 유탄을 발사했다. 그리고 사무라이가 아니라도 갑옷이 조금만 괜찮거나 제대로 된 투구를 쓰고 있으면 여지없이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왜병들은 지휘하는 자 없이 산산이 흩어져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쇼호 왕자! 유구국 보병을 전진시켜 왜적을 소탕하라!”

이민호는 먼 산을 바라보는 유구국 쇼호 왕자를 불렀다. 그러나 쇼호 왕자는 지금 상황이 영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상대할 적도 마음에 안 들고, 소탕 명령을 내리는 이민호도 마음에 안 들었을 것이다.

“전하! 왜병이라곤 패잔병밖에 없잖습니까!”

“곧 도성을 칠 것이다. 도성 탈환 작전에 참가하기 싫으면 빠져.”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돌격!”

고산국과 동맹을 맺기 전부터 왜구나 명나라 해적, 또는 필리핀 남부 해상에서 활동하는 이슬람 해적들과 싸우는데 이골이 났던 유구국 보병들이었다. 이들은 지휘체계가 무너져 서너 명씩 흩어져서 도망가는 왜병들을 아주 쉽게 잡았다. 왜병들은 유구국 보병들을 상대하기 위해 몇몇 살아남은 사무라이들을 중심으로 급히 방진을 짰다.

이제야 제대로 된 전투를 하게 됐다며 쇼호 왕자가 기뻐하며 왜병들이 방진을 제대로 짜도록 기다려주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유구국 보병들과 왜병들이 집단전을 하도록 내버려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감동아! 절반 이끌고 가서 적 보병방진을 깨! 너는 방진만 깨고 돌아다녀라.”

“예! 도련님!”

감동이 기마병 250명을 데리고 해병들의 대열 사이를 빠져 나갔다. 그리고 유구국 보병들과 맞서 싸우는 왜병 방진의 뒤로 돌아갔다.

개인전은 유구국 병사들이 밀리지 않는데 집단전은 경험 많은 왜병들이 확실히 나았다. 장창이 없어 짧은 칼만 쓰더라도 동료들과 공조를 하며 유구국 보병들에게 피해를 누적시켰다.

그러나 기마병들이 왜군의 방진 안에 유탄 몇 발을 쏘니 방진이 바로 허물어졌다. 대열이 무너져 뒤로 밀리는 왜병들을 유구국 병사들이 몰아붙이며 난도질했다. 유구국 병사들은 왜병 부상자들까지 깔끔하게 목을 쳐서 포로를 남기지 않았다.

“감불아! 저쪽에 왜장이 오는 것 같다. 가급적 생포해!”

왜병들 사이에 얼마 없는 기마 대열이 몰려오고 있었다. 원 안에 십자가가 든 마인의 주인은 소서행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분명했다. 부상을 입은 다이묘를 말에 태우고 오던 사무라이들이 기마병 100여 명에게 포위되자 즉시 항복했다.

소서행장은 부상을 입었고 외교승 겐소는 멀쩡했다. 그 주변에서 소 요시토시와 마쓰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등 해적 영주들도 고스란히 항복했다. 이민호는 이들에게서 무기만 압수하고 갑옷과 투구 등은 그대로 착용하게 했다.

해병들이 쏘는 총소리가 줄어드는 것으로 전투가 끝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기마병들은 그 후로도 포로 수집을 계속됐다.

함포 공격을 꾸준히 받았어도 다이묘들이 뜻밖에 많이 살아남았다. 부상당한 다이묘들은 대부분 의식을 차린 채로 부하들이 말고삐를 잡은 말에 실려 오고 있었다. 감불이 이끄는 기마병들이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와 그의 가신단을 포위했다.

“나는 시마 사콘(島左近)이다! 용기를 겨룰 자 내 앞에 나서라!”

- 탕!

일본에서는 꽤나 유명한 무장이었던 모양인데 기마병이 쏜 총탄 한 방에 화려한 갑옷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이 상황에서 귀찮게 포로로 잡아주는 것만 해도 자비를 베푸는 것이었다. 저항하면 용서할 필요가 없었다.

주군인 다이묘까지 사살당할까 두려워한 가신들이 일제히 항복했다. 풍신수길의 5봉행 중의 한 명인 석전삼성, 이시다 미츠나리가 이렇게 간단히 붙잡혔다.

“여자한테 진 다이묘로 유명한 놈이로구나.”

이시다 미츠나리를 경멸하는 무단파 다이묘들이 흔히 하는 말이 이민호 입에서도 나왔다. 그러나 일본에서 이시다가 싸우다 패한 그 여자는 절대로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1590년 풍신수길이 호조 가문의 오다와라(小田原) 성을 공격할 때 이시다 미츠나리는 병력 2만을 이끌고 오시(忍) 성 공략을 맡았다. 오시 성의 성주 나리타 우지나가(成田氏長)가 오다와라 성에서 농성 중이었기에 오시 성을 수비하는 병력은 겨우 300명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시다는 여러 번에 걸친 공격과 시간 들여 제방을 쌓아 시도한 수공마저 실패했다. 이어진 공격에서 이시다는 오시 성주의 부인, 또는 딸 가이히메(甲備姬)가 수비를 지휘하는 오시성을 끝내 함락하지 못하고 말았다. 300명이 2만 명 이상을 막았으니 영화 <300>에 못지않은 처절한 싸움이었다.

습지대와 진창에서 고생한 이시다 미츠나리는 그때부터 여자에게 진 다이묘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하지만 오시 성주의 부인 또는 딸 가이히메에게 일대일 대결을 제안했다가 목이 잘린 사무라이가 여러 명이었다. 그들에 비하면 이시다 미츠나리가 패한 것은 그다지 불명예가 아니었다.

승마보병들도 행주 북쪽에서 생포한 일본 포로들을 잡아왔다. 다이묘는 구로다 카이노가미(黑田甲備守) 나가마사 단 한 명뿐이고 가신들 중에 고토 마타베에가 대표적으로 유명한 모양이었다. 같은 방향으로 도주한 깃카와 히로이에는 전사했는지 승마보병들이 화려한 갑옷들만 잔뜩 가져왔다.

지금까지 다이묘 여러 명과 사무라이 수십 명, 그리고 왜병 3천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너무 완벽하게 패배해서 왜병들은 저항할 엄두도 못 내고 무장해제 당한 채 임시 포로 수집소로 터벅터벅 걸어깄다.

“이거 백작 작위가 몇 개야? 도지휘사는 몇 개고? 상으로 받을 은만 해도 거의 십만 냥은 되겠구나.”

“저도 방문을 읽었는데 평수침이 누구에요?”

“나도 몰라. 명나라 조정에 확인해 봐야지.”

포로가 된 다이묘들을 확인하고 돌아온 민희가 이민호에게 물었으나 명나라에서 부르는 이름을 일본 이름과 매치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선조실록 1593년 1월 7일자 기사에 명나라에서 왜장들에게 현상금을 내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명나라)와 그대 나라를 논할 것 없이 누구든지 평수길(平秀吉), 평수침(平秀沈) 및 중 현소(玄蘇)를 사로잡거나 죽이는 자가 있으면 한 명당 상으로 은 1만 냥을 주고 백(伯)으로 봉(封)하여 세습시키고, 평수가(平秀家), 평수충(平秀忠), 평행장(平行長), 평의지(平義智), 평진신(平鎭信) 등 유명한 제추(諸酋)를 사로잡거나 죽이는 자는 한 명당 상으로 은 5천 냥과 대대로 지휘사(指揮使)로 삼으며, 그 이하를 사로잡는 자에게도 각각 상을 주는 규정이 있으니 (후략)’

“도련님! 왜적 총대장 우희다수가를 잡아왔습니다.”

“오! 살려서 잡아오느라 수고했다.”

감불뿐만 아니라 더 이상 적 방진을 발견하지 못한 감동도 포로를 잡아왔다. 화려한 갑옷을 입은 새파란 젊은이가 포박당한 채로 이민호 앞에 끌려와 무릎을 꿇었다. 뒤로 묶여 무릎을 꿇린 가신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청년 무장은 오들오들 떨면서도 고개를 똑바로 들고 있었다.

“아아! 들판에 시체가 가득해. 네가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냐?”

“예! 할복하게 해주시오.”

“그건 곤란한데. 너는 산 채로 행재소에도 가고 북경에도 가야 해서 말이야.”

“할복하게 해주시오!”

“그렇지! 밥이라도 먹을래?”

“할복하게 해주시오오~”

우키다 히데이데가 울먹거렸으나 이민호의 명으로 가신들과 함께 기마병들에게 질질 끌려갔다. 우키다 히데이에는 명목상 총대장이니 선전용으로 제격이었다.

전투가 일단락되자 이민호는 서대문 방향으로 파견했던 기마정찰대에게 전령을 보냈다. 그러나 금방 돌아온 전령은 서대문이 굳게 닫혀있다고 보고했다. 행주산성을 공격했던 왜군이 한성에 원군을 요청하는 전령을 보냈는지 알 수 없지만 한성 쪽에서 왜군이 나오지는 않았다.

들판에서는 전장 정리가 한창이었다. 행주산성 앞에서도 마찬가지로 조선군이 왜병들의 목을 베고 갑옷과 무기를 수집하고 있었다. 계복이 말을 몰고 터벅터벅 다가왔다.

“계복이 왔어? 수고했다.”

“그 전에 도련님이 그렇게 야만적인 관습이라고 하시던 수급 베기를 우리가 가장 많이 하고 있습니다. 거의 만 5천 개는 되겠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끔찍하다만 북경에서 필요하니까 할 수 없지 뭐.”

계복이 갸웃거리다가 물었다.

“그런데 도련님! 도련님이 병력을 이끌고 한성에 와도 됩니까? 경기도에도 들어오지 않기로 했잖아요?”

“그거야 간수군이고, 이쪽은 고산국 원정군이니까 다르지.”

“해병 대부분이 간수군 출신입니다. 눈 가리고 아웅이군요.”

“어쨌든 국적이 다르니까. 간수군에 의한 반란을 걱정했다면 지금은 고산국의 침략을 걱정해야 하나?”

조선 조정에서 걱정하던 문제는 전쟁 직후 간수군 천여 명이 삼도수군통제사에게 속함으로써 해결됐다. 그러나 새로운 문제, 이민호가 고산국 병력을 이끌고 언제든 한성을 점령할 수 있다는 문제가 생겼다. 그러나 고산국은 황제의 명으로 파병됐기에 조선 조정에서는 막을 방법이 없었다.

“한성 탈환을 명군에게 맡겼으니 조정은 안심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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