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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232화 (181/1,000)

00232  30. 섬에서 섬으로  =========================================================================

누르하치와 동가 공주의 고모가 몸을 배배 꼬면서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더니 천막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동가 공주가 삐진 표정을 얼굴에 드러냈다.

그러나 잠시 후 키가 작은 동가 공주가 애절한 표정을 지으며 이민호에게 물었다. 올려다보는 얼굴과 눈빛을 보고 있자니, 마치 배고픈 강아지나 고양이를 보는 것 같아 이민호의 가슴이 아팠다.

“전하도 저보다 제 고모가 더 좋으세요? 아니, 건주좌위 지휘첨사 어른은 저와 고모 둘 다 좋아하세요. 그래서 큰 고모에 이어 작은 고모도 저 분께 시집갈 것 같아요. 하지만 전하께서는 저 말고 고모만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저는 몹시 슬퍼져요. 세상에 이럴 수는 없어요! 남들처럼 전하께서도 저를 미인으로 대우해주세요!”

이민호는 해서여진을 대표해서 다급히 찾아온 동가 공주가 우디거와 싸우면서 높아진 동해국의 긴장과 경계심을 해소하고, 해서여진 진영으로 끌어들이려고 시도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동가 공주는 해서여진과 별로 상관없는 개인적인 일에만 집중해서 실망이었다.

물론 두 세력 사이에 이루어진 혼사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동맹을 의미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정략결혼과 권모술수로 해결하려는 공주나 그 배후에 도사린 예허부 패륵이 싫었다.

그리고 공주는 주변에서 항상 최고 미인이라고 떠받들어주니 이렇게 천방지축이었다. 이민호는 이번 기회에 미모를 앞세워 기고만장한 공주의 콧대를 눌러주고 싶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어린이를 여자로 보지 않소. 하지만 공주의 고모는 이미 성인이고 공주보다 더욱 미인이잖소? 정상적인 남자라면 공주보다 고모를 더 좋아하는 게 당연하오.”

“흑흑! 그러셨군요. 제가 고모보다 못 생겼다니, 제 인생은 이제 의미가 없어졌어요.”

동가 공주가 털썩 주저앉아 비련의 여인 흉내를 냈다. 분노한 공주의 추종자들이 벌떡 일어섰으나 호위대가 급히 나서서 간신히 막아 세웠다. 그때 잠시 천막 밖으로 나갔던 누르하치가 환하게 웃으며 공주의 고모와 함께 돌아왔다.

“국왕전하! 전에 전하를 처음 뵌 날 제가 여덟 번째 아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날 처음 본 고산국의 깃발에 들어간 태극 문양이 인상적이었기에 아들 이름을 황태극이라 지었습니다.”

누르하치는 몇 년째 구혼을 하며 따라다니는 여자가 바로 앞에 둘이나 있는데도 다른 여자에게서 아들 낳았다고 자랑했다. 누르하치의 심리를 이민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누르하치 입장에서는 예허부 귀족 여자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의 예허부 측실이 아들을 낳아 몹시 기쁘다고 표현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지금은 건주여진이 해서여진, 그 중에서 특히 예허부와 대립하고 있지만 측실이 예허부 출신이라도 차별대우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고, 예허부와 언제든 우호를 다질 수 있다는 정치적 선언이었다. 모든 언행을 정치적으로 해야 하는 왕족과 귀족들의 생리를 이민호는 아직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발음이 홍타이지가 되나요? 득남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하하!”

누르하치의 측실 예허나라 씨가 낳은 홍타이지가 실제 역사에서 청태종이 되고, 누르하치 사후 일 년 만에 정묘호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민호가 개입한 이상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측실 예허나라 씨는 공주의 고모에게 언니가 되는 여자였다.

이민호가 잠시 천막에서 나왔다. 누르하치의 호위병들이 이번에는 겨우 2백 명만 와서 숙영지를 세우고 있었다. 저번처럼 호위를 많이 데려와서 살벌하게 대치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현재 동해국의 수도인 아사달에는 건주여진의 지배자와 해서여진에서 웬만한 패륵들보다 영향력이 큰 동가 공주가 동시에 와 있었다. 그러면서도 싸움이 없으니 아사달에 임시 거주하는 여진족들이 어이없어 했다. 그러나 전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어서 아사달 주민들은 담담히 받아들였다.

이민호는 저녁에 나라라고 하기에는 어색한 세 집단의 유력자들을 토성에 친 대형 천막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했다. 이민호가 일단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자 양쪽 진영 모두 최소한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여겼는지 다들 편안하게 식사를 했다. 여기서 이민호가 지지하는 쪽으로 전황이 확 기울 수 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전하! 저번에 제가 전하와 함께 무역협정을 체결했지만 이렇게 되면 많이 이상해지는군요.”

“걱정 마시오, 지휘사. 특별히 다른 상황이 생기지 않는 이상 협정을 지키겠소. 딱히 더 이상 교역 물량을 늘릴 필요가 없으니 말이오.”

중립을 선언한 이민호는 양쪽 모두에게 끊임없이 우호적인 신호를 보냈다. 누르하치는 물론 동가 공주도 우호적으로 응답했다.

이민호는 동해국이 안정될 때까지 양쪽 세력이 계속 팽팽하게 맞서길 원했다. 그러나 누르하치가 결국 후금을 세우고 홍타이지 때 조선과 명나라를 공격할 정도로 성장한다는 사실을, 역사를 대충 아는 정도에 불과한 이민호도 명확히 알고 있었다. 결국 예허부는 패할 것이다.

“전하! 그렇다면 동해국과 동해여진 사람들이 교역하는 것은 내부 교역으로 간주해 수량에서 빼면 어떻겠습니까?”

얼마 전까지는 시장의 무역을 감시하는 자가 파견됐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누르하치가 동해국의 교역을 통제할 능력을 잃었다. 그러나 이렇게 양보하는 척해줘야 명분도 서고 이민호에게서 뭔가 얻어낼 기회를 차지할 수 있었다.

“사실 그 동안 건주여진이 해서여진과 동해국의 교역량을 통제한다는 사실이 기분 나빴어요.”

이민호가 대답하기 전에 동가 공주가 토를 달았다. 덕택에 이민호는 입을 다물고 누르하치에게 뭔가 양보하지 않아도 되었다.

양자 사이에 맺은 협정의 효력이 제3자에게 미친다면 제3자 입장에서는 일반적으로 불쾌해 하는 것이 맞았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전 세계를 둘로 나눠가지는 조약은 다른 나라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대공산권 수출통제위원회 협정처럼 제3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다.

공적인 대화가 마무리되자 동가 공주가 아라 공주에게 질문을 건넸다. 아라 공주가 이민호에게 몸을 기댄 채 이민호 얼굴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계속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아라 공주님은 연치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곧 생일이 지나면 열세 살이 돼요.”

이민호는 아라 공주의 생일에 줄 선물로 뭐가 좋을까 잠시 고민했다. 역시 다른 귀인들에게 준 것처럼 보석 종류가 나을 것 같았고, 양심에 조금 꺼렸지만 커다란 인조 사파이어를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유구국과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 때문에 이민호가 아라 공주를 처음부터 세심하게 신경을 쓴 편이었다.

“혹시 국왕전하와 잠자리를 가지셨나요?”

“아뇨. 저는 괜찮은데 전하께서는 제가 아직 어리대요.”

“공주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 같은데요?”

“그렇지 않아요. 전하께서는 지금까지 딱 이틀 빼고는 계속 저하고 같은 침대에서 주무셨어요. 젊은 남자가 욕구를 참기 힘들다고 들었는데 전하께서는 오랫동안 저를 위해 참아주셨어요.”

그러나 그 동안 이민호는 이리저리 눈치 보면서 민희와 민영을 안았고 아라 공주가 직접 시녀들을 안으라고 청하기도 했다. 예전 생에서 연구실에 틀어박혀 사느라 거의 초식동물로 지낸 이민호에게 이 정도는 참는 것도 아니었다.

“흐음. 그렇군요. 하지만 전하의 회포를 풀어주시지 못할 공주께서 전하의 사랑을 독차지하려 하다간 미움 받으시겠어요.”

“험! 그런 민망한 이야기는 그만 하면 좋겠소.”

이민호가 나서서 마치 중년 아줌마들 같은 공주들의 대화를 끊었다. 동가 공주가 의심을 품은 눈으로 이민호 뒤에 시립해 있는 민희와 민영을 잠시 살폈다. 그러나 민희와 민영이 자신감 넘치는 미소로 답하자 동가 공주가 홱 토라졌다.

“본직이 고자는 아니오.”

“네! 오늘 아침에도 보니까, 그......”

아라 공주의 얼굴이 빨개졌다. 도대체 뭘 봤는지, 혹은 만졌는지 이민호는 모르는 척했다.

다음 날 오전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의 대치상황이 급박하다는 전령을 받고 누르하치와 동가 공주가 급히 본거지로 돌아갔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동가 공주의 고모가 어린 시녀 하나만 데리고 천막에 남아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이민호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지도자는 개인의 욕망보다는 책임이 앞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민호였다.

“어째서 돌아가지 않았소?”

“국왕전하께서 동가 공주보다 저를 좋아하신다고 하셔서 남기로 결심했사옵니다.”

“왜요? 도대체 왜 내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는 거요?”

이민호는 몹시 화가 났다. 남자로서 미인을 얻으면 기뻐하는 게 보통일 텐데 화를 내자 공주의 고모가 몹시 당황했다. 그러나 이민호가 이유를 계속 묻자 고모가 진실을 밝혔다. 아주 단단한 돌직구였다.

“제 마음대로 결정했으니 저를 버리셔도 좋습니다, 전하. 하지만 이렇게 해야 질투에 눈 먼 누르하치와 전하의 관계가 멀어지지 않겠습니까?”

“으윽! 당신도 몸을 던져서 정치를 하는 것이오? 나는 두 세력의 다툼에서 중립이라 하지 않았소?”

“패륵의 딸이며 현재 패륵의 여동생으로서 지금까지 커오면서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이제 그 보답을 해야 해요.”

동가 공주의 고모는 그 동안 누르하치를 연모하는 듯한 표정과 대사도 모두 연기였다는 고백을 했다. 이민호는 명나라 황제나 조선 국왕과 만나면서도 겪지 못했던 권모술수를 접하고 조금 역겨웠다. 여진족이 순박하다고 들었는데, 그런 평가는 평민에나 해당하지 정치인들은 어딜 가든 다 똑같았다. 아니, 생존경쟁이 치열해서 그런지 여진족이 오히려 더 심했다.

이민호는 본거지로 돌아가고 있는 누르하치에게 급히 전령을 보냈다. 그리고 동가 공주의 고모를 데려갈 것인지 의향을 물었다. 지금 상황에서 이민호가 누르하치와 적대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간단히 사양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누르하치가 사랑하는 여인은 오직 동가 공주밖에 없다고 선언했다. 전령에게 전해들은 이민호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 동안 누르하치가 동가 공주의 고모에게 다정한 척하며 시집오라고 유혹한 것도 다 정치적인 계산 아래 이루어진 연극이었다. 누르하치는 여자 하나를 두고 이민호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탓에 쉽게 여자를 버렸다. 물론 이민호가 누르하치와 대립하고 싶지 않은 속셈을 누르하치는 분명히 파악했고,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갔다.

“전령이 전한 말 들었소? 당신의 의도가 무산됐으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시오.”

“이용가치가 사라졌으니 이제 제가 돌아갈 곳은 없어요.”

“어이! 남의 천막에서 옷을 벗지 마시오.”

이민호는 동가 공주의 고모를 어떻게 처분해야 될지 잠시 고민했다. 만약 병사들을 호위시켜 동가 공주의 수레를 따라잡아 데려다줄 경우 병사들의 생사를 장담하지 못했다. 물론 해서여진 입장에서는 동해국이 중립을 지키는 것이 낫기 때문에 그럴 일이 생길 가능성은 적지만, 추종자들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에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었다.

또한 누르하치의 부하들이 매복했다가 습격해서 해서여진에게 죄를 덮어씌울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여자 하나 때문에 적지에 소수 아군만 내보낼 수는 없었다.

그런데 만약 동해국의 여진족 추장들에게 시집보낼 경우 고모에게 홀려서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었다. 그렇다고 데리고 다니자니 음식에 독을 탈까 걱정됐다. 이민호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곤란하게 됐소. 당신은 지금부터 내 허락 없이 지정한 장소에서 벗어날 수 없소.”

“전하의 어명을 따르겠습니다.”

이민호는 호위대 중에서 여성 대원들을 시켜 동가 공주 고모의 소지품을 샅샅이 조사하도록 명했다. 이미 끈 떨어진 신세라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새로 동해국에 복속하겠다는 부족의 추장이나 유력자들이 거의 당연하다는 듯이 딸이나 손녀를 바쳤다. 이민호는 전에 받아들인 전례가 있어 거절하지 못하고 숫자만 줄여서 받아들였다.

다만 커서도 후궁이 아닌 시녀로만 쓸 수도 있음을 미리 밝혔다. 추장들은 그 정도로도 좋다고 승낙했다. 이민호는 교육만큼은 최고 수준으로 해주기로 약속했다.

완전 꼬마들은 빼고 나이 많은 부류만 적당히 추려서 82명을 새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동네는 결혼적령기가 너무 낮았다. 그나마 유치원에 들어갈 애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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