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238화 (187/1,000)

00238  30. 섬에서 섬으로  =========================================================================

“도련님! 저 병력을 없앤다 해도 왜적들이 계속해서 아이누 섬을 공격할 것 같습니다. 아이누 사람들은 집단전에 약한 것 같으니 우리가 고산국에 돌아가면 다시 저놈들에게 정복될 겁니다.”

계복이 말한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그렇다고 아이누 섬에 고산국 병력을 주둔시킬 수도 없었다. 아이누 섬에 소규모 병력만 배치시키면 왜군에게 전멸당하고 총이나 빼앗기기 십상이었다. 그렇다고 아이누 주둔 병력을 무작정 늘릴 수도 없었다.

“이럴 때는 공격이 최선의 방어다. 아이누 섬을 공격해올 만한 놈들이 누군지 확인해보고 혼쭐을 내줘야겠다.”

“일본 정벌을 벌써부터 단독으로 시작하시는 건 아니죠?”

“정벌은 준비를 많이 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시작해야지. 그 일에는 명나라와 조선 모두 끌어들여야 해. 하지만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정말 피곤한 일이겠다. 저번에 했던 것처럼 해안 성곽을 포격하고 포구를 불태워버리자.”

“해안선 따라 줄줄이 불타오르겠군요.”

그러나 문제는 일본의 다른 지역들과 달리 도호쿠 지방의 성곽 대부분이 내륙에 세워져 바다에서 성을 공격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이 고대부터 에조(蝦夷) 또는 에미시(毛人)라 불렀던 아이누 인들을 계속 북동쪽으로 몰아내는 과정에서 큰 위협을 느끼지 않아 자기들끼리의 싸움에 더 집중했기 때문이다. 동북지방에 자리를 잡은 대부분의 영주들은 남만과의 무역을 하지 않아 바닷가에 성을 쌓을 필요도 없었다.

그래도 어차피 고산국에 돌아가는 길이니 지나가다 성이나 포구가 보이면 공격하고, 안 보이면 그냥 지나치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동북 지방에서는 수군을 거의 운영하지 않아 걱정할 것도 없었다.

밤이 될 때까지 전투는 없었다. 왜군은 주변 아이누 마을에 약탈하러 나갔던 병력을 불러 모아 진영을 단단히 방어했다. 왜군은 고산국 원정군 대부분을 기병으로 파악하고 진채 주위에 목책을 이중으로 세우고 조총병을 배치해 기병의 돌격에 대비했다.

이민호는 적이 야습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해 총병력의 5분의 1씩 교대로 투입해 사주경계를 시켰다. 적이 위치한 곳 반대 방향을 경계하는 병사들은 뒤통수가 간지러워 피곤한 밤을 보내게 되었다.

첫날밤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왜군은 진채에 틀어박힌 채 고산국 원정군이 먼저 공격해오길 기다리는 듯했다. 고산국 전력을 기병 5천 기 이상으로 파악한 왜군은 퇴각 도중에 추격을 받아 짓밟힐까봐 두려워 함부로 후퇴하지도 못했다.

이민호는 급할 게 없으므로 병사들을 휴식시키며 대기했다. 아이누 전사들이 도착하려면 아직 2, 3일은 더 기다려야 했다.

다음 날 아침, 고산국 병사들이 아침에 물을 뜨러 강에 갔다가 강 건너편에서 접근하는 왜군 수십 명과 만났다. 그러나 양쪽 모두 적대적인 행동은 자제하고 서로 인사하고 손을 흔들어댔다. 그들 중에 피그미족 전령이 끼어 있는 것이 이민호의 눈에 띄었다.

“계복아! 아이누 섬에 말 목장을 반드시 만들어야겠다. 답답해서 안 되겠어. 넓은 땅에 사는 사람들이 어째서 걸어 다니는 거야?”

“서역 대완국에서 난다는 천리마를 수입해 키우는 건 어떨까요? 여기서 수만 마리를 키워서 아이누 사람이나 승마보병들이 오추와 적토마를 타고 다니는 겁니다.”

“농담 말고. 나는 지금 진지해.”

이민호는 투르크메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사이 페르가나 분지에서 난다는 황금털의 명마 아할 테케 종을 기억했다. 중국 과학자들이 한무제 능에 순장한 한혈마와 DNA를 비교한다던데 어떻게 됐는지 그 후의 일은 알지 못했다. 알렉산더가 타던 부케팔로스도 같은 종이라고 들었다.

한혈마가 하루에 천 리나 달린다는 말에는 과장이 섞여 있었다. 1935년 투르크메니스탄 군인들이 아할 테케 전마 55필을 타고 모스크바로 갈 때 대략 천리 거리인 390km 폭의 카라쿰 사막을 밤낮으로 사흘이나 달려서 통과했다. 천리마라는 이름에 전혀 걸맞지 않았다. 낙타도 아닌 주제에 사흘 동안 사막을 달리면서도 물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한혈마가 지금도 분명히 있긴 할 텐데, 지금은 구할 방법이 없었다. 해서여진에 의뢰한다면 몽골 등으로 이어지는 초원의 무역로를 통해 다른 서역 상품은 다 구할 수 있어도, 지금은 명마를 파는 시대가 아니라 구할 수 없었다. 아할 테케는 현대에서도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이 카페트와 함께 직접 관리하는 국가 보호 상품이었다.

한무제가 황금 20만 냥을 줬어도 페르가나의 대완국에서는 명마를 절대 안 팔았다. 한무제가 괜히 대완국에 두 번이나 원정을 시켜 수만 명의 병사들을 사막에서 말라죽게 만든 것이 아니었다.

“므부투!”

“국왕전하! 부르셨습니까?”

피그미족 전령이 잽싸게 달려왔다. 체구는 작아도 워낙 빠릿빠릿해서 이민호가 자주 부려먹곤 했다.

“이제 존댓말 잘하네?”

“근무 중이니까 그렇지. 왜 불렀어?”

“내가 그래도 왕인데 남들 있는 자리에서 꼭 반말을 써야겠냐?”

이민호가 괜히 투정을 부리자 민희와 민영이 고개를 슬쩍 돌리며 웃었다.

“친구라며? 친구가 아니라면 지금부터 존댓말을 쓰겠습니다.”

“아니. 됐어. 아프리카, 그러니까 네가 살던 대륙에서 말이야. 얼룩말 있지? 그거 가축으로 키울 수 있지 않아? 너희 흑인들이 아프리카로 돌아가서 얼룩말을 길들여 타고 대륙을 누비면 어떨까?”

“성질 더러워서 길들일 수 없다. 얼룩말 고기 맛없다. 가죽에서 냄새난다. 얼룩말은 전혀 쓸데없는 동물이다.”

이민호는 노예 출신인 흑인 병사들을 아프리카로 돌려보내고 국가를 세워 유럽의 식민제국들을 막을 계획을 세웠다. 총은 있으니 말만 있으면 되는데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사람이라면 전선이든 수송선이든 가득 구겨 넣을 수 있지만 말을 배로 옮기려면 보통 골치 아픈 일이 아니었다. 체구가 큰 말과 건초 등을 함께 옮기려면 가장 큰 상선이라도 100마리 넘게 수용하기 어려웠다.

“아프리카까지 말을 수송하기 어려워서 그래. 아프리카 가까운 곳에서 말을 구할 곳이 없을까?”

“가까운 아라비아에 좋은 말이 많다던데 그거 사주라.”

“페르시아 말? 끄응! 그게 얼마나 비싼데!”

“국왕이 가난하면 할 수 없지.”

무함마드가 전리품으로 대량 들여온 페르시아 말이 나중에 아라비아 말로 발전했다. 그러나 품질이 좋다고 소문 난 만큼 비싼 가격이 문제였다. 여진과 몽골처럼 말이 좋고도 싼 곳이 드물었다.

대치 이틀째에도 병사들끼리 강을 사이에 두고 인사를 나눴다. 서로 얼굴을 알아본 병사끼리는 더욱 반갑게 인사했다.

그러나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흑인 승마보병들은 일본말을 몰랐고, 왜병들은 간혹 조선말을 구사하는 자가 있더라도 설마 흑인이 조선말을 쓴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다.

사흘째는 병사들끼리 손짓 발짓을 동원해 서로 물건을 바꿨다. 물자가 풍족한 고산국 병사들이 먹을 것을 주고, 왜군은 잡다한 기념품이 될 만한 것을 주었다. 물론 이민호나 왜군 대장이 용납했기에 저런 우호적인 행위가 가능했다.

“므부투! 이야기는 해봤어?”

“아니. 일본어 모르는 척했다. 그래도 대충 돌아가는 이야기는 들었다.”

이웃집에 일본인 부부가 살아서 일본어를 배웠다고 했다. 므부투는 그들에게 농토를 맡기고 앞으로도 계속 직업군인으로 일하고 싶어 했다.

“저놈들이 우릴 먼저 공격하지 않는 이유가 뭐야?”

“바다를 건너기 전부터 화약이 부족했다고 한다. 먼 영지에서 빌린 화약이 오늘 오후에 도착한다고 했다.”

“그래? 수고했다.”

일본 전체적으로 화약 부족 문제가 심각해진 것 같았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일본에 화약을 팔지 않으니 국내에서 생산해야 하는데 일본의 화약제조 기술은 아직 효율이 떨어진 편이었다.

이민호는 화약을 운반하는 왜군 수송대를 공격할까 하다가 포기했다. 기마병이라면 몰라도 승마보병들이 왜군 1만 명이 진을 친 곳 후방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삿포로로 이어지는 길이 작은 산길 포함해서 최소한 다섯 개 이상이었다. 괜히 병력을 내보냈다가 왜군의 매복에 당하느니 차분히 기다리기로 했다.

역시나 오후에 수레행렬이 왜군 진영으로 들어갔다. 왜군 전체가 분주히 움직이며 뭔가 일을 낼 듯했다.

이민호는 밤에 왜군의 야습이 있을 것으로 판단해 3분의 1씩 교대로 야간경계에 투입시켰다. 그리고 늦은 밤에는 호위대와 함께 순시를 돌아 숙영지 주변 경계가 철저한 것을 확인한 다음 취침에 들어갔다.

이민호는 외투만 벗고 군복을 입은 채로 천막 안 야전침대에 누웠다가 어둠 속에서 누가 흔들어 깨우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이민호가 눈을 떠보니 민희가 이민호의 외투를 들고 서 있었다. 바깥에서 총성이 연달아 울리고 있었다. 시끄러운 총소리에도 깨지 못할 정도로 피곤했던 것은 며칠 동안 대치하면서 신경을 쓴 탓이었다.

“주인님! 야습이에요.”

“적당한 시간이로군.”

탁상시계를 보니 어느새 새벽 3시였다. 야습을 몰아내고 어정쩡한 시간에 다시 잠든다면 아침에 일어나고 나서 하루 종일 피곤할 것 같았다. 민영이 이민호의 방탄복을 조이고 민희가 뒤에서 외투를 입혀줬다. 이민호가 아직 잠이 덜 깨서 마치 유치원에 가기 전에 엄마가 옷을 입혀주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천막을 열고 나가보니 전투가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왜군 대부분이 강을 건너 야습을 대대적으로 감행하고 있었다. 상대를 피곤하게 만들기 위한 소규모 기습이 아니라 거의 전 병력을 투입한 것을 보고 이민호는 조금 놀랐다. 총구 화염과 희미한 화승 불빛으로 보아 조총병이 최소 천 명은 넘을 것으로 추산했다.

- 펑!

그러나 상대는 고산국 원정군이었다. 이따금 조명탄이 터질 때마다 왜병들이 어둠 속에서 환히 드러나고, 강한 빛 때문에 시력을 잃어 꼼짝하지 못했다.

물론 움직이지 못하는 표적들을 내버려둘 승마보병과 해병들이 아니었다. 조명탄이 천천히 땅에 떨어질 때까지 원정군 총병들이 여러 발씩 쏘았다. 그 직후 왜병들이 괴성을 지르며 일제히 돌격했으나 원정군은 적이 정면에서 몰려올 경우 최소 세 배 이상을 막아낼 수 있었다.

- 두두두~

밤이라서 말 달리는 소리가 몹시 크게 들렸다. 왜군 기마무사들이 반대쪽에서 몰려오는 소리였다. 후방에 적이 출현하자 고산국 진영 곳곳에서 병사들이 당황하는 것이 이민호에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진정해라! 왜군 기마대는 일천 기도 안 된다!”

계복이 소리를 질러 병사들을 안정시키는 사이 이민호는 호위대와 함께 진채 뒤쪽으로 향했다. 고산국 원정군은 후방에도 충분한 방어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수많은 말들이 달리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으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 같긴 한데 달이 구름에 가려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었다.

“7려 1대 1번 유탄발사수! 조명탄 한 발 발사.”

- 철컥! 투웅~

이민호의 지시에 따라 유탄발사수가 조명탄을 최대한 멀리 발사했다. 공중에서 조명탄이 터지자 강렬한 빛에 놀란 말 수십 마리가 일제히 비명을 질러대며 앞발을 치켜들었다. 병사들이 총구를 들고 조준했다.

“아직 쏘지 마!”

후방에 배치된 부대들의 지휘권을 장악한 이민호가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왜군 기마무사들은 이미 돌격 거리 안쪽으로 진입됐다고 판단했는지 일제히 말에서 내려 고산국 진영으로 돌격해왔다. 200미터 거리까지 끌어들인 다음 이민호가 사격 명령을 내렸다.

“쏴!”

- 타타탕!

후방 목책선에 엎드린 해병들이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낮에 전투할 때는 잘 몰랐는데 야간에 총기 천여 정이 뿜어내는 섬광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 달려오는 왜군 기마무사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쏘니 거의 백발백중이었다. 짧은 시간에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도 불구하고 기마무사들이 창과 칼을 앞세우고 돌격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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