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9 30. 섬에서 섬으로 =========================================================================
- 타타탕! 탕!
다시 해병들이 보병총을 일제 사격하는 중간에 기병총이 연속 불을 뿜었다. 화려한 갑옷을 차려입은 왜군 기마무사들이 몇 걸음 걸을 때마다 총격이 퍼부어지면서 인명피해가 점점 누적됐다. 야간 사격임에도 고산국 해병들이 쏜 총탄의 명중률은 높았으나 동일한 표적에 동시에 서너 발이 맞은 경우가 많아 계산보다 훨씬 적게 쓰러진 셈이었다.
왜군이 고산국 진채에 접근할수록 해병들이 더욱 정확히 사격을 가했다. 여기에 덤으로 유탄과 수류탄이 사방에서 폭발했다. 왜군 기마무사들이 용감하게 계속해서 전진했지만 일정한 거리를 앞두고 더 이상 진채에 접근할 수 없었다. 기마무사들이 이미 쓰러진 위에 세 겹, 네 겹으로 차곡차곡 쌓여 새로운 담이 목책 앞에 길게 이어지며 만들어졌다.
결국 기마무사들은 큰 피해만 입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숨을 때가지 총탄이 계속 따라갔다.
“국왕전하! 전리품 획득을 합니까?”
“날이 새면 하게.”
이민호는 지휘관들에게 경계를 더욱 엄중히 하도록 당부했다. 쓰러진 적들 중에 살아있는 자들이 있을 테고, 사무라이들 중에서 조총을 쏘는 자들도 있었다. 그까짓 전리품을 얻으려고 쓸데없이 인명피해를 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 말은 너무 작아서 전마로 쓰기가 좀 답답했다. 아이누 섬에 아무리 말이 없다지만 일본 말을 키우고 싶지는 않았다.
이민호는 다시 반대편, 전방으로 이동했다. 적 보병 주력이 투입된 전방에서도 한창 전투 중이었다. 어두워서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지만 왜병 7천 정도가 몰려와 그 중에서 2천 정도는 이미 쓰러져 있었다.
보병총이 조총보다 사거리가 길고 명중률이 높은 것은 분명한데 야간 전투라서 큰 장점이 되지 못했다. 대신 왜군 조총병들이 무장한 조총은 화승 불씨를 계속 살려야 하기 때문에 바로 이것이 약점이 되었다. 고산국 승마보병들은 어둠 속에서 작고 희미하게 빛나는 불꽃을 목표로 총격을 가했다.
- 피잉~ 딱!
주변 공기를 찢고 뭔가가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민희와 민영이 이민호의 자세를 낮췄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쪽이 지휘부인 것을 알고 왜군 쪽에서 사거리가 긴 오오쓰쓰를 발사했을 수도 있었다.
“대통(大筒) 사수들이 근처에 있다. 찾아서 격멸하라!”
민희가 호위대와 주변 목책에 배치된 승마보병들에게 긴급 지시를 내렸다. 유탄발사기 사수들이 조명탄을 좀 더 멀리 날리자 어둠 속에 숨어있던 오오쓰쓰 사수 세 명의 몸이 환히 드러났다. 왜병들은 각자 총탄 열 발 이상씩 맞고 쓰러졌다.
그 사이에도 왜군 창병들의 돌격과 조총병들 및 궁병들의 사격이 계속됐다. 그러나 고산국 진채 외곽은 겨우 목책으로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철벽같았다. 인명 피해가 누적돼 왜군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그러나 뒤에서 끝없이 돌격을 외치는 사무라이들 때문에 후퇴도 하지 못했다.
연합부대의 특성상 지휘권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지 못한 것도 효율적인 전투를 못하는 이유였다. 왜군 쪽에서 명령이 동시에 세 군데에서 나와 유기적인 공격이 되지 못했다. 한 부대는 이미 뒤로 빠져 나가고, 나머지 두 부대가 그 간극을 메우지 못하는 바람에 여유가 생긴 일부 승마보병들이 효율적인 일제 사격으로 왜군에게 피해를 가중시켰다.
“민영아!”
이민호가 민영에게 사격 목표 하나를 가리켰다. 기병포 2문을 기병들이 가져가서 포격을 할 수가 없어 아쉬웠다. 이동하기 좋게 경량화한 기병포를 승마보병이 똑같이 운용할 수도 있겠지만 포수 후보들은 현재 고산국에서 교육 중이었다.
“저기 돌무더기 뒤쪽에 가키자키 군기다. 군기 앞에 특이한 투구와 가면을 쓴 놈이 앉아 있지?”
“수염 달린 도깨비 가면을 쓴 장수요?”
“그래. 횃불 옆에 앉은 놈.”
계복보다는 조금 못해도 민영도 보병총을 잘 쐈다. 총성이 울리는 순간 접의자에 앉아 버티고 있던 왜장이 단 한 발에 뒤로 나자빠졌다. 이민호에게 후계자를 비롯한 아들 모두를 잃었던 가키자키 요시히로는 복수도 못하고 영지를 되찾지도 못한 채 차가운 땅에 쓰러졌다.
이것이 신호가 돼서 왜병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살아남은 왜병들 대부분이 강을 건너가자 끊임없이 퍼부어지던 총격도 드디어 그쳤다. 비슷한 숫자의 총병들을 향해 돌격했다가 퇴각한 것 치고는 야간전이라서 그런지 생존자가 의외로 많은 편이었다.
“아직 3천 정도는 남았네. 어? 뭐냐?”
이민호는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 치열한 전투에서 살아남은 왜병들이 며칠 동안 머물렀던 진채로 몰려가더니 갑자기 천막과 수레에서 물건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탈한 물건을 두고 서로 갖겠다고 자기편끼리 싸웠다. 주먹질이 칼질로 발전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전투는 끝났다.
“도련님! 적 진채에서 자기들끼리 싸웁니다. 반격할까요?”
“아니! 밤이라 사고가 많이 날 테니 우리만 손해다. 밝아질 때까지 진채 밖으로 나가지 마!”
이민호는 계복의 제안을 거부했다. 유리한 쪽이 야간 전투를 강행할 필요가 없었다. 이민호는 병사들에게 2교대 휴식을 지시했다. 어느덧 하늘이 희뿌옇게 밝아오는데도 왜군 진채에서는 아직도 서로 치고받고 싸우고 있었다.
연신 하품을 하던 이민호는 민희와 민영이 양쪽 팔을 잡아 천막으로 끌고 가자 못 이기는 척하고 따라갔다. 이민호는 아직 새벽잠이 많았다. 이 정도면 나이가 어린 때문이 아니라 체질이라고 봐야 했다.
아침에 일어난 이민호는 민희와 민영이 챙겨준 밥을 먹고 천막 안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냈다. 추워서 밖에 나가기 싫어하는 이민호를 민희가 억지로 몰아내서 바깥으로 나왔다. 천막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계복이 바로 보고했다.
“새벽에 소리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왜군이 또 공격을 해왔습니다. 이번에는 소규모였습니다만, 역시나 전 병력을 투입했습니다.”
“내분으로 흩어진 것 아니었나?”
“반란을 일으킨 낭인 무사들을 모두 죽이고 어찌어찌 패잔병들을 다시 규합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공격이 실패하자 해 뜨기 전에 모조리 도망갔습니다. 남동쪽 들길이 아니라 남쪽 산길로 향했는데, 추격할까요?”
“지금은 아니고 아이누 전사들이 도착하면 그때 추격하겠다.”
이민호는 해병 지휘관들에게 진채 뒤쪽에 쌓여있는 기마무사들의 갑옷을 벗기도록 지시했다. 800명이 넘는 기마무사들이 화려한 갑옷과 투구를 걸친 채 허망하게 쓰러져 있었다. 목책에 칼질이라도 해본 기마무사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오늘은 영국 하마기사와 비슷한 일본 기마무사들의 역할이 완전히 끝난 날이었다.
왜군의 진채에서도 전리품을 거둬들였다. 이 정도 적은 보급품으로 1만 명이 어찌 버텼나 싶을 정도로 병참능력이 빈약한 모양인지 별로 얻을 게 없었다. 승마보병들이 가키자키 요시히로의 갑옷을 벗기는 중에 가문의 인장을 발견해 이민호에게 바쳤다. 별로 쓸 데가 없는 것이지만 이민호는 챙겨두었다.
그날 오후가 돼서야 고산국 기마병들을 필두로 해서 아이누 전사들이 도착했다. 그런데 자그마치 5만 명이나 모였다. 듣던 것보다 아이누의 인구가 많았던 것 같았다.
이민호는 아이누 전사들에게 들판에 쓰러진 왜병들에게서 전리품을 수거해서 가져도 좋다고 허락했다. 보통 왜병들에게는 고산국 원정군이 쓸 만한 물건이 없으니 이럴 때 인심이라도 쓰기로 했다.
5만여 명의 아이누 전사들이 용감하게 몰려가 1만에 못 미치는 왜병 시체를 약탈했다. 아이누들은 왜병이 걸친 마지막 천 한 조각까지 다 털고 나서 시체에 칼질을 하며 그 동안 쌓인 원한을 풀었다.
진채를 거두고 그 날은 평지와 산길로 병력을 나눠 각각 20리 정도만 남하했다. 그 전에 삿포로 북서쪽 해변에서 정박 중인 함대에 전령을 보내 남쪽 치토세 쪽 해안으로 가라고 일러두었다.
다음 날 낮에 아이누 전사들과 함께 남쪽 해안에 도착한 이민호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남쪽 일본 땅에서 바다를 건너온 작은 어선 수백 척이 왜병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마치 덩케르크 철수작전을 보는 듯했다.
해변에 남은 왜병들은 고산국 원정군이 아니라 5만이나 되는 엄청난 숫자의 아이누 전사들을 보고 겁에 질린 채 다급하게 바닷물로 뛰어들었다. 작은 어선 하나에 삼사십 명씩 달라붙어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었다.
“우아아~”
아이누 전사 5만여 명이 일제히 해변을 향해 돌격했다. 왜병들을 다 태우지 못한 일본 어선들이 서둘러 해변을 떠나려 했다. 아직 배에 못 탄 왜병들이 뱃전에 매달리다 물에 빠졌다.
왜병들을 가득 태운 어선이 뱃전에 매달린 왜병들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자, 배에 탄 자들이 못 탄 자들에게 칼을 휘둘렀다. 그런 식으로 왜병들을 가득 태운 어선들이 해변을 떠났다.
“와아아~”
아이누 전사들이 다시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아이누 전사들이 5만 명이나 집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왜군이 알게 됐으니 앞으로 경거망동하지 못할 것으로 이민호는 여겼다.
“왜군 병력이 이렇게 많았나?”
“남서쪽 반도에 1만 정도가 더 있었나 봅니다.”
어선에 탄 왜병들은 해변을 향해 조총을 쏠 생각도 못했다. 아이누 전사들이 쫓겨나는 왜병들을 향해 비웃음을 날린 다음 마지막에는 다시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오늘 몇 번이나 반복해서 환호하지만 아이누족이 이런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을 테니 기쁨을 즐기도록 내버려뒀다.
“마침 전선들이 도착하는군요.”
“그런데 쟤들 뭐하냐? 움직임이 이상한데?”
기함을 비롯한 전선들이 빠른 속도로 일본 어선들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이민호는 원정함대의 지휘권이 누구에게 있나 잠시 머릿속을 더듬어봤다. 아라 공주에게는 신분이 높더라도 군사지휘권이 없고 이민호는 물론 계복과 감동, 감불에 유사시 지휘권이 있는 호위대도 전원 지상에서 작전 중이었다. 함대 지휘권은 기함의 함장에게 있었다.
- 쿠쿵!
“맙소사!”
커다란 전선에서 자그마한 일본 어선을 향해 함포를 발사했다. 함포에 제대로 맞을 때마다 어선이 가루가 되었고, 빗맞아도 치솟는 물기둥이 물벼락으로 변해 쏟아져 내려오면서 어선을 뒤집어버렸다. 어선에 가득 탄 왜병들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어선에 탄 왜병들은 전선을 상대로 저항할 엄두도 못 내고 손으로 물을 저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이 태운 어선은 느리게만 움직였다. 전선이 다가오자 다급해진 나머지 차가운 바다로 뛰어드는 왜병들도 있었다. 내버려뒀다간 최소 수천 명이 바다에 빠져 죽을 판이었다.
“조명탄 날려.”
“도련님! 왜놈들 죽게 내버려두는 게...... 알겠습니다.”
전선이 빠른 속도로 달려오더니 두 손을 맞붙인 채 굽실거리는 왜병들이 가득 탄 작은 어선을 그대로 들이받아 버렸다. 왜병들과 왜인 어부는 물에 빠져 잠시 허우적거리더니 곧 안 보이게 되었다. 왜선이 격침될 때마다 해변에 모인 아이누 전사들이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고산국 전선 함장으로서 왜병이 탄 왜선을 격침시키는 것은 의무였다. 기함 함장에게 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학살이 끝이 없을 것 같았다.
- 펑!
계복이 조명탄을 하늘에 대고 발사했다. 대낮에 공중에서 터진 조명탄은 그저 작은 연기를 뿜어내고 말았다. 그러나 신호탄 역할은 충분히 해냈다. 전선들과 그 뒤에 수송선들이 해안으로 다가왔다. 그 사이 어선에 탄 왜병들이 허겁지겁 노를 저어 남쪽으로 달아났다.
이민호가 승선 명령을 내렸다. 승마보병들과 해병, 기마병들이 정해진 배로 다가가 차례로 승선했다. 하도 자주 타고 내려서 이제 승하선에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민호는 마지막까지 배에 타지 않고 남았다. 그는 아이누 추장들 사이에서 일본어 구사가 가능한 아이누인들을 모았다. 대부분 추장인 그들에게 아이누어로 크게 소리를 지르도록 했다.
“아이누 섬은 내 것이다! 그리고 이 섬에서 살아가는 모든 아이누의 것이다! 내 것을 건드렸으니 샤모 놈들을 응징할 것이다!”
“국왕전하 만세!”
이민호가 마지막으로 기함에 올랐다. 수많은 아이누 전사들의 함성 속에서 기함이 해변을 떠났다. 전선과 범선들이 수평선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이누 사람들이 만세를 불렀다.
이민호는 일본이 더 이상 아이누 섬을 공격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좀 더 확실히 아이누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함대를 남쪽으로 향하도록 지시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