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240화 (189/1,000)

00240  30. 섬에서 섬으로  =========================================================================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하겠소.”

“황송하게 부탁이라뇨. 어떤 일이든 시켜만 주시면 소인은 그저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전하!”

혼슈 북단과 아이누 섬 중간 바다인 쓰가루 해협의 동쪽 입구에서 영덕어부 김 가선과 헤어졌다. 김 가선이 마치 이민호와 영원히 이별하는 양 서럽게 눈물을 뿌렸다. 겨우 한두 달 만에 만나도 헤어질 때마다 매번 이러니 이민호는 몹시 부담스러웠다.

이민호는 아이누 섬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기로 하고 그 기초를 닦는 일은 김 가선에게 맡겼다. 위도는 낮아도 훨씬 더 추운 함경도에서 여러 가지 곡식 종자를 들여와 섬의 들판에 심고 아이누 사람들에게 본격적인 농경을 가르치라고 했다. 내한성 품종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어도 쌀농사가 가능한지 올해 시험해보기로 했다. 더 추운 사할린에서도 쌀농사가 가능했으니 아이누 섬에서는 새 품종이 아니라도 쌀농사가 가능할 것 같았다.

그리고 함경도에서 철장과 광부들을 고용해 아이누 섬에서 철광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금광이나 은광은 나중 문제였다. 그 동안 짭짤한 수입을 올리기는 했지만 무거운 철제 농기구를 매번 대량으로 가져오는 것도 문제였다. 그리고 아이누인들이 일본인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려면 철기 제조 능력을 자체적으로 보유해야 했다.

언덕 초지에는 말 목장을 여러 곳 세워서 운영하기로 했다. 함경도에서 여기까지 건너와 목부나 마의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아 인원 충원에는 문제가 없다. 전마로 쓸 만한 큼직한 서역마를 몽골에서 해서여진을 거쳐 동해국에서 수입해 아이누 섬에서 키우기로 했다.

“그럼 이만 하직 인사 올리겠습니다. 언제든 옥체 보중하옵소서, 전하!”

“김 영감도 항상 건강하시고 장수하시길 빌겠소.”

김 가선은 벼슬은 조선 조정에서 받고 충성은 이민호에게 바쳤다. 김 가선이 대형 외륜선 세 척을 이끌고 해협을 지나 서쪽으로 향했다. 자그마한 어선에 정원을 초과해서 타고 노를 젓고 가던 왜병들이 화들짝 놀라 길을 비켜주었다.

원정함대는 전투병들과 말을 승선시키느라 한참 늦게 출발했는데도 왜병들이 탄 자그마한 어선들을 바다 중간에서 따라잡았다. 노 젓기를 멈추고 왜병들이 양 손바닥을 붙이며 허리를 숙였다. 살려 달라, 혹은 항복하겠다는 표시였다. 엎드려 절하며 고개를 들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다. 거대하고 빠른 전선들이 다가오는 동안 왜병들은 도망칠 엄두를 못 내고 그저 처분을 내려주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이민호는 왜병들을 다 무시하고 함대를 남쪽으로 보냈다. 아주 가끔 젊은 사무라이가 칼을 뽑아들고 전선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으나 전선에 탄 해병들이 총을 쏘기도 전에 주변의 왜병들이 제압하거나 심한 경우 물에 빠뜨려버렸다.

함대가 남쪽으로 향하는 중에 작은 세키부네 한 척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함장이 함포 사격을 지시하려 하자 이민호가 말렸다. 왜선 갑판에 눈에 띄는 화려한 갑옷을 입은 왜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민호가 기함을 함대 행렬에서 잠시 빼어 작은 세키부네로 접근하도록 지시했다. 왜장 주변을 둘러싼 왜병들의 손에 쥔 창칼 끝이 심하게 떨렸다. 조총병들은 화승에 불도 못 붙인 채 조총을 버릴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해병들이 전선의 갑판에 쭉 늘어서서 세키부네의 상갑판을 향해 총을 겨눴다. 명령만 떨어지면 단 한 번의 일제사격으로 왜병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었다. 이민호가 손을 들어 왜장을 가리켰다.

“당신, 다이묘인가?”

“예! 대왕 전하! 쓰가루 우쿄다이부(右京大夫) 다메노부입니다. 바다 건너 히로사키를 영지로 갖고 있습니다.”

쓰가루 다메노부는 자기가 이끄는 병력은 삿포로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변명인지 모를 말을 해댔다. 해안에서 도망가던 왜병들과 그들을 태우고 남쪽으로 향하는 어선들은 쓰가루가 동원했다고 고했다.

혼슈의 북쪽 끝 히로사키의 다이묘 쓰가루 다메노부는 무쓰국 북부를 다스리던 난부 가문에서 얼마 전에 독립했다. 성을 쌓고 임진왜란에 참가하는 등 바쁘게 움직이느라 아직 기존 근거지인 오우라(大浦) 성에서 히로사키 성으로 이전하지도 못했다. 쓰가루도 아이누 섬의 변고 때문에 풍신수길이 급히 본거지로 돌려보낸 무장들 중 하나였다.

“무슨 일로 왔나?”

“저는 영주로서 패전 책임을 지고자 합니다. 부디 대왕께서는 저에게만 책임을 물으시고 가신과 병사들의 목숨을 살려주십시오. 생령을 살려보겠다고 여기까지 노를 저어 온 어민들의 죄도 용서해주시길 대왕께 간곡히 당부 드립니다.”

“영주가 책임을 지겠다고? 아들은 있나?”

쓰가루 다메노부는 원래 삿포로에 집결한 왜군 진영에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아이누 섬을 점령하면 가키자키 가문이 땅을 나눠주지는 못하더라도 서해안의 어업권을 주기로 약속해 흔쾌히 병력을 파견했다. 그러나 고산국 원정군이 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놀란 쓰가루는 즉시 병력 이동을 멈췄다. 가키자키 등 다른 영주들이 잇따라 전령을 보내 독촉했는데도 핑계를 대면서 합류를 계속 미루고 있었다.

삿포로에 모인 왜군 여러 부대들은 화약이 부족한 탓도 있었지만 많은 병력을 보유한 쓰가루가 며칠째 합류를 미룬 탓에 전투를 주저하다가 결국 야습을 하게 되었다. 고산국 원정군이 압도적으로 왜군을 섬멸하자 쓰가루는 즉시 전군에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아이누 섬에 건너올 때도 작은 어선들을 동원해 며칠씩이나 걸렸기 때문에 퇴각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고산국 함대가 나타나 바다 한가운데서 꼼짝 못하고 전멸 당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고산국 함대가 왜선들을 무시하고 남쪽으로 지나가자 한 편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영지가 초토화될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쓰가루는 영지를 살리기 위해 할복하기로 작정했다. 삿포로에서 합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른 영주들이 비난할 것에 대비해 영주가 패한 다음 비장하게 할복한 것을 내세워 비난을 모면할 계획이기도 했다.

“비록 못난 자식들뿐이지만 삼형제를 두고 있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그렇다면 안심하고 패전이 아닌 침략에 대한 책임을 져라! 나는 그대의 부하들을 살려주고 그대의 영지에는 피해를 주지 않고 지나가겠다. 다만 앞으로 돛을 단 배를 바다에 보내지 말고 노를 젓는 배로 육지 가까이서 고기잡이를 하도록. 만약 북쪽 섬에 어선을 보내면 네 후계자들을 용서하지 않겠다.”

“하! 감사합니다.”

40대의 다이묘가 무릎을 꿇고 상체의 갑옷을 벗었다. 갓푸쿠(割腹), 셋푸쿠(切腹), 하라키리(腹切り), 도후쿠(屠腹) 등 이름은 여러 가지였지만 똑같은 자살 방법이었다. 이민호가 함대 행렬을 따라잡아야 하고 이곳은 바다 위였으므로 할복은 간소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민호가 비단 한 필을 세키부네에 보내자 쓰가루가 감사를 표한 다음 그 비단을 깔고 앉았다. 쓰가루가 자세를 잡고, 영주에게 신뢰받고 칼솜씨도 좋은 가신이 카이샤쿠로 선정돼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쓰가루 다메노부가 짧고 예리한 칼을 배에 찌른 다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단숨에 그었다.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진 쓰가루가 차분한 동작으로 배에서 창자를 줄줄이 뽑으면서 이민호에게 소리를 질렀다. 목소리가 의외로 담담했다.

“제 충성스런 신하들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들도 전하께 은혜를 갚을 기회가 오면 반드시 갚을 것입니다.”

“기억해두겠다.”

주군을 배반해 반란을 일으켜 다이묘가 된 주제에 말이 많았다. 조선인 출신 해병들이 끔찍한 장면에 고개를 돌리는데 반해 민희와 민영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지켜보고 있었다. 아라 공주는 얼굴이 하얗게 변하며 선실로 돌아갔다.

고통스런 신음이 다이묘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순간 가신이 칼을 휘둘렀다. 목이 거의 다 잘리고 다만 목 앞 가죽이 아슬아슬하게 남는 바람에 머리가 주인의 가슴팍으로 떨어져 안겼다. 가신의 뛰어난 칼솜씨가 다이묘의 머리가 바닥을 구르는 추태를 막았다.

“오오!”

할복을 지켜보던 가신들이 멋진 카이샤쿠의 칼솜씨에 놀라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할복을 한 쓰가루 다메노부의 용기와 명예보다 카이샤쿠를 한 가신의 실력이 더 크게 소문 날 것 같았다. 이민호는 다이묘의 자식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넨 다음 기함을 출발시켰다.

“참 가식적이네요. 그런데 저놈들이 도련님께 복속을 한 건 아니죠?”

“내게 복속하면 주변 영주들이 영지를 넓힐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겠지. 그냥 패배 책임만 물은 거야. 항복을 잘 받아줘야 앞으로 전쟁을 쉽게 할 수 있어.”

보이는 족족 쳐 죽여서 적이 목숨을 걸고 싸우게 해서는 안 된다. 영주는 물론 모든 무사와 병사, 심지어 백성들까지 똘똘 뭉쳐서 성을 지키고 아군의 보급로를 공격하면 원정이 엄청나게 길어지고 실패할 수 있었다. 압도적인 군세를 갖고 있던 몽골도 정복 과정에서 적의 항복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하는데, 아직 1만도 되지 않는 병력을 가진 고산국이 내키는 대로 적을 죽이고 다닐 수는 없었다.

함교에 오른 이민호가 지도를 살폈다. 겐타로가 보낸 지도에는 꼼꼼하게 도호쿠 지방의 영지 경계선까지 자세히 표시돼 있었다.

“히로사키 번은 빼고 쓸어야겠군. 다음 목표는 하치노헤다.”

속도를 올려 함대를 따라잡은 기함이 선두에 섰다. 그리고 남서쪽 아오모리와 무쓰만을 치려던 계획을 수정해 남방으로 곧장 항해해 하치노헤로 향했다. 그러나 해가 지고 있어서 시리야자키 곶 서쪽, 파도가 잔잔한 해안에 함대를 정박시켰다. 함대가 접근하는 것을 발견한 왜인들이 급히 피난을 떠났다.

“쇠로 만든 닻이라니, 고산국이 아무리 부자라지만 사치가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닻을 내리고 배 위치를 고정시키기 위해 전선이 앞뒤로 움직이는 과정을 진행하는데 계복이 빈정거렸다. 이 시대에 철제 닻은 드문 편이었다. 대체로 무거운 나무에 돌을 다는 닻을 사용했고 급하면 끊고 도망가는 일도 흔했다.

“배가 무거워서 나무로 만든 닻이 버티지 못한다. 불만이면 계복이 네가 나무 닻을 만들어 보든지.”

“험! 나무 닻이야 쉽게 만들 수는 있지만 닻이 배의 절반 크기에 달해 꼴불견일 것 같습니다.”

“닻을 수납할 공간을 달리 활용하는 게 낫지. 멀리 원정을 하려고 기껏 전선을 만들었는데 물을 찾고 땔감을 구하는 건 판옥선과 똑같다. 짜증난다.”

“거기에 더해 꼴을 베어 쇠죽을 쑤어야 합니다.”

해병들을 단정에 태워 해안에 상륙시키면서 이민호가 계복과 함께 툴툴거렸다. 연료를 아끼기 위해 기관을 정지시키면 밥을 짓기 위해 땔감이 필요했다.

물은 그렇다 치더라도 대형 외륜선들이 따라다니는 바람에 적지에서 소가 먹을 여물을 구하는 것도 신경이 많이 쓰였다. 앞으로 남쪽으로 항해해야 할 테니 범선이 순풍을 받을 일도 거의 없어 기동력 저하도 심각한 문제였다.

“역시 석유를 활용해야 한다니까!”

“석유가 뭡니까, 도련님?”

“땅에서 나는 시커먼 기름이 있다. 그걸 태워서 동력을 얻어 배가 움직일 수 있어.”

“지금 전선이 움직일 때 태우는 땅콩기름처럼 말입니까? 아! 쇠똥을 말려서 연료로 쓰면 어떨까요? 유목민들은 그걸로 난방도 하고 빵을 구워먹기도 한답니다.”

전선이 움직이기 위해 바이오디젤 연료를 쓰는데 보통은 땅콩기름이라고 설명했다. 생산비용이 비싼 것도 문제였지만 아무래도 연소 효율이 낮아 더 많이 적재해야 했고, 작전 거리도 짧아진다는 문제가 있었다.

“화력이 약해서 안 돼. 석탄도 화력이 약한데 쇠똥은 말할 필요도 없지.”

“석유를 어디서 구하죠? 어디서 나건 배를 보내 구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음에 에스파냐와 함께 남양의 해적을 치고 브루나이 제국에게서 유전, 그러니까 석유가 나는 땅을 얻으려고 해. 협상을 잘해야겠지.”

“함대를 보내 유전이란 것을 빼앗으면 되잖아요?”

“빼앗고 나면 그걸 어떻게 지키려고? 유전을 지키기 위해 병력을 파견하고 병참선을 유지하느니 차라리 땅콩기름을 때고 말겠다.”

해병들 일부가 물을 구하고 꼴을 베는 사이 일부는 포구에 정박한 일본 어선을 부숴서 땔감으로 만들었다. 어선을 불태우느니 이러는 편이 나았다.

일본인 어민들이 어둠 속에서 지켜보고 있었으나 감히 항의하지 못하고 덜덜 떨었다. 일본 어민들은 앞으로는 훨씬 작은 어선을 타야 할 것이다.

밤에 검은 숲을 통해 소수 왜병들이 묘박지에 접근했다. 그러나 조총 사거리에서 벗어난 바다에서 정박 중인 함대를 공격할 수단이 없었다. 어선은 모두 땔감으로 뜯어가고 전선마다 파수병들이 돌아다니며 경계를 서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오전에 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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