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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243화 (192/1,000)

00243  31. 혼슈 봉쇄  =========================================================================

“싱거워! 재미없어!”

감불이 기마무사들이 몰살당한 곳을 옆으로 돌면서 얼마 안 남은 생존자들에게 권총을 쏘아 영원한 안식을 주었다. 다른 기마병들이 칼을 뽑아들어 부상을 입고 바닥을 기어가는 기마무사들의 숨통을 끊었다.

포위당한 채 전멸하는 바람에 좁은 지역에 말과 사람의 시체가 잔뜩 쌓여있었다. 시체가 겹겹이 쌓인다는 말이 실제로 이렇게 가능했다.

이어서 기마병들이 전리품을 거둬들였다. 기마무사들이 착용한 갑옷과 투구, 왜검은 비싼 물건이었다. 이것들을 명나라 황제에게 바치면 황제가 적당한 값을 치러주었다. 일본 내에서 거래되는 값보다는 약간 적게 받더라도, 일본에서 갑옷의 판로를 구하기 쉽지 않은 고산국에는 쉽게 돈을 버는 방법이었다.

“의외로 빨리 왔네. 전서구라도 쓰나?”

이민호가 호위대를 이끌고 근처 언덕으로 올라갔다. 에도 평야는 엄청나게 넓은데다 멀리 산에 안개가 끼어 지평선이 보이는 줄 알았다.

“주인님! 기마무사들이 몰려왔다는 것은 적의 대규모 병력이 오고 있다는 뜻이겠죠?”

“어디서 출발했는지 몰라도 보병들은 한참 지나서 도착할 거야.”

민희가 조금 걱정했지만 이민호는 태평했다. 사방팔방 아무리 살펴봐도 왜군이 몰려오는 기색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민호는 호위대를 이끌고 마치 산책하듯 천천히 에도성 북쪽으로 말을 몰았다.

별로 크지도 않은 에도성은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붕괴한 다음 불에 타는 천수각과 성벽 위에 길게 설치돼있던 야구라가 산산 조각으로 부서져 불에 타올랐다. 나무로 만든 다리가 활활 불타다가 부서져 해자로 내려앉았다.

이제 에도성은 당분간 통행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시뻘건 불길과 시커먼 연기에 삼켜진 에도성에서 적의 저항은 이미 오래 전에 그쳤다. 성안으로 도주한 왜병들 대부분이 불에 타죽거나 연기에 질식해 죽었을 것으로 판단했다.

“도련님. 이제 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 돌아가자.”

계복이 적절할 때에 건의하자 이민호가 바로 받아들였다. 시가전 훈련을 충분히 받은 해병을 투입하면 에도성을 완전 점령하는 것도 가능하긴 한데 의미가 별로 없었다. 그리고 활활 불타고 있는 에도성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사이 해병들은 에도성에 가까운 간다강과 폭이 더 넓은 아라카와강 하구에 지어진 선착장과 시장 건물들을 불태우고 있었다. 총소리와 대포소리에 놀란 왜인들이 이미 피난을 떠나서 방화 작업은 아주 쉽게 이루어졌다. 시장 건물도 성 아래 마을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목재로 지어져 불이 잘 붙었다.

부둣가 창고 하나에 비단이 잔뜩 쌓여있는 것이 발견돼 승마보병들까지 동원돼 범선으로 운반했다. 시간을 더 들여서 가게 건물을 수색한다면 일본 상인들이 숨겨놓은 금붙이나 명나라 동전 영락전이라도 발견할 수 있겠지만 시간 낭비였다. 고산국 원정군이 잔돈푼에 연연할 가난한 군대도 아니고, 특히 그렇게 혐오하던 왜구와 같은 노략질을 할 수도 없었다. 물론 큰돈이 된다면 전리품으로서 챙겨갈 의향은 있었다.

승마보병들이 려 단위로 어선들이 정박된 포구 몇 곳으로 몰려가 어선과 선창 건물들을 모조리 태워버렸다. 병사들이 다들 불 지르는데 익숙해진 것 같아 이민호는 조금 걱정이 들었다. 보급품 중에서 특히 성냥갑이 바닥을 보이고 있다는 보급담당관의 보고가 기억났다.

성 아래 마을과 시장이 적당히 불타자 이민호가 병력을 거둬들였다. 에도성과 시가지에서 치솟아 오른 검은 연기가 하늘을 가득 메웠다.

원정함대는 오후에 에도만을 나와서 우현에 후지산을 두고 남서쪽으로 항진했다. 오늘은 기마무사의 갑옷 말고도 조총이나 왜검 같은 전리품을 많이 얻었다. 2천 정이 넘는 조총은 아이누 섬이나 사할린에 팔기로 했다. 특이한 것은 바닷가 시장 창고에서 옮긴 비단이었다.

“비단 2만 5천 필? 많이도 쌓아놨군. 원정군 전원에게 한 필씩 나눠줘.”

이민호가 보급담당관에게 지시했다. 보관 문제를 고려한다면 원정이 끝나고 귀국한 다음 나눠주는 편이 좋겠지만, 사기를 올려주기 위해서는 즉시 나눠주는 편이 나았다.

예전에는 일부 병사들끼리 서로 귀중품을 훔치고 빼앗고 하더니 처벌을 강화한 다음부터는 그런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월봉을 충분히 받아도 남의 것을 끝없이 탐내는 인간들이 있어서, 적발되면 곤장을 친 다음 군에서 쫓아내거나 심한 경우 사형을 시킨 사례도 있었다.

고산국에서 훈련 중이거나 조선이나 여진의 주둔지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재판이라도 열렸다. 하지만 전투지역에서는 그런 복잡한 절차가 없이 즉결처분한 적도 있었다. 술 마시고 싸우다 동료를 때려죽인 인간이나 동성 강간을 한 놈을 사회라면 모르지만 군대에서는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병사들은 특히 원정 중에는 범죄에 연루되지 않으려고 더욱 조심했다.

“다음 공격 목표가 어디지?”

정찰을 위해 오시마(大島)에 병력을 상륙시키면서 이민호가 물었다. 오시마는 에도만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사가미만 남쪽에 위치한 큰 섬이었다. 기함 승조원이며 동시에 함대사령부 요원이기도 한 항해사들이 해도를 살피며 보고했다.

“내일 공격할 곳들 중에서 중요한 곳은 가마쿠라, 오다와라, 이즈입니다.”

다른 전선보다 많은 함교요원이 배치된 기함이지만 항해사들은 전체 함대 운영 업무도 처리하고 함대 작전계획 수립에도 참가해야 해서 오랫동안 격무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아직은 전대장과 전단장도 없고 사령부 요원도 따로 두지 않았다. 지휘, 통신 체계는 손을 많이 봐야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도를 살펴보니 사가미만에 접한 해안도시와 이즈반도에 들어선 도시와 마을이 수십 곳이었다. 갑자기 공격목표가 확 늘어나자 기뻐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인구가 적은 관동지역이라지만 이 지역은 오래 전부터 인구밀집 지역이었다.

- 탕! 타탕!

오시마 섬 안쪽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오시마에 해병들을 무장상태로 상륙시켰는데 섬에 자리 잡은 사무라이가 병력을 동원해 저항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전투는 곧 끝나고 해병들이 물을 떠오고 꼴과 땔나무를 베어왔다.

섬 북쪽 평지에 살던 왜인들이 집을 버리고 미하라 산이라는 화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산 정상은 숨을 곳도 없는 활화산 분화구였다. 해안으로부터 사방을 둘러싸고 토끼 몰이하듯 천천히 올라가면 화산 꼭대기에서 왜인들을 다 잡을 수 있겠지만 이민호는 별로 심심하지 않았다.

“자가당착이야. 모순이야!”

이민호가 연신 혀를 찼다. 대형 외륜선 때문에 적지에서 보급을 추진해야 하니 신경도 많이 쓰이고 특히 밤에 거의 무조건 정박해야 하니 시간 낭비가 심했다. 전선과 효율을 비교하면 극명하게 차이가 났다.

이번 작전만 끝나면 외륜선은 더 이상 군선으로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민호는 항상 그렇게 다짐하곤 실제로 일이 있을 때마다 지키지 못했다. 전선을 만드는 속도보다 병력이 늘어나는 속도가 빠르고, 말을 원정에 동원하려면 대형 외륜선까지 투입해도 모자라기 때문이었다. 괜히 범선 여러 척이 낀 것이 아니었다. 수송선에도 기관을 장착하려면 아직 멀었다.

“그 옷은 뭐요, 공주?”

“호위대 분들이 이렇게 입으니까 멋져 보여서 비슷하게 따라서 만들었어요.”

이민호는 차를 마시다가 쏟을 뻔했다. 원정군 전원에게 1필씩 나눠준 비단으로 아라 공주와 시녀들이 치파오를 본떠 이상한 옷을 만들어 입고 있었다.

여진족 출신인 민희와 민영, 그리고 호위대 소속 여자들은 더운 고산국 기후에 맞춰 치파오의 밑단을 짧게 자르고 어깨를 드러내는 민소매로 바꾸는 등 개량을 많이 가해 왕궁이나 기함의 호위 대기실에서 편하게 입고 다녔다. 부드러운 면으로 잠옷도 해서 입었다. 치파오는 여성스런 몸매가 강조되고 옆선을 통해 허벅지가 살짝 드러나는 등 이민호가 보기에도 좋았다.

그런데 유구국에서 자란 아라 공주와 시녀들이 만든 것은 치파오와 비슷하면서도 좀 달랐다. 치맛단을 길게 늘이면서도 옆선을 엉덩이까지 터서 허연 허벅지 살이 드러나 보이도록 했다. 우연일지 몰라도 베트남의 아오자이와 거의 비슷한 스타일이 되었다.

“어때요, 전하? 옷 예쁘죠? 아마가 옷을 잘 만들어요.”

“아주 예쁘오.”

치파오나 아오자이나 상체를 조이고 하반신은 품이 넓어서 여성미를 강조하는 디자인이었다. 아야나 다른 시녀들이 입으니 가슴과 허리 등 몸매를 한층 더 드러내 이민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상체가 평평한 아라 공주가 입으니 포대기를 씌운 꼴이나 다름없었다.

무명이나 모시와 달리 비단은 두 배인 84자가 한 필이라 한 필로 옷 여러 벌을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남는 천을 서로 바꿔서 여러 가지 무늬의 옷을 만들어 입었다.

문화는 이런 식으로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서로 협조해야 발전하는 것이니 다양하게 만들어 입도록 이민호가 격려해줬다. 고산국이 더운 곳이니 잘하면 미니스커트도 조만간 나올 것 같아 기대가 됐다.

“예쁜 속옷도 여러 벌 만들었어요, 전하. 어머! 못 들은 척해주세요.”

“쿨럭!”

이민호가 기어코 차를 쏟고 말았다. 그러나 아라 공주는 금방 잊어먹고 속옷을 들어 올리면서 놀았다. 이럴 때 보면 공주가 마치 소꿉장난을 하는 것 같았다. 아직은 인형을 갖고 놀 나이에 시집가고 남편을 따라 원정에 참가하고 있으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이나 고산국에서 속옷은 주로 부드러운 면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무늬가 화려한 비단으로 만든 여성 속옷을 이민호가 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보니 그 동안 백성들을 먹이고 재우는 것에 바빠 옷을 신경 쓰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날 밤 아라 공주를 먼저 재운 다음 시녀들이 입은 속옷을 점검해보았다.

“비단이라 무늬도 예쁘고 잘 만들긴 했는데 디자인, 아니 도안이 너무 단순하지 않아? 비단이 모자라면 내 것까지 줄 테니 좀 더 다양하게 만들어봐. 예를 들어서 한쪽 혹은 양쪽을 끈으로 묶었다 풀 수 있게 한다든지, 장식을 단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야.”

“부끄러워요, 전하. 치마를 내리도록 허락해주세요.”

“잠시만 가만히 있어 봐. 음. 고무줄을 넣은 것도 필요하겠군. 다양하게 만들어서 명나라나 유럽에 팔아볼까? 이번에는 뒤로 돌아봐. 허리 숙이고.”

얼굴이 빨개진 아야와 아마, 아나가 이민호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아야는 날씬하고 아마는 약간 풍성한 편이었다. 아나는 장군의 딸이라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무예를 배워 몸매가 탄탄해서 보기에 좋았다. 그러나 이민호는 진지하게 돈 벌 생각에 골몰했다.

시녀들을 재우고 이민호 혼자 밤늦도록 재봉틀을 설계했다. 가정용이 아닌 산업용을 먼저 만들어야 해서 손으로 핸들을 돌리는 것보다는 발로 구동시키는 것을 선택했다. 바늘에 걸린 윗실이 천을 관통해 아랫실과 교차해서 꿰매는 것을 연속 동작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기술의 핵심이었다. 다음 날 아침 시녀들이 왠지 모르게 뿔이 난 것 같았다.

원정함대는 이른 새벽에 다시 북상해서 사가미만으로 접근했다. 전선 수십 척이 횡으로 넓게 전개해 명백하게 적대적인 의도를 가지고 해안선으로 접근해도 배를 띄워 저항하는 세력은 없었다. 일본 수군이 조선에 갔다가 조선 수군에게 걸려 몽땅 다 죽었는지 일본 본토에서는 수군을 구경하기 어려웠다.

- 쾅!

기함의 함수 함포가 불을 뿜으면서 혼슈 초토화 작전이 재개됐다. 가마쿠라(鎌倉)는 삼면이 언덕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 지역이라 하지만 바다 쪽으로는 섬도 거의 없이 활짝 열려 있었다. 가마쿠라는 오래된 도시였고 한때 막부가 설치됐었다고 해도 지금은 많이 쇠퇴해서 인구가 줄어든 시기였다.

시가지 주택, 상가, 선창 창고 등 건물들은 일본에서 다 그렇듯 목재로 되어 있었고, 봄이라서 더욱 잘 탔다. 포격을 할 때 절인지 신사인지 구별 못할 사원에 포탄이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주로 연막탄을 쏘았다. 간단히 시가지를 불태우고 함대는 서쪽으로 향했다. 상륙해서 점령하거나 공격할 값어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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