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48 31. 혼슈 봉쇄 =========================================================================
전선을 자기 손으로 불태워야 한다고 생각하니 이민호는 아까워 미칠 것 같았다. 특히 오늘은 하루 종일 포격을 하느라 전선에 실은 포탄이 거의 떨어졌으니, 수송선에서 포탄을 보급받기 전에는 전투력이 급감할 것이다. 요도가와의 물길이 끊긴 지금으로서는 적을 막기 어려웠다.
승마보병을 포탄 운반병으로 잠시 전용할까 고민하다가 그것도 포기했다. 전선 좌초 지점에서 강 하구까지 6km에 달하는 보급로를 지킬 자신이 없었다. 요도가와 강에 물이 차 있을 때는 강 건너편이 조총 사거리 밖이라 작은 배 한두 척으로 건너오는 소수의 적 외에는 걱정할 게 전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왜군이 강바닥을 바로 건너올 수 있었다.
오사카는 동서와 남북으로 사람 키를 넘는 강과 개울이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어 유사시에 다리 몇 개만 지켜도 쉽게 방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평소와 달리 강물이 말라 다리가 막히거나 부서졌다 해도 어디든 걸어서 이동할 수 있었다.
사방이 확 트였으니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목 지점 몇 개를 방어하는 식으로 병력을 아낄 수가 없었다. 이것까지 감안해서 풍신수길이 요도가와 강의 물줄기를 돌리는 장치를 미리 만들어둔 것 같았다.
“전선에 비싼 것들 많잖아요. 수레로 옮겨요.”
“배 한 척에 실린 것을 옮기려면 수레 100대 이상이 필요해. 개인 소지품 중에서도 일부만 챙겨야 할 거야.”
기차가 생기기 전까지 육상 운송은 해상 운송을 절대 못 따라왔다. 운송 단가를 따지면 현대에도 여전히 해상 운송이 싸게 먹혔다.
“배는 불태우더라도 기관만큼은 떼어서 갖고 가요.”
“그래요. 기관은 무겁더라도 가져가요. 장인들이 고생해서 만들었잖아요.”
배를 불태우고 퇴각하자는 이민호의 말에 이견은 없었다. 특히 기관이라 불리는 터보 샤프트 엔진을 만들 때 이민호가 얼마나 고심했는지 호위로 따라다닌 민희와 민영은 잘 알고 있었다.
간단한 구조에도 불구하고 처음 만들 때 몇 달이나 고생했고 장인들이 제작에 익숙해진 지금도 한 달에 겨우 6개를 만드는 수준이었다. 제작비는 말도 못하게 들어갔다.
“기관이 워낙 무거워서 말이다. 폭탄을 장착해서 날려버려야겠다. 티크목이 불에 잘 타야 할 텐데.”
그리고 티크목은 좋은 목재이지만 유구국 상선들을 동원해 멀리 남쪽에서 수송해오느라 엄청나게 비쌌다. 기함에 쌓아놓은 황금과 은이 몇 톤이나 되는데 이것을 포기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는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게 불가능하고 적에게 넘길 수는 더더욱 없었다. 상자를 승마보병들에게 나눠서 상선이나 외륜선으로 옮기기로 했다.
그 외에 여러 가지 모두가 돈이었다. 전선 12척을 다시 만들 생각을 하니 이민호는 눈앞이 캄캄했다. 당분간 고산국의 전력이 급감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이곳에서 제대로 탈출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런데 쟤들 뭐하냐? 유구국 애들 어서 데려와라.”
호위대 병사 하나가 말을 타고 남쪽으로 달려갔다. 나카노시마 돌다리 건너편은 적지인 셈인데 유구국 보병들이 아직도 남아서 시가지 건물에 신나게 불을 지르고 있었다.
유구국 보병들은 존재감이 희미해 이민호가 종종 까먹어서 작전 지시를 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사실 일본 동해안을 훑고 내려오는 중에 창칼을 휘두르는 보병을 써먹을 곳이 별로 없었다.
“유구국왕의 군대가 일본의 수도를 공격해 충분히 징치했으니 일본국왕은 반성할 것입니다.”
쇼호 왕자가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씩씩하게 보고했다. 이민호는 어이가 없었지만 유구국 입장을 고려해볼 때 뭐라 꾸짖기도 어려웠다.
“잘했다. 그런데 일본 수도는 교토이고 풍신수길은 국왕이 아니다.”
“실질적인 수도와 국왕이죠.”
“그래. 어서 강 하구로 가서 승선해라. 퇴각한다.”
“오사카를 점령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내게 그럴 능력이 없어서 미안하다.”
쇼호 왕자가 툴툴거리며 보병 400명을 이끌고 강 하구로 이동했다. 유구국 범선에 탄 선원들이 쇼호 왕자의 개선을 환영했다. 선원들은 하루 종일 진행된 오사카 성 전투가 아니라 유구국 보병들의 활약을 지켜보면서 환호를 내지르고 있었다.
풍신수길이 군을 몰고 온다는 소식에 계복이 승마보병들을 이끌고 급히 복귀했다. 그런데 이상한 소리를 했다.
“역시 도련님이십니다. 오사카 성을 친 것은 풍신수길을 끌어들이기 위한 작전이었죠? 예상보다 훨씬 빨리 달려오고 있습니다. 저 놈만 잡으면 이제 전쟁도 끝나겠군요. 우두머리를 잃은 일본은 당분간 내전에 시달릴 겁니다.”
“적의 10만 대군이 몰려온다고 들었습니다. 여기서 아예 왜적들의 씨를 말리죠.”
감불도 허세를 작렬하며 헛소리를 지껄였다. 평소라면 약간 무리하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을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전선에서 하루 종일 함포를 쏴서 포탄이 얼마 안 남았다. 너희들 탄약 얼마나 남았어?”
“유탄은 거의 다 썼고 총탄은 절반쯤 남았습니다. 전선에서 보급 받으면 됩니다.”
탄약 수송선 역할을 하는 범선에서 떨어져 있으니 이렇게 매사에 불안했다. 다음에는 탄약 수송선과 연료 보급선에도 기관을 장착해야겠다고 이민호는 마음먹었다.
물론 오늘 전선 12척을 모두 잃을 테니 전선을 적정 숫자만큼 갖추는 게 우선이었다. 장인들이 지금까지 24시간 3교대로 일하고 있어 더 이상 과중한 노동을 시킬 수도 없으니 인원을 더 늘려야 했다.
“화수분인 줄 알아? 더 이상 보급 못해주거든? 자! 이제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지?”
“창칼과 총검으로도 얼마든지 싸울 수 있습니다.”
“됐어! 전멸하기 싫으니 얼른 전선 불태우고 도망가자. 그 사이에 너희들이 시간 좀 벌어줘야겠다.”
계복, 감동, 감불은 같이 자라서 친하기도 하지만, 실전 경험이 풍부하고 믿을 만한 전술 지휘관이었다. 이민호가 셋에게 지시를 내렸다.
“계복! 승마보병 1천을 이끌고 나머지 승마보병과 해병이 강 하구로 이동해 범선에 승선할 때까지 풍신수길 본군을 잠시만 고착시켜라. 감동! 기마병 2개 려를 데리고 서쪽을 맡아 적 선봉 기마무사들만 잡고 바로 돌아와! 감불은 동쪽이다. 다들 조총 사거리에 유의해서 견제만 할 것. 지금 적 몇 백 명을 죽이는 것보다 아군 한 명을 살려서 빠져 나가는 게 더 중요하다. 출발!”
“옛!”
2천 명이 말을 타고 세 방향으로 움직였다. 이민호는 해병 지휘관들과 좌초한 전선에 타고 있는 함장들을 불렀다.
“안타깝게도 상황이 이렇게 됐다.”
이민호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한 함장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건조할 때 설계 단계부터 참가해 전선이 처음 진수되고 시험항해하고 취역할 때까지 제 자식처럼 세심하게 보살핀 사람들이 함장이었다. 지금까지 전선을 제 집처럼 여기며 배에서 지낸 시간이 더 많은 사람들이기도 했다.
- 타타탕!
멀리서 총소리가 울렸다. 거의 동시에 동과 서, 북쪽에서 전투가 시작됐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보고자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기마병과 승마보병들의 노고와 희생을 헛되이 버리지 않아야 했다.
“상황이 급하니 간단히 지시를 내리도록 하겠다.”
함장 몇 명이 중년의 나이임에도 훌쩍거렸다. 이런 명령을 내려야 하는 이민호도 기분이 언짢았다.
이민호가 함장들에게 전선을 불태우고 해병들에게 금 상자를 꺼내라고 지시하려는 바로 그때 강물이 천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민호는 지휘관들을 불러놓고 말을 못하고 눈알이 강으로 돌아간 채 침을 꿀꺽 삼켰다. 상황이 다시 변했다.
그러나 상류에서 제방이 자연적으로 복귀될 리는 없었다. 역시나 물이 상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하류에서부터 밀려 올라왔다. 바다에서 밀물이 시작된 것이다.
세토내해는 멀리 수평선이 보이는 일본의 다른 지역들과 달리 조선 남해안과 서해안처럼 밀물과 썰물이 확연히 구분됐다. 그리고 오사카 시가지를 사방으로 거미줄처럼 가로지르는 하천들은 조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오사카의 해발고도가 낮아 만조시 해면의 수위와 강 중류의 수위가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바닷물이 올라오네.”
“이제 살았습니다!”
“배가 움직이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거야.”
기울었던 전선이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바로 서게 되었다. 잠시 후면 배가 제대로 설 수 있고, 만약 적이 공격해 와서 급히 떠나야 할 경우에는 강바닥을 긁으면서 하류로 항해해도 상관없었다. 수리는 나중에 해도 되니 여기서 빠져 나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해병, 전선에 탑승해!”
전선 12척에 배치된 해병들이 무릎까지 강물에 적시며 전선으로 뛰어갔다. 평소라면 단정을 이용해 옮겨 타겠지만 지금 전선에는 단정이 한 척씩밖에 없었다. 물이 더 차오르기 전에 태우는 편이 나았다. 함장이 이민호에게 물었다.
“전하! 나머지 단정들은 어떻게 합니까?”
“어서 하류로 빼! 요도가와 강 하구에 정박한 수송선과 전선 사이를 오가며 포탄을 보급한다.”
전령 역할을 맡은 호위대 하나가 나카노시마로 달려갔다. 나카노시마 주변은 특히 밀물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곳이었다. 하루의 절반은 강물이 바다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바닷물이 역류하는 지역이었고, 물빛도 부유물이 가득해서 허연색이었다. 그러나 아직 요도가와 강과 물길로 연결되지 못했다.
일단 승마보병 4천 명을 강 하구로 보냈다. 말 4천 필을 더 적은 수의 배에 수용하기 위해 말 수송선들은 3층으로 된 외양간 형식으로 개조됭 있었다. 그래서 같은 크기의 다른 범선들이 겨우 100마리를 운송할 때 개조된 수송선은 말 500마리까지 수용 가능했다. 건초와 사료, 곡물도 충분히 운반했으나 모두 말을 먹이기 위한 보급품이었다. 배마다 마의와 목부들이 배치돼 세심히 말을 돌봤다.
외륜선에 탑승할 해병들도 먼저 강 하구로 보냈다. 해병들은 죽으나 사나 자기가 탄 배와 운명을 같이 했다. 수병과 해병은 배에서 싸운다는 점에서는 같고 다른 점은 지상전투 임무를 맡는 것뿐이었다.
“단정은 물에 뜨나?”
“예! 언제든 이동 가능합니다.”
이민호는 전선에 한 척씩 남긴 단정들을 강 하구로 보내 포탄을 운반하도록 지시했다. 탐망선도 포탄 운반하는 일에 동참시켰다.
이제야 여유가 좀 생겼다. 전선들은 수병들이 수심을 재면서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선이 움직이려면 아직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전하! 적이 접근합니다! 포격을 시작하겠습니다.”
어느새 기함에 돌아간 함장이 이민호에게 소리를 질렀다. 포탄이 20발 정도밖에 남지 않았을 텐데 배짱도 좋았다.
한 척씩밖에 없는 단정들이 포탄을 옮겨와도 금방 소진될 테니 아껴 써야 했다. 전선마다 단정 네 척이 포탄을 운반해야 여유 있는 함포 사격이 가능할 텐데 지금은 나머지 단정은 오가와 강을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 뻥! 콰앙~
포성이 울리자 다시 병사들의 사기가 살아나는 것 같았다. 북동쪽을 바라보니 계복이 이끄는 승마보병들이 말을 타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풍신수길군의 기마무사들을 해치우고 보병들에게 총격을 가한 다음 퇴각하는 중이었다.
동쪽과 서쪽에서도 마찬가지로 감동과 감불이 선봉으로 달려온 기마무사들을 요격한 다음 본군인 보병들에게 총격을 가해 전진을 멈추게 했다. 기마무사들을 다 잃고 조총병들이 대응을 못하자 구원군을 끌고 온 영주들이 신중하게 변했다.
계복이 가장 먼저 돌아왔다. 이민호는 승마보병 1천 명을 강 하구로 보내고, 호위대도 기함에 탑승시켰다. 호위대는 사람 가슴까지 차오르는 강에 말을 탄 채 뛰어들었다. 차가운 두만강 물도 말을 탄 채로 건너던 여진족 출신이 많아서 이럴 때는 아주 좋았다.
“도련님은 강물로 뛰어들지 마세요. 감기 걸려요.”
“그래. 난 자신 없다.”
전선 12척이 서서히 하류를 향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리고 풍신수길이 이끄는 왜군이 움직일 때마다 전선에서 포격을 가해 이동을 멈추게 만들었다. 풍신수길의 본진이 멀리 후방에 있어서 함포로 잡지 못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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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