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51 32. 뜨거운 바다 =========================================================================
32. 뜨거운 바다
고산국 궁궐에 돌아온 이민호는 며칠 바쁘게 보냈다. 개선식과 장례식을 가장 우선했고, 나머지 급한 일들도 처리했다.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면 항상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내정은 혜영이 관료들과 더불어 대부분 처리해준 덕에 밀린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군사와 외교는 이민호가 최종 결재를 해야 했다. 왕명명이 외국 정보를 수집하고 미카가 분석하고 최 선생이 문서 작업을 많이 도와줘서 예전에 비해 훨씬 수월하게 끝냈다.
오전에 국왕 집무실에서 간단한 회의를 열었다. 6국 국장 직책에 직업 관료를 임명해 구성한 내각은 혜영이 통령으로서 내각회의를 주재해 평상시 업무를 처리했다. 지금은 직책이 있건 없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국가안보회의 비슷한 개념이었다.
신분으로 따지면 최 선생과 계복 외에는 대부분 참가자가 내명부 소속이었다. 귀인 등 이민호의 여자라는 뜻이다. 최 선생과 계복을 빼면 침대나 목욕탕에서 회의를 열어도 될 정도였다. 민희에게 군사행정을 맡기고 최 선생을 궁궐에 들인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고 이민호는 생각했다.
“4월 12일 이전에 마닐라에서 보자고? 원정에 참가한 병사들 휴가 줬는데 또 데려가야 하겠군.”
“필리핀 총독이 너무 서두르는 게 아닌가 싶어요. 열대용 전투복은 충분한 수량이 준비됐어요.”
다스마리냐스 총독이 보낸 공문은 다방면으로 세밀하게 분석되고 마닐라를 오가는 상인들을 통해 추가적인 정보를 수집했다. 총독이 원하는 것은 역시나 향신료였다. 뉴기니 서쪽, 정향과 육두구가 생산되는 섬들을 가능하면 정복하고, 그게 불가능하더라도 향료제도와 마닐라 사이의 무역로를 개척하는 것이 총독의 최종 목적이었다.
현재는 술루술탄국의 국가사업인 해적 때문에 통상로가 막혀 있었다. 술루술탄국의 해적들은 인도와 아랍, 포르투갈 상선들에게서는 통행료만 적당히 받고 마는데 에스파냐 상선에만 적대적으로 대했다.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싸우면서 쌓인 원한까지 보태져서 둘이 만나기만 하면 죽기 살기로 싸웠다.
“향료제도가 눈앞에 어른거리겠지. 잘하면 원가의 100배에서 1000배의 이익이 난다니까 죽자 살자 달려들 거야. 총독은 통상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술루왕국 해적들을 몰아내고 싶어 해.”
“원정에 참가하면 우리에게 이익이 있나요? 향료제도에는 우리가 손을 안 대기로 했잖아요?”
이번 일본 공격에 국가예산의 절반을 썼다고 혜영은 불만이 많았다. 이번에 또 원정을 나선다니까 혜영은 당장 얻을 이익부터 계산했다.
“우리 심부름을 하는 유구국 상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술루 해적을 없애는 게 좋아. 지금도 에스파냐와 관계가 좋은 편이지만 이번 원정을 통해 확실한 힘의 우위를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호주, 그러니까 멀리 남쪽으로 탐사대를 보낼 때 해적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하지만 명분이 없잖아요.”
“지난번 태극기를 달고 항해하는 브루나이 상선을 술루 해적들이 노략질한 것을 명분으로 삼아야겠어.”
고산국 함대가 팽호도에서 대규모 명나라 해적 집단을 격파한 것은 동남아시아 전체에 전설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필리핀 근해에서 겁도 없이 고산국 상선을 공격하다가 몇 번 호되게 당한 술루 해적들은 그 후부터 고산국이나 유구국 상선을 공격하지 못했다. 그래서 주변 여러 나라의 상선들이 가짜 태극기를 만들어 항해하는 경우가 흔했다.
술루 해적들도 바보는 아니라서 고산국이나 유구국 상선이 명백히 아닌 상선을 철저히 확인한 다음 노략질하곤 했다. 그러나 고산국 입장에서는 허가 없이 태극기를 달고 다닌 범죄를 저지른 외국 상선들을 징치할 권리는 오직 고산국에게만 있으므로, 고산국이 술루 해적을 처단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할 셈이었다. 사실 힘을 바탕으로 한 억지였다.
“포르투갈에서도 이번 원정의 목적을 알지?”
“예. 에스파냐가 향료제도를 정복하더라도 독점하지 않는 조건으로 양해했나 봐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관계는 항상 미묘했다. 대항해시대 이후 전통적인 경쟁자이면서도 현재는 같은 왕을 모시는 다른 국가, 즉 동군연합이었으므로 쉽사리 전투를 벌이지는 못했다.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2세를 포르투갈 국왕으로 받아들인 것에는 에스파냐와의 과도한 경쟁을 완화하려는 포르투갈 귀족 상인들의 욕구가 반영됐었다. 그러나 지금은 네덜란드 독립전쟁에 참가해야 하는 등 득보다 실이 많아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다.
미카는 예전부터 적당한 정보나 무역 이익을 넘기고 포르투갈 상인이나 선원들로부터 정보를 얻고 있었다. 고산국과 마카오 사이를 오가는 상선 한 척에 탄 선원이나 상인들 중에서 정보원을 최소한 둘 이상을 확보해서 관리하고 있었다. 정보원이 없다 해도 마카오를 근거지로 무역 활동을 하는 포르투갈 상인이나 선원들은 고산국에게 우호적이라서 정보 제공을 잘 해주는 편이었다.
“에스파냐는 갤리선을 준비했어. 무풍지대가 걱정되니 범선을 쓰기 어렵겠지. 노예를 노잡이로 쓰는지 확인했어?”
“총독은 과감하게 명나라 사람들을 노잡이로 고용하고 있어요. 지난 몇 십 년 동안 관계가 나빠서 사고가 날지 모르겠어요.”
마닐라에 거주하던 명나라 사람들 일부가 현재는 고산국으로 이주해서 예전에 비해 줄어들었다지만 여전히 많았다. 그리고 에스파냐 사람들과는 서로 으르렁거리면서도 무역할 때나 해적을 소탕할 때는 협조하곤 했다. 지난번 해적이 마닐라를 공격했을 때도 그랬지만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탓에 공동의 적에 대한 공동 대응은 괜찮은 편이었다.
“완전무장한 군대가 같은 배를 타고 이동하는데 설마 돈을 받고 고용된 노잡이들이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겠지.”
“그래도 조금 불안해요.”
레판토 해전 등 유럽 국가들이 오스만투르크와 해전을 벌이는 중에 노예 신분인 기독교도 노잡이들을 해방시켜 같은 편으로 싸우게 한 사례가 있었다. 그러나 발목에 차꼬를 차고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평소에 노잡이에 의한 반란은 거의 일어나기 힘들었다.
그러나 총독의 갤리선에 탄 명나라 노잡이들은 노예가 아닌 고용관계이기 때문에 발목에 차꼬를 채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반란이 일어날 경우 성공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마카오에 거주하는 에스파냐 사람들이 불안하게 생각하고 말렸으나 총독은 노잡이들에게 돈을 주고 정당하게 고용했으니 반란이 일어날 일이 없다고 단정했다.
“도련님! 해병만 이번 원정에 참가합니까? 현지 적응훈련을 하게 5일 이상 여유 시간을 주셔야 합니다.”
계복이 건의해서 해병들을 먼저 바기오로 보내 열대 밀림지대에 대한 적응 훈련을 시키기로 했다. 아무래도 훈련이 전투보다 편할 것 같았다.
이번 원정에서 가장 걱정되는 것은 모기, 즉 말라리아였다. 말라리아 예방약이나 치료약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현대에서도 말라리아 백신은 없었다. 자칫 전투가 아닌 말라리아로 인해 인명피해가 크게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해병에게 긴팔 옷을 입히고 반드시 모기장을 치고 자도록 했다. 그 외에도 모깃불을 피운다거나 노출된 피부에 곤충기피제를 바르는 등 소극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로 했다.
특히 열대용 군복은 말라리아모기를 감안해서 질기면서도 얇고 통풍이 잘 되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열대지방에서 긴팔 옷을 입어야 하는 병사들 입장에서는 미칠 것이다. 체온이 주변 온도보다 낮을 때는 차라리 긴팔 옷을 입는 게 시원하다고 아무리 설명해줘도 소용이 없었다. 아랍 사람이 아니라면 쉽게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기마병 250기 포함. 전선 12척이니까 해병 12개 려로 꽉 채우자. 기관을 장착한 보급선은 진수했지?”
“아직 두 척뿐이에요. 시험항해 중이에요.”
“드디어 풍향을 덜 신경 써도 되겠구나. 진작 만들었었어야 했어.”
기관 2기와 돛대를 달아 기범선이라 할 수 있는 보급선 두 척을 최근에 건조했다. 평소에는 필리핀 북부 바기오나 해남도를 왕복하다가 전시에만 동원되어 보급선 역할을 맡기로 했다.
보급선은 전선보다 적지만 함포 2문을 달아서 자체 방어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선체 디자인이나 선재 같은 세세한 부분에서 전선과 많이 달라서 전투용으로 쓰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었다. 대신에 가격은 확실히 싸서 전선의 3분의 1 이하였다. 전선이란 놈은 적은 수로도 대규모 왜선 함대를 상대로 승리하기 위해 사정없이 돈을 처바른, 이 시대에 지극히 예외적인 함선이었다.
“하지만 승마보병을 활용하려면 아직 범선을 써야 할 걸요?”
“그건 그래. 대형 보급선이 어서 많이 건조되면 좋겠어.”
이번에 일본을 공격하면서 배운 게 많았다. 범선이나 외륜선 같은 수송선들이 한 곳에 모든 말과 병력을 내려놓고 돌아가면 몰라도, 함대에 포함되어 같이 다니면 작전의 자유도가 극도로 제한됐다. 기관을 갖춘 전선이나 보급선으로 함대 전체가 편성되기 전에는 앞으로 대규모 원정을 자제하기로 했다.
“도련님도 이번에 참전하실 겁니까? 웬만하면 궁궐에 계시지 그럽니까?”
“브루나이하고 외교 교섭을 해야 하니까 내가 가야지. 지상전은 계복이 네가 지휘해. 나는 주로 해전이나 정치 교섭을 맡을 테니까.”
“예. 저는 밀림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모기와 싸우고 있을 테니까 그 시간에 도련님은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낚시나 하십시오.”
“그것 참 고맙다.”
이민호가 원정마다 따라다니는 것은 주위 사람들이 보기에 불안했으나 딱히 한 사람을 믿고 맡기기도 어려웠다. 특히 외교 교섭을 맡을 사람이 없었다.
계복은 전투 지휘는 아주 잘하지만 무역에는 완전 젬병이었고 외교 교섭을 맡기기에도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래도 충성심과 능력 면에서 계복만큼 믿음직한 사람은 드물었고, 거의 혜영에 비견됐다.
“감동은 주본을 갖고 북경에 가서 황제에게 왜장 갑옷을 바치도록 하고 감불이 이번 원정에서 기마병을 지휘하게 하자.”
“그게 좋겠습니다.”
황제에게 바칠 주본에는 이번에 일본 오사카 성 외에 해안 지방 여러 곳을 공격했다는 내용을 서술했다. 일을 보고한다는 뜻도 있지만 사무라이 갑옷을 사서 전시하는 취미를 가진 황제에게 갑옷을 파는 문제도 있었다.
그러나 만약 감불을 북경에 보내면 황제를 알현하다가 무슨 실수를 저지를지 몰랐다. 그래서 신중한 감동을 북경에 보내기로 했다. 감동은 무역에도 소질이 있어서 이번이 정식 조공은 아니지만 적당히 교역을 시켰다.
“그런데 정말 시끄럽다.”
유구국의 아라 공주가 거처할 별궁을 짓느라 궁전 안에서 벌써 두 달째 공사를 하고 있었다. 건축 양식은 슈리성 본궁과 비슷한데 규모는 훨씬 컸다. 유구국 사신이나 상인들이 보면서 기뻐할지, 씁쓸해할지 알 수 없었다.
“아라 공주가 적응이 끝나면 무역과 탐사 부문 전체를 맡길 거야. 어려도 능력이 좋고 유구국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얻어내기 위한 결정이니 다들 협조를 잘해주도록 해.”
“그럼 저는요? 앞으로는 주인님의 침대에서 일하면 되나요?”
왕명명은 아직 처녀 주제에 못하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계약관계가 그래서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라 공주가 무역을 총괄할 테니 멍멍이는 그 밑에서 명나라와 안남 무역만 전담해. 대신 앞으로는 외교나 군사 같은 분야에도 깊숙이 관여해야 할 거야. 운남, 사천, 호남, 광동성과 귀주에 사는 소수민족들과 우호관계를 맺는 계획을 알고 있지? 해남도의 옥남과 협조해서 잘 진행해봐. 괜히 명나라 관리들에게 의심 사지 말고 순수하게 교역관계로만 접근하도록 해.”
“예. 명나라가 망했을 때 강남지역을 흡수하기 위한 사전 공작이라고는 절대로 말하지 않을게요.”
왕명명이 엉덩이를 맞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왕명명의 엉덩이는 워낙 찰져서 손바닥으로 때리는 맛이 있었다. 그러나 얼마 전에 치질 걸린 놈을 때렸다가 피를 본 다음부터는 그런 행동이 끔찍하게 여겨졌다.
“명나라를 전복시키기 위한 사전 작업이 아니니까 분명히 구별하도록 해. 나는 명나라를 군사적으로 적대할 생각이 없으니까. 지금도 무역흑자 절반 이상이 명나라한테서 나와. 항상 명나라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자.”
“예. 복건성 기근 이후 명나라 사람들이 주인님을 몹시 존경하고 있어요.”
그러나 상황에 따라 경제적인 수단을 동원해 명나라를 공격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가끔은 이것이 훨씬 치명적일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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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