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61 33. 남국의 바다 =========================================================================
다음 날 전선 12척과 보급선 2척, 탐망선 2척을 포함해 16척으로 구성된 남방 원정함대가 마닐라 항에 도착했다. 함대 전체에서 돛을 안 쓰니 그렇게 빠르고 편할 수가 없었다. 이 시대에 역풍을 받으면서 하루에 500km를 움직일 수 있는 함대는 고산국이 유일했다.
마닐라 항에는 내일 출항을 앞두고 준비 중인 200여 척의 에스파냐 함대가 정박하고 있었다. 적도 인근 무풍지대에 대비한 갤리선 20척을 주력으로 갤리옷과 속도를 중시한 프리깃도 몇 척이 동원돼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외에 노를 젓는 작은 배에도 식량과 물 위주의 보급품을 선적하고 있었다.
기함이 먼저 요새 밖 선착장에 배를 댔다. 다른 전선들도 차례로 부두에 입항해 닻을 내렸다. 에스파냐 선원들이 기꺼이 계류용 밧줄을 잡아 말뚝에 묶어 주었다.
이민호가 호위대와 함께 배에서 내리자 선착장에 미리 마중 나온 총독 일행이 반갑게 환영했다. 수평선에 고산국 깃발이 나부끼는 것을 보고 총독이 관리들을 이끌고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 총독은 여전히 정정했고 탄탄해 보이는 몸집의 중년인 총독 아들과도 처음으로 인사를 나눴다.
“고산국 국왕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성 훌리안의 기사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입니다.”
루이스는 유서 깊은 알칸타라 기사단의 기사였다. 12세기에 무어인들과의 전쟁 중에 설립된 알칸타라 기사단은 15세기 말에 왕립기사단으로 편입됐다.
“반갑습니다. 이번 원정을 아드님이 지휘하시는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폐하! 적은 병력이라면 제가 지휘하겠지만 큰 원정은 아버님이 직접 하십니다. 저는 이번 원정에서 총함장으로서 함대 지휘를 맡았습니다.”
“부친께서는 그 연세에 참으로 정정하십니다.”
총독 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는 올해 들어 74세였다. 그의 아들 루이스는 경력 수십 년차의 직업군인이며 다음 세기의 함대사령관 역할을 하는 총함장을 맡고 있었다.
내일 출항을 앞두고 마닐라에서도 준비를 많이 했다. 출정하는 병력은 순수 에스파냐 군인들만 900명이었고 말레이인, 중국인, 일본인들도 군인이나 선원, 노잡이로 다수 참가했다. 세부에도 병력을 일부 파견해야 해서 원정 중에 마닐라를 지키기 위해 남는 군인은 겨우 300명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민호는 10년 전에 총독을 맡았던 디에고 론키요(Diego Ronquillo)와 변호사 출신 민정장관 페드로 드 로하스(Pedro de Rojas)와도 인사했다. 총독은 임시로 론키요에게 군사를, 민정은 로하스에게 맡기기로 했다. 부총독 보르히아 자작도 이번에 출전하기로 해서 원정 기간 중에는 마닐라를 텅 비우다시피 했다.
“저는 페드로 드 로하스입니다. 원정 기간 동안 임시로 인트라무로스를 지키면서 원정군에 보급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돈 페드로께서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셨군요.”
이민호는 호위대를 이끌고 해자 다리를 건너 산티아고 요새의 정문을 통해 인트라무로스로 들어갔다. 고산국과 무역을 한 이래 마닐라 총독부는 갈레온 무역을 통해 세금도 많이 걷고 총독부가 직접 투자한 상품 교역에서 수익도 많이 얻어서 원래 역사인 1606년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인트라무로스의 성벽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마닐라 외곽 지역에 화재가 발생했는지 무너지거나 시커멓게 탄 집이 수백 채였다. 목조건물에 화재가 나는 것이야 흔한 일이지만 조금 인위적이라는 생각이 이민호에게 들었다. 총독에게 물어보니 인상을 찌푸렸다.
“저 구역에 사는 자들이 명나라 해적들과 반란을 모의하고 있었습니다. 총기를 몰래 들여오는 날에 우리 군대가 덮쳤습니다. 그때 저항하는 자들과 큰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명나라 해적들이 주택가에 불을 지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명나라 해적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까?”
“예. 그들은 시암이나 안남에 본거지를 마련하거나 광저우에서 사는 자들은 상인인 척하면서 멀리 필리핀 남쪽 섬까지 항해해서 노략질을 합니다.”
동남아 바다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던 팽호도 해적들을 고산국이 전멸시켰어도 아직 명나라 국적을 가진 자들로 이뤄진 해적이 많았다. 이들은 상인으로 위장하고 무역을 하다가 기회가 생기면 노략질을 하기도 했다. 명나라 해적들이 몇 번 크게 당한 이후 고산국 상선에는 감히 대들지 못하지만 마닐라 근해에 자주 출몰한다고 했다.
마닐라는 일본인들이 기독교 탄압을 피해 고산국으로 이민을 갈 때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다. 지난 겨울에 북풍을 타고 남하한 작은 배 100여 척에 2천여 명이 타고 마닐라에 도착한 다음, 산토 토마스에 들르는 정기 여객선 편을 타고 아리수 강 하구에 도착해서 입국 수속을 밟았다.
이민호는 이런 식으로 스스로 선택해서 오는 자들을 환영했다. 고산국에 정착한 그들은 열심히 일하고 일부는 군에 입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루손 섬 북부 지방 사람들은 위에서 선택한 대로 따라왔기에 자발성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밤에 총독 관저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했다. 같은 테이블에 총독과 아들 내외 외에도 총독의 손녀 비올레타가 앉았다.
“전하! 혹시 주상아 공주님은 안 오셨나요? 감사 인사를 꼭 전해드리고 싶어요.”
“예. 비올레타 양. 대신 주상아 공주가 편지를 보냈소.”
“꺄아~ 감사해요.”
비올레타가 주상아 공주의 편지를 받고 몹시 기뻐했다. 그리고 편지를 읽는 내내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이민호는 혹시 여자들끼리 연애하나 싶었다.
“이 귀여운 분은 혹시 따님이신가요?”
“내 아내요. 유구국의 아라 공주요.”
비올레타가 벌떡 일어나 아라 공주에게 고개를 숙였다. 선착장에 나오지 않은 비올레타는 그 자리에서 인사를 하지 못해 아라 공주를 몰라보았다.
“죄송해요. 용서해주세요.”
“괜찮아요, 비올레타 양. 어서 앉으세요. 주상아 공주님께 비올레타 양이 훌륭한 분이라고 자주 들었어요. 빈민 구제 사업은 잘 되세요?”
아라 공주가 묻는 질문마다 비올레타가 친절히 설명했다. 세 사람은 계속 중국어로 대화했다.
총독과 그 아들 내외는 유창하게 중국어를 구사하는 손녀를 자랑스러워했다. 총독 가족은 고산국에서 중국어를 쓴다고 잘못 아는 것 같았지만, 이민호는 그냥 넘어갔다.
“저번에 고산국 국왕전하께서 하사하신 금괴로 고아원을 세웠어요. 부모를 잃은 아기들을 위해 유모 여럿을 구하고 부족하면 염소젖으로 키우고 있어요. 어린 아이들도 많답니다. 그리고 빈민가에서 매일 무료로 빵을 나눠주고 있어요.”
“운영 자금이 부족하지는 않아요?”
“주상아 공주님이 매달 일정 금액을 기부해주신답니다. 아름다운 분이 마음씨마저 정말 천사 같은 분이세요.”
“그럼 저도 기부대열에 동참하겠어요.”
“어머! 고맙지만 주상아 공주님이 보내주신 것만으로도 모자라지 않아요, 공주님.”
“큰돈은 아니에요. 아이들에게 통닭이라도 사먹이세요.”
이민호가 보석을 남에게 주지 말라고 했으므로 아라 공주는 진주팔찌와 금발찌를 빼서 비올레타에게 주었다. 비올레타가 몇 번 사양하다가 결국 아라 공주에게 정중히 감사를 표시하며 받았다.
예쁜 여자들이 예쁜 짓을 하니까 더 예뻐 보였다. 이민호도 빠질 수 없었다.
“나도 기부에 동참하겠소.”
이민호가 바기오에서 생산한 금괴 하나를 식탁 밑으로 해서 비올레타에게 건넸다. 비올레타가 얼굴을 빨갛게 붉히더니 남들 몰래 얼른 가슴골에 집어넣었다. 가슴 사이에 금괴가 몇 개나 들어갈지 궁금했으나 총독 아들 부부가 말을 거는 바람에 더 이상 주지 못했다. 대화는 재미있게 진행됐다.
연회가 끝날 무렵 총독으로부터 작전 계획을 문서로 전달받았다. 이민호는 그것을 스페인어 통역에게 전달하고 아라 공주 등과 함께 총독 관저 별관으로 돌아왔다. 기분이 좋아진 아라 공주가 이민호의 팔에 매달리며 종알거렸다.
“전하! 비올레타 양은 정말 훌륭한 분인 것 같아요. 시집 안 간 분이 고아원을 운영하는 경우는 처음 봤어요.”
“아라 공주도 비올레타 양처럼 훌륭하게 자랄 것으로 믿소.”
“가슴이 자란다는 말씀이지요, 전하? 연회 내내 비올레타 양의 가슴에서 눈을 떼지 못하시더군요.”
“험! 험! 착한 마음씨 말이오.”
그날 밤 총독 관저 별관에서 잤다. 모기장을 치고 모기향을 여러 개 피운 탓에 방에 연기가 가득했다. 이민호는 밤에 기침을 하다가 잠이 몇 번이나 깨었다.
밖에서 지키는 호위들은 긴팔 옷을 입고 얼굴과 목까지 모두 가린 복장을 해서 마치 도둑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 해뜨기 전에 연합함대가 출항했다. 전선과 갤리선은 일찌감치 마닐라 만 입구에 도착했으나 범선들이 빠져 나오는데 한참 걸렸다. 그나마 프리깃은 역풍에도 강해서 다행이었다.
에스파냐군 전투 병력은 총독을 비롯해 대부분 갤리선에 탔다. 명나라 국적을 가진 자들이 고용돼 열심히 노를 저었다. 이민호는 노잡이들의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고 여겼으나, 총독이 걱정 없다고 해서 신경을 끊었다.
이번 원정에서 가장 중요한 공격 목표는 술루술탄국의 왕성이 위치한 홀로 섬이었다. 마닐라에서 정 남향으로 1000km가 넘는 곳에 위치한 섬이었다. 그러나 해류와 바람 방향을 감안해 연합함대는 팔라완부터 공격하기로 했다. 그 다음은 브루나이 북쪽 사바 지역, 그 다음 북동쪽으로 항해해 홀로 섬을 치기로 했다.
마닐라에서 출항하고 사흘째 되는 날 500km 길이가 넘는 길쭉하게 생긴 섬인 팔라완 중부에 도달했다. 주변에 작은 섬들이 많아 탐망선 두 척을 앞세워 수심을 재게 하면서 함대가 전진했다. 작은 돛단배들이 들락거리는 작은 항구가 목표였다. 에스파냐 탐험가들이 붙인 이름은 스페인어로 푸에르토 프린세사, 공주의 항구였다.
태극기를 깃대에 게양한 전선 12척이 나타나자 배에 탄 해적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기함을 비롯한 전선에 탑재된 함포마다 수병들이 배치돼 있었다.
“쏴!”
- 쿠웅!
오늘도 평화롭게 지나가는 배를 약탈하려고 출항을 준비하던 해적들이 날벼락을 맞았다. 급히 항구를 떠나 도주하려던 배가 해적들과 함께 바다에 가라앉고 해안에서 우왕좌왕하던 해적들도 포탄의 비에 찢겨 나갔다. 화승총을 들고 전투 배치되던 해적들도 쏟아지는 포탄에 맥을 추지 못하고 숲으로 도망갔다.
“상륙!”
“단정 내려!”
전선 12척이 해안 가까이 접근했다. 이민호가 지시하자 함장의 구령에 따라 각 전선마다 해병이 가득 탄 단정 4척이 일제히 수면에 내려갔다. 그리고 전선의 옆문이 열리면서 10척에 나눠 탄 기마병 250명이 바닷물에 뛰어들었다. 해안에 오른 기마병들이 키 작은 나무들이 서 있는 언덕을 넘는 사이, 단정을 타고 상륙을 마친 해병들도 동서로 나뉜 다음 일제히 북상했다.
그 후에 갤리선이 해안에 도착해 에스파냐 군이 상륙했다. 에스파냐 군은 머스켓과 창칼 등으로 무장하고 빠르게 숲으로 들어갔다. 어찌 된 셈인지 할버드를 든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이민호는 말을 타고 호위대와 함께 천천히 전진했다. 중앙에 에스파냐 원정군, 좌우에 해병 6개 려 750명씩 전진했다. 기마병들은 도주하는 해적들을 해치우면서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목표인 푸에르토 프린세사 성채에서 해적들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북쪽에서 틀어막았다.
호위대와 함께 이민호가 2km쯤 북상하자 해자와 목책을 두른 작은 성채가 하나 나왔다. 해적들은 이곳에서 결사 방어를 위해 창칼과 화승총을 들고 목책에 올라서고 있었다.
“전하! 비록 나무성채에 불과하지만 적이 많습니다. 위험하니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고맙소. 총독의 말씀에 따라 나는 여기에 있겠소.”
“감사합니다. 적이 해적이라 하지만 화승총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공격하는 중에 희생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선봉은 저희 에스파냐 군이 맡겠습니다.”
“그러시구려.”
갑옷을 입은 노인 총독이 막 공격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나무성채 쪽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움찔하던 총독은 나무성채에서 연속 포탄이 터지는 것을 보면서 입을 벌렸다.
목책에 포탄이 명중할 때마다 말뚝 중간이 부러지거나 일렬로 세워둔 통나무 수십 개씩이 우르르 무너졌다. 지상 목표에 명중해 폭발하는 파열탄의 위력을 처음 본 총독은 얼이 나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