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64 33. 남국의 바다 =========================================================================
창을 들고 술탄 양 옆에 선 호위병들은 민희와 민영, 그리고 총독의 호위병들이 흘리는 기세에 눌려 바짝 긴장했다. 이민호와 필리핀 총독은 의자에 앉아 술탄을 대면하고 있었다.
옥좌를 놓기에 충분한 높은 단을 쌓고, 그 위에 의자 형식의 옥좌가 아닌 두터운 방석을 깔고 술탄이 앉아 있었다. 팔걸이 베개에 팔꿈치를 얹고 눕다시피 앉은 술탄이 나른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해적은 정말 골치 아픈 놈들이오. 전에 에스파냐와 싸우다가 함대를 잃지만 않았다면 아무 것도 아닐 놈들이지만, 지금은 어느새 내 왕국의 목줄을 쥐고 있었소.”
“앞으로는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고귀한 술탄이시여.”
100여 년 전에 상업 국가로 급성장한 브루나이는 지금도 국제무역이 가장 큰 수입원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술루해적선들이 궁성 앞바다를 돌아다니면서 상선과 어선을 약탈하고 있어서 아주 죽을 맛이었다. 최근 해적들의 노략질이 심해 브루나이 수도인 코타 바투 항구로 향하는 상선들의 숫자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특히 가장 중요한 거래처인 말래카를 비롯해 시암과 리고르 상선들의 방문이 급감해 무역량이 대폭 줄어들었다. 만약 유구국 상선이 꾸준히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브루나이는 근년에 망할 수도 있었다.
해적을 토벌할 군사력이 부족한 브루나이 술탄은 심각하게 수도를 남쪽으로 옮길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다만 브루나이의 황금시대를 연 5대 술탄 볼키아 이래 궁성과 항구 주변을 청동제 대포로 도배해놔서 해적으로부터 만 깊숙이 위치한 항구와 궁성만은 무사히 지킬 수 있었다. 브루나이 술탄 입장에서는 대포를 팔아준 포르투갈 상인들이 은인이었다.
“요구할 게 있으면 말씀해보시오. 웬만하면 들어드리겠소. 이번에 해적들로부터 탈환한 팔라완과 조만간 탈환할 브루나이 북부 지방을 할양하라고 요구해도 허락하겠소. 특히 팔라완은 고산국이나 에스파냐가 반드시 영유하면서 수비 책임을 져 주었으면 좋겠소.”
브루나이 술탄은 다른 세력들이 그렇듯이 필리핀 총독이 영토를 요구할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민호와 총독이 자주 토론했다시피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민호가 중국어로 건의하고, 통역이 술탄에게 귓속말로 전했다.
“고귀한 술탄이시여! 고산국과 에스파냐가 술루해적들의 중요한 거점 두 곳을 파괴했다지만 두 나라가 계속해서 병력을 파견해 두 지역을 지킬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브루나이에서도 이번 원정에 도움이 되는 군사행동을 해주십시오. 병사를 동원해 팔라완과 제셀턴을 지켜주실 것을 술탄께 정식으로 요청합니다. 두 지역은 원래 브루나이의 영토 아니겠습니까?”
“영토를 되찾아서 돌려준다니 정말 고맙소. 사실 루손 섬 전체와 술루제도, 민다나오도 얼마 전까지 모두 브루나이의 영토였지요. 그러나 에스파냐에게 마닐라를 빼앗기고 그 직후 술루술탄국이 독립하면서 브루나이가 이 모양이 되었소.”
술탄이 예민한 문제를 건드리자 총독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다들 서로 눈치를 살피느라 잠시 말이 없었다.
팔라완은 누구도 원하지 않았으며, 다만 해적에게 넘어가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할 뜨거운 감자였다. 술탄이 표정을 묘하게 일그러뜨리더니 슬며시 웃었다.
“아무래도 내 생각에는 팔라완을 가장 필요로 하는 나라가 팔라완 수비를 맡는 게 합당할 것 같소.”
“그럼 팔라완에 가까운 브루나이나 마닐라겠군요.”
이민호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미소 지었다. 그러나 중년을 넘어 노년에 접어 들어가는 노회한 술탄이 씩 웃었다.
“외륜선은 자주 항구에 들러야 하는 약점이 있다고 알고 있소. 그 외륜선을 유구국에서 많이 운영하고 있지요. 유구국의 실질적 종주국이 어느 나라인지 나는 잘 모르겠소.”
“끄응!”
이민호가 크게 낙담했다. 술탄의 말은 고산국이 팔라완을 지키라는 소리였다. 유구국에서 운영하는 상선 수십 척 중에 고산국에서 넘겨준 소형과 중형 외륜선이 여러 척 있었다. 주로 고산국의 의뢰를 받아 중개무역과 티크목 등 운송에 사용되고 있었다.
고산국에서 되도록 외륜선을 안 쓰려고 노력하고,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가 충분한 기술이 있음에도 외륜선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이런 종류의 배는 매일같이 보급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물레방아를 돌리는 소가 먹는 여물의 부피가 장난 아니었고 보통은 매일, 못해도 사흘에 한 번은 항구에 들러서 쇠죽을 쑤어 먹여야 했다. 화물 적재량이 줄어든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같은 이유로 외륜선을 이용할 경우 연안에서 벗어나 장거리 항해를 하기 힘들다는 것도 결정적인 단점이었다. 그래서 유구국은 소를 줄이고 돛을 개량해서 속도는 느려도 화물을 충분히 실을 공간을 마련해 해류와 바람을 이용하기 어려운 남방 무역에 이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항해 중간에 정박할 포구만 확보할 수 있다면 사람이 노를 젓는 갤리선보다는 차라리 외륜선이 나았다.
“어떻소, 아라 공주?”
“팔라완을 반드시 고산국이 확보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중간 거점인 항구를 팔라완에 보유한다면 확실히 유구국 상선들이 안전해져요. 어차피 누군가는 팔라완을 지켜야 해요.”
이민호 옆자리에 앉은 아라 공주가 그렇게 충고했다. 병력이 적은데 팔라완을 지킬 생각을 하니 이민호는 조금 답답해졌다.
팔라완은 고산국보다는 유구국에 더 필요했다. 그러나 유구국도 병력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고, 유구국에 여러 가지 일을 시키는 것은 고산국이었다. 결국 고산국이 맡아야 했다. 이민호는 루손 섬 북부에서 용병을 모아 팔라완에 배치할까 잠시 고민했다.
“어쩔 수 없군요. 고산국에서 병사들을 파견해 해적 거점이었던 푸에르토 프린세사를 지키겠습니다. 아무런 경제적 이익이 없는 섬과 항구를 지키기 위해 많은 비용이 들어갈 것입니다.”
“그건 그렇소.”
술탄이 동의했다. 물론 팔라완에서 가까운 남사군도, 즉 스프래틀리 군도는 원유매장량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20세기 이후 동남아 여러 나라가 각축을 벌이는 장소였다. 그러나 지금은 쓸모없는 바위섬과 사구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술탄께 브루나이의 영토 일부를 추가적으로 양도해주시길 요청합니다. 수도에서 10레구아 떨어진 서쪽 해안선 지역이며, 면적은 넓지 않아도 됩니다.”
영토를 받아들여주는 대신 추가로 영토를 내놓으라는 이상한 요구였지만 여기서는 먹혀 들어갔다. 이민호는 팔라완에 병력을 파견할 바에는 이 기회에 아예 브루나이 유전을 갖고 싶었다.
“흐음. 어딘지 몰라도 내드리겠소. 만약 해적이 쳐들어올 경우 그 병사들이 내 궁성을 지켜준다는 조건 하에서 허락하겠소. 요즘 브루나이가 너무 약해져서 곤란하던 참이오. 정확한 위치가 어디요?”
“저는 세리아를 원합니다.”
물론 세리아가 이탈리아 축구 세리에 A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세리아는 브루나이 수도 코타 바투에서 남서쪽으로 50km 정도 떨어진 해안지대로서 원유가 산출되는 유전지대였다. 이민호가 기억하기로 현대 브루나이의 지상과 해저 유전에서 확인된 원유 매장량만 14억 배럴이었다.
브루나이 섬 북부 세리아와 라사우에 육상 유전이 있고 나머지 7개의 유전과 천연가스전은 해안에서 가까운 해저에서 20세기에 발견됐다. 세리아 육상 유전의 원유매장량은 적으나 채굴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 시대에는 아직 석유가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 냄새 나는 검은 물이 나오는 땅 말이오? 가난한 백성들이 등잔불 연료로 쓰기도 하던데 물고기 기름을 써도 되니까 상관없겠지. 대신 병력은 조금 많이 주둔시켜 주시오. 유사시에 궁성에서 구원을 요청하면 도와주길 바라오.”
술탄의 말을 들어보니 지표면 가까운 곳에 스며 나오는 원유가 있는 것 같았다. 유전 탐사기술과 원유 채굴기술이 부족한 이민호 입장에서는 무척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술탄 마음대로 영토를 주고받다가 어떻게 될지 불안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고산국도 외세인데 술탄께서 마음대로 영토를 할양해줘도 괜찮겠습니까?”
“대신에 고산국왕은 사바 지역을 우리에게 돌려줄 것 아니오? 혹시 국왕은 사바 지역을 갖고 싶은 욕심이 나오?”
“아닙니다! 만약의 경우 빈 땅이라도 너무 넓어서 고산국이 감당을 못합니다.”
얼마 안 되는 술루해적들이 차지한 사바 지역이 고산국 전체 면적보다 두 배 이상 넓었다. 이민호는 새삼 고산국이 좁다고 느껴졌다.
“총독은 어때요?”
“전혀 없습니다. 그 대신 술루해적을 퇴치한 다음 술루제도는 필리핀 영토로 집어넣겠습니다.”
“그 얄미운 술루해적들만 없애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좋소. 고산국왕! 세리아에 구체적으로 얼마나 파병할 계획이오?”
팔라완에 이어 세리아에 고정된 파견 병력이 필요했다. 방어를 위해 작은 요새를 건설하면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부족한 병력을 나눠 배치하려니 골머리가 아팠다.
“세리아가 넓은 해안지역이므로 승마보병, 그러니까 기마병을 125명 정도 상시 배치하겠습니다. 그 지역에 요새를 건설하여 대포를 배치해 해적이나 반란군을 격퇴하겠습니다.”
“요새라면, 고산국 수도의 아리수 하구에 건설된 요새와 등대가 상인들에게 유명하더군요. 내 궁성 앞에도 요새를 하나 지어주겠소? 인력과 자금은 걱정 마시고 설계와 감리만 해주시오.”
“좋습니다. 장인들을 파견해드리지요.”
파병 장병들과 장인들의 임금, 그리고 식량 보급은 브루나이 술탄이 책임지고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생산보다 수송이 더 어려운 이 시대에 식량처럼 신선도가 금방 떨어지고 부피가 큰 물품은 현지에서 해결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웬만한 문제가 다 합의되자 술탄의 얼굴에 장난기가 번졌다.
“총독! 에스파냐 군대가 코타 바투를 72일이나 점령하고 있었지만 끝내 궁성의 보물창고는 찾지 못했지요. 겨우 약탈해간 것이 국왕의 황금 침대와 황금 욕조뿐이었소. 큭큭! 그래서 브루나이 왕실에 아직 자금 여유가 충분한 편이오. 어때요, 총독? 다시 궁성을 점령해서 보물찾기 놀이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오?”
“보물을 얻을 욕심 때문에 우호국을 망가뜨리는 것은 정치가로서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전쟁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긴 하나, 15년 전에 코타 바투를 침략해서 저지른 전쟁범죄 행위를 술탄께 사과드리겠습니다.”
“에스파냐 총독이 사과하시다니, 참 별일이오.”
에스파냐는 민다나오와 술루제도, 마닐라를 두고 1565년부터 브루나이와 치열하게 해상에서 싸웠다. 에스파냐가 1571년에 마닐라를 정복하고 나서 브루나이가 여러 번 함대를 파견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오히려 술루제도와 민다나오까지 빼앗겼다.
1578년 4월에는 에스파냐가 병력 400과 필리핀 원주민 1500명, 술탄 계승문제로 다투던 브루나이 귀족 2명이 이끄는 반란군 수백 명 등과 함께 브루나이 수도 코타 바투를 두 달 넘게 점령했다. 그러나 콜레라와 이질 같은 돌림병 때문에 큰 인명피해를 입은 에스파냐 원정군은 브루나이 점령을 포기하고 마닐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힘의 우열이 결판난 전쟁을 끝내기 위한 브루나이와 에스파냐의 협정은 우여곡절 끝에 타결됐다. 마닐라를 포함한 루손 섬은 에스파냐에게 완전히 넘어갔고 민다나오에 대한 브루나이의 권리도 잃었다. 브루나이의 속국이었던 술루술탄국은 독립을 되찾았다.
이후 술루술탄국이 해적을 동원해 오히려 브루나이에 역공을 가해왔다. 브루나이 영토였던 팔라완과 브루나이 북부 사바 지역을 빼앗아간 것이다. 이 정도로 그쳤다면 좋았을 텐데 술루술탄국은 주변 지역에 해적을 파견해 아주 초토화시켰다.
향료제도로 진출할 예정이었던 에스파냐하고도 충돌이 잦아지자 필리핀 총독은 정벌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마닐라에서 향료제도로 가는 중간 해역을 술루술탄국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