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65 33. 남국의 바다 =========================================================================
그러나 브루나이가 점점 쇠퇴한 것은 영토가 축소된 때문만은 아니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동남아시아로 진입함으로써 동남아시아의 전통적인 교역 방식을 무너뜨려 경제적 피해가 누적된 탓이 더 컸다.
유럽 세력이 들어오기 전에는 많은 상인들이 향신료 무역에 참여했다. 옛날에는 브루나이를 비롯한 여러 지역 상인들이 향료제도에서 말래카나 인도 지역으로 상품을 옮기고, 이것이 아랍과 오스만제국을 거쳐 이탈리아로 향한 다음 전 유럽으로 분배되었다. 그러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상선들이 향료제도에서 대량 구입한 향신료를 바로 유럽으로 가져가 판매하면서 중간 상인들이라 할 수 있는 여러 지역의 중개무역이 붕괴되어 버렸다.
이런 현상은 점점 힘을 잃어가는 동남아시아의 다른 무역왕국들에서도 쉽게 확인되었다. 유럽 상선들 때문에 여러 무역항에서 운송업과 향료 중개무역 비중이 낮아지면서 상선의 숫자도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향신료와 도자기 등을 유럽에 가져가기만 하면 수십 배의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적극적으로 무역활동을 확대해나갔다. 이것은 무역왕국들의 경제적 기반인 기존 무역구조를 완전히 파괴했다. 또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이따금 군사를 동원해 이곳저곳 정벌에 나섬으로써 기존 세력의 정치적 기반까지 파괴했다.
특히 브루나이의 경우 종전협정 조문 중에 브루나이 영토 내에서 에스파냐 신부가 기독교를 전도하도록 허락한 것도 치명적이었다. 이슬람 문화와 무슬림들의 보호자를 자임하던 술탄의 권위가 이 협정 때문에 땅에 떨어졌다. 브루나이 곳곳에서 귀족 또는 그 동안 억눌려 지내던 다른 인종의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켜 술탄은 반란을 막기도 벅찼다.
“고산국 국왕은 어떤 종교를 신봉하시오? 국왕이 대명제국의 영하와 고산국 수도에 모스크를 건립하도록 도와주신 이야기로 무슬림들이 국왕을 무척 좋게 보고 있소. 하지만 국왕이 무슬림은 아니라고 들었소.”
술탄이 이슬람 왕국의 수장이라 하나 이민호가 다른 종교를 믿는다고 말해도 불이익을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필리핀 총독도 로마 가톨릭과 신부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술탄도 종교 문제에서 그 정도 아량은 있었다.
무슬림들에게 로마 가톨릭은 낡은 종교지만 같은 신을 모신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도들에게 어느 정도 호의를 갖고 있었다. 일부 이슬람 지역은 십자군 전쟁에 오래도록 시달리면서 감정이 안 좋았으나 드넓은 이슬람 국가들의 영역에서 극히 일부에 국한된 문제였다.
그러나 만약 이민호가 믿는 종교가 없다거나, 다신교를 믿는다고 하면 이야기가 좀 달라졌다. 자칫 술탄에게 비문명인이나 야만인 취급을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민호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따로 믿는 종교가 없던 이민호는 빠르게 머리를 굴린 다음 해답을 내놓았다.
“저도 유일신을 믿습니다. 제가 믿는 종교는 약자로 FSM이라고 합니다. 구약성서도 제가 믿는 종교의 경전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FSM은 플라잉 스파게티 괴물교의 약자였다. 몇몇 할 일 없는 사람들이 FSM을 설립한 것은 종교를 조롱하고 비꼬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으나 이민호는 종교를 적대할 마음은 없었다.
“오! 그럼 로마 가톨릭처럼 이슬람과 형제 종교였구려. 그럼 안심하고 내 여동생과 딸, 손녀들을 국왕에게 소개시켜주겠소. 마음에 들면 데려가시오.”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지금도 너무 많아서요.”
이민호가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했다. 루손 섬 북부지방의 라자와 술탄들이 딸이나 손녀를 바치겠다고 했을 때도 모두 사양했었다. 주는 대로 받으면 고산국 궁궐이 어린 소녀들로 가득 찰 것이다. 왕립여학교는 여진족과 아이누족 아이들만으로도 충분히 차고 넘쳤다.
“딱히 누군가를 선택하지 않아도 괜찮소. 이 기회에 처녀들이 미모 자랑이라도 할 기회를 주는 것이오. 일종의 축제 같은 행사라서 공주들이 아마 국왕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다른 경쟁자들을 이기려는 마음이 강할 거요.”
“그렇군요.”
외교 교섭이 일단락되자 궁전에서 연회가 열렸다. 50대 술탄의 여동생이라는 처녀와 열두 살부터 성인이 다 된 딸과 손녀까지 나와서 이민호와 총독에게 인사했다. 이민호는 고모할머니가 손녀보다 어릴 수 있다는 것을 여기서 처음 알게 됐다.
늘씬하고 풍염한 무희들이 외국 손님들을 위해 배꼽춤을 추었다. 시녀가 아닌 공주들만으로 가무단을 조직할 수 있을 정도로 많았으나, 신분이 높은 공주들은 피부를 함부로 드러내지 않았다.
“국왕은 마음에 드는 공주를 고르시오. 네 명까지는 괜찮소.”
연회 중에 이민호는 술탄 옆 자리에 앉았다. 아라 공주가 이민호 옆에 바짝 붙어 있고, 민희와 민영은 뒤에 서 있었다. 반대쪽에 앉은 다스마리냐스 총독은 부관과 뭔가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고귀한 술탄이시여! 공주님들이 다들 미인이긴 하지만 저는 이미 책임져야 할 아내가 많습니다.”
“국왕이 되시면 더욱 많은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오. 힘을 가진 자의 의무 비슷한 것이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나라끼리 혈연으로 연결되면서 우호를 다지는 것이니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없소.”
“그렇다면 한 사람만...... 그래도 더 이상 여자를 늘리고 싶지 않습니다.”
이민호는 미모 수준이 주상아 공주와 거의 맞먹는 아리따운 공주를 선택하려 했으나, 옆에서 아라 공주가 째려보는 바람에 찔끔해서 포기했다. 결국 한 명도 선택하지 않은 이민호를 술탄이 대놓고 비웃었다.
“고산국왕은 전쟁터의 사자로 이름 높던데 여자에게는 의외로 약하군요. 심각하게 여길 필요가 전혀 없다고 하지 않소? 그리고 아라 공주는 현명한 분으로 이름이 높지만 역시 여자인 것 같소.”
“사랑하는 남편을 지키는 일입니다, 고귀한 술탄이시여!”
이 자리에 모인 술탄과 총독, 이민호와 아라 공주 중에서 아라 공주가 가장 큰 힘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아라 공주! 그런 식으로 투기를 부리면 남자들이 싫어한다오. 국왕에게는 왕실의 자손을 번영시켜야 할 의무가 있소. 보아 하니 국왕이 어리신 공주의 몸을 아직도 지켜주고 있는 것 같으니, 공주도 국왕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오.”
“명심하겠습니다, 고귀한 술탄이시여.”
웬 일로 아라 공주가 술탄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말레이어로 대화하느라 이민호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들었다. 브루나이 사람들 중 말레이 계통이 다수라서 말레이어를 쓰지만 다른 지역 말레이어 사용자와 서로 대화가 통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형이 심했다.
연회가 끝나고 궁전에서 나오면서 총독이 이민호에게 충고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반복했지만 그때마다 이민호가 심각히 충고를 받아들였다.
“전하! 콜레라와 이질을 조심하십시오. 1578년에 에스파냐 원정군이 브루나이의 수도를 점령한 동안 술탄은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72일 동안이나 코타 바투를 점령하고도 술탄에게서 큰 이익을 보장받지 못하고 물러선 것은 콜레라와 설사병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물은 반드시 끓여 먹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설사와 탈수증 증세를 보이는 병사 세 명이 발생해 병원선에 따로 격리시켰습니다.”
지지리도 말 안 듣는 인간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원정 출발 전 훈련할 때 그렇게 강조했어도 덥다고 시원한 개울물을 마신 병사들 셋이 물똥을 싸면서 병원선에 드러누웠다. 격리된 병실에서 하루에 수십 번씩 설사를 하면서 탈수증세로 비쩍 마른 병사들에 대한 소문이 퍼진 덕택에 이질은 더 이상 번지지 않았다.
“열대지방은 더위 빼고는 모든 것이 풍요로워 보이지만 사실은 무척 무서운 곳입니다. 국왕전하께서는 특히 말라리아도 조심해야 합니다. 에스파냐 병사들이 괜히 이 무더위에 저렇게 두꺼운 옷을 입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고산국 병사들에게도 긴 팔 옷을 입혔습니다. 모기를 쫓는 모기향을 나눠드릴까요?”
“저희 에스파냐 병사들은 모기를 쫓는 다른 약품을 피부에 바르고 있습니다.”
“혹시 그게 뭔가요, 총독?”
“후후! 비밀입니다. 전하께 나눠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러나 남미 대륙에서 나는 나무껍질에서 나온 수액은 아닙니다.”
결국 에스파냐도 포르투갈처럼 고산국의 협력자인 동시에 경쟁자였다. 그리고 이민호가 예국을 통해 다른 나라에서 말라리아 치료제를 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총독도 들어서 아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모기 퇴치제와 말라리아 치료제는 전혀 다른 약품이었다.
밤에 브루나이 군대가 기습을 가할 수도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의전 절차에 따라 궁전에서 하루 묵기로 결정했다. 호위대뿐만 아니라 기마병 일부까지 이민호가 묵는 별궁을 호위했다.
넓은 침실에 모기향을 잔뜩 피우고 잘 준비를 하는데 손님들이 방문했다. 흰 신부 복장을 한 브루나이 공주와 시녀들 네 명이었다.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었는지 아라 공주가 이들을 이민호에게 안내했다. 이런 상황을 자주 접해도 별로 놀라지도 않은 이민호가 이들과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그러니까 당신이 술탄의 여동생이란 말이오?”
“예. 이름은 하나라고 합니다. 행복이나 천국의 기쁨이란 뜻입니다. 에, 제가 중국어가 서투르더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잘하고 있소. 나도 사실 중국어는 서투른 편이오.”
하나 공주는 이민호가 연회에서 신부로 지목할 뻔한 여자였다. 현대인 취향이 강한 이민호가 보기에 하나 공주는 연회에 참가했던 30여 명에 달하는 시집 안 간 공주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미인으로 분류할 만했다. 눈치가 빠른 술탄과 아라 공주가 이민호의 눈길이 닿는 공주를 눈 여겨 보아둔 모양이었다.
하나 공주가 입은 결혼 예복은 신부가 입는 하얀 복장이 분명히 맞는데 금실로 자수가 된 화려한 복장이라 특이했다. 자세히 살피니 금실이 아니라 얇은 금판을 비단에 붙인 것이었다. 개방적인 이슬람 국가답게 머리에는 간소한 히잡을 둘렀다.
“저를 따라오지 않아도 됩니다. 돌아가도 좋소.”
“제가 원해서 왔습니다. 국왕전하! 제발 저를 받아들여주십시오. 저는 하필 술탄의 딸이나 손녀가 아닌 여동생입니다. 제가 궁성에 남아있으면 사촌 오빠들에 의해 반란이 그치지 않고 아직 어린 왕자들의 목숨이 계속 위태롭게 됩니다.”
역시나 브루나이에서는 술탄 계승전쟁이 아직도 암암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술탄의 적법한 계승권자는 술탄의 손자들인데 아직 다들 어려서 장남이 세자 책봉도 못 받았다.
만약 왕자들이 성장해 술탄의 혈통이 끊이지 않는다 해도 술탄의 여동생인 하나 공주를 아내로 얻은 귀족이 다음 대 술탄을 계승할 동등한 권리를 획득하게 된다고 아라 공주에게 들었다. 그리고 이민호가 정통 무슬림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 공주가 시집가는 순간 공주로 인한 남편의 술탄 계승권도 사라진다. 이슬람 율법에 말레이 고유의 재산상속 관습이 섞여 이상한 상황이 연출되어 버렸다.
만약 공주가 이 나라에서 사라지면 왕자들은 보다 확고한 계승권이 생기므로 조금 더 안전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술탄도 그 상황을 알고 있었으나 차마 자기 혈육을 쳐내지는 못했다. 대신 이 기회에 공주를 외국으로 시집보내려고 했고, 이민호는 아주 적당한 사윗감이었다.
“공주의 상황은 잘 모르겠으나 나는 남편의 의무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무능력한 남자요.”
“예. 국왕전하께서 바쁘시다고 아라 공주님에게 자세히 들었습니다. 하오나 제 백성들이 내란에 휘말리지 않도록 저를 이 나라에서 데려가 주시기 간청합니다.”
“하나 공주는 사회지도층으로서 백성을 위해 스스로 희생을 하는 훌륭한 분이군요. 하지만 나는 자선사업을 하는 사람이 아니오. 공주는 어떤 능력을 갖고 있소?”
“아라 공주님보다는 못하지만 상거래를 배우고 몇 가지 언어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황금을 녹여 여러 가지 장신구를 만드는 법을 압니다.”
“좋소. 하나 공주를 고산국으로 데려가겠소. 밤이 늦었으니 이만 쉬시오.”
긴장이 풀린 공주가 탈진해서 쓰러졌다. 이민호가 하나 공주를 안아 침대에 뉘였는데 자는 중에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십 년 동안 시달린 악몽에서 빠져 나왔으니 후련할 것 같았다.
“필리핀에서는 간신히 모면했는데 결국 브루나이에서 신부가 더 생기고 말았소.”
“아름답고 능력 있고 좋은 여성이에요. 엉덩이가 커서 애도 잘 낳겠어요.”
아라 공주가 마치 시골 할머니처럼 말해서 이민호가 속으로 한참 웃었다. 아라 공주는 질투 반, 새로운 친구에 대한 기대 반으로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늦는 게 습관화된 듯합니다. 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