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67 33. 남국의 바다 =========================================================================
- 쾅!
기함 함수 함포가 오늘 처음으로 불을 뿜었다. 망루 꼭대기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파편을 뒤집어쓴 해적 초병 서너 명이 땅으로 떨어졌다. 기우뚱거리던 망루도 결국 옆으로 쓰러졌다.
노잡이들이 죽어라 노를 저어 에스파냐 갤리선들이 만 안으로 들어갔다. 고산국 전선들도 좁은 입구를 지나 만으로 돌입했다.
폭이 2km 정도 되는 입구를 지나치자 만 안쪽은 자루 모양으로 넓은 호수 같은 잔잔한 바다로 변했다. 북쪽 해안을 따라 줄줄이 세워진 오두막에서 해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갤리선 2층 갑판에서 에스파냐 병사들이 머스킷을 연속 발사했다. 뒤늦게 따라간 전선 갑판에서도 해병들이 보병총을 쏘아 해적들을 쓰러뜨렸다.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전진해!”
이민호가 함장을 독촉했다. 해적 보병들하고 싸울 시간이 없었다. 전선이 안으로 더 들어가자 저 멀리 해적선 백여 척이 정박한 포구와, 그 포구를 둘러싼 목책이 이민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민호가 찾는 것은 따로 있었고, 바로 찾아낼 수 있었다.
“함장! 목책 위 언덕에 석성이 있다. 포루가 있어!”
“예! 바로 공격하겠습니다, 전하!”
함장이 전령들에게 지시하는 사이에도 해적들이 석성과 해안 포구 목책에 배치되느라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이민호는 망원경을 들어 포루에서 움직이는 해적들을 살폈다. 기다란 포신과 거대한 포구가 기함을 향해 방향을 틀고 있었다.
“도대체 포르투갈 놈들은 어쩌자고 해적들에게 저런 대포를 파는 거야? 자기들도 위험해질 텐데.”
“많은 돈을 줬나 봐요.”
“그래. 해적에게 대포를 팔아 얻은 은으로 옥 도자기와 명나라 비단을 샀겠지.”
에스파냐 상인들은 남미나 멕시코에서 채굴한 은을 아시아로 가져 오지만, 포르투갈 상인들은 금 약간, 그것도 없으면 빈손으로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포르투갈 상인들은 일단 아시아의 바다에 온 다음 돈이 되는 짓이라면 무슨 짓이라도 했다. 중개무역이나 운송업, 용병 일을 2, 3년 동안 해서 돈을 모은 다음 향신료나 명나라제 비단과 도자기 등을 잔뜩 싣고 돌아가는 것이 무역의 한 사이클이었다.
멀어서 확인할 수 없지만 해적들이 발사준비를 하는 대포는 컬버린이나 세이커, 팔콘 같은 소형 캐넌 종류였다. 크기가 아담하고 자포 교환식인 불랑기 포 따위가 아니라 포신이 사람 키의 몇 배나 되는 대형 대포였다. 나중에 명나라 말기에 홍이포라 불린다.
저런 큰 대포에서 쏘는 포탄에 맞으면 튼튼한 티크목으로 건조한 전선에도 확실한 타격을 줄 우려가 있었다. 저런 대포는 사정거리도 꽤 길고 흑색화약을 몇 킬로그램이나 쑤셔 넣은 탓에 포탄의 관통력도 높았다.
- 콰쾅!
성벽 일부를 둥그렇게 튀어 나오게 해서 공간을 만들고 그 위에 대포를 배치한 포루 밑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거의 수직으로 세운 성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대포시대에는 성벽의 경사를 낮추고 성벽 안쪽을 흙으로 메우는 식으로 대포의 위력에 대응했지만 아직 대포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포탄이 터질 때마다 수직으로 높이 쌓은 성벽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대포가 전장에서 위력을 발휘하면서 옛날식 성벽은 모두 개축하거나 적이 대포를 끌고 오면 수비를 아예 포기해야 했다.
- 퍼엉~
에스파냐 범선에서도 해적들이 웅거한 성벽을 향해 대포를 발사했다. 그러나 포 구경이 작은 화포를 성벽에 쏘아봤자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에스파냐 포수들은 바다에서 그랬듯이 여기서도 대인 살상용으로 대포를 쏘고 있었다.
그 사이 갤리선에서 에스파냐 병사들이 해안에 상륙하고 있었다. 고산국 전선들은 해적들의 항구를 틀어막아 해적선이 못 나오게 하고, 함포는 주로 해적들의 대포를 찾아 격파했다. 전선에서 발사한 포탄이 성벽 아래를 뚫고 들어가 폭발하자 성벽을 구성한 돌들이 터져 나가며 성벽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폭발에 휘말리거나 붕괴하는 성벽에 휩쓸린 해적들이 쏟아지는 돌 사이에 파묻혀 죽어갔다.
- 트앙~ 탕!
해안에 상륙한 에스파냐 병사들이 언덕길을 올라가며 머스킷을 발사했다. 성벽에 오른 해적들도 아래쪽을 향해 화승총을 발사해 양쪽 진영 모두 하얀 연기가 가득했다.
이때 전선에서도 단정을 내려 해병들을 차례로 상륙시켰다. 전선이 해안에 붙이지 못해 아직 기마병은 상륙하지 못했다.
- 꽝!
“으아악~”
기함 바로 옆을 따라오던 총독의 갤리선이 포탄 한 방을 맞았다. 1층 노잡이 갑판으로 날아온 커다란 쇠구슬이 노잡이 대여섯 명을 뚫고 지나가 기둥을 무너뜨린 다음 갑판 위로 떼굴떼굴 굴렀다. 노잡이들이 젤리 인간인가 하는 의심이 드는 순간 떨어진 팔다리들이 갑판 위에서 펄떡거렸다.
“적 대포가 아직 남아있다!”
“전하께서는 함교에 남아계십시오. 위치 확인했습니다!”
함장이 함교 밖으로 나가 함수 함포들을 직접 지휘했다. 이민호는 함장의 권유를 받아들여 상대적으로 안전한 함교에 남았다. 그렇다고 함교가 안전한 것도 아니었다.
- 꽝! 쨍그랑~
기함의 함교창을 뚫고 작은 포탄이 날아들었다. 민영이 이민호의 머리를 감싸 안고 주저앉았다.
그러나 사람이 포탄이나 총탄을 상대로 대응하기에는 이미 늦기가 쉬웠다. 이민호가 민영과 함께 일어나서 포탄을 찾았다. 볼링공보다 약간 작은 포탄이 유리창을 깨고 지나간 다음 벽에 박혀 있었다. 전선도 저런 본격적인 대포 앞에서는 결코 안전하지 않았다.
- 쾅! 쾅! 쾅!
그 포탄을 발사한 해적의 포대는 나무 그늘 아래에 있어서 그 동안 전선으로부터 관측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발사하는 순간 피어오르는 연기로 인해 위치가 노출된 다음 해적들의 운명은 빤했다. 해적들이 포구 앞에서 꽂을대로 포강을 청소하는 사이 기함에서 대응 포격으로 포루째 날려버렸다. 그것이 해적이 보유한 마지막 대포였다.
적의 대포를 모두 제압한 다음 전선에 탑재된 함포들이 본격적으로 기다란 성벽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어떨 때는 커다란 돌에 맞아 포탄이 터지면서 돌 파편만 튈 때도 있고, 어떨 때는 맨 아래에 쌓인 큰 바위가 깨지면서 그 위에 쌓인 돌들이 우르르 무너지기도 했다. 그러나 석성이 워낙 길어서 성벽을 모두 무너뜨리려면 시간이 한참 걸릴 것 같았다.
“함장! 기마병 상륙시켜!”
“예! 해안에 배를 댑니다!”
이민호의 지시에 따라 전선들이 해안으로 접근했다. 전선 옆문이 열리면서 기마병들이 차례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말이 모래 바닥을 딛으면서 제대로 선 다음 앞으로 뛰어 나갔다.
감불은 이민호에게 지시 받은 대로 기마병을 이끌고 석성 동쪽 언덕으로 올라갔다. 기마병 포병들에게 기병포를 높은 곳에 방열시키게 한 감불은 주력을 이끌고 석성 뒤쪽으로 돌아 들어갔다.
- 콰앙!
2문에 불과한 기병포라도 성 안을 내려다보며 발사하자 해적들은 재앙을 맞이했다. 지휘부 역할을 하던 커다란 목조건물이 포격을 받아 무너졌다. 해적들이 포격을 피해 마치 거미 새끼처럼 흩어졌다.
해적의 석성은 바다 방향을 향해 반원형으로 쌓은 성이었다. 뒤쪽이 비어 있어서 기마병들이 이 공간을 통해 석성 안쪽으로 돌입했다.
- 타탕! 펑!
해적 주력이 성벽에 고착돼 있는 동안 기마병 250기가 방어가 약한 성 안쪽 마을을 마음껏 휘저었다. 바짝 마른 오두막이 화끈하게 불타오르다가 결국 무너졌다.
곳곳에서 유탄과 수류탄이 터졌다. 기마병이 쏘는 보병총이나 기병총도 무섭지만 해적들은 말발굽을 더 두려워했다. 후방에 남아있던 해적들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성벽 쪽으로 물러났다. 성벽에 몰린 해적들은 앞뒤에서 총격을 받았다.
해적들이 우왕좌왕하며 성벽 위를 몰려 다녔다. 성벽 아래로 전진하던 해병들이 쏘기 좋은 표적을 놓아두지 않고 연속 총을 쏘았다. 에스파냐 총병들이 높이 치켜든 머스켓에서 불벼락과 함께 하얀 연기를 시원시원하게 뿜어냈다.
“항복! 항복이다!”
해적들이 결국 몇 가지 언어로 항복하겠다고 부르짖었다. 에스파냐 총병들과 해병들이 사격을 멈췄다. 기함에서도 포격 중지를 지시하는 깃발을 올렸다.
전투가 끝난 것을 확인한 이민호가 호위대와 함께 말을 타고 기함에서 내렸다. 숲으로 도망간 해적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전투는 방금 막 끝났다.
- 탕! 타탕! 쾅!
그러나 해적들의 석성 안에서는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다. 해적들이 항복한 줄 모르는 기마병들이 성 안에서 계속 총을 쏘며 난동을 부린 탓이었다. 버티다 못한 해적들이 성벽에서 뛰어내려 기마병들의 총칼을 피했다. 그리고 정문이 열리더니 여자들과 아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도망나왔다.
기마병들을 피해 성에서 피신해 나온 해적들과 비전투원들을 에스파냐 병사들이 분류해 둘로 나눴다. 해적들의 무장을 해제하는 곳에 화승총과 창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여자들과 아이들이 울고불고 소란을 피웠으나 에스파냐 창병들이 창 자루로 두들겨 패서 소란을 잠재웠다.
잠시 후에 칼에 시뻘건 피를 묻힌 감불이 성문 밖으로 나왔다가 깜짝 놀랐다. 천여 명이 넘는 해병과 900명의 에스파냐 병사들, 그리고 해적 포로들과 해적 가족들까지 합해서 수천 명이 감불 한 사람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중에서 이민호를 발견한 감불이 머리를 긁적였다.
“도련님! 전투 끝났어요?”
“그래, 임마! 분위기 좀 살펴라.”
“헤헤! 안에서는 안 보여서 몰랐어요.”
성의 완전한 점령을 에스파냐 병사들에게 맡겨두고 기마병들은 성 밖으로 빠져 나왔다. 그리고 다시 대별로 뭉친 다음 해안선을 따라 서쪽으로 달려갔다. 해안을 따라 해적들이 지은 오두막이 아직 수백 채가 남았고, 도망간 해적들을 추격하는 임무도 기마병들이 맡았다.
기마병들이 해안선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한 다음부터 총성이 간헐적으로 울렸다. 그리고 시커먼 연기가 치솟아 올랐다. 이민호가 해적들의 거주지를 불태워버리라고 했더니 감불이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중이었다.
에스파냐 병사들이 산다칸에 웅거한 술루해적 본거지인 석성을 샅샅이 수색해 포로 몇 십 명을 더 생포했다. 그리고 그 동안 상선이나 해안 마을을 약탈해 구한 금은보화를 산더미처럼 찾아냈다.
전리품 중에 굵은 진주가 의외로 많아서 이민호가 군침을 삼켰다. 당연하겠지만 모두 천연진주였고, 흑진주가 꽤 많이 섞여 있었다. 일단 전과를 정리한 총독이 이민호에게 보고했다.
“전하! 해적 포로가 3천 명이 넘습니다. 젊은 남자가 천 명, 나머지는 여자와 아이들입니다. 그리고 해적에게 붙잡혀 일하는 노예들이 2천 명입니다. 어떻게 처리할까요?”
혹시 고산국에서 노예로 쓸 만하다고 생각되면 먼저 가지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해적들을 탄광에 보내기에는 위험했다. 탄광은 금광과 가깝고, 수도에 너무 가까이 있었다. 잘못해서 탄광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곤란했다.
그리고 금광에서 일하는, 아직 해방되지 않은 흑인 노예는 예외로 두고 고산국에는 노예제도가 없었다. 그래서 해적 가족들을 고산국에 끌고 가서 노예로 부릴 수도 없었다.
“총독이 알아서 처리하시오. 노예는 해방시키는 것이 좋지 않겠소?”
“그럼 성인 해적들은 처형하고 나머지 여자와 아이들은 포르투갈 노예 상인에게 넘기겠습니다. 해적에게 잡혀 노예 생활하던 자들은 여기서 일괄적으로 석방하면 고향에 돌아가기 어려울 겁니다.”
에스파냐도 해적을 노예로 팔아서 원정비용에 충당하기에는 그 동안 쌓인 원한이 너무 컸다. 에스파냐 병사들이 손을 뒤로 묶은 해적 포로들을 해자 앞에 일렬로 꿇어앉혀 놓고 처형을 집행했다. 해적 가족들이 울부짖는 가운데 해적들을 모조리 해자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성 안팎의 시체까지 해자 구덩이에 집어 던진 다음 기름을 부어 태워버렸다.
“총독! 노예들을 모두 집에 데려다줄 수도 없지 않겠소?”
이민호가 몇 단계에 걸쳐 통역을 하면서 노예들의 고향을 물었다. 일부는 여기서 가까운 브루나이 북부였지만 멀리 북동쪽 민다나오와 남쪽 술라웨시, 심지어 마닐라 등 동남아 곳곳에서 잡혀와 강제로 노역을 하고 있었다.
일부는 잠수부로서 물속에서 해삼과 전복을 채취하는 어부들이었다. 싸구려 열대 해삼을 잡으면서도 해삼의 씨가 말라 점점 깊이 들어가야 해서 잠수병에 걸리는 경우도 많았다. 해적들 입장에서는 사람은 약탈해오면 그만이었기 때문에 잠수병에 걸린 자들은 버림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