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78 34. 종전 =========================================================================
“전하께서는 이곳을 곧 비울 생각이신가요?”
“맞소. 오늘 밤에 왜병들이 성에서 나와 움직이면 따라가면서 타격을 가할 계획이오.”
승마보병의 진영에서 기병포를 쏴도 됐을 텐데 구태여 단정에 실어서 쏜 이유를 비올레타는 정확히 파악해냈다. 그렇다고 비올레타가 특별히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일견 무의미해 보이는 지시에 의문을 품었다면 당연히 그런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 이민호의 생각이었다.
해가 지면서 명군이 북쪽과 서쪽의 숙영지로 퇴각했다. 그리고 밤이 깊어지자 왜성 주변에서 왜병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이민호는 병사들에게 저녁을 먹이고 해병들이 강변에서 횃불을 들고 돌아다니도록 지시했다. 해병과 반대로 승마보병들은 다시 배에 태우고 평소보다 일찍 재웠다.
오늘은 달밤에 체조하게 생겼다. 마침 음력으로 5월 하순, 당연히 그믐달이 아주 늦게, 새벽 다 돼서 뜰 밤이었다.
이민호가 깨어났을 때는 기함 함교에 척후와 정찰병, 전령들이 숱하게 드나들 때였다. 먼저 일어난 계복이 함교에서 지휘하고 있다가 이민호를 반갑게 맞이했다. 시계를 보니 새벽 두 시에서 10분 전이었다.
만약 왜군이 명군을 기습하러 나가지 않았다 해도 오늘 밤 왜군 진영에 야습을 가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왜군은 이민호의 예상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왜군이 자정에 왜성에서 나와 명군 숙영지 두 곳을 동시에 공격하고 있습니다. 서쪽 언양 방향에는 명군 남병 숙영지가 있습니다만, 야습을 받고도 잘 버티고 있습니다. 북쪽 경주 방향에 숙영지를 둔 명군 북병은 야습을 당한 직후 숙영지를 버린 채 뿔뿔이 흩어져 도주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한두 시간 정도는 왜군이 명군을 추격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왜성을 지키는 병력은 얼마나 돼?”
“현재 1만 이상이 관측되지만 전투병은 많아 봤자 2, 3천입니다.”
울산왜성에 주둔한다는 왜군 6만 중에서 하인 등 비전투병력은 1만 이상으로 추산되었다. 작년에는 전투병과 비슷한 규모의 비전투병력이 따라다녔으나 조선 수군의 활동으로 일본에서 해협을 건너기 어려워지면서 지금은 전투 병력 위주로 편성될 수밖에 없었다. 울산에 주둔한 왜군은 군량 등 기본적인 보급도 어려운 시기였다.
“좋아. 해병은 절반씩 교대로 재우고 기마병과 승마보병은 전원 말에 탑승시켜. 먼저 왜성을 불태우겠다.”
“도련님! 전투는 제가 지휘해도 됩니다. 도련님은 이곳에 남아 계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쭈? 어울리지 않게 말투가 진지해졌네. 나 혼자만 안전한 곳에 있으면서 병사들에게 위험한 곳으로 돌격하라고 명령할 수는 없다. 그리고 태극기가 있을 때와 없을 때 병사들 사기가 달라지잖아. 전투현장에서 적당히 떨어져 있을 테니 너무 걱정마라.”
고산국왕이 있는 곳마다 항상 태극기가 따라다녔다. 이민호가 궁성을 나오는 순간 궁성 남문에 게양된 태극기가 내려왔고, 돌아오면 올라갔다. 태극기는 고산국의 국기가 아니라 아직은 왕실 깃발이기 때문이다. 태극기가 휘날리는 곳에서 아직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그래도 불안합니다. 도련님께서는 아직 후사를 얻지 못했지 않습니까?”
“내가 없으면 누군가가 책임을 지겠지.”
“부디 무사하시길 빕니다, 도련님.”
계복이 이민호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도련님 대신 주군이라고 불러줬으면 멋있었을 텐데 마지막에 초를 치는 것 같았다.
계복은 자기 능력을 잘 알아서 권력에 욕심이 없었다. 물론 사람 속을 들여다본 건 아니지만 대원수 직책도 서류 작업이 많다고 귀찮아 할 정도였다.
그러나 만약 이 자리에서 이민호가 죽는다면 고산국이 공중 분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계복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계복이 혜영과 결혼해서 외정은 계복, 내정은 혜영이 맡아서 국가를 운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여자들을 계복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꼭 살아남고 싶었다.
이민호가 배에서 내리려다가 호위대 중에서 민정과 민지를 발견했다. 짜릿했던 지난밤이 생각난 이민호가 얼굴을 붉혔다. 민정과 민지도 이민호와 눈을 마주치곤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저기, 피곤한 것 같은데 둘은 오늘 쉬는 게 어떨까?”
“아니에요. 이제 괜찮아요. 호위가 주인님을 지켜야죠.”
민정과 민지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원인 제공자인 이민호가 다른 이유를 대지 못해서 더 이상 쉬라고 권하지 못했다. 그러자 민희와 민영이 나섰다.
“주인님 말씀을 들어, 이것들아! 어제 큰일을 겪었는데 말 타다가 귀한 몸 상하면 어쩌려고 그래?”
“이렇게 관심을 받는 것도 한 때야. 너희들 좋겠다.”
민희와 민영이 민정과 민지를 등 떠밀어 호위대 침실로 보냈다. 어디선가 부러움 섞인 한탄과 야유가 터져 나오는 듯했다.
이민호는 뜨거운 낯을 두 손으로 식히며 말을 묶어둔 곳으로 향했다. 그 동안 민영이 열심히 훈련시킨 백마가 이민호를 알아보고 고개를 홱 돌려 외면했다. 수말이라 그런지 이민호보다 민영을 훨씬 좋아하는 말이었다. 그래도 말을 잘 들으니 이민호도 불만은 없었다.
“국왕전하! 유구국의 용감한 병사들도 데려가 주십시오.”
이민호가 말을 타고 나오는데 유구국 쇼호 왕자가 나섰다. 이민호는 결연한 왕자의 표정에서 마지막 일전이 될 중요한 전투에 참가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읽었다. 그러나 보병이 기마병과 승마보병을 따라다니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민호는 아주 잠시 고민했다가 단정들을 준비시켰다. 작전을 간단히 설명하자 쇼호 왕자가 이민호에게 정중하게 군례를 올렸다.
기마병을 선두로 이민호와 호위대, 그리고 승마보병들이 어둠 속에서 태화강 남쪽 강변을 따라 서쪽으로 움직였다. 말 타고 달리면 20리는 금방이었다.
잠시 후 첨병이 등불을 들어 신호를 보내오자 감동이 첨병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 다음 감동이 말을 몰고 가장 먼저 강으로 뛰어들었다. 수백 마리의 말이 강을 건너면서 강물이 밀릴 듯이 튀었다.
차례가 되어 이민호와 호위대가 말을 강으로 몰았다. 그 뒤로 승마보병 5천 명이 따라왔다.
- 콰쾅!
멀리 해병 진영에서 포격을 시작했다. 단단한 바위산에 세워진 왜성은 이미 몇 달 전에 수군에 의해 철저히 무너졌고, 왜군은 그 뒤 야산과 주변에 진채를 세워두었다. 태화강에 진입한 조선 수군 판옥선에서 퍼붓는 화포 사격을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바로 그곳에 포탄이 연속 떨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비전투병들이 대다수일 왜군들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불벼락을 맞았다. 왜인들이 포탄을 피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울부짖었다.
그때 이민호가 이끄는 병력은 왜군 진영에서 불빛이 비치는 않는 어둠 속에 숨어 있었다. 말에 재갈을 먹이지 않고 병사들에게 함매를 물리지 않아도 다들 입 다물고 조용히 기다렸다. 40리 길을 뛰어온 말 수천 마리가 내쉬는 숨소리가 거칠었다. 아직 왜군 진영으로 돌격할 때가 아니었다.
- 타타탕!
왜군 진영 동쪽에서 총성이 울렸다. 유구국 병사 800명과 고산국 해병 1개 려가 공격을 시작하는 소리였다. 왜병들이 목책에 늘어서서 조총을 쏘았으나 어둠 속의 적을 조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해병들이 총을 쏘아 횃불에 의해 몸을 환히 드러낸 왜군 조총병들을 쓰러뜨렸다.
유구국 병사들과 해병들이 왜군 진영을 향해 천천히 전진했다. 해병 외에 유구국에도 예전과 달리 조총병들이 꽤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밤에 보면 수천 명이 공격해오는 것처럼 보였다.
왜군 진영 서쪽과 야산을 지키던 왜군 조총병들이 유구국 군사들을 막기 위해 서둘러 동쪽으로 이동했다. 이민호는 조총병들이 동쪽으로 절반쯤 이동했을 때, 그리고 해병 진영에서 포격이 일제히 멈춘 순간에 신호했다.
“이때다. 돌격!”
“와아!”
선두에 기마병 500기가 나서서 왜군 진영 서쪽을 향해 달려갔다. 기마병들 뒤에서 이민호가 말을 달리면서 기병총을 꺼내들었다. 옆에서 호위가 기수로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같이 달렸다.
이민호와 호위대에 이어 5천 명의 승마보병들이 뒤따랐다. 왜군 진영을 앞두고 최고 속도로 달려 나간 5500명이 일제히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질렀다.
“우와아~”
왜군 진영의 서쪽 목책은 태화강 건너편에서 해병들이 발사한 포격에 의해 이미 무너져 있었다. 지키는 왜병이 거의 없는 목책선을 기마병들이 통과해 왜군 진영 중앙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앞을 가로막는 모든 왜병들을 휩쓸며 빠르게 지나갔다.
기마병 뒤를 따라 진입한 승마보병들이 뒤처리를 확실히 했다. 살아남은 자들뿐만 아니라 이미 죽은 자들에게도 총질이나 칼질을 했다. 어두워서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 타탕! 펑!
가끔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어두운 왜군 진영에서 고산국 군복을 입지 않은 자들은 모두 적이었다. 울긋불긋한 옷을 걸쳐서 확실히 왜인으로 구분된 자들은 여지없이 죽음을 당했다.
가끔 조선 옷을 입은 남자들이 있었으나 포로인지 왜군 부역자인지 알 수 없었다. 이들이 각궁 같은 무기를 들고 있거나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을 하면 그 즉시 총탄이 날아갔다.
이전의 전투에서 조선인 복장을 한 사람이 무기를 들었는데도 머뭇거리다가 부상을 입은 경우가 있어서 이번 전투 전에 이민호가 몇 번이나 강조했다. 적진에서 만난 사람이 적인지 아닌지 쉽게 구별할 수 없을 때는 일단 쏘고 나서 확인하라고 했다.
- 피잉! 딱!
말을 타고 이민호 앞을 지나던 호위가 날아오는 화살을 대신 맞았다. 이민호는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총을 겨눴다. 체구가 큰 남자가 방금 막 활시위를 놓은 자세로 각궁을 들고 있다가 호위들에게 총격을 받아 입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옷 입은 것으로 미루어 분명히 조선인이었다.
그 조선인이 어째서 부역을 하게 됐는지 이유를 알 필요는 없었다. 아군을 죽이려 하는 자는 적이었고, 어떤 방법으로든 무력화시켜야 했다. 가장 확실하고 훌륭한 무력화 방법은 발견된 적에게 즉시 죽음을 안기는 것이었다. 여차하면 부대 전체가 어이없이 붕괴될 수도 있는 야간전을 시도하면서 이민호가 신경을 많이 썼다.
“괜찮아?”
화살에 맞고 잠시 말안장에 엎드려 있던 호위가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일어나 앉았다. 얼굴을 보니 민주였는데, 방탄판에 화살을 맞은 덕택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괜찮아요, 주인님. 나는 절대 처녀 귀신이 될 수 없어요! 아셨죠?”
“그래. 알았다.”
요즘 호위들이 적극적으로 변한 것 같았다. 원래 호위와 호위대상의 관계는 정서적으로 긴밀해지기 마련인데, 이민호가 왕인데다 민희와 민영을 호위 겸 후궁으로 두어 그런 경향이 더 강해졌다.
이민호 얼굴을 바라보던 민주가 갑자기 말에 박차를 가하면서 달려 나갔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애들아! 도망가지 말고 엎드려 있어!”
민주가 지켜준 덕에 조선인 아이와 여자들이 피와 살이 난무하는 지옥 속에서도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민호가 승마보병 1개 대를 불러 아이들과 여자들을 태우고 해병 진영에 데려다주라고 명령했다.
왜병들이 여자를 납치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조선인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경우가 흔했다. 성적인 목적으로 그런 경우는 적고 대부분은 일본에 돌아가서 노예로 팔기 위해서였다. 가끔 자식이 없는 왜병들이 양자로 삼기 위해 데려가는 경우도 있었다.
왜인 옷을 입은 아이나 여자들도 알고 보면 조선인인 경우가 자주 있었다. 왜인처럼 머리를 민 경우에도 말을 시켜보면 조선인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시대에도 아직 사람이 가장 큰 전리품이었다.
잠시 후 동쪽 목책선이 무너지고, 유구국 병사들까지 왜군 진영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유구국 병사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왜병들을 척살했다. 수십 년 동안 분노가 쌓인 탓에 유구국 병사들은 왜병들이 저항하지 않는다 해도 쳐 죽여 포로를 남기지 않았다.
“주인님! 왜병이 없어요!”
“무슨 소리야? 지금까지 죽인 숫자가 얼만데.”
민희가 가리킨 곳을 이민호가 확인했다. 겹겹이 쌓인 시체들이 왜군 조총병이라 생각했는데 창병에 비해 간소한 조총병용 갑옷을 입은 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왜군 지휘부가 민간인인 하인들에게 값비싼 조총을 맡긴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잡병이야. 돈 받고 전쟁에 참가하는 용병 같은 거야.”
“그럼 뎃포 아시가루는 다 빠져나갔겠네요?”
“그래. 지금 울산왜성을 지키는 다이묘가 단 한 명도 없다는 뜻이야. 야습 외에 뭔가 다른 목적이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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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