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79 34. 종전 =========================================================================
숨어있는 왜병 또는 왜인들을 찾아내는 잔적 소탕 시간 중에 유구국 쇼호 왕자가 이민호를 찾아왔다. 왜병이 보이는 족족 쳐 죽이는 유구국 병사들 때문에 극소수 조선인 말고는 포로가 없었다.
“국왕전하! 아주 호쾌한 대첩입니다! 다 합해서 1만 명 넘게 벤 것 같습니다.”
“그렇다. 유구국 병사들도 수고했다고 전해다오. 쇼호 왕자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기겠다.”
“어떤 임무든 맡겨만 주십시오!”
“왜성을 완전히 점령하고 전리품을 수집해라. 그리고 명군을 기습하러 나간 왜군이 돌아오면 최대한 오랫동안 막아라.”
“국왕전하의 명을 받들어 반드시 왜성을 사수하겠습니다!”
명령을 오해한 기개만 높은 열혈 왕자를 설득해야 했다. 아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데 괜히 혼자서 왜성을 지키느라 인명피해를 늘릴 이유가 없었다. 유구국에 시킬 일이 워낙 많아 이민호는 유구국 병사들의 목숨도 챙겨줘야 했다.
“사수할 필요는 없다. 적이 너무 많거나 정 불리해지면 강변으로 퇴각해. 강 건너에서 아군 해병들이 지원해줄 테니까.”
“유구국 병사들만으로 막을 수 있지만 국왕전하께서 내린 군령이니 따르겠습니다!”
유구국 쇼호 왕자는 왕위계승자답게 자존심이 더럽게 강했다. 조금 불안했지만 전투 지휘 하나만큼은 잘 하는 쇼호 왕자를 믿고 왜성 방어를 맡겼다. 그리고 명군 야습에 나선 왜군의 움직임을 감시하던 정찰병들에게 보고를 들었다.
“여기서 북쪽 경주 방향으로 10리 거리에 명군 숙영지가 있습니다. 1만에 달하는 왜군이 야습을 성공시킨 다음 명군을 추격하고 있습니다. 이쪽 왜성이 함락된 상황을 알더라도 병력을 돌릴 때가 아니라서 계속 추격하는 것 같습니다.”
이여송을 비롯해 명군 주력 3만 정도가 며칠 전부터 그곳에서 숙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야습을 받자마자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뿔뿔이 흩어져 도주하고 있다고 정찰병이 보고했다.
왜군 보병 1만이 명군 기병 3만을 쫓고 있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명군이 아군이라지만 구해주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지게 만드는 추태를 보였다.
“서쪽 언양 방면으로 출진한 왜군은 3만 가량입니다. 적의 주력이 분명합니다. 역시나 명군 숙영지에 야습을 시도했으나 남병들이 큰 희생을 내면서도 아직까지 잘 버티고 있습니다.”
“알았다. 계속 연락을 유지해라.”
결국 북쪽 이여송 군을 견제하기 위해 보낸 소규모 양동부대가 뜻밖의 대박을 거뒀고, 서쪽 남병을 공격한 왜군 주력부대는 기습이 실패해 고착되어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민호에게 군례를 마친 정찰병들이 말을 타고 각자 맡은 구역으로 돌아갔다.
한 지역을 제대로 정찰하기 위해서는 기마정찰병 다수가 필요했다. 혼자서 정찰도 하고 보고도 하라고 시키면 감당을 못할뿐더러 적정 보고에 대한 신뢰도가 뚝 떨어진다.
역시나 왜군은 울산왜성에 웅크리고 있지만은 않고 서쪽으로 진격할 계획을 실행하고 있었다. 어차피 왜성에 남아있으면 굶어죽는 길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왜군 지휘부는 부족한 군량은 명군이나 조선 관아의 것을 빼앗아 보충하기로 하고 자살적인 진격작전을 시도하고 있었다.
“3만과 1만, 1만. 합해서 5만밖에 안 되잖아? 왜군 1만 명이 어디로 빠져 나갔는지 모르겠다. 이봐, 전령! 해병들에게 후방을 특히 주의하라고 해!”
“예!”
“이봐, 전령! 돌쇠야! 상류로 돌아가서 강을 건너지 말고 주교를 건너라!”
“예! 도련님!”
수원에서 종으로 일하다 호위대에 속하게 된 기마전령이 남쪽으로 말을 달렸다. 태화강 중류에는 단정을 널빤지로 연결한 주교, 즉 배다리가 두 개나 놓여졌다.
왜성 북쪽 야산을 점령하고 내려와서 보고를 같이 들은 계복이 이민호에게 물었다.
“도련님! 다 쳐 죽였습니다. 포로를 잡아서 뭔가 좀 물어보려고 해도 우리 병사들 군복을 보기만 하면 정신없이 달아다니 바쁩니다. 할 수 없이 다 쏴 죽였습니다. 다음 목표는 적의 주력이 향했다는 서쪽입니까?”
“아니. 야간 경계도 못하는 멍청이를 먼저 구해주자.”
이민호는 병력을 집결시킨 다음 먼저 북쪽을 목표로 잡았다. 명색이 연합작전인데 명군의 주장인 이여송이 죽기라도 한다면 이 전투가 무조건 패전이라고 우길 사람들이 있을까 염려됐기 때문이다.
“정찰대가 길을 인도한다! 전진!”
기마정찰대가 앞서고 거리를 두며 첨병들이 뒤를 따랐다. 그리고 5500에 달하는 기마병과 승마보병들이 말을 달렸다.
울산에서 경주까지는 구조곡 비슷한 지형이라 양쪽 산 사이로 폭이 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북쪽으로 한참 말을 달린 이민호는 불타는 명군 숙영지를 지나게 되었다. 말을 모아놓은 곳으로 몰려가다가 서로 짓밟혀 죽은 명군 기마대의 시체가 곳곳에 쌓여 있었다.
이민호는 원정군을 이끌고 계속 북진했다. 저 앞에서 기마정찰병이 급히 달려와 이민호에게 보고했다.
“적군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3마장 앞에 있습니다!”
“전체 정지!”
이민호는 휘하 부대 전체에 전령을 보내 매복하라고 지시했다. 밤중이라 언덕 뒤에 숨거나 참호를 파고 들어갈 필요도 없이 제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리는 것만으로 매복준비는 충분했다. 대충 반원형 포위망이 갖춰졌다.
잠시 후 북쪽에서 1만에 달하는 왜병들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달려오고 있었다. 달도 뜨지 않은 밤이라서 앞이 거의 안 보이는데도 왜군은 일부러 횃불을 키지 않고 움직였다. 왜병들은 허리춤에 둥그런 것을 매달고 달려왔다.
이때 새벽 세 시가 넘어 그믐달이 동쪽 하늘에 살짝 떠올랐다. 왜병들의 허리춤에 매달린 둥그런 것은 명군의 수급이었다. 야습을 받아 당황하거나 제대로 말을 탈 시간이 없어 맨 걸음으로 도망가다가 잡혀 죽은 기마병들의 머리였다. 저 중에 이여송의 머리가 있을까봐 이민호는 속으로 초조했다.
“쏴!”
- 타타타타탕! 퍼퍼펑!
기마병과 승마보병들이 말에 탄 채로 왜군에게 총격을 퍼부었다. 유탄이 터질 때마다 환한 조명에 드러난 왜병들 몸은 총병들이 맞히기 아주 쉬운 표적이었다.
기습을 받은 왜군이 서둘러 방진을 짰다. 그러나 고산국 병사들은 전원이 총병이었다. 왜병들이 밀집하자 명중률이 급격히 올라가고 총알 한 방에 두세 명씩 관통되며 쓰러졌다.
거기에 유탄이 날아와서 터지자 방진 안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왜병들 숫자가 급속히 감소해 방진이 금방 와해됐다.
“전진!”
5500명이 넘는 말 탄 총병들이 탄막을 치면서 왜군을 북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자그마한 화승의 불꽃이 피어나는 곳마다 유탄이 날아가 폭발했다. 왜군 조총병들이 가장 먼저 표적이 되었고 창병과 궁병들도 저항하지 못하고 총탄 한 방에 나뒹굴었다.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주애공 대인!”
적을 거의 몰살시킬 때쯤 이여송이 가정들과 함께 말을 타고 달려왔다. 이여송은 갑옷도 제대로 못 입고 가정들은 무기를 제대로 가진 자가 없었다. 그나마 말이라도 탔으니 도망가서 살 수 있었다. 이여송이 말에서 내려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이 제독 아니시오? 살아서 정말 다행이오. 명군이 야습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왔소만 아주 늦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오.”
물론 늦었다. 고산국 원정군이 소식을 듣고 아무리 빨리 왔더라도 명군 주둔지가 왜군에게 급습당하는 것을 막을 시간이 없었다. 어쨌든 목표인 이여송은 구할 수 있었다.
“이 못난 소장을 구하러 와주신 겁니까? 실로 대인께 감읍했습니다!”
“왜성 서쪽에 주둔한 남병들도 야습을 받고 있다고 하니 서둘러 구원하러 가야겠소.”
“황공, 황공무지로소이다. 하온데 수급과 전리품을 대인께서 거둬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명군 주력인 기마병 3만이 무너진 이 참담한 상황에서 이여송은 전리품에 정말 관심이 많았다. 전과라도 있어야 패전을 만회할 수 있으니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절반씩 나눕시다. 다만 왜군 장수들의 투구와 갑옷은 내 것이오.”
“대인께서 매번 은혜를 베풀어주시는데 저는 은혜를 갚을 도리가 없습니다. 전리품이라도 잘 챙기겠습니다.”
나중에 이여송이 반분했다면서 보내온 전리품을 살펴보니 수급이 5천여, 갑옷과 무기 다수가 있었고 특별히 은 10만 냥이 자루 몇 개에 담겨 있었다. 명나라에서 흔히 쓰는 발굽 모양의 은이었는데 아무래도 명나라 조정에서 이여송에게 군자금으로 내려준 것을 전리품에 끼워서 바친 것 같았다.
이민호가 병력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울산왜성 옆을 지날 때 유구국 병사들이 환호를 보냈다.
여기까지 왜병이 없는 것을 확인한 이민호가 진군 방향을 서쪽으로 틀었다. 쇼호 왕자가 뭔가 보고할 일이 있는지 달려오기에 이민호가 기다려주었다.
“전하! 왜군 진채에서 전리품을 수색하고 있습니다만, 화약과 무기, 식량이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금과 은 같은 군자금이나 옷 종류는 넘쳐납니다.”
“역시 왜군이 울산왜성을 버리고 밤중에 대거 이동할 생각이었군. 그것도 서쪽 방향으로. 왕자의 생각은 어떤가?”
“그렇습니다. 천이나 옷은 왜적들이 몹시 귀하게 여기는 물품입니다. 놈들이 왜성을 버리고 다른 곳에 웅거하려고 몸만 빼서 이동한 것이 분명합니다. 저도 더 이상 이 왜성을 지킬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쪽 들판에서 가장 높은 곳이니 지키다가 상황이 달라지면 아군을 도와주도록 해.”
“군령을 받들겠습니다, 전하!”
울산왜성 서쪽으로 언양 가는 길, 구불구불한 태화강 상류를 자연 해자 삼아 그 주변에 목책을 설치한 곳에 명군 숙영지가 있었다. 목책과 강에 의지해서 남병들이 아직도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이민호는 남병들에 대한 평가를 올려주기로 했다.
그러나 태화강 상류는 무릎을 걷고 건널 만큼 얕았고 왜군이 치열하게 공격해서 위태위태했다. 특히 산에서 쏟아져 내려와 진채 후방을 공격하는 왜병들을 몰아내느라 병력을 돌리는 바람에 명군의 정면 방어가 허약해지고, 왜군은 이 틈을 노려 대거 공격에 나섰다.
“왜군이 명군 숙영지를 세 방향에서 공격하고 있으며 함락 직전입니다. 우리가 진군해야 할 언덕이 좁은 목 지형인데 하필 그곳을 일부 왜군 병력이 막아섰습니다.”
“쳐부순 다음 아군을 먼저 구원해야겠다.”
정찰병들이 지도를 펼쳐서 이민호에게 왜군의 공격 진형을 보고했다. 그믐달에 비쳐서 간신히 지도 내용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적 병력이 3만이라면 6천 이하 병력을 갖고 한꺼번에 상대하기는 조금 벅찼다. 게다가 야간전에는 총의 명중률이 급격히 떨어지고 근접전이 벌어질 확률이 올라갔다. 총에 비해 창칼이 유리할 때가 상대적으로 많아진다는 것이다. 지형도 불리했다.
그러나 왜군이 명군을 공격하는 동안 뒤에서 협공하는 편이 여러 모로 유리했다. 그래서 이민호가 결단을 내렸다.
“승마보병 하마! 지금부터 대별로 움직인다. 분산하지 말 것! 전진!”
- 타탕!
고산국 원정군의 움직임을 발견한 왜군이 언덕 쪽에서 조총 사격을 시작했다. 승마보병들이 반격하면서 언덕으로 밀고 올라갔다.
이쪽 지형이 낮아 약간 불리했으나 언덕 지형만 점령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 평지에서 싸우게 된다. 앞쪽에서 인명피해가 조금 발생한 것 같지만 이민호는 계속 승마보병들의 진격을 독려했다.
그런데 하필 이때 그 동안 버티고 버티던 남병들이 왜군의 마지막 돌격에 결국 무너졌다. 명군 숙영지 안에서 주요 전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끝까지 싸우다 몰살한 부대도 있고, 언양 쪽으로 퇴각한 부대도 있었다.
명군이 조금만 더 버텨줬으면 양쪽에서 공격할 수 있었는데 졸지에 고산국 원정군이 홀로 대군을 맞아 싸우게 생겼다. 그래도 이민호는 계속 전진하라고 명했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었다.
“전하! 강 건너 아군 진영에서 전투가 시작됐어요.”
“역시 우회해서 해병을 공격하는군. 알려줘서 고맙소, 비올레타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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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또 하나 올려야겠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