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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284화 (233/1,000)

00284  34. 종전  =========================================================================

왜군은 처음부터 항복을 할 의향이 없었다. 호탕하게 웃는 나베시마와 그의 가신 두 명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사무라이들도 드디어 의무감에서 해방됐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오늘 내내 조선 수군의 봉쇄망을 뚫고 부산포나 수영에 들어온 왜선은 단 한 척도 없었다. 그러나 조선 어민들이 탄 배 몇 척이 자유로이 바다에 떠다녔다. 그 배에 탄 자들 중에 조선 어민으로 변장한 왜군 전령이 있었고, 부산포에서 내린 전령이 대마도에서 구원함대가 출발했음을 왜군 지휘부에 알렸다.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왜선들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끄는 역할을 자원해 이 자리에 있게 되었다.

“호위대는 이들을 결박해라!”

- 타타탕!

호위들이 밧줄을 내밀고 다가가자 사무라이들이 먼저 칼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총탄이 이들의 몸을 꿰뚫었다. 사무라이들이 후련한 표정을 지은 채 쓰러졌다.

시간을 끌러 왔다면 이미 항복 사절이 아니었고, 저항하면 죽음뿐이었다. 그리고 사무라이들은 여기서 가장 적절한 자살 방법을 이용해 자살한 셈이었다.

“나베시마와 가신 두 명을 높은 산에 데려가 나무에 묶어라. 산 위에서 내려다보게 해! 왜군이든 왜선이든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게 하는 벌을 내리겠다.”

호위들이 나베시마와 가신들을 포박해 끌고 나갔다. 그 사이 권율이 천막에서 뛰어 나가 경상좌병사 이광악과 경상우병사 유숭인에게 출전 명령을 내렸다. 이민호도 호위대와 함께 말에 올라타면서 대기하고 있던 승마보병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전원 말에 올라타라! 전진!”

왜선 2천여 척이 부산포와 수영으로 밀려들고, 황령산 북쪽에 진을 치고 있던 왜군이 모든 짐을 버리고 해안을 향해 달려갔다. 왜군을 뒤쫓아 고산국과 조선의 기마병 1만여 기가 달렸다. 말발굽 소리가 천지를 울리고 땅이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진동했다.

그리고 지금껏 기장과 가덕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군 함대가 부산포와 수영 앞바다를 향해 이동했다. 이제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도련님은 여기 남아 계십시오.”

“좋다! 계복 너에게 지휘를 맡긴다.”

계복이 떠나고 나서 이민호는 호위대를 이끌고 자리를 옮겼다. 이곳은 싸움을 구경하기에 별로 좋은 곳이 아니었다. 그리고 뒤에서 경상 좌우병영의 보병들과 의병들이 끊임없이 지나가면서 흙먼지를 날리고 있었다.

이민호는 동쪽으로 이동해 옥봉산을 지나 장산 산기슭에 올랐다. 조선 기마병들이 조금 전까지 왜군이 진을 쳤던 황령산 북쪽을 지나고 있었다. 계복이 지휘하는 고산국 기마병과 승마보병들이 조선 기병을 뒤따랐다. 보병들도 열심히 뛰어갔지만 조금 뒤쳐졌다.

“역시 순풍을 받은 외돛배가 빠르군요. 돛도 달고 노도 젓는 배인가요?”

“그렇소. 일본 해적과 달리 일본 군선은 노가 기본이오.”

거리는 이순신 함대가 출발한 가덕도에서 부산포, 이응화 함대가 출발한 기장에서 수영 앞바다가 더 짧았다. 그런데도 대마도에서 출발한 왜선들이 목표 해안인 부산포와 수영에 먼저 도착했다.

얼마 전까지 왜구에게 시달렸던 마닐라의 에스파냐 사람으로서 비올레타는 일본 군선들을 신기하게 여겼다. 그러나 계절에 따라 무풍지대가 형성되는 지중해에서 활동했던 에스파냐에서도 노를 젓는 갤리선이 군선의 다수를 차지했다.

비올레타의 할아버지인 다스마리냐스 총독이 요즘 심혈을 기울여 건조한 것도 노를 젓는 갤리선이었다. 전쟁과 무역에서 범선이 중요한 역할을 맡은 대항해시대라지만 노를 젓는 군선의 역할은 여전했다.

- 타탕! 탕!

“아악!”

왜선들이 해안에 도착하기 전부터 바닷가에서는 이미 학살이 진행되고 있었다. 고산국과 조선 기마병들이 총과 활을 쏜 다음 기창이나 환도를 빼어들고 왜군을 마구 쳐 죽였다. 뒤에서는 말에서 내린 승마보병들이 전진하며 총격을 퍼부었다. 다른 부대들이 배에 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방진을 짜고 있던 왜병들은 유탄과 총탄, 활 사격에 이은 기마돌격에 의해 순식간에 쓸려 나갔다.

기마병들이 돌진하자 다급해진 왜병들이 창을 버리고 갑옷을 벗어 던진 채 물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노잡이들의 도움을 받아 고바야에 올라탔다. 노잡이 20명 외에 탑승 정원이 8명에서 12명에 불과한 고바야에 왜병들이 30명씩 올라탔다. 승객을 가득 태운 고바야는 즉시 해안을 떠나 다른 배에게 공간을 비워줬다.

- 콰쾅!

“끄아악!”

그러나 철수작전은 순조롭게 이뤄지지 않았다. 유탄이 배 한가운데서 폭발하자 파편에 부상을 당한 노잡이들이 갑판에서 떼굴떼굴 굴렀다. 급한 마음에 노잡이를 밀치고 왜병들이 직접 노를 저어 해안에서 빠져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다른 배에 막혀 그 고바야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 사이 지상으로부터 총격을 받아 노잡이와 왜병들이 가리지 않고 쓰러졌다. 탑승자들이 모두 죽은 배는 다른 배들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이런 배들이 늘어나면서 연쇄 반응을 일으켰고, 이 때문에 동래의 왜군을 구출하는 작전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 쿠웅~

부산포에서 작은 고바야들이 왜병들을 태우는 사이에 중선과 대선으로 분류되는 세키부네 200여 척으로 이뤄진 왜선 함대는 가덕도에서 이동한 조선 수군과 싸우고 있었다. 수영 앞바다에서도 세키부네 300여 척이 고산국과 조선 수군 연합함대에 맞섰다.

세키부네들은 동래에 고립된 왜군이 고바야에 타고 도망갈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구출해야 할 동료들이 1만 5천으로 줄어든 것은 알지 못했다.

수영 앞바다와 부산포 앞바다에서 전투 중인 세키부네 500척에 탄 병력만 해도 1만 5천보다는 많았다. 노잡이와 수부까지 합치면 4만을 넘었다. 그리고 해안에서 구출작전을 실시하는 고바야 1500척에서 노를 젓는 왜인들 숫자는 3만에 달했다. 일본 입장에서는 7만여 명을 투입해 1만 5천 명을 구하는 작전을 실시하고 있었다.

“아주 잘 됐다. 이 기회에 왜선 숫자를 확 줄일 수 있겠어.”

“주인님! 부산포 앞바다 통제 대감 쪽에 왜선이 너무 많은 것 아녀요?”

“판옥선 120척한테 세키부네 200척은 너무 부족해.”

통제사 이순신이 지휘하는 판옥선 120척을 상대하는 세키부네 200척은 너무 초라한 규모였다. 이순신을 무시해도 유분수였으나, 왜군 수군 장수는 고산국 전선이 기장 쪽에서 내려와서 어쩔 수 없이 수영 앞바다에 더 많은 함선을 배치했다.

이민호의 부친 이응화가 이끄는 판옥선 및 거북선 100여 척, 그리고 외륜선 20척과 맞붙은 세키부네 300척은 최악의 상대를 만난 셈이었다. 이응화의 함대에 고산국 전선과 보급선들이 가담하자 승부의 추가 확 기울어졌다.

왜군 함대 지휘관은 어떻게든 접현전을 시도하려고 치열한 함포 사격에도 불구하고 배를 고산국 전선이나 조선 판옥선에 접근시켰다. 그러나 고산국 천자 전선에서 쏟아 부은 막강한 함포 사격으로 인해 피해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커갔다. 포탄 두세 발만 맞아도 세키부네가 침몰하거나 허름한 판잣집처럼 무너져버리니 왜군들이 기가 질렸다.

“비올레타 양은 두 곳에서 해전을 벌이는 함대들을 어떻게 보시오?”

“먼 쪽의 함대 지휘관은 적의 전략목표를 파악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행동하는 유능한 분이에요. 군함 절반을 적 전투함과 상대하게 하고 나머지는 탈출하는 작은 배들을 가로막아 소탕하고 있으니까요. 그에 반해 가까운 쪽의 함대는 적 전투함을 격파하는데 한 눈을 팔아 정작 중요한 목표인 작은 배들이 탈출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있어요.”

“뭐, 먼 쪽의 함대 지휘관이 제독이고 가까운 쪽 함대 지휘관은 부제독이라오.”

“역시 능력 차이가 있었군요.”

“무능력한 부제독이 내 부친이시오.”

“어머! 미안해요.”

“아니요. 제독을 할 만한 분이 제독을 맡아 다행이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이민호는 은근히 속이 상했다. 왜선이나 판옥선에 비해 화력이 비교조차 할 수 없도록 강한 전선 수십 척을 지휘하면서도 부친은 전략 목표를 잊어버렸다. 이응화가 뒤늦게 배들을 움직여 수영 앞바다를 가로막으려 했으나 이미 고바야 대부분이 빠져 나가고 난 뒤였다.

반면에 이순신 함대는 부산포 앞바다에서 세키부네와 고바야 대부분을 격침시킨 다음 대마도 방향으로 빠르게 남하하고 있었다. 수영 앞바다에서 빠져 나간 고바야를 추격하려는 것이다. 이응화 함대가 뒤늦게 따라 나섰다가, 한참 후에 함대 진형을 풀고 속도가 빠른 전선들을 앞에 내세웠다.

이것도 시기를 놓친 결단이었다. 고바야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달아나서 전선 수십 척으로는 고바야를 많이 잡지 못했다. 오히려 전선들이 분산돼 지휘통제에 애를 먹었다. 덕택에 함대 전체의 이동 속도가 뚝 떨어졌다.

그에 반해 이순신 함대는 고바야 한두 척은 무시해버리고 함대 진형을 유지하면서 부산포 앞바다와 대마도 사이 바다로 직행했다. 그리고 적당히 함선 간 간격을 넓히며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했다.

판옥선을 피하려는 고바야들은 방향을 돌리다 못해 북쪽으로 향하게 됐다. 그러나 북쪽에서는 이응화 함대가 남하하면서 고바야들을 하나씩 때려잡았다.

“저 분 제독의 지휘능력은 정말 탐나요. 왜선들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미리 위치를 선점해서 빠져 나간 배가 거의 없어요. 전술능력도 물론 훌륭하지만, 지상전도 아닌 해전에서 저 정도로 정교하게 함대를 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워요.”

“동감이오.”

통제사 이순신 덕택에 고바야 1500척 대부분을 격파시켰다. 살아서 일본 땅으로 돌아간 왜병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판옥선마다 한 척씩 딸린 사후선에 탄 수군들이 물에 빠진 왜병의 목을 베었다.

“해전도 거의 끝나가고, 지상전은 끝난 것 같소. 내려갑시다.”

“1년 넘게 끈 전쟁이 드디어 끝났군요. 대승을 축하드려요, 전하.”

“고맙소, 비올레타 양.”

“덕택에 많은 것을 배웠어요. 전하께 감사드려요.”

“천만에 말씀이오. 고산국에서도 에스파냐에게 많이 배운다오.”

이민호는 호위대를 이끌고 수영 앞 해변으로 말을 몰았다. 마치 해안 토치카에서 기관총 사격을 받아 미군 시체가 겹겹이 쌓인 노르망디 해안 같았다. 그러나 이들은 상륙하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배를 타고 도망치려다 기마병들에게 잡혀 죽은 왜병들이었다.

“대첩을 경하 드립니다, 대인!”

“도원수 대감도 수고하셨소. 전쟁을 잘 마무리해주시오.”

“대인께서 내리신 분부를 잘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도원수 권율의 허연 수염에 피가 잔뜩 묻어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저 노인은 이번에도 직접 칼을 들고 설친 게 분명했다.

고산국 병력은 사무라이가 입은 갑옷과 투구, 무기만 전리품으로 챙겼다. 전투 때에는 보이지 않던 명나라 군대가 미친 듯이 왜병들 수급을 베어 모으고 있었다. 이민호가 혀를 차면서 지나갔다.

경상우수영 앞바다는 부서진 왜선으로 가득 차서 전선이 해안에 접근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는 수 없이 병력을 동쪽 송정 쪽으로 이동시켜 배에 탑승시켰다. 그 동안 나무에 묶어 놓았던 나베시마와 가신 두 명도 끌고 왔다. 나베시마는 마치 넋이 나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주애공 대인! 어찌 벌써 떠나려 하십니까? 승전 축하연이라도 참가하셔야죠.”

“오! 이 동지! 고생이 많으시오. 국상 중에 어찌 축하연을 벌이겠소?”

동지중추부사 이덕형이 제독접반사로서 이여송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 사람도 머리가 진짜로 좋아서 그 어려운 중국어를 금방 배워서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 구사할 수 있었다.

“이제 전쟁은 끝났소. 지금부터는 장수가 아니라 이 동지 같은 문관 분들이 열심히 일을 해야 할 때요. 조선이 빠른 시일에 재건되고 안 되고는 이 동지 같은 분들에게 달려 있소.”

“명심하겠습니다, 대인!”

이여송이 슬그머니 다가와 이민호에게 속삭였다.

“노야! 황제폐하께 올리는 주문에서 명군 이야기도 잘 써주십시오. 부총병이 두 명이나 전사했고, 유격이나 참장들이 너무 많이 죽었습니다. 제가 패전한 것은 사실이나 전사한 부하 장수들을 영전에서 보기에 심히 부끄럽습니다.”

“물론이오. 이 제독도 열심히 싸웠소. 왜적 13만 대군을 격파한 이 제독을 어느 누구도 패장이라 하지는 못할 것이오. 왜군 6만, 왜선 2천여 척에 수군 7만 해서 합 13만이오. 반드시 기억하시오.”

“감사합니다, 노야! 조선 장수들의 전공도 빠짐없이 기록해서 보고하겠습니다. 수군통제사도 대단했습니다.”

길고 긴 하루가 지나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오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더 올리겠습니다.

이번 편은 앞으로 한 회분이면 끝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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