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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290화 (239/1,000)

00290  35. 기술개발  =========================================================================

이민호는 병력 동원이나 전선 파견 같은 헛짓거리를 다 취소시키고 궁궐에 들어앉았다. 계복을 비롯한 지휘관들이 투덜거리며 이민호를 찾아왔다.

“완전히 똥개 훈련한 셈이 됐습니다.”

“왜적의 침입에 대한 대비태세는 항상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명확한 적정 정보 없이 괜히 호들갑 떨 필요가 없다는 교훈을 이번 일로 인해 알게 되었다.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삽질을 미화해도 소용없이 이번 사건은 고산국 최악의 삽질로 남게 되었다. 마침 일본 사신이 방문하고 겐타로가 일본의 침공을 경고한 탓에 실체 없는 적에 대한 두려움이 이렇게 실제적인 대응을 하도록 만들었다.

만약 이때 누군가 ‘늑대가 나타났다!’고 소리 질렀다면 정말로 온 나라가 전시태세로 전환될 뻔했다. 실제로 수병과 해병을 동원할 때는 왜군이 쳐들어온 줄 아는 병사들도 많았다.

일본 또는 풍신수길에 대한 두려움이 여전히 깊게 남아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사태를 맞아 의외로 병력동원이 빠르게 이뤄졌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았다.

“좋습니다. 대신 지금 상태에서는 너무 불안하니 해상 경계에 투입할 배를 좀 늘리죠. 현재 북쪽 바다에 한 척, 남쪽 바다에 한 척이 경계임무에 투입되고 있습니다. 대형 외륜선 겨우 두 척만으로 넓은 바다를 감시하기에는 너무 부족합니다.”

“전투를 할 필요가 없으니 중형 외륜선이나 기관을 갖춘 탐망선 몇 척을 추가해서 상시 순찰시키도록 하자. 유구국 방면에는 순찰선이 상시 떠 있도록 해야겠어.”

적 함대의 기습이나 침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충분한, 이라는 말은 해상경계에 있어서는 무한대를 의미했다. 현대 한국 해군이나 해경이 그렇듯 아무리 함선과 인원을 증원해도 지켜야 할 바다는 항상 텅 비어 보이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적절한 숫자의 함선과 인원을 보유하고 있다가 필요한 곳에 재빨리 함정을 파견해 대응하는 것이 주요 임무가 되었다. 해상경계에 무한정 자원을 투입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정도가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레이더가 없는 이 시대에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예. 봉화나 역참도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것들을 유지하는데 인원이 너무 많이 필요합니다.”

“좁은 고산국에서 역참까지는 필요 없다. 봉수대는 500개만 유지하려 해도 2교대로 5천 명이 필요해. 불가능하다.”

조선의 경우 봉수제를 운영하면서 변경 지방 봉수대에는 오장 2명에 봉수군 10명, 내륙지방에서는 봉수군 6명과 오장 2명을 배치했다. 여기에 봉수군마다 규정상 보인 3인을 주면 봉수대 500여 곳에 총 2만여 명이 묶이는 셈이었다. 역참은 말과 숙박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역마다 더 많은 인원이 필요했다.

“천자 전선이 강력하니까 이 배들을 교대로 해상경비 업무에 투입하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천자 전선이 출동할 때마다 수병과 해병 합해서 최소 100여 명이 타야 하니까 그건 낭비야. 그리고 전선은 자주 원정에 나가야 하니까 연안경비 함대, 그러니까 해상경계 함대를 따로 설치하도록 하자. 임무는 대규모 적 함대의 접근을 발견해 해군이 출동할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추가로 탐망선을 건조하고 인원을 뽑아 훈련시키는 데만 상당한 시간이 들었다. 그 동안에는 전선이 한두 척씩 교대로 파견돼 왜군 함대의 진공로가 될 가능성이 높은 고산국 북동쪽 바다를 순찰했다.

“풍신수길이 죽었어?”

며칠 후 겐타로가 급히 보낸 보고를 받은 이민호가 어리둥절해졌다. 얼마 전에 와병 중이라는 소식은 들었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이 이렇게 허탈하게 갈 줄은 몰랐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도 풍신수길은 정유재란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 확인된 다음 실망해서 병으로 죽었다고 봐야 했다.

선조 임금도, 풍신수길도, 심지어 에도막부를 열어야 할 덕천가강도 죽었다. 셋 다 이민호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죽인 셈이었다. 앞으로 역사가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어 이민호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당분간 일본은 내부 문제만으로 혼란스러워 바깥으로 눈을 돌릴 여력이 없을 것 같았다. 조선도 국상 때문에 왜국을 정벌하자는 소리가 나올 틈이 없었다. 명나라는 황제는 분명 의향이 있는데 대신들이 반대하는 것 같았다.

조선 출신인 계복은 일본 정벌에 적극적이었다. 전쟁이라면 무조건 좋아하는 감불과 감동도 당연히 찬성이었다.

“비겁한 놈들 빼놓고 우리끼리 합시다, 도련님!”

“우리만으로는 시간이 많이 걸릴 텐데. 일단 조선이 국상을 마칠 때까지만 기다려 보자. 거기서 장수들뿐만 아니라 용병도 많이 고용할 수 있을 거야. 왜적에게 복수하자고 설치던 선비들도 참가하겠지.”

자기는 싸우지도 않고 뒤에서 말로만 떠들던 자들을 확 다 끌어와서 전쟁에 투입하고 싶었다. 의병을 일으키거나 군량을 지원하기는커녕 피난이나 간 주제에 어느 의병장은 언행이 불충하니 참해야 하고, 어느 의병부대는 하는 일 없이 논다고 상소를 올려 비난하는 선비들이 많았다.

마침 다음 날 복건 순무 허부원이 찾아왔다. 이 사람은 거리가 가깝다고 한 달에 두세 번씩 들러서 고산국 궁전의 음식을 축내고 갔다. 의외로 풍신수길이 죽었다는 정보를 빨리 얻었는지 이 문제를 논의하러 왔다.

“일본에 보낸 간첩이 이제 다섯 명밖에 안 남았습니다. 스무 명 모두 다 고르고 고른 인재인데 아깝습니다. 동창에서 파견한 인원이 가장 먼저 죽어서 동창 내부에서 난리가 났답니다. 국내에 있을 때처럼 교만하게 행동해서 쉽게 들켰다고 합니다.”

“대명에서 보낸 첩자는 이제 네 명 남았소. 사흘 전에 큐슈에서 또 한 명이 잡혀 죽었소.”

“끄응~”

“정보는 많이 구했소?”

“예, 전하. 그러나 지금 일본에서는 온통 풍신수길 죽은 이야기밖에 안 합니다. 그리고 전하 이야기도 많이 합니다. 대부분 헛소리지만요.”

이민호도 자주 들은 이야기였다. 고산국 국왕은 키가 9척에 이마에 뿔이 났고 점심으로 처녀의 심장을 먹는다든가 하는 헛소문들이었다. 이 시대 도량형인 척근법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다양하므로 이민호 키를 거의 9척이라고 볼 수도 있고 투구 장식을 뿔로 볼 수도 있었다. 처녀의 심장을 먹은 적은 없지만 밤에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다.

“허 순무! 일본 정벌 계획은 어떻게 됐소?”

“여전합니다. 황상께서는 적극 추진하고 계시지만 반대가 심합니다. 당연하겠지만 공 세울 기회가 생기는 무관들은 정벌을 찬성하고, 예산 문제를 들어 문관들은 반대합니다. 일단 조선에서 국상이 끝나봐야 제대로 가닥이 잡힐 것 같습니다.”

“한 달 남았군요. 그러나 의견을 맞춰보고 준비하려면 올해는 훌쩍 지나가겠소.”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고구마를 보내주신 덕택에 복건성에서 기근을 쉽게 넘길 수 있었습니다. 국왕전하께 감사드립니다.”

복건성의 기근은 거의 해결됐다. 10만 석의 쌀보다 시들어 말라비틀어진 고구마 순 몇 천 가닥이 기근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황토 지역이 흔한 복건성 토질에도 고구마가 잘 맞아 복건성 전역에 고구마가 퍼져 나갔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고구마를 재배하려 하지 않았다. 황무지에서 어마어마한 양을 캐낼 수 있는 작물이 제값을 받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황식물로 고구마와 감자만한 작물이 드물어 텃밭에 조금씩 심는 식으로 천천히 퍼져 나갔다. 실제 역사에서 고구마가 중국 땅 전체에 퍼지는 것은 청나라가 들어서고도 한참 지난 다음이었다.

“잘 됐소. 필요할 때 임노동자나 잘 보내주시오.”

“전하 덕택에 복건성 백성들이 먹고 삽니다.”

복건 순무 허부원은 목민관으로서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는 고산국에서 여러 가지를 배워서 복건성에서 시험하고 있었다. 고원지대에 차나무를 심어 가꾸고 언덕에서는 양을 키웠다. 손바닥만 한 땅이라도 놀리는 법이 없었다.

백성들은 그만큼 고달파졌지만 앞으로 굶어죽을 일은 겪지 않게 되었다. 복건성의 차는 품질이 좋아 이민호가 적당한 양을 수입해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판매하고 있었다.

무역왕국인 고산국 입장에서 불안하게도 순무라는 높은 직책을 가진 허부원이 상재에도 밝다는 것이다. 그는 고산국 건너편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다른 지역에서 사들인 상품을 고산국에 팔아 이익을 남겼다. 양잠도 열심히 해서 주로 생사를 고산국에 팔고 남는 생사는 비단을 짜서 다른 지역에 팔았다. 겨우 반 년도 안 지났는데 기근 때 고산국에서 지원해준 쌀값의 거의 절반을 갚았다.

그러나 황제에게 미움을 받았는지 이번 복건 순무를 끝으로 관직 생활을 마친다는 소문이 돌았다. 허부원도 그런 소문을 듣고서도 여전히 복건성 백성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일을 했다.

국왕 집무실 2층 창문에서 왕립여학교의 수영장이 내려다보였다. 초등학생들이 단체로 수영을 배우고 있어서 이민호가 슬쩍 보고 그냥 고개를 돌리려다가 우뚝 멈췄다. 그리고 다시 창문으로 내다보았다. 학생들 앞에서 수영장에 들어가기 전에 준비운동을 지도하고 있는 최 선생의 몸매가 장난이 아니었다.

수영복이 따로 없어서 최 선생은 흰색 속옷만 입고 준비운동을 하고 있었다. 흰색 속옷은 물에 들어가면 무색투명해진다. 이민호는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뭘 보세요, 주인님?”

“윽! 혹시나 수영장에서 사고가 우려돼서.”

“아직 덜 큰 애들 몸은 훔쳐보지 마세요.”

“그래.”

이민호가 누굴 봤는지 알면서도 혜영이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는 것 같았다.

“비올레타 양은 왜 궁성에 남아있는 거야?”

“조선말과 고산국 궁정생활을 배우겠대요. 주상아 공주님하고 친하기도 하고 공주님이 중국어와 조선말을 동시에 아시니까 배우기에 편하겠지요. 왜요? 비올레타 양한테 관심 있어요?”

혜영이 장난스런 표정으로 웃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다른 여자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고, 그것을 혜영도 잘 알았다.

“아니. 하는 짓이 꼭 간첩 같아서 불안해.”

“이상할 건 없어요. 우리나라가 이 주변에서는 가장 강하고 중요한 나라니까 당연히 관심을 가지겠지요. 주인님이 우리나라를 그렇게 만드셨어요.”

“칭찬 고마워.”

이제는 고산국을 우리나라라고 해도 어색함이 없었다.

행정업무를 6국에 대부분 이관하고 혜영이 감독을 하고부터 이민호는 할 일이 별로 없었다. 무기 개발할 때와 마찬가지였다. 혼자서 나사 만들고 강선 깎고 일일이 다할 때는 이민호 혼자서만 바빴지만 아랫사람들에게 떠넘기고부터는 결과가 나왔을 때 잔소리만 하면 되니 편했다. 대신 장인들에 대한 대우는 확실히 해줘서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행정도 마찬가지였다. 한글과 아라비아 숫자로 문서를 작성하라는 등 몇 가지 지침을 내려주고 일을 시켰다. 물론 장인들처럼 행정관료들도 과중한 업무에 죽어나갔다.

그러나 장인들과 달리 행정관료는 쉽게 인원이 충원되지 못했다. 조선에서 이민 오는 양반과 서출은 적고 마카오 대학에서 학생들이 졸업하고 귀국할 때 아주 잠깐만 숨통이 트였다. 그러나 다시 업무가 밀려들어와 관리들은 서류 속에 잠겨 허우적거렸다.

“아사달에서 온 편지에요, 주인님.”

“응. 동해국은 잘 돌아가나? 으음!”

이민호가 편지를 뜯어 읽었다. 여진족 출신 첨사 아오지는 의외로 달필이었고, 논리 정연하게 보고했다. 그런데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왜요?”

“9부 연합군이 건주여진에게 대패했다는군. 병력만 많으면 뭐해? 종대로 전진하다가 선봉이 포위당해 섬멸되고 나머지는 도주했다는데. 해서여진에서 인명피해가 상당한데? 패륵들도 다수 전사했어.”

해서여진 울라부 패륵 부잔타이는 포로로 잡히고 동가 공주의 아버지인 예허부 패륵은 전사했다. 예허부에서 새로운 패륵에 오른 부양구(布楊古)는 동생인 동가 공주를 누르하치에게 시집보내려 했으나 동가 공주가 거절했다. 그 대신 고모가 누르하치에게 시집갔다.

============================ 작품 후기 ============================

오늘 3회 연재가 과연 가능할까 모르겠습니다. 기다리지는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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