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01 36. 소 해적시대 =========================================================================
이민호는 계복과 함께 이번에 새로 간판을 올린 국방연구소로 향했다. 그리고 신무기를 개발하는 장인들을 언제나처럼 닦달했다. 기관총이나 7총신 연발총 둘 중에 하나만 완성되어도 일본 원정에서 조금 안심하게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산 넘어 산이었다.
“사격 과정에서 반동이 너무 심해서 첫 탄 이후 명중률이 현격히 떨어집니다. 완충기와 용수철이 못 버티고 부러지는 경우도 흔합니다.”
“음. 공기 용수철은 너무 복잡하고. 전령! 시계 장인 책임자를 불러와라!”
고산국에서 명나라에 해삼과 전복, 옥 도자기 등을 팔지만 가장 비싼 상품은 의외로 탁상시계였다. 고산국 장인들은 이민호에게 도움을 받아 마카오의 잡화점에서 구한 시계를 뜯어보고 그대로 복제했을 뿐만 아니라 보다 소형화할 수 있었다. 명나라와 일본은 자명종을 비슷하게 만들어내긴 했지만 열처리한 강철로 만든 용수철은 아직 생산할 수 없었다.
“소인 부르심을 받고 대령했사옵니다, 전하.”
“시계에는 철판 용수철을 쓰지 않소? 여기 개발 중인 기관총의 완충장치로 그 철판 용수철을 쓸 수 있겠소?”
“강력한 반동을 짧은 시간에 받는다면 필시 부러지거나 휘고 말 것입니다, 전하.”
“휴우! 알겠소. 돌아가도 좋소.”
완충기에 감긴 나선형 용수철을 더 강화할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예전에 TV 뉴스에서 봤던 내용이 떠올랐다. 용수철을 반대쪽으로 밀어 거꾸로 해놓으면 더 강한 힘을 받을 수 있으며 부피를 60퍼센트까지 줄일 수 있다고 했다. 그대로 따라하면서 개머리판 견착 부위에 유압식 완충장치를 추가하기로 했다.
“도련님! 장인들이 참 열심히 일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 저들에게 항상 고맙고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관총이나 연발총을 실전에 투입할 수만 있다면 일본 정벌이 훨씬 쉬워질 텐데 말이야.”
“도련님이 개인적으로 일본을 싫어하시는 것을 알지만, 이렇게까지 하면서 일본을 무너뜨리려고 노력하시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고산국 국가 입장에서 타당한 이유가 있습니까?”
“내가 일본인들을 싫어하니까.”
“에이! 미카 귀인이나 다른 일본 출신 여자들, 그리고 니시무라 겐타로 씨는 잘 믿으시면서 그래요.”
이민호가 개인적으로 알게 된 일본인들 중에서 나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모르는 일본 사람들은 왜 다들 그 모양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뭉치면 반드시 사고를 쳤다.
“일단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야. 조선을 침략한 자들은 대부분 죽었지만, 일본에 남아있는 자들도 공동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해. 침략을 당한 나라의 백성들이 고통을 겪었으니 침략을 지지하거나 순응한 백성들도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거지.”
“백성들이 반대하고 싶어도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이 시대에 현대 민주주의 원리를 적용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일본이나 조선의 백성들은 주권자가 아니기 때문에 책임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리고 국가를 운영하면서 국왕 개인의 감정을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도 사실 보기 좋지 않았다.
“사실 고산국이 발전하는데 일본이 방해가 되기 때문이야. 내가 구상한 영역 안에 하필 일본이 들어와 있는 것이 문제거든. 일본이 방해하려고 마음먹으면 동해국과 유구국, 아이누 섬, 그 외에도 많은 지역이 언제든 고립되거나 위협을 받을 수 있어. 그리고 일본은 조선을 침공한 것처럼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거지.”
“위치가 좀 그렇죠.”
19세기 말 일본은 주권선(主權線)과 이익선(利益線)을 설정하고 이의 수호를 위해 반드시 무력을 행사해야 하는 지역으로 삼았다. 주권선은 영토선이고, 이익선은 본토의 안위와 직결된다고 판단한 한반도와 요동, 산동 반도, 대만 등이 포함된 넓은 지역이었다.
남의 나라 영토든 말든 상관없이 일본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무력을 행사해야 할 지역이 이렇게 넓었다. 일본이 조선과 대만을 병탄해 주권선 안에 포함시킨 이후에는 이익선이 필리핀과 만주로 확대됐다. 이런 식이니 전 세계를 정복하기 전까지 일본인들은 결코 안심할 수 없고 끝없이 영토를 확장해야 한다.
미국은 태평양을 두고 일본과 양립할 수 없는 국가였다. 하와이의 진주만이 공격당했을 때 미국인들이 충격을 받은 것은 그 다음 방어선이 바로 미국 서해안이기 때문이었다. 현실적으로 거리 때문에 일본 함대가 미국 서해안을 공격하기 어렵지만 미국인들은 명백하고 급박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이차대전이 끝나고 일본을 농업국으로 만들려던 미국은 소련이 급격히 팽창하자 계획을 변경해 일본을 소련 공산주의의 침공에 대한 방파제로 삼았다. 또한 이를 위해 무역상 특혜를 부여해주었다. 1950, 60년대에 일본이 급성장한 배경에는 이렇게 미국의 세계전략이 있었다. 한국이 경제적으로 급격히 성장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일본이나 미국이나 이렇게 스케일이 컸다.
“그래서 아예 일본을 내 것으로 만들든지, 최소한 고산국의 일을 방해하지 못하게 만들려고 해. 앞으로 우리 상선들이 태평양을 자주 횡단할 텐데 태풍이 불면 자칫 일본 해안에 표류할 수 있거든. 그럴 때마다 배와 선원을 다 빼앗긴다고 생각하면 열불 나겠지. 매번 신경을 쓰거나 전쟁을 하느니 화끈하게 한 번 강하게 두들기는 편이 나아.”
안보 강박증에 걸린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이민호의 스케일은 무척 소박했다. 그리고 산둥반도에서 출항한 청나라 정크선이 큐슈를 침공할까 두려워한 일본이나, 베트콩이 카누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캘리포니아를 침공할까 두려워 베트남전에 참가한 미국과 달리 이민호는 일본이 고산국을 침공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봤다. 실로 안보 불감증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일본을 두들겨 팬 다음 억지로 우호국으로 만들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겠지요.”
“우호국이 될 리가 없지만 눈치 보게 만들 수는 있지. 왜놈들에게 얕보이면 절대 안 돼. 우리가 강하게 보일수록 진심으로 복속하고, 일본이라는 나라를 우리한테 팔아먹지 못해 안달이 날 거야.”
이민호는 매사에 일본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계복이나 이 시대 사람들은 모르지만 이민호는 일제강점기를 역사로 배운 사람이라 일본을 더욱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조선에서 넘쳐나는 명나라 사대주의자들이 얄미웠다. 이민호가 알기로 구한말 개화파라는 것들은 수구 사대주의와 다를 바 없는 그저 신식 사대주의자들에 불과했다.
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저녁이 되면 이민호는 가족과 함께 하려고 노력했다. 임신한 여자들의 침실을 방문해 건강을 살피고 되도록 많은 시간을 보냈다. 국왕의 특권으로 궁성에 여의사 2명을 상시 배치했다. 건강한 후사를 생산하는 것은 국가의 중대과업이라서 여의사들도 흔쾌히 임무를 받아들였다.
여러 명이 동시에 임신하니까 후사에 대한 압박감이 많이 줄어들었고, 동시에 이민호에게 시간이 좀 남았다. 그래서 남는 시간을 임산부들을 위해 사용했다. 이민호는 아라의 시녀 아마에게 시켜 편안한 임산부용 옷과 아기 옷을 만들고 목공들에게 아기 침대와 장난감을 만들게 했다.
“2개월인데 아직 배가 안 부르네?”
“당연하죠. 만지지 말고 보기만 하세요.”
“그래. 임신 초기에 조심해야지. 너무 뜨거운 물에 목욕하면 안 돼. 체온보다 살짝 더운 물에 잠깐만 들어가. 알았지?”
이민호는 여자를 임신시킨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 몹시 허둥거렸고, 혜영은 무척 예민해졌다. 이민호는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한 후 얼마 되지 않은 시기라 매사에 조심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주인님. 여기만 계시지 말고 다른 후궁들 방에도 가보세요.”
“혜영이도 참! 고집 피우지 말고 정비에 오르라니까.”
“훗! 만약 원자를 생산한다면 그때 다시 한 번 생각해볼게요.”
욕심이 없는 혜영은 항상 이민호와 나라를 먼저 생각했다. 그것이 안타깝기도 했지만 가장 혜영다웠다.
“전하! 귀인 마마께서 육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지금이 중요한 시기입니다.”
“알았소.”
“어서요!”
이민호는 단호한 여의사에 의해 혜영의 방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이민호가 가야 할 곳은 아직 많았다.
임신한 후궁은 혜영과 민희, 일본 출신 네이, 유구국 출신 아야였다. 임신한 줄 알았던 브루나이 공주 네나와 다나는 단순한 생리불순으로 밝혀졌다. 죄송하다며 펑펑 우는 공주들을 달래주느라 이민호는 아주 혼이 났다. 그러나 현대인의 의식이 남아있는 이민호 생각에는 갓 열아홉에 접어든 어린 공주들은 조금 나중에 임신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민희는 침대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비번인 호위들이 민희의 말동무를 하면서 24시간 시중을 들었다. 네이는 다른 시녀와 함께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둘은 여의사가 허락할 때까지 침대에서 못 나온다고 이민호에게 하소연했다.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일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이민호가 민희와 네이의 방을 거쳐 아야의 방에 들어갔다. 아라 공주가 시녀처럼 아야를 돌보고 있었다.
“전하! 어서 오세요.”
“임산부는 일어나지 말라. 그리고 아라 공주는 일하느라 피곤할 텐데 일찍 침소에 드는 게 좋겠소.”
아라 공주가 나비가 날듯이 뛰어와 이민호의 품에 답삭 안겼다. 아라 공주가 급성장 중이라 예전처럼 조카나 어린 여동생처럼 안 보여서 이민호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러나 아라 공주는 예전처럼 여전히 이민호의 품에 파고들었다. 조금 더 봉긋해진 가슴이 팔에 느껴졌다.
“아야가 더 힘들 것 같아요, 전하.”
“맞소. 가만히 있는 게 더 고역일 것 같소. 아야는 조금 더 참아라. 산파 어른과 의사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네, 전하.”
침대에 누운 아야가 몹시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주인보다 먼저 회임한 탓에 아라 공주에게 미안하게 여겼다.
“오늘은 여기서 잘까? 이보시오, 산파! 안고 자기만 하는 건 괜찮겠지요?”
“안 됩니다, 전하. 침소에 계시다가 만약 다리를 산모의 배에 올리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끙! 알겠소.”
유구국에서 급히 파견한 40대 산파가 아야에게 산모에게 좋은 음식과 피해야 할 음식을 가르쳐주는 것을 이민호도 옆에서 들었다. 산파는 바나나는 산모에게 좋은데 바나나 같은 것은 당분간 먹지 말라고 경고했다. 시녀들이 입을 가리며 웃음을 참았고, 아라 공주만 어리둥절했다. 이민호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방에서 나왔다.
이민호는 주상아 공주의 별궁으로 향했다. 다른 후궁들은 배란기 하루만 방문했는데 주상아 공주는 처음부터 이틀 연속 방문해 이민호가 힘을 쏟았다. 그러나 아직 회임을 못하자 주상아 공주가 몹시 죄스러워했다.
이민호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이번 달에는 배란기 전후 4일 연속 방문했다. 그렇다고 다른 후궁 차례를 건너뛴 것도 아니었다. 이민호는 튜브를 꾹꾹 눌러 얼마 안 남은 치약을 짜내는 장면을 상상했다. 지금이 딱 그 꼴이었다.
“제가 나이가 많아서 회임하기 어려울지도 몰라요.”
“부담 갖지 마시오. 공주는 이제 겨우 22살 아니오? 아직 어린 나이요.”
“어머! 제 나이는 잊어버리세요, 전하.”
주상아 공주는 후궁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다. 그래서 공주도 항상 나이를 신경 쓰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민호가 느끼기로 주상아는 아직 활짝 피지도 않은 어린 나이에 불과했다.
이민호는 주상아의 매끄러운 종아리를 손에 받치고 유려한 곡선을 감상했다. 마치 신이 빚은 듯한 아름다운 종아리와 허벅지였다. 주상아 공주가 낳은 아기라면 무척 귀여울 것 같지만 이미 여유가 생긴 이민호 입장에서는 주상아가 출산을 안 하더라도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국왕의 여인으로서 임신을 못하는 그 자체만으로 죄가 될 수 있는 시대였다. 그래서 주상아를 죄인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힘을 쏟았다. 이런 미인을 임신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이민호는 불끈 힘이 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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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시대라면서 해적은 아직 등장하지도 못하는군요. ㅜ.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