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04 36. 소 해적시대 =========================================================================
그러나 섬 선착장에 도착해보니 예상한 것과 정반대였다. 치열한 격전을 치렀는지 등대 주변에 명나라 노무자들이 주로 입는 허름한 옷을 걸친 자들 20여 명이 쓰러져 있었다. 등대 한쪽 구석에는 해병들이 40여 명에 달하는 자들을 무릎 꿇린 채 총을 겨누고 있었다. 풍랑에 의해 반쯤 부서진 채 선착장에 계류된 갤리선은 단 한 척이었다.
“국왕전하께 충~ 성!”
“좋았어. 아주 잘했다. 해적 놈들이 체구가 크군 그래.”
이민호가 전선에서 내리자 해병들이 받들어 총 자세로 이민호를 맞이했다. 이민호는 한 시간 전에 등대섬에 상륙했다가 잡혔다는 포로들부터 살폈다.
포로들은 어부나 상인들치고는 지나치게 건장한 체구였다. 동아시아의 바다에서 어부나 상인이 기회를 틈타 언제든 해적으로 돌변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어느 정도 세월이 흘러 전문 해적집단으로 발전하면 일반인들과 달리 평균보다 큰 체구의 해적들이 많이 남게 된다. 이들은 더 이상 평범한 어부나 상인으로 돌아갈 수 없는 직업적인 해적이었다.
그런데 선착장에 접안한 갤리선은 이민호가 알던 총독의 기함이 아니었다. 그래서 해적 포로에게 이민호가 중국어로 물었다.
“필리핀 총독의 기함은 어디로 갔나? 너희들 두목이 탄 배 말이야.”
“두목이 탄 배는 저희들보다 먼저 북쪽으로 떠났습니다. 벌써 광저우에 도착해 배에서 내렸을 겁니다.”
해적이 순순히 사실을 말할 리가 없었다. 이민호는 기함에 탄 해병들을 시켜 포로들을 포박시켜 기함으로 옮겨 실었다. 총독을 잃고 분노한 마닐라의 에스파냐 사람들에게 갖다 주려고 해적들 시체도 남김없이 실었다. 갑판에 오른 비올레타가 이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주 잘했다. 분대장을 비롯해 전원 일계급 특진이다.”
“감사합니다!”
등대를 지키는 해병들에게 즉석에서 포상을 내려준 이민호는 즉시 전선을 출항시켰다. 해적이 말한 것과 달리 해적 두목은 아직 이 근처에 도달하지 않은 것 같았다. 멀리 동쪽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주력 함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항법사! 해적선의 예상 위치를 계산했나?”
“목표는 범선이 아닌 노를 젓는 갤리선입니다. 태풍이 마닐라 근해를 지났다면 예상 위치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고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사실 시간과 갤리선의 속도로만 따지면 해적선들이 광저우에 이미 도착하고도 남습니다.”
지금도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태풍의 중심은 이미 지나간 다음이었으나 아직도 파도가 3미터 넘게 출렁댔다.
매 시간마다 측정하는 풍향과 풍속, 해류가 매번 달라졌다. 비슷한 체급의 갤리선을 탄 페드로가 고산국에 도착할 정도라면 해적이 탈취한 갤리선들은 이미 광저우에 도착했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알아내! 라고 명령하면 어떡할 텐가?”
“그래도 모릅니다, 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명확하지 않은 정보를 국왕전하께 보고해서 잘못된 지시를 내리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훌륭해. 앞으로도 그렇게 정확한 보고를 할 수 있도록.”
마카오 대학을 졸업한 항해사와 항법사들은 나이가 젊어도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이 든 함장들의 경험과 감을 무시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이들에게 경험이 충분히 쌓이면 신뢰할 만한 함장들이 될 것이다.
총함장 이순신이 지휘하는 주력 함대가 명나라 남쪽 해상을 봉쇄하기 위해 동서로 늘어서는 사이 이민호는 분함대를 이끌고 남서쪽으로 직행했다. 필리핀에서 출발한 갤리선이 북쪽으로 가지 않았다면 남는 방향은 서쪽 안남 방향뿐이었다.
현재 베트남이 북쪽은 찐 정권, 남쪽은 응우옌 정권으로 나뉘어 있었다. 막 왕조는 올해 드디어 멸망했고 예전의 레 왕조가 다시 들어섰으나 실권을 갖지 못했다. 북쪽의 찐 정권에서는 권력을 장악한 찐똥(鄭松)이 1572년 아인똥(英宗)을 살해하고 떼똥(世宗)을 옹립해 그가 현재의 황제였다.
이민호는 전선 9척과 탐망선 한 척으로 단종진을 형성해 남북으로 길게 이어지게 해서 바다를 지났다. 전투가 벌어지고 있지 않아서 이민호가 탄 국왕좌승함이 함대 선두에 섰다.
탐사선이 이미 위도와 경도를 측정한 서사군도를 함대가 지나는 사이 풍랑이 점점 가라앉았다. 그러나 드넓은 바다에서 아직 갤리선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민호는 서사군도에서 다시 서쪽 방향으로 함대를 항진시켰다. 해남도에서 남쪽으로 200km도 떨어지지 않은 해상이었고, 안남의 해안에서 100km 이내였다.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지 하루가 지나자 비올레타도 많이 진정되었다. 이민호는 그녀를 집무실로 불러서 물었다.
“비올레타 양. 다시 한 번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리는 바이오. 그런데 명나라 해적들이 총독을 살해한 이유가 뭔가요?”
“모르겠어요. 해적 리마홍의 후예들인지, 아니면 마닐라에서 에스파냐 병사들과 싸우다 죽은 해적들의 끄나풀인지 몰라요. 안타깝게도 에스파냐에게는 적이 너무 많아요.”
1574년대에 마닐라를 불태우고, 그 이전 1570년에 마닐라를 정복했던 마르틴 데 고티를 붙잡아 처형한 명나라 출신 해적이 리마홍이었다. 그러나 후안 살세도에게 반격을 받아 루손 섬 북부 팡가시난에서 리마홍은 불에 타 죽었다.
그런데 바기오의 남서쪽인 팡가시난에 리마홍의 부하 해적들과 그 후예들이 자리 잡고 살았다. 지금은 고산국 해군력이 워낙 강해 함부로 도전해오지 않지만 기회가 생긴다면 언제든 배를 타고 해적질에 나설 가능성이 있는 집단이었다. 복건성 등 명나라 남해안에 살면서 어업과 밀무역에 종사하는 여러 해민(海民) 집단, 해적질이 국가사업인 예전 술루왕국, 큐슈의 왜구,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해적 등등 천지사방에 해적들이 들끓고 있던 시대였다.
이민호는 국왕어승함에 탑승한 해병 지휘관을 불러 해적 포로들에 대한 심문을 하도록 명령했다. 장교들은 어느 정도 고문 방법을 알고 있었고, 고문 교본은 정보부를 운영하는 미카가 닌자들의 고문법을 참고해 작성했다.
“본보기로 해적 몇 명을 심하게 고문해서 끔찍한 비명소리가 나게 해. 다른 놈들을 겁을 줘서 고문하기도 전에 술술 불게 만들어.”
“예! 해적들이 필리핀 총독을 암살한 목적을 반드시 밝혀내겠습니다.”
해병 중위가 집무실에서 나가고 얼마 안 돼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배 안에 울려 퍼졌다. 비올레타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비올레타 양! 요즘 마닐라 인구가 얼마나 되오?”
“마닐라에 에스파냐 사람이 보통 7천 명 정도가 거주해요. 명나라 사람이 1만에서 계절에 따라 최대 3만, 필리핀 원주민 2만, 그리고 가끔 일본에서 추방된 기독교인들이 잠시 들렀다가 다른 지역으로 떠나요.”
“평균 5만은 넘어가겠군요. 유럽에서 이 정도 인구면 대도시 아니요?”
“이탈리아 북부 도시국가나 각국의 수도를 제외하면 지중해에서는 마르세유 정도, 북유럽에서는 플랑드르 지방 도시들이나 단치히가 이 정도 규모에요.”
당시 유럽에서 인구가 많은 지역은 대부분 상공업도시였다. 플랑드르 지역 여러 도시들은 모직물 공업 덕분에 발전했다. 아시아 지역에 비해 인구의 도시 집중이 덜한 편이었으나 산업혁명이 일어난 후에는 유럽에서도 대도시가 발달하게 된다.
“에스파냐 사람들은 명나라 상인 집단이 두렵소?”
“예. 솔직히 그래요. 필리핀 원주민들과 달리 중국인들은 백인이잖아요. 대포와 총을 전쟁에 사용할 정도로 문명인이고 도자기는 유럽 기술로는 모방하지도 못해요. 그리고 마닐라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이 상인이라지만 실체는 거의 해적으로 봐도 돼요.”
“고산국 주변도 상인 겸 해적들로 둘러싸여 있소만, 그런대로 공존하고 있다오. 마닐라 정도면 에스파냐 본국의 힘을 제외하더라도 충분히 강한 세력이오. 그대들이 중국인들을 두려워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먼저 에스파냐인들을 두려워할 것이오.”
“충고 감사해요. 하지만 20년 넘게 두 세력 사이에 쌓인 악감정이 쉽게 풀릴 것 같지는 않아요.”
비올레타가 운영하는 고아원에 사는 아이들은 필리핀 원주민들보다 부모를 잃은 중국인 고아들이 훨씬 많았다. 비올레타 나름대로 에스파냐인들에게 학살당한 중국인들에게 속죄하며 살아온 셈이었다.
고아원 운영비가 생각난 이민호가 서랍을 열어 금괴 세 덩이를 꺼내 책상에 올렸다. 그리고 비단으로 만든 작은 가방에 담아서 비올레타에게 건넸다. 비올레타의 가슴골을 못 봐서 아주 약간 섭섭해 하는 이민호의 감정을 읽었는지, 그녀가 살짝 상체를 숙여 감사 인사를 하면서 가슴골 안쪽을 보여주었다.
“아름답소. 험! 험! 혹시 마닐라에서 일본과 어느 정도 규모로 무역을 하는지 알 수 있겠소?”
“일본 상선, 명나라 상선, 에스파냐 상인이 탄 마닐라 범선이 나가사키나 히라도를 왕복하고 있어요. 그리고 멕시코로 향하는 갈레온이 북태평양을 횡단하기 직전에 최종적으로 거치는 곳이에요. 1년에 못해도 70만 냥은 될 거여요.”
“명나라는 공식적으로 일본과 무역을 하지 않소. 포르투갈과 일본 사이의 무역액이 그 이하, 고산국과 유구국까지 해서 일본의 은 유출량이 매년 3백만 냥 가까이 되겠구려.”
고바타 아쓰시(小葉田淳)의 연구에 의하면 17세기 전반까지 100여 년 남짓한 기간 동안 일본에서 명나라로 흘러간 은의 양이 대략 1만 톤, 2억 6천만 냥 이상으로 보고 있다. 평균적으로 매년 100톤, 260만 냥 이상의 은이 일본에서 명나라로 꾸준히 흘러 들어갔다. 명나라가 일본과 공식적인 무역 관계를 단절한 이후 포르투갈, 유구국, 에스파냐 등이 무역을 중개했으나 최종적으로 은의 종착지는 항상 명나라였다.
볼리비아 포토시에서 채굴한 은을 많은 해에는 100톤, 적어도 50톤을 누에보 에스파냐, 즉 멕시코 부왕령에서 마닐라로 보내 상품수입 자금으로 삼은 것과 비교해 오히려 더 많은 양이었다. 이 시대 발트해 연안 국가들의 일 년 무역량이 은 50톤 정도였으니, 매년 비슷한 금액을 멕시코에서 마닐라로 한꺼번에 보낸 에스파냐의 부유함과, 명나라 무역시장의 거대함을 대략 알 수 있다.
“요즘은 일본 은의 절반 정도, 마닐라 은의 3분의 2가 고산국으로 들어가고 있죠?”
그러나 고산국이 생기면서 일본에서 명나라로 가는 은의 흐름이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다. 명나라에서 은 가치의 하락 속도가 원래 역사보다 더딘 것은 고산국이 중간에서 은을 대량 흡수한 때문이었다.
일본 상인들이 수입하는 대표적인 상품은 비단과 도자기, 면포와 설탕이었다. 적은 양에 불과한 명나라 약재와 서적 일부를 제외하곤 고산국에서 생산한 상품이 다른 나라, 특히 명나라 이름을 달고 일본에 수출되고 있었다. 이 시대 일본은 아직 면직물 수공업이 널리 확산되지 못해 면포는 고급 제품 또는 군수품에 속했다.
“하하! 그렇소. 비올레타 양은 무역도 잘 아시는군요.”
“어머나! 저는 조선말을 다 익힌 다음에 마닐라로 돌아가야 한답니다. 에, 그래도 전하의 품은 따스했어요.”
“내가 뭐라 그랬소? 험! 험! 괜히 오해하지 마시오.”
비올레타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총독의 손녀라서 그런지 아는 게 많아 이민호는 비올레타가 욕심이 났다. 물론 인재 등용 측면이었다. 그러나 총독이 사망함으로써 이제 비올레타는 총독의 손녀가 아니었다. 그래서 비올레타를 더 쉽게 끌어들여 중노동에 시달리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전하! 남쪽 바다에서 갤리선을 발견했습니다!”
“속도를 올려 따라잡으시오!”
“예, 전하! 하오나 안남의 해안선에 가깝습니다.”
“어서 가봅시다.”
이민호는 갤리선 발견 소식을 전해준 함장, 비올레타와 함께 함교로 뛰어갔다. 저 멀리 남쪽 바다에서 기다란 2층 배가 노를 저어 서쪽으로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비올레타가 비명 비슷하게 높은 소리를 질렀다.
“할아버지가 탔던 갤리선이 맞아요!”
“함장! 최고 속도로 추격하시오.”
“지금이 최고 속도입니다, 전하.”
고산국 전선이 추격해오는 것을 발견한 해적들이 그야말로 죽어라 갤리선의 노를 저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거리가 좁혀들었다. 갤리선이 전선의 함포 사거리 아슬아슬하게 접어들었을 때였다. 그리고 안남의 해안선이 가까워졌을 때였다.
현재 위치를 해도를 통해 확인하니 남조 응우옌 정권의 거점 도시인 푸 쑤언, 현대 후에 해안에서 남동쪽으로 50km 정도 거리의 해역이었다. 이민호는 혹시 이 지역이 나중에 베트남의 다낭이 되는 곳이 아닐까 생각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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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목표 해적선이 나왔군요. 휴우~
오전 또는 오늘 중에 한 회 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