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06 36. 소 해적시대 =========================================================================
“와아~ 작은 해적선을 아주 뭉개버렸어요! 함포를 쏠 때마다 해적선이 가라앉아요!”
비올레타가 신이 나서 떠들었다. 상대가 세키부네 크기 정도만 해도 부담 갈 텐데 작은 해적선 따위는 그냥 밀어버려도 큰 상관없었다. 좌승함이 판옥선보다 몇 배나 크고 구조적으로 단단히 만든데 반해, 해적선들은 밀도와 경도가 낮은 나무를 사용해 가볍게 건조한 탓에 왜선보다 더 약했다. 선체 이음매마다 쇠못을 사용해 이것이 녹이 슬면서 구조 자체가 약해진 탓도 있었다.
좌승함은 선체 전체를 티크 원목으로 특별히 튼튼히 만든 데다 외판에 강철판을 덧붙이고 여기에 더해 바닷물로 인한 부식을 막기 위해 얇은 구리판을 덧입혔다. 그리고 해적선과 충돌한 곳은 좌승함의 함수 아래 약간 툭 튀어나온 램 부분이었다. 화력과 방어력, 기동력 모든 면에서 좌승함이 조선의 거북선보다 훨씬 강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이 왜선을 당파했다는 것은 단지 적선을 깨뜨렸다는 뜻이었다. 그 수단은 충돌이 아니라 지자, 현자총통 등 화약무기류였거나 불타는 섶이었다. 현대에 적함을 ‘격침’시켰다면 공격해서 침몰시켰다는 뜻이지 격(擊)이라는 말 뜻 그대로 부딪친 것이 아닌 것과 같았다. 그러나 여기서는 19세기 장갑함들이 적함을 상대로 충각 전술을 사용한 것처럼, 거대한 좌승함이 작은 배들을 부딪쳐 깨뜨리면서 해적선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잠깐만 봅시다.”
“네! 전하!”
비올레타가 활짝 웃으며 이민호에게 자리를 비켜줬다. 이민호는 아군 전선들이 얼마나 왔는지 궁금해졌다. 지금 이 시간이라면 전선 두 척 정도가 전투 해역 외곽에 도착해 함포로 지원 사격을 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잠망경을 동쪽으로 돌리니 전선 두 척이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해적선을 향해 함포를 쏘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마치 임진왜란 해전에서 거북선이 왜군 함대 사이를 누비는 동안 왜선들을 포위한 판옥선들이 화력지원을 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다만 그 숫자는 훨씬 적었다.
아직까지는 해적선들이 도망가지 않고 싸우려 했다. 지금까지 좌승함 단 한 척에 의해 해적선들이 30척 넘게 격파됐어도 해적들은 대포와 화승총을 쏘면서 어떻게든 좌승함에 접근하려 했다. 마치 좌승함에 올라타는 순간 승리라도 얻을 것처럼 악착같이 노를 저어 오던 해적들이 포탄이 터지는 순간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배와 함께 가라앉았다.
해적들에게는 안됐지만 좌승함 갑판에 밧줄을 걸어 올라올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운 좋게 함포의 사각 아래로 접근했더라도 해병들이 총안을 통해 총격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지상전에서 적이 방진을 짤 때 외에는 큰 살상력을 보이지 않던 유탄도 해적들이 밀집한 곳에 날아가 터지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게다가 유탄 탄종이 소이탄일 경우에는 어김없이 화재가 발생했고, 해적들이 물을 부어 불을 쉽게 끌 수가 없었다.
“주인님! 저도 보고 싶어요.”
“응.”
이민호가 민영에게 자리를 비워줬다. 다시 잠망경을 쓰려고 기다리고 있던 비올레타가 이민호에게 달려들어 목에 두 팔을 감았다.
“전하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분일 거여요.”
비올레타가 그 말을 마치고 이민호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이민호도 비올레타를 껴안고 입을 맞췄다. 평소 호감을 느끼고 있던 여자와 첫 키스라서 그런지 입안이 더 달콤하게 느껴졌다. 혀 두 개가 적극적으로 뒤엉켰다.
이민호는 양쪽 모두 갑옷을 입고 포옹하는 것이 불편했으나 다시 오지 않을 기회 같아서 비올레타를 꼭 껴안았다. 그러나 생각만큼 짜릿하지는 않았다. 마치 축구 경기에서 응원하는 팀이 골을 넣고 나서 흥분한 관중들이 옆 사람 아무하고나 키스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오해하지는 말아주세요, 전하. 그저 감사의 표시예요.”
“물론이오.”
입을 뗀 비올레타가 숨을 격하게 몰아쉬었다. 빨개진 얼굴과 이민호의 눈길을 피하는 눈짓이 사랑스러웠다. 다시 품에 안으면 키스를 거절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그러나 앞으로 관계가 어색해질까 봐 꾹 참았다. 옆에서 민영이 지켜보고 있어서 민망한 것도 있었다.
“끝났어요? 주인님! 저도요.”
“헉!”
이때 민영이 몸을 던져 이민호에게 안겼다. 이민호가 오늘따라 적극적인 민영과 진하게 입을 맞췄다. 살짝 눈길을 돌려보니 비올레타가 활짝 웃고 있었다. 이민호와 눈길이 마주친 비올레타가 허둥지둥 잠망경 접안구에 눈을 갖다 댔다.
“총병들이 가득 탄 해적선이 접근해요. 아! 갑판에서 포탄이 터져서 열 몇 명이 한꺼번에 쓰러졌어요. 절반은 물에 빠졌어요. 배 밑바닥이 뚫려서 물이 새나 봐요. 해적선이 점점 가라앉아요!”
비올레타가 해주는 라디오 중계방송을 들으면서 이민호가 민영을 꽉 껴안았다. 민영이 갑옷을 입었어도 이민호가 손을 뒤로 돌리니 만질 곳이 꽤 많았다. 입을 떼고 서로 눈을 바라봤다.
“민영이 너를 사랑해.”
“저, 저도 주인님을 사랑해요.”
이민호가 다시 입을 맞추자 꼭 감은 민영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이민호는 민영이 평생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투에 참가하는 것도 위험하겠지만 이 시대에는 무엇보다 전염병이 생명에 가장 큰 위협 요소였다. 말라리아도 위험했고, 가끔 페스트가 유행해 사람들을 마을 단위로 몰살시키곤 했다. 그나마 천연두는 종두법 개발로 고산국과 조선에서는 거의 발병하지 않았다.
이민호는 여자들과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여러 가지 약품 개발을 서두르기로 결심했다. 요즘 마카오 대학에 유럽 학자들까지 가세해 의학과 생물학 분야에서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었다. 연구 과실을 그 동안 참여한 연구자들이 자연스럽게 나눠 유럽의 본국에 보내는 식이었지만 이민호는 최소한 의약 분야에서만큼은 독점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어딜 가든 민영이 네가 함께 가줬으면 좋겠어.”
“저는 어디든 주인님을 따라갈 거여요.”
“그래, 고마워.”
이민호가 민영을 품에 안고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앞으로 일이 계획대로 된다면 인도와 이집트, 북미 대륙에는 이민호가 한 번쯤 직접 가봐야 했다. 그때 옆에 민영이 있어주면 좋을 것 같았다.
“이 배 어때? 안전하니까 이제 내가 가끔 전쟁에 나가도 되겠지?”
“웅~ 배에만 계시면 안 되나요?”
“가끔 지상전도 지휘해야지. 위험한 곳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을게.”
“제가 주인님을 지켜드릴 거여요.”
“항상 고마워.”
좌승함의 방어력 덕택에 궁성에 있는 아내들을 설득하기 쉬워질 것 같았다. 지상전에 나설 때 만에 하나 불리해지더라도 여차하면 병력과 함께 배로 도망가면 되니 훨씬 안전했다.
현재 고산국은 국왕이 잠시 자리를 비워도 잘 굴러가고 있었다. 이민호는 국가의 발전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정치 지도자로서 중요하지 관리 같은 일은 행정가들이 맡아야 할 일로 봤다. 장인이나 과학자들이 새로운 물건을 발명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그들이 스스로 알아서 해야 했다. 다만 어느 분야에 지원을 얼마나 많이 해줄지 결정하는 것이 정치가의 몫이었다.
물론 전쟁도 장군이 해야 할 일이었지만 국가의 운명을 걸어야 하는 중요한 전쟁에는 국왕이 빠지기 어려웠다. 조만간 시작될 일본 원정이 그런 중요한 전쟁이었다. 게다가 다국적 연합군이 참전할 예정이니 전체를 조율해줄 사람이 반드시 필요했고, 이민호가 가장 적임자였다.
“해적들이 도망가요!”
“잠깐만 봅시다.”
이민호가 잠망경을 잡고 한 바퀴 천천히 돌아 전체 상황을 파악했다. 해적선은 100여 척이 불타거나 반쯤 침몰하고 있었고, 해적선들이 북쪽으로 점점 밀리다가 한꺼번에 우르르 도망가기 시작했다. 동쪽에서는 아군 전선 세 척이 해적선들을 따라가면서 계속 함포를 발사했다.
임진왜란 내내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에게 당했던 해전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조선 수군이 해전에 나설 때 거북선이 왜군 함대 안을 헤집고 다니는 동안 바깥에서 포위한 판옥선들이 치명적인 장군전 종류를 날려 배를 무너뜨렸다.
지금 좌승함이 거북선 역할을 한다면 조선 수군의 해전 양상과 딱 닮아 있었다. 아군 전선이 세 척에 불과하지만 발사속도와 화력으로 비교하면 전라좌수영에 못지않을 정도였다.
멀리 수평선에서 전선 한 척이 더 달려오고 있었다. 전선들이 약 50리 간격으로 바다를 수색하고 있었으니 약 한 시간에 한 척 꼴로 전선들이 이곳에 합류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전선 9척이 모두 합류하기 전에 해전이 끝날 것 같았다.
이민호는 다시 해적선들을 살피다가 특이한 갤리선을 발견했다. 지금까지 전투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 노잡이들이 부상자 없이 가득 타고 있었고, 2층 갑판에서는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부하들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다.
“함장! 마닐라 총독의 갤리선이 북서쪽으로 도주하고 있소. 격침시키지 말고 추격해서 나포하시오!”
“예! 전하.”
이민호가 계단을 반쯤 내려와서 함장에게 지시했다. 함장도 갤리선의 위치를 틈틈이 파악하고 있었는지 금방 조타수에게 정확한 타각을 지시했다.
이민호가 다시 견시실로 돌아왔다. 민영과 비올레타가 교대로 잠망경을 보면서 마치 자매처럼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해적들이야 아주 죽을 맛이겠고, 실제로 지금까지 수천 명이 죽었겠지만 민영과 비올레타는 적들의 죽음 앞에서도 생글생글 웃을 수 있는 여자들이었다. 두 사람이 특이한 것은 아니고 그만큼 남녀노소 떠나서 모든 사람들이 전쟁의 논리에 익숙한 시대였다.
“북쪽에 중국 해적이 아닌 함대가 새로 나타났어요!”
“어디 잠시 봅시다. 20척 넘네. 아! 안남 응우옌의 수군이오.”
북쪽의 찐 씨나 남쪽의 응우옌 씨나 후 레(後黎) 왕조의 신하를 자칭해서 두 세력을 명백히 구별하기 어려웠다. 베트남의 막 씨 황조는 레 씨로부터 선양 형식으로 황위를 찬탈했다가 농민들의 레 씨 부흥 운동에 의해 지난해에 결국 축출됐다. 사실상 베트남의 왕이나 다름없고 실제로 왕호를 쓰는 권력자인 찐 씨라 해도 새 황조를 개창할 용기가 없었다. 이 시대 베트남에서 유교가 그만큼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응우옌 정권(阮王)의 수군은 함선 숫자는 적었으나 해적선들에 비해 배가 제법 크고 돛과 노 양쪽을 갖춘 범노선이었다. 게다가 대포와 화승총으로 확실히 근대적으로 무장했다. 아직 멀었지만 원래 역사에서 1642년에 북쪽의 찐 씨가 네덜란드와 연합해 쳐들어왔을 때 네덜란드 범선 세 척을 쳐부순 배들이었다.
베트남 수군이 2열 횡대로 함대 진형을 짜더니 도망치는 명나라 해적들을 북쪽에서 막아 세운 다음 대포와 화승총, 그리고 활로 때려잡고 있었다. 고산국 전선 네 척이 좌승함 좌우에 따라붙으며 해적들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밀어붙였다.
아직 150여 척이나 남은 해적선들이 베트남 함선들과 갑판을 맞대고 칼질을 해댔다. 좌승함을 포함한 고산국 전선 5척보다는 베트남 수군 20여 척이 약하다고 판단해 한쪽을 뚫고 도주하려는 시도였다.
수시로 왜구로 전환하는 일본의 상선이나 심지어 왜구의 배를 노략질하기도 하던 명나라 해적들이라 단병접전만큼은 막강했다. 그러나 베트남 수군도 칼싸움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았다.
“어? 제법 잘 싸우네.”
“어디, 어디! 저도 봐요.”
젊은 여자 둘이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비벼서 행복했지만 이민호는 일단 잠망경에서 물러섰다. 민영과 비올레타가 교대로 해전을 구경했다.
“아? 우리 전선들이 나타났어요.”
“에스파냐 군선들이 말이오?”
“아니요. 고산국 전선 10여 척이 북쪽에 나타났어요.”
이민호가 잠망경으로 확인해보니 이순신이 직접 함선들을 이끌고 베트남 수군 뒤로 다가오고 있었다. 전선 20여 척으로 명나라 남부 바다를 봉쇄하고 나머지 전선을 이끌고 온 것 같았다. 이민호가 이끄는 분함대와 동반했던 탐망선이 위급 신호를 확인하고 급하게 이순신의 기함에 달려가서 알린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셈인지 분함대 소속 전선들보다 더 빨리 온 것이 이민호로서는 무척 신기했다.
베트남 군선들과 싸우던 해적들은 반대쪽에도 고산국 전선들이 출현한 것을 발견하는 순간 즉시 공황에 빠졌다. 베트남 군선에 넘어가 칼싸움을 하던 해적들까지 일제히 해적선으로 돌아가 도주하려 했다.
그러나 이때는 전선이 15척에 달하고 베트남 군선도 20척이었다. 100여 척 남짓한 작은 해적선들은 완전히 포위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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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중으로 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