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25 38. 큐슈 점령 =========================================================================
상륙한 첫 날은 상륙 교두보가 아직 안전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왜군이 반드시 야습해올 것으로 예상한 이민호는 고산국 전선 43척 중에서 10여 척을 제외한 나머지를 큐슈 나고야 서쪽에 정박시켰다.
고산국 함대 소속 기관 수송선 25척과 대형 외륜선 20척은 대마도에 3연대 병력을 하선시킨 다음 동래로 향했다. 여진과 조선 기마병 2만 3천 기를 승선시켜 다시 돌아올 예정이었다.
국왕좌승함에서 내린 이민호는 계복과 참모들을 데리고 해안에 설치된 연합군 지휘 막사로 자리를 옮겼다. 여러 부대에 전령을 보내자 잠시 후 예하 병력이 숙영지를 건설하는 중에 지휘관들이 모여들었다. 아직 상륙하지 않은 병력이 많이 남았지만 일단 명군과 조선군으로 이뤄진 주력부대의 상륙작전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큐슈 히젠 나고야에 상륙한 연합군은 좁은 지역 안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서 제대로 숙영지 건설조차 하기 어려웠다. 다만 2년 전에 왜군이 대규모로 주둔할 때 파놓은 우물이 수백 개나 있어서 급수 사정은 그나마 나았다.
남쪽으로 보낸 특전대대 소대 전령이 말을 타고 달려와 보고했다. 일반적인 고산국 육군 병사들이 빨간색과 금색이 많이 들어간 화려한 전투복을 착용한 것과 달리 특전대대 전령은 시든 낙엽과 같은 갈색 위장복을 입고 있었다.
“왜군 5천여 명이 목책에서 남쪽으로 10리 정도 떨어진 언덕 뒤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진채를 내린 것은 아닙니다. 정찰대 지휘관은 그 왜군이 증원을 받은 다음 목책선에 야습을 시도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목책선을 지키는 남병은 야습에 대비해 조총 사거리까지 목책 주변의 나무와 풀을 베어 충분한 시야를 확보했습니다.”
며칠간의 포격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은 왜군 주력은 내륙 깊숙이 이동해 주둔하고 있었다. 어수선한 상륙 첫날인 오늘밤에 반드시 야습을 시도할 것으로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잘하고 있군. 만약 적이 야습을 해올 경우 특전소대가 남병에게 조명탄 지원을 해주도록 해.”
“예. 유탄 조명탄을 충분히 가져가겠습니다.”
제독 유정이 반드시 명군이 방어를 맡겠다고 했으니 목책선에 따로 병력 지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민호가 제독 유정과 도원수 이항복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늦은 밤에 야습을 걸어올 테니 병사들을 일찍 재우는 편이 좋겠소. 밤에는 아무 것도 안 보이니까 거제도에서 있었던 일을 재현하지 않으려면 병력 이동을 최소화하는 것이 좋소. 유 제독?”
“예! 남병은 왜구를 잡던 부대입니다. 왜군이 조총과 단병접전에 강하다고 하나 남병은 왜군의 야습에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유정은 거제도에서 모닥불을 피우다가 화약창고를 날려먹은 부대는 남병도 북병도 아닌 병참선 유지를 위한 보조부대라고 주장했다. 과연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명군이 화약을 전적으로 고산국에 의존하게 된 이후 유정 제독은 이민호에게 더욱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
어찌 됐던 고산국왕 이민호가 총지휘관이었고, 대리인은 계복이었다. 고산국 원정군이 맡은 지역이 따로 있어서 아직 계복이 활약할 기회가 없었다.
“자신감도 좋지만 방어선을 이중으로 준비해두고 숙영지 주변에도 울타리를 치는 편이 좋을 거요. 울산에서 북병이 왜군에게 야습을 받아 단번에 무너진 반면 남병은 오랜 시간을 끌어서 아군에게 좋은 기회를 줬었소.”
“예. 그 교훈은 뼈저리게 새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재가 부족하지만 예전에 무너진 왜군 진채의 잔해에서 쓸 만한 목재를 골라 만들겠습니다.”
멀리 동쪽에서 포성이 울렸다. 전선 10여 척을 가라쓰 방면으로 보냈는데 가라쓰를 공격하는 것인지, 아니면 왜군의 지원을 차단하는 전투 중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이민호가 지도를 가리키면서 지휘관들에게 차후 작전계획을 설명했다. 이미 몇 번이나 검토한 작전이라 다들 외우고 있었다. 실전에 들어가면서 차이가 생기면 수정을 가해야 하나 아직까지 계획대로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교두보가 너무 좁아서 보급이 원활하지 못합니다. 작전 계획대로 내일 오전부터 공세에 나서서 서쪽 후쿠시마 건너편 해안부터 동쪽 가라쓰까지 점령지를 확대해 나갑시다.”
후쿠시마(福島)는 관동지방의 지역 명이 아니라 큐슈 북서쪽 마쓰우라의 만 안쪽에 위치한 작은 섬이었다. 가라쓰(唐津)는 고산국 함대가 일본 해안을 공격할 때마다 포격을 해서 시가지는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
“적의 수장은 함경도를 침공했던 과도직무,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아들 나베시마 가쓰시게라는 소년 장수입니다. 이른바 10만의 북 큐슈군을 이끈다고 하나 과장일 것입니다. 류조지(龍藏寺)의 가세는 2만 이상 동원하기 어렵고 주변 영지들의 군세를 모으고 혼슈에서 지원해준다 해도 5만 이상은 아닐 것으로 판단됩니다.”
나베시마 가쓰시게(鍋島勝茂)는 1580년 10월생으로서 원래 역사에서 부친과 함께 일본에서 말하는 소위 조선 정벌에 참가했다. 1597년 9월 풍신수길에게서 받은 1551개의 코 영수증으로 미루어 전쟁 기간 내내 주로 조선에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러나 전세가 왜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맏아들을 영지 경영을 핑계로 대면서 슬그머니 일본으로 귀환시켰다.
“내일부터 방어 부담이 적어질 테니 이제 본격적으로 공세에 나서야 합니다. 저희가 선봉으로서 최대한 적을 몰아내겠습니다!”
“원정군의 주력이니 다른 군에게 모범이 될 것으로 믿소. 다른 군은 선봉으로 돌진하는 천군을 좌우에서 옹위할 것이오.”
일반적으로 적과 맞서는 전선에는 보병이 나서고, 기병은 우회 공격을 시키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유정 제독이 원하고, 기병이 정신없이 몰아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이유로 이민호가 다른 지휘관들을 설득했다.
큐슈에서만 적의 병력이 두 배 이상이고 혼슈에서도 지원이 올 것이 분명했다. 이럴 때는 차라리 적극적인 공세로 나가서 분산된 적을 빠르게 격파하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여진과 조선 기병 2만 3천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좁은 반도의 포위망에 갇히기 전에 먼저 나서기로 했다.
명나라 북병의 출정과 동시에 조선군은 서쪽과 남서쪽 마쓰우라와 오오무라, 아리마 등의 군소 해적 영지들을 치기로 했다. 큐슈 북서부 해적 영주들의 영지는 매번 고산국 함대가 지나갈 때마다 두들겨댄 곳이었다. 쥐어짜내다시피 해서 내보낸 수군은 몇 번이나 전멸했고, 조선 파견군도 몰살에 가까운 인명피해를 입었기에 지금 이 지역에는 성인 남자가 거의 남지 않았다.
“전쟁과 직접적인 주제는 아니지만, 주애공 대인께 건의드릴 것이 있습니다. 해동상단에서 파는 물건 값이 너무 비싸다고 병사들이 심하게 불만을 품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평양이나 개성에서 팔 때보다 네 배 이상입니다.”
“그렇게 비싸오?”
명나라 후기에 접어들면서 명군은 고기와 생선, 소금 등의 보급을 군부대가 맡지 않고 상인들을 통해 구매했다. 원래는 대동, 영하 등의 명군 주둔지에 상인들이 군량을 수송해주면 소금전매권 일부를 나눠주는 식이었는데 나중에는 보급품 구매대금을 은으로 일괄 지급하게 되었다.
지난 임진왜란 기간 동안 해동상단 상인들은 명나라 상인들보다 지리적으로 유리한 입장에서 장사를 할 수 있었다. 전쟁 초반에 보급에 뛰어들었던 명나라 상인들은 손해를 보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번 원정에는 거리가 너무 멀어 명나라 상인들이 거의 따라붙지 못했다. 결국 지리적으로 가깝고 외륜선을 다량 소유한 해동상단이 명군의 보급을 거의 독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독과점의 폐단이 즉시 나타났으니, 바로 가격 상승이었다.
해동상단이 돈을 버는 곳은 또 있었다. 명군 병사들은 그렇게 많이 먹으면서도 여러 가지 간식을 먹기를 원했고, 명나라가 조선 조정에 명군의 이동로마다 식당이나 가게를 세워 운영해줄 것을 요청한 바가 있었다.
그 필요에 응하기 위해 이민호는 해동상단을 시켜 거제도에서 많은 사람들을 고용했다. 이들이 명군의 주둔지 주변이나 길가에 임시 가게를 짓고 간식을 팔아 명군 병사들이 소지한 은을 단 한 푼이라도 더 짜냈다. 그것은 일본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명군 병사들이 불만을 품은 것은 대량 운송한 보급품이 아니라 명군이 직접 사먹는 군것질거리의 가격이었다.
“나는 가격을 잘 모르겠지만 운송에 동원되는 배가 부족한 상륙 초기라서 그럴 거요. 잠시만 참아보라고 하시오.”
“그렇겠군요. 알겠습니다.”
앞으로 간식이나 군것질거리의 가격이 오를 일만 남았지만 일단 시간을 벌면서 넘어갔다. 이민호가 노리는 것은 은도 있지만, 은과 일정 비율로 교환되는 구리 동전이었다.
이 시기 명나라에서 은 한 냥에 동전 1000문 정도로 교환됐고 시간이 흐르면서 은 가격 하락속도보다 더 빨리 동전의 값어치가 떨어졌다. 동전이 법정통화가 아니라면 동전에 포함된 금속, 특히 구리의 가격으로 회귀하기 마련이었다. 비싼 구리의 양을 줄이면 그 동전의 값어치는 더욱 빠르게 떨어졌다.
그러나 이곳 전쟁터에서는 동전의 가치 하락 폭이 더욱 가파르게 진행됐다. 거제도에서는 한 냥에 1200문이었던 교환비율이 큐슈에 와서는 한 냥에 1500문 비율로 떨어졌다. 은의 가격도 떨어졌으니 동전의 가치는 거제도의 절반 이하였다.
이것을 이용해 명나라 상인들이 떼돈을 벌었다. 명나라에서 동전을 잔뜩 가져왔던 명나라 상인들이 나고야 상륙 첫 날부터 은과 동전을 교환하면서 두 배나 되는 이익을 챙긴 것이다. 명군 병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은과 동전을 교환했고, 몇 배나 비싼 조선 간식을 사먹었다.
나고야에서 명나라 동전의 가치는 재료인 구리 값에 접근했다. 가게를 통해 해당상단에서 빼돌린 동전은 고산국에 가져가서 녹여서 쓸 예정이었다. 이것은 이민호가 나중에 명나라에 써먹을 겸 심심풀이로 해본 장난인데 억울한 것은 가치가 폭락한 동전을 내고 간식을 사먹어야 하는 명군 병사들이었다.
가라쓰 앞바다에 갔던 전선 10여 척이 돌아와, 전단장이 이민호에게 보고했다. 가라쓰는 폐허가 된 채 그대로였으나 주변 길을 지나던 왜군 부대를 포착해 포격을 퍼부어주었다고 한다. 가라쓰에서 발견한 왜군은 3천 명 정도로 파악했는데 그 앞뒤에 더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확실히 나고야 방면으로 왜군이 증원되고 있었고, 이는 야습의 전조가 분명했다.
- 탕! 타탕!
의외로 초저녁부터 왜군이 야습을 해왔다. 목책을 세운 명나라 남병들이 화승총을 쏘고 등패, 당파, 낭선 등 각종 무기를 유기적으로 결합해 왜병들의 공세를 막아냈다.
- 펑! 퍼벙!
특전대대 대원들이 남병들 틈에 섞여 있다가 공중에 조명탄을 발사했다. 어둠 속에 숨어 돌격해오던 왜병들이 강렬한 빛에 눈을 가리고 멈춰 섰다. 이들을 향해 명군 조총수들이 사격을 퍼부었다.
- 콰콰쾅!
전진이 멈춘 적군은 함포의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다. 특전대대 대원들이 조명탄을 쏘아 올린 직후 전선에서 일제히 함포를 발사했다. 목책 방어선에서 약간 떨어져 폭발한 포탄에 밀집대형으로 돌격하던 왜병들이 수십 명 단위로 몰살당했다.
조명탄이 꺼지고 전장이 다시 어둠에 잠겨도 상관없었다. 서쪽 바다에 정박한 전선들은 해안에 횃불을 여럿 피워놓고 목표를 정확히 파악해 함포를 연속 발사했다. 전선의 포수들이 목측을 하지 않고도 함포를 발사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죽여도 죽여도 계속 꾸역꾸역 몰려드는군.”
“필리핀에서 반란을 일으킨 왜구들도 저런 식으로 싸웠어요.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왜병들이 다른 나라 군대에 비해 용감한 건가요?”
국왕좌승함의 관측실에서 이민호와 비올레타가 전장을 지켜봤다. 전체 함대의 함포 사격을 기함에서 이순신 총함장이 지휘하고 있어서 지휘 부담이 줄어든 이민호는 구경밖에 할 것이 없었다. 이민호는 비올레타와 함께 마치 불꽃놀이 구경하듯 여유 있게 감상했다.
“듣자니 마을 단위로 병사를 모아 같은 부대에 배치시킨다더군요. 그래서 만약 누가 도망가서 전열이 무너지는 바람에 패하면 먼저 도망간 자는 그 마을에서 살 수가 없소. 목숨 걸고 싸울 수밖에 없다오.”
“일본에서 얼굴에 상처 입은 자가 대우받고 등에 상처 입은 자는 비겁자 취급을 받는다고 들었어요.”
정유재란 때 일본에 가족 단위로 잡혀갔던 강항이 지은 <간양록>에 그런 기록이 나온다. 운명의 장난인지 강항은 일본 성리학의 시조인 후지와라 세이카의 스승으로 추앙받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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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기병이 아직도 상륙지에서 못 나갔군요. ㅋ
오늘 안으로 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