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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334화 (283/1,000)

00334  38. 큐슈 점령  =========================================================================

전령들이 포탑을 오가더니 곧이어 굉음과 함께 배에 작은 진동이 울렸다. 포탄 수십 발이 어둠 속으로 날아가더니 곧이어 왜선 장갑함 10척이 단번에 박살났다.

불타는 왜선들을 조명 삼아 고산국과 조선 연합 수군이 나머지 왜선들에게 포탄과 총탄을 나눠 보냈다. 그러나 왜선들은 끝없이 몰려오고 있었다. 작은 고바야라 해도 이 정도면 조선 수군 함대에 꽤나 위협적이었다.

- 타타타탕!

고바야 수백 척에서 전선과 판옥선을 향해 열심히 조총을 쏘았다. 그러나 겨우 몇 방 쏘더니 왜선들은 침묵에 빠졌다. 화약 부족은 모리군에서도 심각한 상황이었다.

조총 사격이 그치고 왜선들이 속도를 높여 전선이나 판옥선에 달라붙었다. 왜 수군 입장에서는 상대방 배에 올라타서 창칼로 싸우는 등선육박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전선과 판옥선은 왜선들보다 갑판이 훨씬 높았다.

“전진 신호입니다, 전하. 왜군이 전선에 올라타지 못하게 속도를 높이라는 총함장의 명령입니다.”

“나한테 일일이 묻지 말고 조타수에게 바로 지시하시오, 함장.”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하.”

마치 장군 운전병이 ‘사거리에서 좌회전하겠습니다. 기어를 4단으로 교환하겠습니다.’는 식으로 미리 통보하면서 운전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이민호가 몇 번이나 말했지만 함장은 버릇을 쉽게 고치지 못했다.

“학익진을 펼친 판옥선들을 지난 다음 변경된 함대 진형에 맞춰 좌승함의 위치를 점하겠다. 조타수는 중앙으로 몰고 들어가도록.”

고산국 전선들이 판옥선을 지나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그리고 10척 단위로 4열 횡대를 만들었다. 그 와중에도 전선들이 왜선을 향해 계속 함포를 쏴댔다.

전선들이 전면을 향하고 있을 때는 함수 함포밖에 사용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함미 함포 2문까지 포격전에 가담해 적선을 격파했다. 작은 고바야는 포탄에 한 발 맞을 때마다 두 쪽이 나서 가라앉았다.

전선마다 1개 소대씩 탑승한 해병들도 좌우로 가까이 접근한 왜선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유탄이 날아가면 비좁은 고바야 안에 탄 왜병과 왜인 노잡이들이 한꺼번에 부상을 입고 뱃전에서 나뒹굴었다. 예광탄이 날아가 왜선에 몇 발 명중하자 자그맣게 시작된 불이 점점 커졌다.

- 타다닥!

전선에 화살이 연달아 꽂히는 소리가 났다. 왜선에서도 확실히 반격을 하고 있다는 증거였으나 뭔가 어색했다. 화약이 떨어진 철포병들은 기다란 일본식 활을 들고 전선에 화살을 날렸다.

그러나 위가 길고 아래가 짧은 일본 활을 쏘는 데는 조선 활만큼 고도의 숙련도가 필요했다. 철포병들이 단지 몇 달 훈련받은 것만으로는 일본 활의 위력을 제대로 살리기 어려웠다.

임진년 조선 수군의 사상자를 무기별로 분류해보면 조총탄과 일본 화살에 의한 부상자 숫자가 거의 비슷했다. 조총만큼 일본의 활도 위협적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일본 활에서 발사된 화살은 사방을 단단한 나무로 만든 전선의 외판을 뚫지 못하고 화살촉 절반 정도만이 꽂힐 뿐이었다.

“으아아아!”

함성을 지르며 전선에 사다리를 걸고 올라오던 왜병이 풍덩~ 소리와 함께 바다에 빠졌다. 왜병들의 등선육박 시도는 꾸준히 이어졌으나 정지한 배가 아니면 사다리를 제대로 걸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고산국 전선은 속도도 빨라서 대나무사다리를 걸치고 올라오던 왜병들이 바다에 연속해서 빠졌다.

“우리는 무라카미 수군이다! 태합이 위협해도 거부하던 멋진 자유민이란 말이다! 적선에 올라 적을 베어라!”

국왕좌승함에도 해적 왜장 하나가 줄을 타고 끙끙 소리를 내며 기어오르고 있었다. 전선의 2층 갑판이 높고 대나무사다리 끝에 달린 갈고리에 걸칠 것이 없어서 도움이 되지 않자 왜장은 갈퀴가 달린 외줄을 던져 올라오려고 했다.

해적 왜장이 입에 칼을 물고 힘겹게 전선의 2층 갑판에 바로 올라섰다. 그러나 대기하고 있던 해병이 총을 쏘자 기껏 올라온 노력도 헛되이 바다로 떨어지고 말았다.

“무엇을 아쉬워하고, 어푸! 또 무엇을 원망하리. 어푸! 본디 이러한 운명이었던 것을!”

절명시, 임종시라 할 사세구(辭世句)를 읊은 왜장은 다시 물에 떠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비장한 뜻을 담은 사세구는 왜장이 숨 쉬려고 물을 내뱉는 소리가 섞이는 바람에 코미디가 되고 말았다.

왜구에게 피해를 입은 다른 나라 입장에서는 왜구가 곧 해적이었으나, 일본에서 해적이란 수군을 지칭한 경우가 흔했다. 다이묘들이 정규 수군을 보유하지 못하고 기존 해적을 수군으로 전용했기 때문에 해적은 수군 용병과 비슷한 개념이었다. 물론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처럼 육전 장수에게 배를 주어 수군 장수를 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일본 국내에서는 해적이 노략질을 자제하고 세토 내해나 좁은 해협을 지나는 배들에게서 통행세를 징수해서 단순한 왜구와 약간 다른 면모가 있었다. 그래서 다이묘에게서 토지를 받아 영주 행세를 하는 자들이 꽤 있었다.

- 빠각!

“아, 놔!”

이민호는 전선 뒤에 충격이 온 것을 느끼고 범인이 누군지 바로 알아챘다. 판옥선에서 왜선을 향해 포를 쏜다는 것이 좌승함의 뒤꽁무니를 맞혀버린 것이었다. 폭이 넓은 비싼 티크목 판자를 교환할 생각을 하며 이민호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전방에 무수히 깔린 것이 왜선이었으나, 가끔 이렇게 아군에 대한 오사가 발생했다. 다음부터는 판옥선에서 함부로 화포를 쏘지 못했다.

고산국 전선이 해적의 등선육박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판옥선들이 총과 활을 쏘는 식으로 전투가 계속 전개됐다. 고바야 300여 척은 시간이 갈수록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만약 반대로 판옥선들이 고바야와 근접전을 했다면 상당한 인명 피해를 감수해야 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판옥선에 피해가 갈까 두려워 전선에서 함부로 함포를 쏘지도 못했을 것이다.

“총함장님은 여전하시군 그래.”

이민호는 함대 기함의 관측실에서 보병총을 쏘는 사람들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함대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큰 변화가 없자 이순신이 수하 장수들과 함께 직접 왜선을 향해 총을 쏘고 있었다. 두꺼운 판자로 사방은 물론 천장까지 가린 관측실에서 활을 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총은 얼마든지 쏠 수 있었다.

사거리가 긴 보병총을 몇 가지 개량을 통해 사거리와 명중률을 끌어 올렸다지만 아직 이민호의 마음에 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대량 생산한 양산형 보병총 중에서도 아주 우연히 만들어진, 특별히 명중률이 높은 총이 가끔 있었다. 미국 서부시대에는 원 오브 싸우전드(One of Thousand)라고 불린 정밀한 총이었다.

이순신은 보병총 몇 정을 시험해보고 바로 그런 정밀한 총을 골라냈다. 그러나 어차피 같은 선반에서 제조된 총들이라 아주 미세한 차이일 뿐 실제로 큰 차이는 없었다.

이순신은 마음에 드는 총을 장인들에게 가져가 총강부터 개머리판까지 특별히 개조를 거쳤다. 이순신의 나이를 생각해봤을 때 실로 놀라운 집착이었으나 무장들이 좋은 무기를 원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실제로 조선에서 이민 온 무관들은 자기 무기를 골라 개량하는 일에 골몰했다.

원정 출발을 앞둔 어느 날 이순신과 계복이 총쏘기로 내기를 했다가, 그 동안 천하제일 명사수로 이름이 드높던 계복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꼴을 구경하게 됐다. 몇 년 동안 사격 훈련을 했던 계복은 겨우 두 달 사격 연습을 한 이순신은 물론, 조선 출신 무관이나 군관들에게도 뒤쳐졌다.

한국 올림픽 사격 대표들이 국궁이나 양궁을 따로 배운다던데 활쏘기를 잘하면 뭔가 사격 실력 향상에 보탬이 되는 것 같다고 이민호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부랴부랴 총병들이 활쏘기 연습을 할 수 있는 활터를 만들고 조선 무관 출신들을 교관으로 임명해 병사들에게 궁술을 훈련시켰다. 그 이후 보병총 사격 실력이 아주 조금은 향상된 것 같았다.

새벽이 다 되어서 왜선 300여 척이 모두 격파됐다. 신기하게도 해적의 자부심 때문인지 도망친 왜선은 단 한 척도 없었다. 왜구들은 대장선이 격파되면 즉각 도주하는 것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해전의 결과물이 확연히 바다에 남았다. 바다에 반쯤 가라앉은 왜선들과 나무판자, 돛, 각종 천이 파도에 떠다녀서 물살이 제대로 흐르지 않을 정도였다. 전선들이 늪지대처럼 변한 해역에서 간신히 빠져 나왔다.

조선 수군은 간몬 해협으로 다시 돌아가고, 고산국 함대는 총함장의 지휘를 받아 하기로 향했다. 이민호는 함대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간몬 해협을 모리군이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지만 딱히 총함장 이순신의 결정을 반대하지 않았다.

아침 해가 뜰 무렵 고산국 함대 43척 전부가 하기 앞바다에 도착했다. 아마도 무라카미 수군의 무사 귀환을 빌던 가족인 듯한 민간인들 수천 명이 바닷가로 마중 나왔다.

그러나 아침 햇빛에 빛나는 배가 왜선이 아닌 고산국 전선임을 알아본 해적 가족들은 비명을 지르며 육지 쪽으로 달아났다. 망연자실해서 주저앉은 임산부들도 꽤 많았다. 지난 밤 해전을 통해 고아와 과부가 수천 명이나 생겼다.

“이왕 만난 것 환영해주지 왜 도망가나?”

이민호가 다시 지도를 살폈다. 하기는 강 하구가 둘로 갈라진 그 중간이 시가지였다. 양쪽 강 하구마다 언덕이 있고 그 안쪽이 포구라서 지금까지 고산국 함대의 눈을 피해 왜선들을 숨겨둘 수 있었다.

- 쿠쿠쿵!

고산국 전선들이 일제히 강 하구를 향해 함포를 발사했다. 인원이 부족해 남겨둔 배가 포탄에 명중해 박살나 금방 물에 가라앉았다. 작은 어선도 단 한 척을 남겨두지 않았고, 선착장과 부두 시설도 모두 박살나거나 불타올랐다.

“왜성의 입지에 변화가 생겼군. 훌륭하게 발전했군.”

이민호가 언덕 안쪽을 가리켰다. 건설 중인 하기 성이 바닷가 언덕에 세워지고 있는 것은 다른 해안 왜성들과 같았으나, 성은 바다 쪽이 아닌 내륙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다 쪽에서의 함포 공격에서 어느 정도 가려진 위치였다.

그러나 고산국 전선들이 만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함포를 발사하자 성벽이 줄줄이 무너졌다. 천수각은 아직 건설되지도 않았다.

왜성과 포구 두 개를 파괴한 다음 모든 전선의 포구가 시가지로 향했다. 가로 세로 2km 정도로 정사각형으로 생긴 시가지에 옹기종기 모인 민가들은 포격에 무너지고 금방 불타올랐다. 소이탄이 꽤 효율이 좋았다.

“일본인들은 어째서 목재로만 집을 만들죠? 건축에서 돌을 전혀 안 쓰는 것은 아니에요. 저렇게 집 주변을 돌담으로 두르잖아요?”

“아마도 지진 때문인 것 같소.”

비올레타가 묻자 이민호는 잘 모르면서 그렇게 대답해줄 수밖에 없었다.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곳에서는 돌에 깔려 죽을까봐 석조 건물 건축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2차 대전 때 미 육군항공대의 폭격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원자폭탄이 투하된 히로시마나 나가사키가 아니라 도쿄였다. 도쿄 대공습 때 미군 폭격기들이 소이탄을 투하해 20만에 달하는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를 발생시켰다. 네이팜탄의 위력도 강했지만 대부분 목조 가옥이라 화재가 확산되면서 피해를 가중시킨 셈이었다.

하기도 마찬가지였다. 전선들은 목조 가옥에 소이탄을 발포한 것뿐이었지만 화재가 번지면서 시가지는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변했다. 최소한 수천 명의 민간인들이 화재로 사망했다.

“이제 그만하세요. 도시 기능은 이미 상실했잖아요. 사람들이 죽는 꼴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요.”

“비올레타. 왜군에게 침략을 당한 조선 사람들은 당신의 말에 절대 공감할 수 없을 것이오. 하지만 끝날 때가 됐으니 이만 포격을 중지시키겠소.”

이민호는 왜인들이 불에 타서 죽는 것보다는 포탄이 아까워서 포격을 중지시켰다. 장교들이 불만을 품은 것 같았으나 포탄 한 발에 쌀 스무 가마라는 이민호의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고산국의 세금이 5할이나 되는 이유가 있었군요.”

“함장! 이 전쟁은 내탕금이 없다면 수행할 수 없소.”

“과연 그렇겠습니다.”

함장과 장교들이 이민호에게 안쓰러운 눈길을 보냈다. 이들은 전쟁을 수행하면서 월급이라도 받지만 이민호는 돈을 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괜히 더 억울했다.

============================ 작품 후기 ============================

오전에 더 올리겠습니다.

큐슈는 거의 끝나가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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