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340화 (289/1,000)

00340  39. 간몬 해협 전투  =========================================================================

부상을 입은 왜병들을 구해서 치료해줘야 한다는 의사들을 밤에는 위험하다고 말린 이민호가 다시 등대 위층으로 돌아왔다. 동이 트면 병사들의 호위 아래 의사와 의학도들을 시모노세키 쪽으로 보내주기로 했다.

적병이라도 살릴 만한 사람은 살리라고 말해주니 종교를 떠나 의사들이 기뻐했다. 다른 직업에 비해 많은 수입을 얻지 못하는 시기라서 의사들의 실력이 떨어질 수는 있으나, 최소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넘어 환자의 국적을 가리지 않는 1948년 제네바 선언에 근접한 휴머니스트들이 의사와 군의들이었다. 그러나 부상자들이 밤새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도련님! 주코쿠의 모리 가문은 병력을 최대한 7만에서 8만까지 동원한 사례가 있다고 했습니다. 육지와 바다에서 도합 20만을 쳐부쉈으니 나머지는 다른 지역에서 지원한 겁니까?”

“또 까먹었군. 왜 수군에서 노잡이는 뭐다?”

“민간인이요. 젠장! 해군이 왜선 약 3천 척, 인원 10만 명을 때려잡았는데 그 중에 왜병은 겨우 3, 4만이겠군요.”

현대 일본인들은 임진왜란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패한 왜 수군 장수들이 동원한 병력이 겨우 2천 이하에 불과하다면서 이순신의 전공을 깎아내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당시 두 나라는 병력의 기준이 달랐고, 현대 일본인들은 알면서도 거짓말을 한 셈이었다.

당시 조선과 일본의 군제에서 차이가 났다. 조선 수군에서 노를 젓는 격군이 정식 수군 신분인데 반해 왜 수군에서 노를 젓는 노잡이들은 민간인에서 징발됨으로써 신분 차이가 있었다. 양쪽 모두 전투 중에는 노만 젓고 전투를 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었고, 급할 때는 역시나 양쪽 모두 일부가 뽑혀 전투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래서 임진왜란 해전에서 사망한 왜군의 숫자는 판단하기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어들었다 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여러 차례 징발해 내보낸 민간인 노잡이들의 인명피해가 크다는 사실은 일본의 여러 사료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을 전사자에 포함시키면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전사자 숫자가 급격히 늘어난다.

“그리고 아까 확인해보니까 보병 중에서도 5만은 하인이었던 것 같아.”

“끄응! 그럼 결국 합해서 8만입니까? 어쩐지 군기가 다 같더라 했죠.”

“주코쿠에서 모리 군이 최대한 긁어모을 수 있는 병력이야. 성문 경비병 몇 명 빼고 이제 남은 병력은 거의 없다고 봐야지. 새벽에 여진 기병을 투입하기 전에 적이 매복했는지 먼저 파악해야 해.”

“특전대대 정찰대가 진격로 주변에 파견돼 있습니다.”

매복한 적에게 기습을 당하지 않는 것도 중요했지만, 아군이 매복해서 적에게 기습할 기회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특전대대에서 소대 단위로 적진에 파견해서 퇴각하는 왜군에 기습공격을 가하고 물러나는 작전이 현재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4~5만에 달하는 왜군은 밤새도록 기습 공격에 시달리며 산길을 헤매게 되었다.

“그런데 도련님은 명나라 북병을 무시하시더군요. 중요한 작전에 쓰는 것을 못 봤습니다.”

“북병이 무시할 만한 전력은 절대 아닌데, 왜군 상대로 약하니까 그렇지.”

“기병으로 왜군을 잡기 어렵습니까? 조선에서는 경상우병영 기병이 왜군 보병 상대로 굉장히 잘 싸우던데요.”

“대다수가 궁기병인 동시에 경기병이니까 가능한 거야. 북병은 움직임이 둔해서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 방진에는 상대가 안 돼. 중기병은 경기병을 몰아서 잡을 때나 유리하지. 총기가 발달할수록 중기병이 설 자리가 없어. 앞으로 경기병으로 대체됐다가, 경기병도 사라지겠지.”

그러나 기병의 기동력을 보병이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승마보병을 운용한 것인데 일본 지형에서 승마보병은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일본 같은 섬나라에서는 차라리 해안선에 기습적으로 상륙시킬 해병이 나았으나, 현재 고산국에 해병 숫자가 적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럼 앞으로 기병을 없애실 겁니까?”

“아니! 북쪽 초원지대나 화북 지역에서는 기병이 중요해. 그래서 보병들도 승마훈련을 시키고 있잖아.”

이민호는 자정이 다 돼서 모지항에 정박 중인 좌승함으로 돌아왔다. 말을 배에 태우는 동안 좌승함 함장이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다고 툴툴거렸지만, 요새 아래 항구인 모지항을 지킨 유일한 전선이 좌승함이었다.

“그래도 어둠 속에서 몰래 기어들어오던 왜선 열 척을 잡았습니다.”

“잘했소. 함장은 가장 중요한 곳을 지킨 것이오. 내일은 새벽부터 출항할 테니 오 방어사와 총함장님이 출발 시간을 정하라고 말씀을 전해주시오.”

보급품이 잔뜩 쌓인 모지항에 불을 지르려고 바다를 건너오던 왜병들은 간몬 해협에 빠져 물살에 휩쓸려갔다고 했다. 이민호가 호위들과 함께 계단을 올라 집무실에 들어섰다.

“대첩을 경하드립니다, 전하.”

집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주상아 공주와 비올레타가 시녀들과 함께 축하를 해줬다. 이민호는 두꺼운 담비 외투부터 벗었다.

“밤이 늦었는데 주무시지 그랬소?”

“전하께서 군대를 이끌고 계신데 저희들이 어찌 편하게 잠을 자겠습니까?”

“일은 다했소?”

주상아는 명나라 황실에서, 비올레타는 가정교사로부터 기본적인 산법을 다 배운 사람들이었지만 고산국의 산법은 조금 달랐다. 아라비아 숫자를 쓰고 사칙연산에 기호를 사용해서 간단하더라도 배우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규칙이었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반에 덧셈 +와 뺄셈 - 기호가 처음 만들어졌으나 유럽에서 정식 기호로 인정받은 것은 1630년이었다. 곱셈과 나눗셈 기호도 17세기에 정해졌다.

“예. 내일 들어올 보급품은 이번에 정해진 우선순위에 따라 각 부대로 운송하도록 나고야에 전령을 보냈습니다.”

“총탄과 포탄 재고가 절반 이하로 내려갔소. 내일 아침 일찍 전령을 나고야에 보내 고산국에서 실어오도록 전하라고 하시오.”

국왕이 후궁들과 함께 있는데도 분위기가 딱딱했다. 후궁들이 참모진을 겸하다 보니 이렇게 부부간에 따뜻한 대화가 오가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다.

집무실에 간단한 야식이 준비돼 있어서 이민호가 따뜻한 잣죽을 마시듯 한 다음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내일은 새벽부터 움직여야 했다.

“피곤하시죠? 얼른 주무세요.”

욕실에서 나오니 침전에 비올레타와 아이샤가 와 있었다. 다들 이민호의 건강을 최우선 순위에 두었기에 일찍 자게 하려고 했다. 이민호가 침대에 눕고 비올레타가 옆에 누웠다.

그러나 이민호는 낮에 등대에서 낮잠을 자는 바람에 잠이 오지 않아 멀뚱멀뚱 눈을 뜨고 있어야 했다. 전투 중에 직접 싸운 것도 아니었고 대부분 등대에서 구경만 해서 피곤할 일이 없었다.

품에 안긴 비올레타에게서 향긋한 체향이 맡아졌지만 주상아 공주와 함께 하루 종일 일을 해서 그런지 금방 잠에 빠져 들었다. 흐린 취침 조명을 받은 비올레타의 뺨이 발그스름해서 예뻤다.

“주인님. 따뜻한 꿀물이라도 가져올까요?”

이민호가 뒤척이는 것이 신경 쓰인 아이샤가 물었다. 아이샤가 가져온 꿀물을 마시던 이민호는 흐릿한 조명에 아이샤의 속치마 안쪽이 비치는 것을 봤다. 그리고 조선에서 양반이 어떻게 계집종을 건드리는지 기억났다.

이민호가 빈 물잔을 돌려주는 척하면서 아이샤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화들짝 놀라던 아이샤가 이민호의 힘에 이끌려 침대 안으로 들어왔다.

“안 돼요, 주인님. 바로 옆에 귀인님 주무시잖아요.”

“그러니까 조용히 해. 이번 달에는 아직 안 했잖아.”

“이잉~”

이민호가 하체를 아이샤의 하체에 비비면서 입술을 찾았다. 잠시 바동거리던 아이샤가 힘을 풀고 이민호의 혀를 혀로 마중했다.

언니인 파티마가 있는 자리에서 아이샤를 처음으로 안으면서 한 달에 한 번 이상 안아주기로 약속했었다. 이민호는 약속을 지키는 훌륭한 왕이라서 최소 한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아이샤를 안았다.

아이샤의 귀엽던 얼굴이 어느새 성숙해져 있었다. 내년에 스무 살 넘으면 언니인 파티마보다 더 섹시할 것 같았다.

“아이샤 너도 언니처럼 모델을 해보는 게 어때?”

“예쁜 옷 입고 화장해서 손님들 앞에서 걷는 일이요? 좋긴 한데 못 생긴 제가 해도 될까요?”

“넌 예뻐.”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상인들에게 물건 팔아먹으려고 시킨 모델인데 이게 시녀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그러나 신체 비율 때문에 동서양 모델이 함께 나오면 바로 비교가 돼서 아직은 백인 시녀들만 모델을 시켰다.

치렁치렁한 명나라 전통의상은 괜히 모델이 옷을 입어 중고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 나중에 인도나 아랍에 옷감과 보석을 팔아먹을 때 다시 모델을 기용할 예정이었다.

“윽!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왜요, 주인님?”

“힘 좀 풀어. 이거 누구한테 배웠어?”

“브루나이의 하나 공주님께요. 전하께서 후궁들이 배운 것을 나누라 하셔서 배운 다음 연습했어요. 제가 잘못했나요?”

“잘못한 건 아닌데 사람 잡겠다. 적당히 해.”

다른 후궁들은 몰라도 후원 나뭇가지 위를 홱홱 날아다니던 백인 시녀들이 인도 방중술을 배운 것은 지나친 것 같았다. 더 많은 운동을 하는 여진족 호위들은 이민호에게 안기는 즉시 비몽사몽이라 그 기술을 써먹을 기회가 없어서 이민호도 오늘 처음 알게 됐다.

“죄송해요.”

“죄송할 것까지는 없고 나도 좋은데, 지나치게 옥죄지 말고 부드럽게 하라고. 내가 못 움직이고 있잖아. 좀 더 풀어. 같이 맞춰보자.”

“힘 하나도 안 줬어요. 아!”

“그래? 딱 좋다. 아이샤는 그 기술을 써먹지 않아도 충분해.”

실험정신이 투철한 이민호였다. 옆에서 비올레타가 풋 하고 웃는 소리가 났고, 잠시 후 반대쪽 보조침대에서 민영이 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었다. 그러나 이민호가 고개를 돌리자 다들 자는 척했다.

이민호는 낯이 뜨거워졌으나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다. 행궁 내명부의 임시 수장인 주상아 공주가 오늘은 아이샤를 안으라고 미리 언질을 줬으니 이것은 국왕이 할 업무의 연장이었다.

배가 움직이는 느낌에 깬 이민호가 탁상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세 시인데도 벌써 배가 움직이고 있었다. 새벽에 출항하라 일렀더니 꼭두새벽부터 준비를 마치고 전선이 움직였다. 여진 기병도 이미 간몬 해협을 건너 북동쪽으로 출발했는지 멀리서 말 달리는 소리가 났다.

이민호에게 새벽이라면 해뜨기 직전을 의미했지만 조선이나 고산국에서는 그보다 훨씬 이른 시간부터 새벽에 포함됐다. 캄캄한 밤에 뭐가 보여서 말을 타나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밤늦게 뜨는 하현달의 달빛을 받아 이동하는 것 같았다.

전투는 육지에서 여진족 기병을 이끄는 오응태와 해안선을 따라 동진하는 이순신이 알아서 할 테니 이민호는 더 자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천지를 진동하는 말발굽 소리가 땅을 지나 바다를 건너 배를 뒤흔들 정도라서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양 옆에 누운 비올레타와 아이샤가 눈을 부비며 일어났다.

“비올레타, 더 자요.”

“네.”

여기서 가장 피곤한 사람은 비올레타였다. 이민호는 비올레타와 아이샤를 껴안고 이불을 머리 위로 끌어 올렸다.

바깥이 어수선해서 다시 깨어보니 아침이었다. 옆에 아이샤는 없고 비올레타만 자다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일어나서 씻고 식사를 마친 다음 느긋하게 오전 8시쯤에 함교에 나갔다. 2연대 병력이 전선에 타면서 배 안이 북적거렸다.

“잘 주무셨습니까, 전하? 여기는 야마구치 남쪽 50리 지점입니다.”

“여진 기병은 어디쯤 있소?”

“새벽에 출발 전에 오 방어사가 제출한 기동 계획서입니다.”

여진 기병을 셋으로 나눠 한 부대는 북쪽 미네를 치고 다른 두 부대는 도시와 마을이 산재한 해안선을 따라 공격하되 번갈아 교차 진격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세 부대가 다시 야마구치에서 합세해 본격적으로 공략한다는 작전이었다.

“이것은 첫 번째 전과 보고서입니다.”

“왜군이 성에 들어가기 전에 다 잡았군요.”

세 부대로 나뉘기 전부터 여진 기병이 전과를 올렸다. 어제 저녁에 간몬 해협을 공격했다가 물러난 모리 군의 숙영지 세 곳이 특전대대 정찰대에 포착돼 신호를 보냈고, 여진 기병들이 급습해 4만 정도의 패잔병을 소탕했다고 한다.

간몬 해협에서 패하고 도망간 자들 중에서 왜병은 1만 정도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왜인들이었다. 그런데 왜인들이 천막도 없이 한겨울에 노지에서 자는 바람에 절반쯤은 공격하기 전에 이미 얼어 죽은 것 같다는 보고를 했다. 살아남아 항복한 왜인들은 모닥불을 피우게 해서 급히 몸을 녹이되 시체를 땅에 묻은 다음 집으로 돌아가라고 오응태가 명령했다고 한다.

“만 단위로 얼어 죽다니 끔찍하군요. 아무리 일본이 조선보다 따뜻하다 해도 산에서 자면 위험한데 말이오.”

공기층이 산의 경사를 따라 상승할 때 100미터마다 섭씨 1도가 내려가고, 공기층이 하강할 때 몇 도가 오른다는 기억이 났으나 정확한 것은 이민호가 기억하지 못했다.

“야마구치까지 50리라. 함포는 도움이 안 되겠군요.”

“예. 사거리가 약간 미치지 못해 아쉽습니다.”

조만간 지상 공격용으로 5인치 함포를 개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든든해질 것 같지만 탄약수들이 더 고생할 것이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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