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44 39. 간몬 해협 전투 =========================================================================
이민호가 정문부를 모지항에 세워진 군막으로 데려갔다. 일본 사신들과 대화를 했던 장소였다. 탁자와 의자 외에는 아무런 장식품이 없는 단순한 창고 같은 곳이었다.
정문부는 큐슈에 오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해둔 듯했다. 품에서 꺼낸 지도 한 곳을 가리키면서 정문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전하! 큐슈 총독부 위치는 사가 남쪽 80리, 구마모토 북서쪽 70리 거리 해안 마을인 오무타가 어떻겠습니까? 큐슈의 지리적 중심은 구마모토이나 앞으로 오랜 기간 해안 방어를 해야 하는 입장임을 감안해 기마 전령이 좀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는 곳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말보다 배가 빠르므로 해안지대가 적당할 것 같습니다. 만 안쪽 육지로 둘러싸인 곳이라 바다가 잔잔해서 항구로 쓰기도 좋습니다.”
“그곳이 좋겠군요. 총독이 직접 가서 실사를 해보고 확정지으시오. 군사와 행정 업무만 하면 되니까 괜히 무역항까지 만들어 기반 도시를 키울 필요는 없소. 오히려 방어에 불리해질 뿐이오.”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이제 큐슈를 본격적으로 바꿀 계획을 세우기 전에 기본적인 요소를 하명해주십시오.”
이민호 마음에 들 때까지 계획을 세워보라고 정문부에게 일을 시킨다면 그것이야말로 시간 낭비였다. 무능하고 권위적인 높은 사람 흉내 낼 필요 없이, 이민호가 그 동안 생각했던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을 정문부에게 제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전에 전제 조건 몇 가지가 있었다.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고, 여차하면 주코쿠 일대를 포함한 서일본까지 다스려야 할지도 모르겠소. 큐슈 동쪽 시코쿠도 한 번 손을 대야 하니까 감안하시오.”
“예. 고려하겠습니다. 항로의 안전을 위해 왜구의 근거지였던 대마도와 일기도, 그리고 오도는 고산국에서 확실히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큐슈에 사는 전체 일본인들에게 어떤 제한을 가하실 건지요?”
큐슈에 거주하던 주민들 중에서 가장 높은 비율이 전쟁에 중립적인 농민들이었다. 큐슈를 점령한 정벌군이 외국 군대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지배자의 단순한 교체 정도로 받아들였다.
두 번째로 많은 비율이 외국군의 침공을 두려워하여 작은 배를 타고 주코쿠나 시코쿠로 도망갔던 농민들이었다. 이들 중에서 일부는 큐슈에서 전투가 끝난 순간부터 고향 마을로 귀환하고 있었다. 여진족 기병들이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학살했다는 살벌한 소문을 듣고도 농사를 지어 먹고 살기 위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시마즈 군에 가담한 사쓰마 지역 주민들이었다. 적극 가담자들은 대부분 전사했고 나머지는 포로로 잡혀 간몬 해협까지 끌려왔다.
“일단 인력을 넘겨주겠소. 아직 전쟁이 끝나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해산될 기리시탄 의용병들 4만 중에서 일부를 군에 남겨 기본적인 방어부대와 치안부대로 삼으시오. 1만 정도면 될 것이오. 도시나 도로 건설에 활용할 인력은 성인 남자 포로 4만과 그들의 가족 2만을 주겠소. 일정한 기간이 끝나면 풀어주고 정착시켜줘야 합니다.”
“일정한 기간이라면, 3년으로 정해주십시오.”
“2년으로 정하겠소. 그들에게도 2년만 고생하라고 알려주시오. 포로라고 하지만 식사 외에 적더라도 일당을 지불해야 합니다. 자금은, 음. 일단 은 3백만 냥을 넘기겠소. 앞으로는 사쓰마의 히시카리라는 곳에서 금광을 개발해서 통치 자금으로 쓰시오. 남을 것이오.”
“나, 남습니까?”
“큐슈는 쌀농사만 해도 남는 곳이오. 농민들을 재배치시키고 나서 첫 수확을 거둔 뒤부터는 자금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오. 남거나 은과 교환한 황금은 고산국으로 모두 보내시오.”
히시카리 금광은 금 함유율이 금광석 1톤 당 40그램으로 세계적으로 높고 다른 금광 평균치의 열 배 이상이었다. 금맥의 폭도 대체로 2미터가 넘었다. 산출량도 풍부해서 매년 순금 7, 8톤을 생산해 21세기 일본 최고의 광산으로 손꼽혔다.
사실 이민호는 히시카리의 정확한 위치도 몰랐다. 히시카리 금광은 금맥이 지상에 노출되지 않아 1981년에 최초로 발견됐다. 다만 천열수성 금은광상이라는 사실만 아는 이민호는 온천 근처 점토층 밑에서 찾아보라고 정문부에게 권했다. 채굴 인력은 포로를 투입하기로 했다.
“앞으로 혼슈와 시코쿠, 큐슈를 제외한 일본의 모든 섬에서 왜인들을 퇴거시킬 작정이오. 총독께서 말씀하신 항해의 안전을 위한 것은 물론, 어떻게 보면 명나라에 해금정책 폐지의 명분으로 내세울 공도정책이오. 더 이상 왜구가 안 생긴다고 명나라 조정에서 안심하면 명나라 남동해안 일부 지역에 아직도 남아있는 해금정책이 풀릴 것이오.”
“명나라와 더 많은 교역이 기대되는군요.”
“그리고 유구국과 가까운 섬 몇 개를 그쪽에 넘기고, 사쓰마 지역은 완전히 비워서 왜인들이 못 들어가게 하시오. 끝까지 저항했던 지역이며 주민들도 다수 가담했으니 아직 남아있는 농민이 있더라도 다른 지역으로 쉽게 옮길 수 있을 것이오.”
“사쓰마의 시마즈 가문은 미카 귀인과 니시무라 씨 가문의 원수라고 들었습니다. 그곳을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으로 만드실 겁니까?”
정문부가 묻자 이민호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남들이 그렇게 생각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안 좋은 감정이 있다 해서 땅을 놀리면 하늘로부터 벌을 받을 것이오. 그곳이 따뜻하고 날씨가 좋다기에 휴양지를 건설할 계획이오. 동해국이든 필리핀이든 외지에서 오래 근무한 군인들에게 편히 쉴 곳을 마련해주려 하오. 활화산이라는 대단한 구경거리가 그곳에 있소.”
“일반 병사들을 위한 휴양지입니까? 역시 전하께서는 성군이십니다.”
“아니 뭐, 왕실 휴양지도 그곳에 만들 생각이오.”
열대지방은 말라리아 때문에 무섭고 추운 곳은 싫어하는 이민호 입장에서는 큐슈 남쪽이나 제주도가 딱 적당했다. 그리고 궁성 안 왕립여학교와 기숙사에만 갇혀 사는 여학생들에게 즐거운 식도락 여행을 시켜줄 심산이었다.
“나가사키는 대외 무역항으로 계속 활용하고, 니시무라 겐타로 씨를 다이칸, 대관(代官)으로 임명하시오. 임면권은 총독이 가지고 직접 통제하시오.”
“어? 저는 니시무라 씨가 저보다 당연히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나가사키는 차라리 왕실 직할령으로 삼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정문부가 곤란해 했다. 니시무라 겐타로는 왕실의 인척이 되므로 정문부 입장에서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미카 때문에 말이오? 개인적인 관계는 상관없소. 그리고 니시무라 씨는 대관의 직임 말고도 일본 혼슈에 파견된 첩자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해야 하니 적당히 도와주도록 하시오.”
“나가사키 행정은 제가 지시하고, 첩보 문제에서는 제가 지원하는 역할을 맡겠습니다.”
이민호가 겐타로에게 영지를 만들어주겠다고 했을 때 겐타로는 오해 여지가 있다면서 몇 번이나 사양했다. 미카와 시녀들도 조만간 고향 땅을 다시 밟아볼 계획이었으나 고통스런 기억만 남았다면서 다시 정착하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정확한 인구 조사를 실시하지 않았습니다만, 농지에 비해 인구가 많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임진왜란과 이번 전쟁을 거치면서 성인 남자 인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 같습니다. 농민들을 정착시키고 세금을 받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농지가 부족할 경우 황무지를 개간하거나 농민들을 동원해 제방을 쌓아 강 하류 삼각주를 논으로 만들겠습니다.”
큐슈에는 아직도 작은 개천 주변의 물을 끌어들여 농업용수로 쓰는 소규모 논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고산국에서 한 것처럼 상류에 저수지를 만들고 하류에 제방을 쌓아 농지를 적극적으로 늘려나갈 수도 있었다. 고산국은 기술과 능력이 있음에도 농지가 남아돌기 때문에 저수지 외에는 하류에 제방을 쌓은 경우가 드물어 자연하천 그대로를 이용했다.
“다이묘들이 실질적인 세율을 8할 이상으로 올려도 버티던 자들이 일본의 농민들이오. 어린 아들은 죽이고 딸을 기루에 팔아서 버티던 사람들이니 전세와 인두세 비율을 잘 책정하시오. 공식적인 전세 외에 공납이나 부역에 시달리는 것은 조선과 마찬가지요.”
“중국 역대 왕조에서 거둬들였던 인두세는 단점이 워낙 많아 걷지 않는 편이 낫겠습니다.”
이 시대 일본에서 세금 즉 연공(年貢)은 다이묘가 운영할 수 있는 재원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슈고다이묘가 각 지방에 파견되면서 다이묘는 자기 영지의 토지 가운데 절반을 차지할 수 있는 권리인 반제권(半濟權)과 농민들로부터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인 수호청(守護請)을 갖고 있었다. 세금은 전국적으로 일률적인 것은 아니었고 상황에 따라 세금을 조정할 수 있었고, 공납이나 부역 형식의 세금도 많이 징수했다.
그러나 막부를 개창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한, ‘농민들이 죽지 않게끔, 살지도 못하게끔 잘 생각해서 세금을 거두라’는 말로 알 수 있듯이 체제 유지를 위해서라도 최대한 농민들을 쥐어짰다. 세금은 막부 또는 다이묘의 주 수입일 뿐만 아니라 소수의 사무라이 계층이 다수의 농민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당장 쓸 곳이 없더라도 세금은 일단 많이 걷는 것이 이상적이었다. 과도한 세금은 인구 과잉을 억제하는 효율적인 수단으로서 작동하기도 했다.
“고산국처럼 수확량의 5할이면 다른 나라에 비해 세금이 적은 편인데, 조삼모사의 원숭이처럼 많다고 여기게 됩니다. 일본 농민들에게 예전 다이묘들보다는 확실히 선정을 베푼다고 느끼도록 해주겠습니다. 다만 들쭉날쭉한 전쟁 비용이 문제일 것 같습니다.”
“평시 외의 전쟁 비용은 왕실에 부담시키시오. 그리고 우리는 소수이니 일본인들을 분할해서 통치하는 수밖에 없소. 종교로 나누고 지역별로 나눠서 같은 큐슈 주민이라도 분열시켜야 해요. 주거지나 직업, 수입 같은 사소한 기준이라도 주민들을 일정한 신분으로 나누는 것도 가능하오. 남과 여, 노인과 젊은 층, 담배 가격이나 금연구역을 설정하는 식으로 흡연자와 비흡연자로 분열시키는 비열한 방법도 있소.”
“차마 고산국이나 조선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방법입니다.”
이민호는 갑자기 현대 한국 생각이 나서 씁쓸해졌다. 네이트라는 사이트에서 병역을 필한 남자들을 미필과 여자들이 합세해서 공격한 사례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특정 세력이 의도적으로 조장한 느낌이 났었다. 인터넷 공간에서 남자와 여자들이 편을 갈라 싸운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고, 병역을 필한 자체로 비난 받는다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큐슈에 사는 일본인 농민들은 아직 제대로 된 고산국 국민으로 대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지배가 안정화될 때까지 이민호가 배운 사악한 통치 기술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다.
당시 일본의 농민은 전체 인구의 8할로서 상인과 기술자 계층인 초닌(町人)보다 훨씬 많았다. 일본의 신분제가 사농공상 순서라지만 상인과 공인들이 농민보다 숫자가 훨씬 적었고, 딱히 신분 차별을 받았다는 증거도 없이 거의 동등한 신분이었다. 그러나 신분제는 전체 백성들을 단계별 신분제로 묶어 상하를 차별함으로써 주종관계, 부부관계, 부자관계에서 서열을 공고히 하여 지배체제를 강화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큐슈에서는 농민들 일부가 칼을 차고 다닙니다. 그것 때문에 왜병으로 오인 받아 많이들 죽었다는데요. 어째서 전하께서는 아직도 도검 휴대 금지령인 폐도령을 내리시지 않았습니까? 그 이유를 알려주십시오.”
“음. 그건 말이오.”
정문부가 초롱초롱 눈을 뜨고 이민호의 대답을 기다렸다. 왜인들이 허리에 칼을 차고 있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대로 놔뒀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무기 휴대라는 건 그래요. 지배자 입장에서는 피지배자가 저항할 수단이 없기를 바라기 마련이오. 그래서 풍신수길도 몇 년 전에 가타나가리(刀狩) 령을 내렸지만 지켜지지 않았다오. 왜 그랬겠소?”
풍신수길은 1588년 백성 신분이 칼을 휴대할 권리를 박탈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병농분리 정책이라 하지만 정확히는 농촌을 무장 해제시키려는 시도였다. 물론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무기를 휴대한다는 것은 남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소. 주민들이 권력자를 못 믿는 것은 아니요. 사실 일본에서 권력자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봤자 토벌밖에 더 당하겠소. 주민들은 다른 마을 주민들을 못 믿는 것이오.”
“예? 설마 농한기에 다른 마을로 쳐 들어가서 약탈하거나 사람들을 납치해 노예로 팔기라도 했습니까?”
“바로 그렇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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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늦었습니다. ㅜ.ㅠ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