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56 40. 혼슈 전쟁 =========================================================================
“계복이 어떻게 막을까? 몇 명 배치해서 나오는 놈마다 총을 쏴서?”
“돌을 쌓거나, 주변에 흩어진 무기 같은 것을 밀어서 출구를 봉쇄해야 해요.”
그러나 땅굴 출구가 막힌다 해도 금방 다른 구멍을 뚫고 나올 수도 있었다. 성벽 등 상대방의 강력한 방어선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고대부터 수공과 함께 가장 많이 쓰는 것이 땅굴이었다. 성벽 밑까지 땅굴을 파서 화약을 터뜨리거나 땅굴 자체를 무너뜨림으로써 성벽을 붕괴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 화약이 부족해서 땅굴을 이용해 성벽 붕괴를 노리지 못하고 직접 병력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히코시마 수로 옆에 쌓은 성벽은 나성 정도로 아주 낮았다. 기껏 어렵게 판 땅굴을 나지막한 성을 붕괴시키는 일에 쓰는 것은 수지가 맞지 않았다.
“아까 계복 대원수의 부하 장교들이 기관실에서 기름통 몇 개를 갖고 가던데요? 아! 말안장에서 기름통을 들고 내렸어요.”
이민호는 민영이 한 말에 놀라 다시 망원경을 들었다. 계복 주위에 있던 장교들이 땅굴 출구인 구덩이에 기름을 쏟아 붓고 있었다. 나무토막과 천조각도 주워서 구덩이에 집어넣었다.
그 사이에도 왜병들이 땅굴에서 나오다가 계속 총에 맞아 쓰러졌다. 시체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땅굴 속의 왜병들이 더 이상 빠져 나오지 못했다. 땅굴 속의 왜병들이 입구를 막은 시체를 치우는 사이 계복이 성냥을 켜서 천 조각에 불을 붙인 다음 구덩이를 향해 던졌다. 구덩이 안에서 불길이 확 일어났다.
땅굴 출구가 막히고 굴 안에 연기가 차오르면 왜병들이 돌아서 나가야 할 텐데 입구 쪽에서 지휘하는 고위 사무라이들은 앞의 상황을 모르니 계속해서 병력을 투입시킬 가능성이 높았다. 오도 가도 못하고 땅굴 속에서 질식사하는 왜병들이 못해도 수백은 될 것 같았다.
“임시 조치는 되겠군. 그런데 너희들 이 거리에서도 보이는 거야? 세상은 불공평해.”
“주인님은 겨우 눈 좋은 것 갖고 그러세요.”
구경이나 해야 하는 이민호 입장에서 여진족 호위들의 시력이 좋은 것이 부러웠다. 만약 평원에서 기병끼리 싸우게 된다면 시력 좋은 쪽이 결정적인 기회를 잡을 가능성이 커진다. 평원 전투에서 시력은 공군 전투기의 성능을 비교할 때 레이더 탐지거리와 유사한 중요한 특성이었다.
기마대대가 몇 번이나 돌격을 반복하면서 그때마다 왜병들을 몰아내고 땅굴 출구를 메웠다. 이민호가 보기에 계복은 감불처럼 대규모 연합부대나 보병보다는 기병 단일 부대를 지휘하는데 더 뛰어났다.
어느새 히코시마 요새의 전투는 소탕전으로 변했다. 조총과 장창, 활로 무장하지 않은 왜병들은 조직적인 전투를 할 수가 없었다. 보조무기인 칼로만 무장한 왜병들은 총격에 몹시 취약해서 계속해서 밀려났다. 특히 외성 성벽 아래 몸이 드러난 넓은 곳에서 전투가 진행되자 2만에 달하던 왜병들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땅굴에서 솟아난 왜병들 때문에 미처 후퇴하지 못하고 성곽 모서리나 건물 같은 곳에 고립되어 있던 1연대 병력들이 이때까지 잘 싸워주었다. 그 덕택에 외성을 회복하는 전투는 일찍 끝날 수 있었다. 이들은 왜군의 본진이 히코시마 요새에 진입하기 쉽도록 외성 일부를 무너뜨리려는 왜군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그 전공이 전체 전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땅굴의 출구를 모두 봉쇄한 다음 2개 연대 전체가 외성 방어전에 투입됐다. 7천이 넘는 소총병들이 수로 건너편의 왜병들에게 총탄을 퍼부었다. 1연대가 지키던 곳에 5천이 넘는 3연대가 추가되자 외성은 막강한 화력을 갖춘 철옹성으로 변했다.
- 콰쾅!
그 사이 히코시마 요새의 외성 앞에 흐르는 수로가 거의 다 메워졌다. 왜병들은 간몬 요새에서 발사하는 야포 약 100문, 30여 척의 전선에서 발사하는 함포 100여 문의 포격을 받으며 계속해서 외성으로 몰려들었다.
- 따다다닷! 따다다닷!
오랜만에 기관총 2정이 시원하게 총탄을 내뿜는 소리가 밤하늘을 울렸다. 왜군은 히코시마 요새의 외성 기관총좌를 점령해놓고도 그곳에 놓인 것이 기관총인지 알아보지 못해 파괴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총탄도 다 떨어져서 왜병들이 기관총을 이용할 가능성은 없었다. 덕택에 기관총좌에서 물러났던 사수와 부사수들이 예비 탄약을 갖고 돌아와 기관총을 발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왜병들은 수로를 넘어 끊임없이 외성으로 달려들었다. 단시간에 수로를 돌로 메워버린 것이 특히 1연대 병사들에게 몹시 충격적이었는지, 아니면 전투 중에 사상자가 많이 발생해 인원이 줄어들었는지 3연대보다 화력이 훨씬 약했다. 왜병들이 외성 벽에 사다리를 걸쳤다.
“전원 착 거어엄!”
계복이 내지른 소리가 전선까지 들려온 것 같았다. 이민호가 민영과 민혜에게 물었다.
“방금 계복이 뭐라고 했는지 들었어?”
“착검하라고요.”
밤이라서 그런지 계복이 외친 명령이 멀리까지 들렸다. 포성과 총성, 비명과 고함소리를 뚫고 들려온 자못 비장한 목소리였다.
이때부터 나지막한 성벽을 사이에 두고 고산국과 일본의 한 판 싸움이 시작됐다. 대나무사다리를 타고 성벽으로 올라가던 왜병이 총탄에 맞아 거꾸로 떨어지고, 총검에 찔린 왜병은 마지막 힘으로 칼을 내리쳤다. 팔이 반쯤 잘린 흑인 병사가 비명을 질렀다.
성벽에 늘어선 고산국 병사들은 온몸을 피로 적신 채 끝까지 버텼다. 병력이 부족해 교대해주지도 못했지만 흑인 병사들은 강한 지구력으로 버티며 성벽을 사수했다. 성벽 일부 구간을 왜병들이 넘어설 때마다 계복이 예비대를 투입해 몰아냈다.
- 콰쾅! 쾅!
성벽 아래에 왜병들이 가득 몰리자 1연대와 3연대 병사들이 수류탄을 연속 던졌다. 파편과 팔다리가 날아가는 참혹한 현장 속에서도 왜병들은 꾸준히 사다리를 타고 성벽에 올랐다. 성벽 아래에 시체가 하도 많이 쌓여서 마치 좀비 영화나 외계 벌레가 가득 등장하는 SF영화가 연상될 정도였다.
“잘못하면 장렬하게 싸우다 전멸하겠군.”
“주인님! 여진 기병을 왜 아직 투입하지 않아요? 요새 앞은 기병 2만이 기동할 공간으로 충분해요.”
“그건 참모부에 물어봐. 투입시기를 조율 중이야. 여진 기병 대신 우리 기병을 투입해야 할 것 같은데?”
여진 기병들은 아직도 간몬 요새 남쪽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들을 혼슈에 투입해 해안도로를 따라가면서 싹싹 쓸어버릴 수도 있었다. 이런 강력하고도 결정적인 카드를 방어전에서 남발할 수는 없다고 하지만, 당장 원정군의 주력 2개 연대가 전멸에 처할 위기에 놓였다.
“지원 병력이 필요해요. 2연대에서 1개 대대를 뽑아줘야 하지 않나요?”
“아니. 계복이 지원부대를 불렀어.”
수송선을 타고 먼저 해협을 건넌 것은 기리시탄 의용병 1만이었다. 이들은 200명 단위로 1연대와 3연대 소속의 각 중대에 배속됐다. 의용병들도 기본은 왜군의 복장과 비슷해 특히 야간전에서 아군끼리 오인 공격을 할 우려 때문에 투입을 늦추고 있었다.
단병접전에 강한 기리시탄 의용병들이 투입되자 성벽의 방어력이 훨씬 강화됐다. 이들이 창칼로 성벽에서 버텨준 덕택에 고산국 보병들은 착검을 해제하고 사격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 대신 기리시탄 의용병들의 사상자도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전투는 새벽이 다가올 때까지 계속 진행됐다.
“아! 모지 성 건너편에 아군 기병이 상륙했어요.”
“어? 응. 보병연대 소속 기병대대야. 좀 많네?”
수송선에서 기마병들이 꾸역꾸역 내렸다. 기병 세력은 1개 대대를 훌쩍 넘어서 1개 연대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민호는 기병연대를 편제한 기억이 없었다. 계복이 각 보병연대에서 기병대대를 차출하고 원정군 직할 기병대대까지 더해 연합부대를 이룬 임시 편제에 불과했다.
원정군 직할 기병대대와 각 연대 소속 기병대대는 큐슈 정벌전 이후 여러 가지 임무에 투입됐었다. 이들은 여진 기병처럼 완전한 기병도 아니고 승마보병도 아니었다. 이들은 보병에서 시작해 승마보병을 거친 다음 총기병으로 전환돼서 이런 다목적 임무 수행이 가능했다.
- 두두두두두~
어둠 속을 달리는 기마병의 파도가 히코시마 공격에 매달리고 있는 왜군 부대의 측면을 찔렀다. 최소 5만은 될 것 같은 대부대가 임시 기병연대의 공격에 측면이 무너졌다. 총격이 맹렬하게 가해지자 왜병들이 아우성을 치며 물러섰다. 왜인과 왜병이 뒤섞인 탓에 통제되기 어려운 문제가 여기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반격과 퇴각 명령이 엇갈리며 왜군 부대의 혼란이 극에 달했다. 그러나 왜군 지휘부가 혼전이 벌어진 곳으로 예비 병력 1만을 투입했고, 주로 조총병과 장창병으로 이뤄진 포위망이 완성되기 직전에 기병연대가 잽싸게 빠져 나왔다. 이후 서로 섣불리 선제공격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대치 상태가 길어졌다.
“지휘관이 감동이에요, 주인님.”
“지휘관이 만약 감불이었다면 적의 지휘부를 향해 죽자 살자 달려들었겠지. 감동인 게 정말 다행이다.”
일본에 화약이 부족하다지만 왜군 총대장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군막 주변에는 철포병들이 충분히 배치돼 있었다. 도쿠가와 가문은 임진왜란에 참가하지 않은 덕에 화약 재고가 아직 많이 남았다.
왜군이 고산국 기병연대가 중앙돌파를 할까 두려워하면서 병력을 재배치시켰다. 그 사이 히코시마 요새에 대한 공격력이 약해지면서 1연대와 3연대는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기병연대는 왜군 주변에 접근할 듯하다가 물러섬으로써 견제 역할을 충분히 해주었다. 그리고 왜군이 기병연대를 향해 접근해오면 전선에서 함포를 쏘아 왜군의 수를 팍팍 줄여나갔다. 시모노세키의 폐허에 살육의 현장이 재현되고 있었다.
“국왕전하!”
“깜짝이야! 어서 오시오.”
함경도 방어사 오응태가 좌승함의 관측실까지 찾아왔다. 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 무장한 상태였다. 갑옷과 투구는 물론, 목도리와 발싸개까지 단단히 껴입었다는 뜻이었다.
“대원수께서 여진 기병의 투입 시기를 국왕전하께서 판단하라고 하십니다.”
“오 방어사의 생각은 어떻소?”
“적이 예상치 못하게 대규모 병력을 투입한 탓에 고산국 주력 2개 연대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몰려 있습니다. 여진 기병 2만을 투입해 몰아친다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진 기병을 여기에 쓴다면 일본에 대한 타격 능력은 뚝 떨어지겠지요.”
“그게 문제입니다. 여진 기병 전력이 절반 이하로 떨어질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이민호는 잠시 고민했다. 민영과 민혜는 당연히 여진 기병을 동원해 왜군 주력인 도쿠가와 군을 칠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왜군이 5만 단위로 교대로 몰려올 것을 예상했는데 왜군 지휘부는 현재 히코시마 앞에 15만 가까이 집중적으로 투입하고 있었다. 왜군의 책사가 누군지 몰라도 항상 예상 밖으로 병력을 집중해서 이민호를 매번 곤란하게 만들었다.
육지로 작은 배를 운반해 모지 항을 공격했을 때도 한꺼번에 300척이나 투입한 것은 사실 상식 밖이었다. 전선 세 척과 1개 중대의 병력으로 적당한 수준의 방어력을 유지했던 모지 항은 하마터면 홀랑 타버릴 뻔했다.
“여진 기마병들이 숙영 준비는 안 되어 있겠지요?”
“예. 최대한 가볍게 준비했습니다.”
여진 기병들은 히코시마 요새 건너편의 왜군을 상대할 것으로 알고 전투 준비를 마쳤다. 천막이나 예비 식량 같은 것은 하나도 준비되지 않았다. 그것은 조선 기병 3천여 기도 마찬가지였다.
“왜군이 이 정도까지 간몬 해협에 병력을 집중시킬 줄 몰랐소. 그래서 가능한 작전이오. 지금부터 적의 전투 병력은 가급적 피하고 해안도로를 따라 진격하면서 일본에 최대한 피해를 입히시오.”
“아아! 드디어!”
“최종 목표는 오사카이며, 매일 일몰 전에 수송선으로 귀환해서 보급을 받고 잠도 수송선에서 재우시오. 류오산 쪽에 적의 보급 기지가 있으며 근처에서 특전대대 한 무리가 불빛 신호로 안내를 해줄 것이오. 직할대대는 휴식이 필요하니 3연대 기병대대와 동행하시오. 무운을 빌겠소.”
“충! 성!”
오응태가 신이 나서 돌아갔다. 곧이어 수송선들이 모지 항과 해협 건너편을 왕복하며 여진 기병들을 실어 날랐다. 수송선이 30척밖에 모이지 않아 한 번에 실어 나를 수는 없었다.
왜군 쪽에서는 수만에 달하는 대규모 기병 돌격에 대비해 급조한 목책을 부대 앞에 쌓아두고 조총병들을 대기시켰다. 기병에 대비해 집결한 왜군을 향해 전선에서 계속 함포를 쏘아댔다. 왜군이 도착한 2월 초부터 파놓았던 참호선은 전마가 기수를 태운 채로 뛰어 넘을 정도로 폭이 좁아서 방어에 큰 도움이 될 수 없었다.
“주인님! 1, 3연대는요?”
“잘 싸우고 있는데 왜?”
기리시탄 의용병이 3만 가까이 주둔하고 있었지만 이들을 1만 이상 히코시마에 투입할 이유가 없었다. 1만 명을 추가 배치함으로써 성벽이 이미 꽉 들어찼기 때문이다. 이민호는 탄약이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히코시마의 낮은 성벽이 무너질 이유가 없다고 봤다.
“간다!”
여진 기병 2만과 조선 기병 3천, 그리고 3연대 기병대대가 북쪽으로 달려 나갔다. 왜군은 여진 기병이 우회 공격하는 줄 알고 북쪽에 목책을 급히 설치했다.
그러나 기병 2만여 병력은 계속해서 북쪽으로 달려갔다. 왜군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보병으로는 여진 기병을 따라잡기는커녕 후방 부대에 급보를 전하는 왜군 기마전령보다 더 빨리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