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66 41. 일본 멸망 =========================================================================
“고산국 국왕전하께서는 큰 힘을 갖고 계시면서도 뜻밖에 다른 나라 영토에는 욕심이 없으시더군요. 큐슈를 고산국 영토로 편입한 것은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는 예외라고 생각합니다.”
같이 작전한 경우는 몇 번 안 되지만 섬라의 왕제는 고산국의 힘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에까토싸롯 왕제는 흑태자 나레쑤언의 동생으로서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어 백태자라는 칭호를 들을 만했다.
고산국 입장에서 큐슈를 딱히 영토로 편입할 필요는 없었지만, 적대적인 세력인 일본에 의해 해상교통로가 차단당할까봐 억지로 편입했다. 이민호는 큐슈를 지키기 위해 고산국의 국력이 심각할 정도로 소모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큐슈를 고산국 군대만으로 통치할 수 없어 억지로 일본인들을 백성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큐슈에 사는 일본인들이 고산국 국민이 된 것은 아니었다. 기리시탄 의용병들을 제외한 백성들은 다른 고산국 백성들과 달리 직업 선택이나 거주이전의 자유가 제한된 농노와 비슷한 신분이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원래 그렇듯이 고산국의 지배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묵묵히 생업에 종사했다.
“그래서 안심하고 앞으로 고산국과 협력관계를 맺었으면 합니다. 만약 버마가 저희 아유타야를 공격해올 경우 고산국이 도와주시길 원합니다.”
“섬라가 이번에 도와준 것처럼 고산국에서도 섬라를 위해 병력을 파견해드리겠소. 허나 고산국은 인구가 적어 2천에서 최대한 5천까지 가능할 것입니다.”
“고산국의 전력은 무지막지하게 강하니 그 정도로 충분합니다. 만약 버마의 보석 산지를 탈환할 수 있다면 고산국에서 주로 수입하는 보석류를 더 좋은 조건에 판매해드리겠습니다.”
“그럼 고맙지요.”
루비는 섬라에서도 생산되지만 사파이어를 포함해 훨씬 많은 양이 주로 버마 땅에서 채굴됐다. 그러나 버마는 수많은 속국을 거느리고 있어서 보석 채굴과 판매망이 제대로 통제되지 않았다. 섬라 즉 아유타야도 얼마 전까지 버마의 속국에 불과했다.
포르투갈 용병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버마 국왕의 근위대로 근무하며, 또는 다른 영주들의 용병으로서 버마에서 싸워왔다. 포르투갈인들은 해적과 용병으로서 연명하고 있지만 장기적인 목적은 오직 버마 북부의 루비 산지인 모곡이었다.
포르투갈 용병들은 버마가 섬라에 패한 직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큰 기회를 잡았다. 버마 서해안의 속국 아라칸의 근위대장 필리페 드 브리투가 버마 남부에 독립국을 세우는 것은 앞으로 몇 년 뒤의 일이었다.
섬라 병력을 귀국시키기 위해 기관을 탑재한 수송선을 15척, 해동상단 소속 상선과 범선을 50척 가까이 동원했다. 남풍이 부는 시기라서 기관 탑재 수송선을 동원하지 않으면 여섯 달을 더 기다려야 했으므로 한동안 고산국의 보급체계가 마비됐다.
섬라 군은 사상자가 가장 적게 났으면서도 가장 많은 외교적 성과를 올리고 돌아갔다. 섬라 병사들은 일본 창검과 조총, 갑옷 같은 전리품 외에도 고산국에서 준 선물을 싸들고 희희낙락했다. 선물보따리 안에는 도자기로 만든 식기류 일습, 섬라인 대부분이 불교도임을 감안해 작은 은입사 철제 향로, 그리고 섬라의 단검과 도안은 같지만 훨씬 강하고 예리한 단검이 들어있었다.
어차피 넘쳐나는 것이 고산국의 재화였다. 이민호가 명령해서 섬라 병사들에게 비단과 면포, 모시도 한필씩 따로 주었다. 섬라 병사들은 그 동안 월봉으로 받은 은과 함께 한밑천 잡아 귀국한 다음 떵떵거리며 살게 되었다. 고산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 가는 강대국으로서 섬라와 버마에 이름을 크게 떨쳤다.
필리핀의 말레이계 용병 2천 명은 그 전에 돌아갔다. 월봉 몇 달치만으로도 고향에 돌아가면 중소 지주로 성장할 정도라서 원정에 참가한 용병들은 그때부터 고산국을 진정한 조국으로 여기게 되었다. 필리핀 북부 고산국 영역은 이들 귀환한 용병들 덕택에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해남도에 거주하던 묘족이었다. 인원은 500명 정도밖에 안 되고 실전에 투입된 적이 딱 두 번밖에 없었지만, 약속대로 보상을 해주어야 했다.
묘족들이 원한 것은 영토였고, 이미 옥남이 묘족과 약속한 조건을 이민호가 추인했었다. 이민호가 묘족 대표들을 군막으로 불러 치하한 다음 영토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주애공 대인! 해남도에서 오크남 대관께서 말씀하시길, 일본을 정복하면 우리에게 영토를 나눠주겠다고 했습니다. 약속을 지켜주십시오.”
“전원이 큐슈에 정착하려고? 좋다. 병사들 전원에게 일본 농민들이 평균적으로 보유하는 경작지의 두 배를 내주겠다. 가족을 데려와 정착할 것을 허락한다.”
수십 년 단위의 장기적인 계획에 따라 이민호는 묘족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명나라가 무너지면 중국 남부 일대 일부분을 묘족에게 분할하려는 계획이었다. 또한 조선에서 이민이 예상보다 많지 않고 여진족도 평원을 떠나려 하지 않아서 묘족은 고산국 영역의 빈 땅에 인구를 채우고 병력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민족 집단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섬라 군과 말레이 용병들이 돌아간 이후 조만간 여진 기병과 고산국 주력 병력도 귀국할 예정이었다. 그러면 앞으로 큐슈에는 소수의 간몬 요새 경비대를 제외하고 기리시탄 의용병들만 남게 된다. 종교적 색채가 강한 기리시탄 의용병들을 다른 세력이 어느 정도 견제를 해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민호가 묘족에게 특혜를 주었으나, 예상과 달리 묘족이 격렬하게 반발했다.
“지금 장난치십니까? 저희들은 일본 땅까지 와서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싸웠단 말입니다!”
“별로 싸우지도 않았잖아? 그럼 세 배를 주겠다.”
여기까지는 미래를 생각해 이민호가 참으려고 했다.
“열 배를 주십시오. 단 한 치라도 줄이면 안 됩니다. 묘족 병사 일인당 왜인 마을 하나씩 다스리고 싶으나, 주애공 대인께 많이 양보해드린 겁니다.”
“아니, 먹고 살기에 충분한 땅을 준다고 하지 않았나? 원래 약속한 것보다 넓은 땅을 주는 거야. 일본 농민에게 소작을 주면 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 넓은 땅이야. 고산국 직할 병사들보다 많은 보상을 받으려고 하면 안 돼.”
“겨우 열 배를 거절하시다니! 저희들을 겨우 그 정도로 보십니까? 그럼 지금 당장 큐슈의 절반을 내놓으십시오!”
시간이 금이라는 격언을 상기시키는 링컨의 일화와 비슷한 소리를 하자 어이가 없어서 이민호가 대꾸를 않고 잠시 노려봤다. 큐슈를 점령할 때 거의 10만에 달했던 연합군 전체와 묘족 500명을 동등하게 대우해달라는 주장이었다. 큐슈 정벌에 참전한 나라는 명나라와 조선, 섬라, 유구, 고산국과 동해국과 묘족인데 나머지 여섯 나라를 하나로 묶어버린 대단한 용자가 납셨다.
“안 된다고요? 그렇다면 일곱 나라가 참가했으니 공평하게 큐슈의 7분의 1을 저희에게 주십시오. 안 됩니까? 그럼 병력으로 따져서 200분의 1을 주십시오. 이 정도면 아주 공정한 분배입니다.”
“계속 까불어봐라.”
이민호는 앞으로의 계획에서 협조를 얻기 위해 묘족과 잘 지내고 싶었다. 그러나 묘족이 논공행상에서 이런 식으로 과도하게 요구하고 나오니 정나미가 뚝 떨어지고 말았다.
“잘못했습니다. 주애공 대인께서 아까 말씀하신 일본 농민의 세 배를 주십시오.”
“두 배다.”
“예...... 고맙습니다.”
그래도 약속은 지켜줬다. 과도하게 욕심을 낸 대표가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묘족의 다른 대표들이 그 대표를 천막 밖으로 쫓아냈다.
“죄송합니다. 저흰 그렇게 욕심이 많은 자들이 아닙니다. 어째 술주정뱅이가 큰소리친다 했더니 결과가 이 모양입니다.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괜찮아. 욕심쟁이들은 결국 손해를 보게 돼 있는 게 이 세상의 정의니까. 그리고 나를 시험함으로써 너희들에 대한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어. 내 앞에서 말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또 욕심을 부리겠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됐어. 이제 나가봐!”
이민호가 묘족 대표들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사람 간을 보는 것은 외교의 기본이라 내키는 대로 응징하지 못하고 이민호가 꾹꾹 참았다. 그리고 억지로 참는 모습을 일부러 보여줌으로써 묘족 대표들의 기선을 제압했다.
“죄송합니다. 저희들은 나라를 세울 땅을 찾고 있습니다. 주애공 대인께서 저희들을 지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대인께서 저희들을 끌어들인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어째서 나를 그 따위로 기분 나쁘게 시험한 거야? 이제 필요 없어. 그리고 나라는 스스로 세우는 편이 좋아.”
이민호는 몹시 불쾌했으나 외교에서 흔한 일이라 해서 꾹 참았다. 이민호의 표정을 살피면서 묘족 대표들이 안절부절못했다. 헛소리하다가 쫓겨난 묘족 전사는 다만 앞에 나선 자일뿐이었다. 그렇게 하라고 충동질한 사람들이 눈앞에 있었다.
“묘족이 거주하는 지역 주변은 명나라를 비롯해 강력한 나라가 이미 성립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영토를 찾을 길은 바다 바깥에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저희들이 명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해남도에 간 것은 바다로 진출해 새로운 땅을 찾기 위한 장기적인 계획의 일환입니다. 그러나 아직 배를 만들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인구 부양력이 충분한 땅을 찾는다면 북미와 호주, 아프리카 정도였다. 농업과 축산업의 발달이 따라준다면 현대 수준 이상의 인구가 거주 가능했다. 이에 반해 여진족이 거주하는 송화강 유역은 소빙기에 본격적으로 접어들면 살기 어렵다. 시베리아는 말할 것도 없었다.
묘족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는 인상이 강하지만 사실은 정착형 농민에 가까웠다. 다만 나라가 없어 수천 년 동안 떠밀려 다녔을 뿐이었다. 사실 한족 때문에 남쪽으로 떠밀린 종족은 꽤 많았다. 섬라와 라오스 등의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주종족인 타이족도 황하 유역에 거주했다가 계속 남쪽으로 밀려났다. 버마의 몽족도 묘족의 일파였다.
“웬만한 땅에는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어떡하나? 원주민들을 몰살시키고 그 땅을 차지하겠다는 계획이라면 절대 협조해줄 수 없다.”
“그렇다고 저희들이 한족들을 몰아내고 옛 땅을 되찾기도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겠습니까? 주애공 대인께서 명나라의 관작을 받았음에도 솔직히 여쭙겠습니다.”
“중국 왕조는 가끔 무너지기도 한다. 그때 땅 일부분을 영유하고 있다가 새로 선 중국 왕조와 잘 협의해서 독립을 인정받도록 하라. 그 방법이 가장 무난할 것이다. 이만 나가봐!”
이것이 소수민족으로서 독립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건국 초기 힘이 넘치는 왕조의 군대는 사방으로 원정을 가서 국경을 넓히기 마련이었다. 전 왕조를 이었다는 정통성을 피지배자들에게 널리 선전하기 위해서라도 전 왕조의 영토를 소수민족이 소유하도록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주애공 대인께서는 저희들이 잠시 시험해본 것 때문에 이렇게 협조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래 나 속 좁아. 너희들은 이미 신뢰를 잃었으니 어떡하나? 처음 본 사람처럼 대해야지. 내가 손해를 봐가면서 너희를 도울 이유가 없지 않나?”
묘족이 치우를 조상으로 모시며 일부 생활도구가 비슷하다 하나 한민족과 전혀 무관한 민족이었다. 이들은 춘추시대 강대국인 초나라의 후예였다.
인구가 적은 고산국으로서 나라가 없는 묘족의 인구와 힘이 필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묘족 대표들도 그런 고산국의 사정을 간파하고 배짱을 한 번 부려본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작은 활약에 그친 주제에 큰 보상을 매번 요구한다면 상대하는 것도 피곤할 일이었다. 이민호는 묘족과 협력관계를 유지할 생각을 접었다.
“일본에서 배운 게 있습니다. 할복이라더군요. 그렇게라도 사과하겠습니다.”
“더러운 짓을 하려면 나가서 해.”
“제가 여러 묘족 집단 중에서 남동 3개 부족을 대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정 사항을 대인께 알려드립니다.”
젊은 대표가 앞으로 나섰다. 민영 등이 긴장하는 중에 대표가 무릎을 꿇고 이민호에게 절을 했다.
“저희들에게 나라를 만들어주십시오. 그 동안 개처럼 부려먹어도 좋습니다.”
“그래? 그거 참 안 됐군. 약속은 지켜주마.”
여전히 기분이 나빴지만 기분 내키는 대로 국사를 집행할 수는 없었다. 인구 수백만의 용병 민족을 얻는 중요한 일이라 이민호는 꾹 참기로 했다. 그러나 묘족을 원래 계획과 달리 몹시 호되게 부려먹을 예정이었다. 이민호는 이들이 어째서 협상 상대방의 기분을 나쁘게 해서 결국은 손해를 자초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묘족의 도박은 묘족 전체가 고산국의 노예병으로 전락하는 것으로 파산을 맞았다.
묘족에는 기병과 조총병이 없어 이 시기의 표준 편제에 비해 많이 약한 편이었다. 그러나 밀림지대에서 다른 원주민과 싸우는 것은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 타이 족의 일파인 해남도의 려족이 얼마 안 되는 묘족에게 상대가 되지 못하고 진압된 것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의 귀족 집안 영애를 왕비로 소개시켜주마.”
“국혼을 함으로써 묘족과 고산국의 결합이 강해진다면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이민호는 서소문에서 몇 번 마주친 꼬마 아가씨를 떠올렸다. 눈앞의 젊은이와 죽이 척척 들어맞는 아주 좋은 배필이 될 것 같았다. 원래 20대 초반의 고요제이 천황을 이혼시킨 다음 시집보내려고 했는데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일본의 운명은 며칠 안 남았다. 문자 그대로 며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