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371화 (320/1,000)

00371  42. 남방 진출  =========================================================================

“파나마에 운하를 판다고요? 차라리 이집트의 고대 수에즈 운하를 다시 여는 편이 쉽지 않겠소?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항해 거리도 훨씬 짧아요.”

“예? 수에즈에 운하를 건설하면 안 됩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포르투갈 상인 동 두아르테가 손사래를 쳤다. 여기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입장 차이가 극명하게 엇갈렸다.

에스파냐는 마닐라 갈레온 무역뿐만 아니라 멕시코시티 동쪽과 남쪽에서 연이어 발견된 34곳의 은광, 페루 부왕청 소속 알토페루, 현대 명칭 볼리비아의 포토시 은광 등 은광을 개발해 본국으로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조만간 북미에도 진출할 예정이라 파나마에 운하를 건설하는 문제를 두고 꾸준히 고민했다.

반면에 포르투갈은 영국과 네덜란드가 인도양에 들어오는 것을 차단해야 하는 입장이라서 아프리카 남단을 돌지 않아도 되는 수에즈 운하가 생기는 것을 꺼리는 편이었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포르투갈이 보유한 인도양의 제해권과 말래카 해협 요새는 다른 나라에 금방 빼앗기고 만다. 에스파냐도 네덜란드에 의해 향료 제도에서 쫓겨나고 대서양과 태평양, 카리브해에서 해적들에게 신대륙의 은을 싣고 돌아오는 보물선을 신나게 털렸다.

“돈 페드로, 동 두아르테 두 분 모두 들어보시오. 두 나라가 맺은 조약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태평양이든 인도양이든 두 나라가 독점할 단계는 이미 지났소.”

“그건 그렇습니다. 고산국은 권리가 있지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고산국이 일본을 공격하는 동안 보급품 수송을 도와주거나 관전무관을 파견해 전쟁 진행 상황을 살폈다. 두 나라는 고산국의 강력한 해군력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아시아에서는 두 나라가 합해도 고산국을 막을 능력이 없었고, 본국에서 병력을 증강해도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는 평가를 했다. 이민호가 그 이야기를 들었다면 피식 웃었을 것이다.

태평양과 남양제도는 이미 고산국이 활발하게 탐사활동을 벌이는 중이었다. 그리고 인도양에서 고산국 해군이 해적을 소탕해주기로 포르투갈과 약속했다. 인도양에는 아랍 해적과 북아프리카 해적선뿐만 아니라 조만간 영국과 네덜란드 배가 해적질에 가세할 예정이었다. 상선은 곧 해적선이라는 개념은 이 시대 어느 나라에나 통용됐다.

“고산국뿐만 아니라 영국과 네덜란드 배가 앞으로 계속 몰려올 것이오. 얼마 전부터 태평양과 대서양 같은 대양에서 영국과 네덜란드 해적이 휘젓고 다니지 않소?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그들을 막을 수 있겠소?”

“그건 좀 어렵습니다. 병력이 부족해 기존 식민지도 지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동 두아르테! 차라리 모든 배가 운하를 지나도록 해서 해적을 통제하는 편이 나을 것이오. 물론 향료 무역의 독점은 앞으로 불가능하겠지만 말이오.”

“으음. 고민 좀 해보겠습니다.”

이민호는 포르투갈을 잘 설득해서 수에즈 운하 건설에 오스만제국의 이집트총독을 끌어들일 계획이었다. 이집트가 오스만제국의 영토이므로 향료 무역에 참가하고 싶어 하는 오스만제국이 운하 건설에 더 적극적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았다. 현재 오스만제국의 황제는 무라트 3세로서 벌써 20년째 재위 중이었다.

그런데 이슬람 제국의 분열 이후 성립된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는 16세기 전반에 오스만제국에 합병된 뒤에도 맘루크는 살아남았다. 맘루크는 지방군벌화 되었고 Bey라 불리는 이집트 총독도 맘루크 출신이었다. 그래서 수에즈 운하를 건설하려면 오스만제국, 맘루크 출신 이집트총독, 포르투갈 모두를 설득해야 가능했다. 수에즈는 평지라서 건설하는 것이 허가 받는 것보다 오히려 더 쉬울 것으로 이민호는 판단했다.

“동 두아르테! 멕시코 부왕께서 파나마 운하 건설을 추진할 계획을 갖고 계시다니 반가운 일이오. 운하 건설비의 절반을 내가 부담할 의향이 있음을 부왕께 전해주시오. 파나마는 산맥을 넘어야 해서 갑문을 만드는 기술이 필요할 텐데 내가 도울 일이 있을 것이오.”

“사실 갑문을 건설하는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운하를 통과하는 배에 통행세를 징수할 경우 이익을 어떤 비율로 분배할 것인지 하는 문제도 함께 부왕께 문의하겠습니다.”

수에즈 운하와 달리 파나마 운하 건설은 지형상 몹시 난공사에 속했다. 배가 산맥을 넘어가려면 몇 차례 갑문을 이용해야 해서 이 시대 기술로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갑문 자체야 14세기 네덜란드에서 개발했으나 평지와 산악지대는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실제 역사에서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는 동안 말라리아 때문에 3만 명에 가까운 공사장 인부들이 죽기도 했다.

그러나 북미 대륙에 군침을 흘리고 있는 이민호 입장에서는 파나마 운하가 반드시 필요했다. 대륙횡단 철도를 깔고 기차를 운영하더라도 대서양을 통해 몰려올 유럽 세력을 막기 위해서는 해군 함선의 이동이 필요했다. 생각 같아서는 에스파냐마저 몰아내고 남북 아메리카 전 대륙을 갖고 싶었지만 북미 대륙에 몰려올 유럽 여러 나라를 감안하면 에스파냐라는 강대국이 우군으로 남아있는 편이 좋았다.

그리고 에스파냐가 큰돈을 들여 공사를 해야 국가 재정 위기가 와서 북미 대륙을 보다 싸게 매입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했다. 사실 에스파냐로부터 북미 대륙을 사는 것이 아니라 북미 대륙에 대한 에스파냐의 개발 우선권을 매입하는 것이라서 일반적인 영토 매입과는 전혀 달랐다.

“그런데 국왕전하께서 입으신 복장이 아주 산뜻해 보입니다. 활동하기 편하면서도 품위를 갖췄습니다. 모직인 것 같은데 재료는 정확히 무엇입니까? 이렇게 고급스런 윤기가 흐르는 모직은 본 적이 없습니다.”

“양털이 맞소. 그러나 일반적인 양털이 아니라 특별한 종류의 것이라서 쉽게 구하지는 못할 것이오. 여러분이 신발로 밟고 있는 것과 비슷한 재질이오.”

“흐익! 페르시아 양탄자!”

상인들이 발을 번쩍 들어 올리다가 탁자에 무릎을 찧으며 비명을 질렀다. 몇몇은 무릎을 꿇고 양탄자의 재질을 면밀히 조사했다.

“국왕전하! 혹시, 설마 이것도 고산국에서 만든 것이라는 말씀은 차마 못하시겠지요? 아닐 겁니다. 페르시아에서 샀지요? 그렇지요?”

“고산국에서 만들었소. 양탄자 끝부분을 들쳐보시오.”

고산국에서 만들었다고 스페인어로 표기된 상표가 떡 하니 붙어 있었다. 상인들 몇몇이 털썩 주저앉았다.

“비단과 혼방한 제품이군요. 양털을 살펴보니 품질은 페르시아산보다 오히려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더 낫지요. 들어간 재료의 품질이 확연히 다른데요. 샘, 견본으로 세 장씩 드릴 테니 동 두아르테는 무굴제국이나 오스만제국, 페르시아 사파비 왕조의 상인들에게 평가를 받아보시오. 돈 페드로는 양탄자 하나를 에스파냐 국왕폐하께 바치도록 하시오. 멕시코 부왕께도 보내드리시오. 모직물도 견본으로 좀 가져가시구려.”

이민호 입에서 하마터면 샘플이라는 말이 나올 뻔했다. 이 시기 영어는 아직 국제어로 흔히 쓰는 말이 아니었고, 현대 영어와도 많이 달랐다.

“후우~ 전하께서 해달 모피처럼 견본을 주시면서 전문가들에게 평가받으라고 당당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이것도 틀림없이 명품이겠군요. 고산국의 끝없는 능력에 절로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저 팔아서 돈으로 바꿀 상품일 뿐이오.”

이민호는 일본에 있는 동안에도 아이샤와 함께 여러 가지 문양을 넣을 수 있는 직조기를 만들기 위해 의논했다. 수력발전기나 기관을 통해 얼마든지 동력을 만들어낼 수 있었으므로 대량 생산도 가능했다.

사실 양탄자는 신기술의 적용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시험 제품일 뿐이었고, 대량 생산할 계획은 없었다. 진짜 팔고자 하는 제품은 양탄자도, 양복도 아닌 최고급 모직물이었다. 고산국 궁성에는 남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모델을 내세울 수 없어 이민호가 직접 입어야 했다.

“혹시 이 양탄자의 가격을 어느 정도로 책정하셨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가격을 알아보는 일은 두 분께 맡기겠소. 페르시아 상인들이 제대로 평가를 하면 가격을 정해보시오.”

해달 모피처럼 최고급 사치품의 가격을 책정하는 것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상인들의 몫이 되었다. 이민호도 페르시아 양탄자의 가격을 알고 있으므로 속일 생각은 못했다.

“오스만제국과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는 아직도 전쟁 중인가요?”

“예. 그 지역은 항상 전쟁을 합니다. 사파비 왕조의 압바스 1세가 오스만제국과 우즈베크인의 침략을 잘 막아내고 있습니다. 바그다드는 다시 페르시아로 넘어갔습니다.”

이민호는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중동의 정세를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아라 공주가 열심히 메모하고 있었지만 미카의 정보부를 통해 몇 년째 중동 지역 정보를 수집해 분석 중이었다.

브루나이의 무슬림들은 메카에 성지 순례를 하고 돌아오면 이름에 하지라는 칭호가 붙는다. 그래서 하지 칭호가 붙은 사람에게 술 몇 잔만 사줘도 얼마든지 정확한 최신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나중에 해상운송이 좀 더 편해지면 사치품보다는 생활필수품을 대량으로 거래하고 싶소. 최소한 먹는 문제, 입는 문제로 사람들이 고통 받지 않는 세상이 오면 좋겠소.”

말이야 쉽지 그런 세상이 쉽게 올 리가 없었다. 현대에서 살았던 이민호가 봐도 국민의 자유와 평등이 민주주의 헌법으로 보장되고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하는 시대가 오더라도 빈부격차가 큰 문제로 남았다.

건국 초기라서 빈부격차가 심하지 않을 것 같은 고산국에서도 조선의 만석꾼에 해당하는 부자들이 상인과 농민, 건설업자 통틀어서 벌써 100명 넘게 생겼다. 기술자들은 다른 직업군에 비해 월급을 훨씬 많이 받았지만 월급쟁이의 특성상 금방 부자가 되지는 못했다.

“역시 고산국 국왕전하께서는 성군이십니다. 황제의 덕이 넘쳐흘러 사해의 백성들이 은혜를 입는다는 중국인들의 정치 이상을 실현하고 계십니다.”

“과찬의 말씀이오.”

“아닙니다. 고산국과 무역을 시작한 이래 버마나 인도에서 용병과 해적질을 하던 포르투갈 청년들을 마카오와 고아에서 더 많이 고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안전하게 번 돈을 모아 고향에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나라가 부유해질수록 국민들이 배를 곯는 모순이 이제는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아부하는 거야 상인의 기본 소양이지만 두아르테는 말에 진심이 담긴 것 같아 이민호는 기분이 좋았다. 페드로도 이민호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에스파냐도 전하 덕택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작년에는 국가 파산을 선언하기 직전에 세비야에 배가 들어와서 간신히 재정 위기를 넘겼다고 합니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이민호는 에스파냐가 망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에스파냐가 잠시 재정 위기에 몰려 북미 대륙을 싸게 매입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고산국도 두 나라와 무역을 하면서 많이 부유해졌소. 무역이란 서로 도움이 되는 일이지요.”

“역시 금과 은을 쌓아두는 것만이 국부의 증가가 아니라는 일부 중상주의 학파의 주장이 옳았습니다. 무역에 의존하던 건국 초기와 달리 지금은 고산국 백성들이 열심히 땀 흘려 일하면서 쌓은 재화가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에스파냐도 그렇게 국내 산업이 진작됐으면 좋겠지만 귀족들이 자기 욕심만 채우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고산국 정부 계정과 왕실 계정, 그리고 국가 전체의 생산액을 비교해보면 왕실 계정에 속한 자산 증가가 여전히 5할 가량을 차지했다. 그러나 최근 여러 나라의 금광을 왕실 소유로 했는데도 왕실을 제외한 국내 총생산이 금방 따라와 비슷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고산국은 매년 국내 총생산이 두세 배씩 뛰어올랐다.

“인구 과소 문제만 어떻게 해결하면......”

이민호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흑인 병사들과 가족이 1만여 명인데 조만간 인도양이 안정되면 아프리카로 돌려보내기로 약속했다. 이민호는 그 약속을 미루고 싶을 정도였다.

“동 두아르테! 혹시 아라비아 주변 지역의 지도가 있소?”

“전하께서 인도양 쪽의 일을 맡기실 것 같아서 지도를 준비해왔습니다.”

지도는 각국의 상인과 모험가들에게 인기 좋은 비싼 상품이기도 하고, 어떤 지도는 국가기밀일 수도 있었다. 에스파냐 상인들이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는 가운데 동 두아르테가 아라비아와 이집트, 이란과 인도 북서부 지방이 포함된 지도를 내밀었다.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현 시점의 국경이 표시돼 있어 이해하기 좋은 지도였다.

============================ 작품 후기 ============================

장사는 한 회 남았습니다.

인도양과 북미 진출 계획이 포함돼서 조금 길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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