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77 42. 남방 진출 =========================================================================
카이펑에서 고산국 왕도 남쪽 구역으로 이주를 마친 개봉부 유대인 대표 자오칭이 아침부터 궁성으로 인사하러 왔다. 이민호는 빵모자를 쓴 유대인 대표 여러 명을 집무실에서 맞이해 탁자를 두고 마주앉았다.
“국왕전하 덕택에 명나라 이곳저곳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이 모두 모일 수 있게 됐습니다. 이번 기회에 항저우와 광저우에 살던 유대인들도 절반 이상이 고산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어쩐지 수가 많다 했지요. 집이 모자랄 것 아니오? 공국 토목부와 건축부에 일러 마을을 확장하라 일러두겠소.”
이 시대 기준으로 광동 광저우, 절강 항저우, 카이펑 순으로 유대인 인구가 많았다. 광저우와 항저우는 전통적인 국제 무역항이며 시기별로 유대인들이 추가적으로 이주해오기도 해서 카이펑 유대인보다 많은 숫자를 유지했다. 원나라 때 집중적으로 이주했다가 주변에 동화되는 과정에 있는 카이펑의 유대인들은 숫자가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카이펑 유대인들 대부분이 이주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국왕전하께 더 이상 폐를 끼치는 것도 예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산국의 법규에 맞게 저희들 힘으로 마을과 집을 건설하겠습니다.”
“유대인 특유의 건축 양식이 있다면 직접 만드는 게 낫겠소. 이민자에게 주택 건설을 지원해주는 제도가 있으니 필요한 건축 재료를 달라고 하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항상 고맙습니다.”
이민호는 유대인들이 지하실 비밀 공간과 옆집으로 연결되는 통로를 만드나 보다 하고 그냥 넘어갔다. 세계를 유랑하면서도 고유의 문화를 지키던 유대인들은 어느 지역으로 이주하든 기존 주민들과 섞이지 못하고 항상 박해를 받아온 사람들이었다.
이민호는 유대인들이 편하게 자기들끼리 모여 살도록 내버려두고 그들의 역량을 끌어내기로 했다. 유대인들은 수가 적더라도 특유의 가정교육에 힘입어 상업적 능력뿐만 아니라 교육과 학문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곤 했다. 그러나 만약 고산국에서 금융을 쥐고 흔들려고 하면 쫓아낼 수밖에 없다고 유대인들에게 몇 번이나 경고했다.
“항저우에 남은 사람들, 그리고 광저우에 사는 유대인들과도 고산국에서 정기적인 회합을 갖기로 했습니다. 명나라는 입국이 자유롭지 못해서 말입니다.”
“고산국은 입국과 출국이 자유로운 편이니 회합은 마음대로 하시오.”
마치 동남아 화교 네트워크처럼 같은 명나라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유대인들도 서로 교류를 이어오고 있었다. 다른 지역에서도 유대인이 살고 있었기에 성서를 분실하면 사오기도 하고, 할례와 돼지고기 금식 등 유대교의 계율을 지킬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유태인이 여러 세대에 걸쳐 외지를 전전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정착한 것은 역사상 처음인 것 같습니다. 여러 방면으로 지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그거 참 다행이오. 잃어버린 경전이나 유태 전통이 끊긴 부분은 예수회 신부들에게 부탁해서 도움을 청하시오. 비용은 내가 내드리겠소.”
현재 명나라의 유대인 공동체에는 랍비가 없었다. 원래 있었는데 중간에 전승이 끊기고 말아서 새로 랍비를 뽑지 못했다. 경전은 1461년 개봉부의 유대 사원이 홍수에 쓸려가면서 대부분 사라졌다가 절강과 광동의 유대인들을 통해 어느 정도 갖추게 되었다.
“폭넓게 자치를 인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유대인은 신앙 공동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민족 공동체 아니겠소? 특수성을 인정해준 것이니 부담스러워 할 필요 없소.”
유대인 마을은 따로 떨어진 곳에 세워서 다른 인종과 뒤섞여 살다가 점차 혼혈되지 않도록 배려해 해주었다. 명나라에서 온 유대인들은 아직까지 혼혈이 적은 편이라서 중동 지역 셈 족의 특성이 얼굴에 잘 나타났다. 그러나 원래 역사에서 청나라의 유대인들은 다수의 인종과 혼혈되어 19세기 중반에는 인종적, 문화적 특성을 거의 잃어버리고 만다.
“계속해서 배려만 해주시고 아직도 저희들에게 일을 맡겨주시지 않으시는 전하께서는 실로 배포가 크다고 아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나한테 말하시오. 유대인이 잘하는 일은 유대인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내가 따로 말하지 않겠소. 아! 대학교육은 유대인에게 부탁하겠소. 교수로 일할 준비가 된 분은 예국 교육부에 신청하시오.”
“죄송하지만 학문 분야에 뛰어난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명나라에서 과거시험 공부하는 사람들만 남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느 사회에 속하든 가장 효율적인 직업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대개의 경우 종교나 인종과 관련이 적은 상업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성과를 올렸다. 사실 장사를 하려 해도 종교나 인종, 지연과 혈연이 중요한 영향을 미치므로 그런 도움 없이도 상업을 번창시킨다면 대단한 능력이라 할 수 있었다.
이슬람이나 초기 로마 가톨릭이 압도적인 지역에서는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이자놀이를 못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 지역에서 다수 주민들을 대신해서 유대인들이 대부업 중심의 금융업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유대인들이 중국인에게 상업도, 금융업도 다 밀렸다. 중국인의 전통 종교가 돈이라고 하면 다들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유대인보다 중국인이 더 돈을 밝혔고, 중국인이 홈그라운드에서 밀릴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이 시기 유대인들은 명나라에서 찾은 가장 우월한 직업인 관료가 되기 위해 과거 시험을 보게 되었다. 탐관오리는 중국에 사는 모든 인간들이 되고 싶어 하는 꿈의 직장이었다.
“유대인이 명나라의 탐관오리가 되면 정말 무섭겠소. 아니오. 계속 말씀하시오.”
“대신 카이펑의 유대인 중에 보석 세공인이 많습니다. 개봉부에서 명나라 상인들에게 보석 원석을 받아 상인들이 원하는 도안에 따라 보석을 세공해주고 공임을 받는 식으로 일했습니다. 80여 세대가 보석 세공인입니다. 이들이 고산국에서도 생업을 이어갈 수 있겠습니까?”
“오! 그거 참 잘 됐소. 서양 상인들에게 보석 대부분을 원석으로 판매해서 아깝던 참이었소. 이 시대 유럽식 또는 동양식이 가미된 유럽식 도안으로 보석을 세공하면 어떨까 하오.”
유럽 상인들에게 사파이어와 루비를 원석 상태로 넘기더라도 색깔을 바꿔 가격을 훨씬 올린 다음 판매했다. 그리고 고산국에도 명나라 출신 보석 가공사가 몇 명 있었다. 그러나 커다란 인공 보석을 커팅하려면 작업 시간이 많이 들어서 다른 자잘한 천연 보석을 만질 틈이 없었다.
“서양에 수출할 보석이라서 그렇게 만드시는군요?”
“그렇소. 어느 정도 수준일지는 몰라도 당장 이탈리아 보석 세공인들하고 경쟁할 수는 없지 않겠소? 그렇다고 너무 동양적이어도 유럽에 안 팔릴 것 같소. 그러니 유럽 귀족들의 미적 감각에 맞추되 동양풍을 가미하면 손님이 있을 것 같소.”
“보석 원석은 많이 있습니까?”
“버마의 루비와 사파이어 원석을 섬라를 통해 수입하고 있소. 여진에서 민물진주를 대량 들여오고 있으며, 해남도에서는 조만간 남양 진주를 생산해낼 것이오.”
“여진 지역에서 나는 반구형 진주라면 저희들도 세공 경험이 많습니다. 금과 은, 보석과 진주를 합해 목걸이와 반지, 귀걸이를 만들어 그 이상의 가치를 창출해내겠습니다.”
사실 보석 장인들이 일할 작업장은 이미 완공됐다. 이민호가 원정을 떠나 있어서 몰랐을 뿐이었다. 국왕으로서 할 일이라면 재료 수급을 원활히 해주고 판매처를 연결시켜주는 일이었다.
아라 공주가 유대인들을 위해 시내에 보석 가게 세 곳을 내주고 도매업용 사무실도 마련해주었다. 섬라와 여진에서 들어오는 보석과 진주 대부분을 넘기기로 했다. 그 대신 이익은 철저히 반분하기로 약속했다.
다른 업종을 영위할 유대 상인들을 위한 가게도 준비되어 있었다. 청과상, 야채상, 푸줏간, 어물전 등 기존 가게들과 비슷하면서도 유통이 대형화되면 거꾸로 생산에 영향을 미칠 만한 업종이었다.
“고산국에서는 물고기를 잡기보다는 직접 사료를 줘서 기른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그렇소. 몇 가지 어종을 가두리 양식장에서 키운다오. 바다에서 그물로 잡는 물고기도 사실은 인공 수정한 치어를 키웠다가 바다에 방류해서 자란 물고기일 가능성이 크오.”
“고산국은 마치 다른 세상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딜 가든 수가 적어 국가의 지배자가 된 경험은 적더라도 페르시아나 원나라 조정에서 그랬던 것처럼 지배자 밑에서 관리로 일한 경험은 풍부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무식한 지배자와 무식한 피지배자 사이에서 양쪽을 마음껏 농락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살았다.
그러나 고산국에 도착하고 보니 듣도 보도 못한 것들 천지에, 국왕은 유대인들에게 모든 것을 내주었으나 다만 금융업만은 금지시켰다. 유대인들이 욕심만 내지 않는다면 살기 좋은 곳이 틀림없었지만, 국왕이 계속 경고해서 등골이 서늘함을 느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언젠가 국가경제를 쥐고 흔들려고 슬금슬금 나설 사람들이었다.
“경고하겠소. 어떤 장사를 해도 좋으나 물고기든 과일이든 유통 과정에서 절대로 장난을 치지 마시오. 상인 입장에서야 최대한 이익을 올리려고 하는 매점매석 행위일지 몰라도 위정자 입장에서는 국가반역죄로 다스리고 싶어지는 법이오. 고산국에서는 모든 백성들에게 토지가 지급되어 최소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 있으니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마시오.”
“저희 유대 상인들도 국왕전하의 뜻을 받들어 백성들의 삶이 안정되도록 힘을 보태겠습니다.”
유대 상인들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갔다. 이 시대에 독과점의 폐해를 아는 군주와 관리가 많아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절대 상인이 독과점을 통해 치부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군주가 아니더라도 대신들이나 실무 관리들이 부패할 여지가 있었고, 상인들은 반드시 그 틈을 파고들었다.
“충성! 소령 김몽돌 외 60인, 남양 제도 탐사와 관계 개선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오! 수고했다. 어서 와. 이번에는 일찍 돌아왔네?”
자카르타 방면으로 떠났던 탐사대장 김몽돌 소령과 장교들이 집무실을 방문했다. 이민호는 이들과 탁자에 앉아 보고를 받았다.
“예! 남양의 몇몇 도시를 방문해 고산국의 앞선 문물을 구경시켜줬습니다. 이미 대부분 지역의 군왕들이 국왕전하를 우러르고 있습니다. 만 리가 넘는 일본에서 벌어진 일을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네덜란드 상인에 대해 충분히 경고해줬지? 반응은 어땠어?”
올해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이 네덜란드 선박들이 향료제도에 진입하는 것이었다. 몇 년 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포르투갈에게서 말래카 요새를 빼앗고 향료제도에서 에스파냐와 영국을 몰아낸 다음 현대의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전역을 석권해 식민 지배한다.
만약 네덜란드가 설치도록 내버려둘 경우 고산국의 남방항로와 인도양 항로가 완전히 막힐 수밖에 없었다. 거리가 멀더라도 고산국은 어쩔 수 없이 국력을 기울여 네덜란드와 상대해야 했다.
“술탄이나 군소 왕들에게 홍모인들의 위험성에 대해 충분히 설득했습니다. 특히 신앙을 강제로 바꿀 것이라고 위협하니 잘 먹혔습니다. 네덜란드 상선대가 올 경우 즉시 브루나이 유전이나 말래카의 포르투갈 요새에 알려주기로 했습니다.”
네덜란드는 신교가 강세이긴 하나 종교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17세기 일본이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상인 및 선교사들을 몰아내고 무역 상대국으로 네덜란드만 남겨둔 것도 네덜란드가 선교에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구교 국가들이 선교사들을 내세워 신도를 늘린 다음 일본을 정복할 것이라고 협잡질한 네덜란드 상인들의 거짓말이 통한 것이었다.
“잘했어. 하지만 네덜란드도 바보는 아닐 테니 처음에야 그럴 듯이 사탕 발린 말을 하겠지. 여기에 넘어가서 정복당하는 멍청이들이 분명히 있을 거야.”
“그렇게 단언하실 정도라니 놀랍습니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그렇게 분탕질을 쳤어도 모르는 척하고 교역을 하는 사람이 바로 나야. 하지만 네덜란드는 도저히 용납이 안 돼. 가만 놔두면 고산국을 정복하겠다고 설칠 걸?”
한때 에스파냐와 포르투갈도 바다를 휘젓고 다니면서 해적질을 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기회가 되면 침략도 하고 그랬다. 포르투갈은 말래카 요새를 가졌고 에스파냐는 마닐라를 얻었다. 당연히 전투를 통해 기존 원주민 토착 세력을 패배시킨 다음 획득한 영토였다.
그러나 지금은 고산국의 눈치를 보느라 함부로 다른 나라를 침공하지 못했다. 새로 필리핀 총독이 된 전 총독의 아들은 예전 크메르 제국인 캄보디아 남부 메콩강 하구의 프레이 노코르를 공략할 준비를 했었다. 얼마 후에 베트남에 정복돼 사이공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지역이었다.
============================ 작품 후기 ============================
1594년의 가장 큰 일은 네덜란드의 진입을 막는 것입니다.
좀 더 이어지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