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82 42. 남방 진출 =========================================================================
한 달 동안 민희와 네이, 아야가 줄줄이 아기를 낳았다. 다들 튼튼한 여자들이라 혜영과 달리 진통이 길게 가지도 않고 초산임에도 쉽게 아기를 낳았다. 산모와 아기 모두 건강해서 이민호는 방 네 곳을 뛰어다니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 항상 귓가에 입이 걸렸다.
이민호는 첫째가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 혜영의 침소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혜영은 처음에 가슴을 가리려 했으나 이민호가 집요하게 지켜봐서 가슴을 가리는 것을 결국 포기했다.
“그냥 빨아만 먹지 왜 손으로 주물러? 젖꼭지는 네 거라도 가슴은 내 꺼야!”
아기가 어미의 젖을 먹는 경건한 장면을 보면서도 이민호가 아들을 질투하며 어처구니없는 개소리를 날렸다. 혜영은 기가 막혀 대꾸도 못했다.
그 와중에 왕실 주치의와 소아과 의사가 검진을 하러 들어왔다. 이민호가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주치의는 원래 한의사였는데 40이 넘은 나이에 마카오에서 포르투갈어와 이탈리아어를 어렵게 익히면서 양의학을 배웠다. 그러나 마카오에서 배우는 의사 양성 과정이 짧은 탓에 배움이 부족하다고 절감한 주치의는 선교사들을 통해 유럽에서 많은 의학서적을 들여와 번역하고 있었다. 12세기 아랍 의사인 이븐 시나가 지은 <의학 정전>의 라틴어 번역본을 들여와 라틴어 전공자들과 함께 이를 다시 번역해서 고산국의 의학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주치의의 건의로 이민호가 유학생을 유럽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마카오에서 의사 교육을 마치고 큐슈 전쟁에도 종군한 젊은 의사 다섯 명을 뽑아 에스파냐 갈레온 편으로 멕시코를 거쳐 유럽에 보냈다. 두 명은 젊은 의사 부부로서 내과로 유명한 이탈리아 살레르노 의과대학에 유학 보냈고, 미혼 남자 의사 세 명은 프랑스 파리대학에서 수학시켰다.
이 시기 유럽 의학계는 중세 아랍 의학의 한계를 뛰어넘고 베살리우스 이후 근대 해부학이 급격히 발전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마카오 대학의 의학과 생물학 수준이 높다는 사실이 이미 유럽에 알려져 있어서 유학생들은 배울 시간을 줄여 엉뚱하게 교수들을 가르치고 앉았다. 고산국 유학생들 덕택에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세포학과 세균학 분야에서 급격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유학생들도 장기간 체재하면서 유럽 의학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유학생들 중에서 부부 의사는 이탈리아에서 흑사병을 막는 일에 크게 기여한 다음 돌아왔다. 프랑스로 간 세 명 중에서 한 명은 파리 대학의 교수로 정착하고 한 명은 프랑스 여자와 결혼해서 돌아왔다.
한 명은 주말마다 빈민들을 무료로 진료해주면서 동양의 성자 소리까지 들었다. 그러나 어느 날 집에 돌아가는 길에 강도를 당해 죽고 말았다. 유학생을 살해한 강도 세 명은 결국 빈민들에게 붙잡혀 갈기갈기 찢겨져 죽었다고 한다.
소아과 의사는 전체 의사의 10분의 1밖에 안 되는 여의사였다. 여의사는 남편 뒷바라지하러 마카오에 함께 갔다가 얼떨결에 어려운 의학공부를 같이 하게 됐다. 부인은 한의사의 딸로 태어나 한의사와 결혼하는 바람에 의학 지식이 풍부한 편이라 적응하기 쉬웠다.
이 소아과 의사 덕택에 의사 부인들이 의학공부를 하거나 최소한 간호사 자격을 따도록 국가 차원에서 지원하고 격려할 수 있었다. 정부에서 여성들을 사회생활에 적극 참여하도록 고무하는 것은 노동력 착취의 일환이었다. 남녀 의사들은 진료와 학술연구에 시달리면서도 그래도 국방연구소의 장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열심히 일했다.
“의사선생님! 아기를 위해 예방접종을 해주세요.”
“소아마비 백신은 2개월이 지나서, 수두는 12개월 지나서 접종을 할 수 있습니다. 아기씨의 예방접종 계획표를 작성했으니 이 표대로 접종을 할 예정입니다.”
혜영의 요구를 거부하며 주치의가 대답했다. 혜영은 수긍했으나 이민호가 무조건 혜영의 편을 들었다.
“이보시오, 의사선생! 혜영 귀인이 예방접종을 해달라고 하지 않소?”
“진짜로 할까요?”
“아니요.”
예상과 다른 반응에 놀란 이민호가 당황하자 주치의가 피식 웃었다.
“안심하십시오, 전하. 그런 얼토당토않은 짓은 설령 어명을 내려도 안 합니다. 저희는 사람을 살리는 의사입니다.”
“괜히 시험해서 미안하오. 내가 잘못했소.”
지난 몇 년 동안 이민호가 마카오 대학의 의학자들을 닦달해서 각종 백신 개발을 진행시켰다. 아직 의학 수준이 낮아 필요한 것의 절반도 못해냈으나 이민호가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어 힌트를 주어서 소아마비와 홍역 백신 개발을 간신히 성공시킬 수 있었다. 천연두는 기존 우두법을 통해 쉽게 예방할 수 있었고, 이 세 가지 예방접종을 고산국 전체에서 시행하고 있었다.
우두법은 구한말에 지석영이 도입했다고 흔히 알려졌으나 일본이 무지몽매한 조선을 개화시킨 업적으로 홍보됐다는 설이 있다. 그 전에 정약용이 종두법 중에서 인두법을 시행하고 우두법도 소개했다.
“결핵 백신은 아직 못 만들었소?”
“마카오 대학에서 조만간 좋은 소식이 들어올 것 같습니다.”
“드디어 결실을 맺는가 보군요. 결핵균을 약화시켜 백신을 만드는 게 뭐가 어렵다는 건지 모르겠소.”
그러나 말로 시키는 사람이야 쉽지, 만드는 사람은 죽을 맛이었다. 그래도 이민호는 원리도 모르는 주제에 그저 무조건 연구 인력을 쥐어짜서 신제품을 만들겠다고 설치는 경영자와는 마인드 자체가 달랐다.
“완전히 죽이지 않고 어느 정도 약화해야 좋을지 판단하는 게 어려우니까요. 헌데 고산국에서는 결핵이 발생한 경우가 거의 없지 않습니까?”
“공중위생을 향상시키기 위해 매년 들이는 예산이 10분의 1이 넘어요. 위생이 안 좋은 도시 지역에서 결핵은 흑사병처럼 지극히 치명적인 병이오. 의사와 관리들은 전염병이 생기지 않도록 항상 신경 써야 하오.”
이 시대에는 결핵과 흑사병, 말라리아 등 온갖 치명적인 질병이 창궐했다. 그나마 고산국에서는 매독과 임질 등 성병이 만연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광저우나 항저우에 입항하는 국영 상인들은 유곽에 들를 기회가 많았으나 성병에 걸리면 상품을 훼손시킬 수 있다고 이민호가 겁을 줘서 직업여성과 접촉하지 못했다.
외국을 드나드는 고산국 국적의 상인들뿐만 아니라 외국 상인들도 아리수 항에 입항할 때마다 병원에 들러 검진을 받는 제도가 정착됐다. 다른 질병 치료도 무료로 해주기 때문에 상인이나 선원들의 호응이 좋은 편이었다.
장거리 항해자들이 흔히 걸리는 괴혈병과 각기병은 서양 상인들을 통해 예방법을 홍보해 동아시아에서는 거의 사라졌다. 대신 선원들은 항해 중에 목숨을 걸고 무인도를 뒤져서 과일을 따먹거나, 출항 전에 고산국식 총각김치를 담가서 항해 중에 매일 먹어야 했다.
민희는 딸을 낳았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아들이라고 오인할 정도로 아기가 무척 활달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아직 잘 보이지도 않을 텐데 이민호가 안아줄 때마다 아기가 까르르 웃었다.
“어유~ 이놈 장군감이네.”
“여자앤데요?”
보름 먼저 몸을 푼 혜영은 아직도 침대에 누워있는데 반해 민희는 해산 직후부터 일상생활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의사들의 권고로 억지로 침대에 누워서 산후조리를 하고 있었다.
“여자라고 장군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나? 민희도 잘하고 있는데.”
“근육이 다 풀어져서 어떡하죠? 1년 넘게 훈련해야 예전 몸을 되찾을 수 있어요.”
“날 따라다니려고? 애 키워야지. 궁에 있어.”
“주인님만 밖에 내보내면 도무지 안심이 안 돼요.”
민희를 비롯한 호위들은 이민호를 물가에 내놓은 아이 취급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민호도 민희와 민영을 비롯한 호위들 덕택에 원정을 나가서도 비교적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정했다.
“다른 호위들도 열심히 하고 있어. 동생들을 믿어도 돼.”
“그래요. 주인님은 못 믿겠지만 동생들은 믿을 수 있죠. 훗!”
민희가 애를 낳더니 이제 대놓고 이민호의 상전 행세를 했다. 이민호는 배반감을 느꼈으나 민희는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야와 네이는 모시는 상전보다 일찍 주인의 아기를 가졌다는 것 때문에 죄스러워했다. 그러나 아라 공주가 아야를 잘 대해줬고, 미카가 임신한 이후 네이도 안심할 수 있었다. 이민호는 아야와 네이의 방에도 매일 찾아갔다.
아라 공주가 아기를 안고, 이민호는 아라 공주를 품에 안고 있었다. 마치 아기 두 명을 품에 안은 것 같았다.
“혜영 귀인님이 아직 허락 안 하셨어요?”
“아기가 좀 더 큰 다음에 생각해보겠다고 했소.”
혜영은 아들을 낳고도 왕비에 오르라는 제안을 수락하지 않았다. 아기들의 생존율이 극악한 이 시대에는 대여섯 살 넘기 전에는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을 핑계로 댔다.
고산국이 처음 건국될 때는 조선의 분국 개념이었기 때문에 군주의 정부인은 왕비보다 한 등급 아래인 빈에 해당했다. 그러나 얼마 전 조선과 대등한 형제국으로 지위가 상승하면서 고산국왕의 정식 배우자로 왕비를 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산국에는 비는커녕 아직 빈도 없었다.
“혜영 귀인님이 전하를 정말 사랑하시는군요.”
“사랑하는 방법에 동의를 못하겠지만 이해는 하겠소.”
아기가 칭얼거리자 아야가 아기를 달라고 하지도 못하고 그저 애처롭게 쳐다보며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놀란 아라 공주가 얼른 아기를 아야에게 넘겼다. 외국 출신 후궁들 사이에서는 신분 제도가 더욱 엄격한 편이었다.
“혜영 귀인님을 일단 빈으로 올려주세요. 저도요!”
“사실 국명을 정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소.”
조선과 동등한 형제국이 되기로 하면서 국명을 바꾸는 등 국격의 승격 문제를 두고 명나라와 계속 논의하고 있었다. 고산국은 섬의 이름 또는 이 섬에 자리 잡았던 옛 왕국의 이름이었다. 백성들도 나라 이름이 촌스럽다며 새로운 이름으로 바꾸는 것을 열망했다.
이민호는 대한국으로 정하고 싶었으나 대명 제국이 명목상 종주국이었기에 대(大) 자를 함부로 쓰기 어려웠다. 베트남이 국내적으로는 대월국이라 칭하면서도 대외적으로는 안남이라 칭하는 것과 같았다. 안남(安南)이란 중국 남쪽을 안정시킨다는 뜻으로, 자칭 황제국인 베트남 입장에서는 몹시 굴욕적인 국명이었으나 외교문서에서는 이 이름을 고수했다.
그리고 단순히 한국(韓國)이라고 하면 이 시대에는 칸의 나라라는 일반 명사밖에 되지 못했다. 대명 황제는 한국이 춘추시대 한국을 이어받는다는 의미냐고 묻기까지 했다. 조선의 다음 이름인 대한제국을 감안해 한국을 남겨둘까 말까 고민 중이었다.
“국명과 상관없잖아요? 빈으로 올려주세요~ 아야도 공을 세웠으니 소의로 올려주세요.”
“그렇게 합시다. 회의를 열어서 결정하겠소.”
“꺄아~ 좋아요. 아야도 축하해~”
그러나 내명부는 직급마다 숫자 제한이 있는 것이 원칙이었다. 조선의 경우 초기에는 1왕비, 3빈, 5잉 순이었고, 나중에는 명칭이 바뀌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조선처럼 공식 행사 때 칭하는 직책을 따로 정하기로 하고, 평소에는 빈의 숫자를 제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혜영과 혜진은 이민호의 분신이라서, 주상아 공주와 아라 공주, 미카와 비올레타, 그리고 민희는 고산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각 나라를 대표하는 후궁이라서 정1품 빈으로 삼았다. 민영과 왕명명, 브루나이의 5공주는 그대로 귀인에 머물렀고, 왕가의 2세를 생산한 다음에 빈으로 올리기로 했다.
나머지 호위들과 시녀들은 종2품 숙의부터 정4품 소원까지 골고루 직첩을 내렸다. 아야와 네이처럼 아기를 낳으면 숙의, 아니면 차례로 낮아지는 식이었다.
갈라티아 백인 시녀들은 파티마와 아이샤 자매, 카디자처럼 승은을 입으면 종3품 숙용, 나머지는 종4품 숙원으로 정했으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승은을 입은 경우 궁녀 일은 그만 두고 내명부 관리자인 내관 일을 맡기로 했다.
“저도 이제 언제라도 좋아요.”
아라 공주가 기뻐하며 이민호의 목에 매달렸다. 고산국에 와서 잘 먹어서 그런지 쑥쑥 자랐고, 어느새 몸이 다 커서 처녀 냄새가 물씬 났다.
“뭐가 말이오?”
“아잉~ 아시면서~”
꼬맹이 공주가 코맹맹이 소리로 애교를 부렸으나 뺨에 뽀뽀만 해줬다. 아직 어린 나이에 임신이라도 하게 된다면 정말 목숨을 걸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다른 후궁들이 이민호의 2세를 낳기를 소망했으나 혜영이 고생해서 아기를 낳은 다음부터는 조금 겁을 먹은 것 같았다. 2남 2녀를 낳아 후계 부담이 덜어지자 이민호도 조금 여유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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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의학 발전과 내명부 일은 계속 진행되겠으나 이것으로 묘사는 일단 끝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