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93 44. 내부 발전 =========================================================================
“그렇다고 벵골을 공격해서 우리가 얻을 이익이 없습니다. 외교적으로 강력하게 항의를 한 다음, 그래도 안 들으면 적정한 금액을 지불하겠다고 협상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귀찮은데 그냥 암살해버립시다. 남의 나라 정치인을 제거한다니 참으로 혐오스럽다는 감정이 듭니다. 하지만 정치인이란 스스로 살아남아야 하는 법, 능력 없으면 죽어야지요. 일단 외교 협상부터 진행하시오.”
회의실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이민호가 의문스런 눈짓을 보내자 예국 참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른 대신들이 말하기 곤란한 것은 예국 참판이 대표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 참판은 그 똑똑한 최 선생을 직접 가르친 아버지였다.
“일단 정치인을 제거하는 것이 혐오스럽다는 전하의 말씀에 대해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도 전하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국가 대 국가로서 떳떳하게 맞서야지 자랑스럽지 못한 수단으로 상대국 정치인을 제거하는 것은 비겁한 자들이나 할 생각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건 국왕전하나 저 같은 정치인들이나 하는 생각입니다. 정치인을 암살하는 행위가 저열하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백성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거 참. 맞는 말씀이오. 내가 잘못 생각했소. 앞으로도 명심하겠소. 한데 결론이 같은 게 아니오?”
그래서 혐오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 정치인을 암살하자는 소리는 결코 아니었다.
“전하. 일단 우리가 손을 쓰면 상대방에서도 어두운 쪽으로 손을 쓰게 됩니다. 상대방이 먼저 손을 쓸 경우 확실한 보복을 해야 하지만 그 전에는 다른 손을 안 쓰시는 편이 좋습니다. 저는 국왕전하를 적국의 암살 가능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가급적이면 적국의 지배자를 먼저 암살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진언을 드립니다.”
“내가 암살 당할까봐 가만히 있으라는 건가요? 전에 닌자들이 왕궁을 습격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죽더라도 여러분이 확실히 보복을 해줄 테니 나는 언제든 목숨을 내놓겠소. 백성들 입장에서는 지배자들끼리 서로 죽이다가 다 죽어버리는 편이 낫겠지요.”
예국 참판이 고개를 저었다.
“고산국 백성들은 다른 나라 백성들과 달리 전하의 만수무강을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럼 고맙겠지만, 아부하지 마시오.”
국왕 같은 정치인이 다른 나라 사람에게 존중받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국내외의 암살 위협에 노출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다. 특정 정치인으로 인해 정치적, 경제적 이득이 위협받는다고 느끼는 세력도 정치인 암살에 나설 수 있었다.
딱히 이익이 없더라도 유명한 자를 해치움으로써 유명해지려는, 또는 정치 피라미드 꼭대기에 선 자를 죽임으로써 자기가 가장 강하다고 착각하는 정신병자들도 이 세상에는 흔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암살이 가능해진 화약시대가 되면서 그런 시도는 더욱 늘어났다. 이러니 정치인이 된 자는 마땅히 암살 위협을 감수해야 했다.
“만약 전하께서 벵갈 태수를 암살했다는 사실을 에스파냐나 포르투갈에서 알아보십시오. 아니, 충분히 의심할 여지가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들이 우리에게 뭐라고 하겠습니까? 속으로는 아주 신이 날 겁니다.”
“끄응! 국제관계에서 손해를 많이 보겠군요.”
결국 전쟁 중이 아니면 타국 지도자에 대한 암살은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민호 개인의 목숨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타국에 의해 깎일 평판 때문이었다. 암살을 성공함으로써 오히려 무역이나 외교에서 손해 볼 수 있다는 걱정도 한몫했다.
그리고 암살을 지시한 것을 의심받게 되면 우호적이거나 중립적인 국가를 자칫 적대국으로 돌릴 우려가 있었다. 다른 나라의 지배자들도 자기가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타국의 정치인을 암살하는 행위는 비열하다고 느끼는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을 막으려면 충분한 이익을 내놔야 한다.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의 의식조사에서, 여야 의원들이 평소에 아무리 욕을 하며 싸우더라도 여야를 불문한 국회의원 동료를 다른 직업군보다 훨씬 신뢰한다. 국민이 정치인을 불신하는 것과 반대로, 정치인들은 국민보다 정치인들을 더 신뢰할 만한 동료로 여긴다는 뜻이다. 동서양의 지배자나 귀족들도 자기 나라 백성보다는 혈연관계가 없더라도 다른 나라 지배자나 귀족을 더 신뢰한 경우가 흔했다. 지배자들끼리 국가적인, 또는 국제적인 연대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셈이다.
“벵갈 태수는 전시에 병력을 5만 정도 동원할 수 있습니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포도 많이 구입해놓았습니다. 고산국이 패배할 리는 없겠지만 전쟁보다는 경제적인 제재를 가하는 편이 훨씬 싸게 먹히고 효과도 좋습니다. 만약 벵갈 태수가 말을 안 듣는다면 듣게 하시면 됩니다.”
“어떻게 말이오?”
“마침 호주를 개척 중이니 몇 억 삼점삼제곱미터(평)쯤 되는 땅에 면화를 잔뜩 심어서 면포를 대량 생산하십시오. 벵갈에서 판매하는 가격보다 훨씬 싸게 생산이 가능하니 주요 무역 상대국에 싸게 팔아버리면 면직물 수출에 의존하는 벵갈을 큰 곤란에 빠지게 할 수 있습니다.”
“차라리 그게 낫겠소. 알겠소. 예국 참판이 교섭을 해보시오. 겨우 월 500냥 가지고 일이 커질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위협해보시오.”
“인도에서도 고산국의 성장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다만 인도의 복잡한 국내 사정 때문에 고산국에 접근해오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잘 알겠소.”
그 다음으로는 특정 직업군에 대한 국가적 지원 문제로 의제가 넘어갔다. 호조 참판이 먼저 운을 띄웠다.
“농민이나 어민은 물론 갖바치나 백정 등 세상에 중요하지 않은 직업이 있을 수 없겠습니다만, 의사와 간호사, 군인, 교사와 기술자는 특히 존경 받아 마땅한 직업입니다. 훌륭한 인재가 좋은 직업에 안심하고 종사할 수 있도록 수입은 물론 사회적 지위도 충분히 보장해줘야 합니다.”
고산국에 아직 소방관이 직업화되지 않았다. 현대 한국의 민방위에 가까운 마을 단위의 민병 조직이 촌장이나 경찰 조직의 지휘를 받아 화재 진압과 자연재해에 대응하는 정도였다. 소방방재 업무의 전문화가 필요해서 조만간 소방조직을 구성할 계획이었다.
가장 안정적인 기준 직업이라 할 수 있는 공무원 중에서 1년차가 월 2냥을 받았다. 기본 소득과 퇴직 후 연금을 감안하지 않으면 중국인 임노동자가 받는 금액과 같았고, 기본 소득을 합해도 농부들이 평균적으로 올리는 수입보다 훨씬 적은 4냥이었다.
평생 공부해야 하고 하루 18시간씩 일하는 의사는 6냥에서 시작하고, 국가연구소에서 일하는 장인, 기술자는 공식적으로 최저 6냥이나 집에 들어가는 날이 한 달에 며칠 안 될 정도로 항상 바빠서 10냥 이상이었다. 여기에 기본 소득이 추가된다. 군인과 교사는 똑같이 3냥부터 받았으나 근속 기간별 임금 상승률은 군인이 더 높았다. 그러니 5냥 이상이었다.
흡연인구가 확 줄어들어서 담뱃가게 주인의 수입은 지금은 공무원과 비슷한 수준으로 떨어졌다. 담배는 하루 종일 판매해야 하는 대신 노동 강도가 극히 낮은 수준이어서 주로 노인들이 심심풀이 삼아 맡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담배 피우면 키 안 큰다, 정력 약해진다, 입 냄새 난다는 식으로 국가에서 발행하는 신문에서 온갖 나쁜 평판을 퍼뜨렸다.
고산국 수취제제에서 농민은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 일반 백성들과 동일한 면적의 농지를 받아 직접 경작을 하는 외에, 가족의 땅과 농사를 짓지 않는 다른 백성들의 농지를 빌려 소작을 한다. 세금을 내고 지주에게 몫을 나눠주면 자기 땅에서 4냥, 가족을 비롯한 남의 땅 한 명마다 2냥씩 최소 6냥 이상을 벌었다. 토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기본 소득은 없었다.
그래서 농민들은 군인과 교사보다 많이 벌고 의사나 기술자와 비교해 약간 적거나 상황에 따라 소수 농민들은 더 벌 수도 있었다. 노동 강도는 중간 또는 간혹 기술자 이상이었다. 백성들에게 땅을 나눠줬다가 이번에 기본 소득 제도로 변경한 것은 농민 비율이 계속 줄어들고 앞으로 영농 기계화가 추진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외에 평균 임금이 심각하게 비쌉니다. 중국인 임노동자들이 건설과 농업분야에서 활동하지 않는다면 경제가 유지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날품 팔아서 한 시간에 얼마나 받소?”
이민호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 동안 정치를 얼마나 잘했는지를 비정규직 노동자의 시간당 임금으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패스트푸드점이나 편의점 같은 단순 아르바이트로 몇 시간 동안 일해서 빅맥 세트를 사먹을 수 있는지 비교해 국가별 노동의 가치를 비교하는 신문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한국은 OECD 국가들 중에서 압도적으로 낮았지만, 고산국은 높을 것으로 기대했다.
“식당 아줌마들 임금이 한 시간에 한 푼입니다. 하루 여덟 시간 한 달 20일을 일한다면 1.6냥입니다.”
“한 시간 일해서 한 끼 먹을 정도면 약간 낮은 것 아닌가요?”
“백성들이 한 끼를 아주 잘 먹어서 기준이 다릅니다. 중국인 임노동자들은 식당에서 한 푼짜리 백반을 비싸서 못 사먹습니다. 복건과 광동 임노동자들이 25일 8시간 일해서 2냥을 받으니 시간당 임금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임노동자들은 식당 일보다 훨씬 중노동에 종사한다는 점을 감안하셔야 합니다.”
고산국은 심각한 인구부족 문제 때문에 인건비가 매우 높았다. 그래서 식당에서 식기를 닦거나 식탁을 청소하는 허드렛일을 하더라도 시간당 임금이 1푼 수준으로, 결코 적지 않은 편이었다.
주부들이 식당이 가장 바쁜 시간에 하루 서너 시간 일하더라도 친척 가게에서 도와준다는 개념으로 일하지 돈 벌려고 일하는 것이 아니었다. 종업원을 많이 둘 수 없어 물이나 엽차는 손님들이 스스로 따라 마셔야 했다.
“그게 최저 임금이군요.”
“외국인 임노동자가 같은 임금을 받는 것은 내국인에게 역차별의 소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노동 강도가 다르고 내국인은 농지에서 쌀과 채소를 받아 식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서 불만이 적은 편입니다.”
“기본 소득으로 바뀌면서 상업이 진흥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기본 소득을 실시하기 전에 모든 백성에게 일정한 농지 면적을 분배해 수취권을 나눠준 것은 인구에 비해 땅이 넓고 2기작으로 인해 농업생산량이 충분하니까 가능한 정책이었다. 세금 5할과 소작농이 가져가는 몫을 제외하고도 쌀과 채소, 간장을 만들 콩, 참기름을 짤 참깨 등의 수확물을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평균 월 2냥 정도로 파악됐다.
기본 소득 제도는 유럽에서 16세기에 최소 소득론, 18세기에 국가적 책임론, 토지 배당론, 이후 국가 배당론 등으로 발전했다. 현대라면 세금과 복지제도의 정글이라 해서 복잡한 복지제도 때문에 정작 필요한 사람이 혜택을 받기 어렵고, 수취인에게 자격이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과 절차가 복잡해 비용이 커진다는 문제 때문에 기본 소득 제도가 지지를 받았다.
고산국에서 새로 태어난 아기들을 제외하고 백성들 대부분이 이민 1세대이며 토지의 불균등한 분배로 인한 빈부격차가 없기 때문에 부유하고 가난한 사람이 따로 없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는 기본적인 복지제도가 생길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선별적 복지냐 일반적 복지냐 따질 필요가 아예 없었다. 교육은 국가의 의무도 아닌 권리에 가까우니 무료가 당연하고 고산국에서 시행되는 복지제도는 무료 의료제도가 유일했다.
그런데 동양에서 새 왕조가 개창되면 보통 농민에게 토지를 재분배한다. 조선의 전제개혁은 1390년 공양왕 2년에 이루어졌고, 새로 과전법을 실시하면서 고려시대에 유효했던 전국의 토지 대장을 개경에 모아 며칠에 걸쳐 불태우는 이벤트를 벌였다. 이것은 고려가 망했다는 사실을 대내외에 선언하는 행사였다. 해방 직후에도 남북한에서 공히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새로 건국한 고산국에서도 이와 똑같이 전 백성들에게 토지를 나눠줬을 뿐이었다. 그리고 농민이 아닌 자들이 농민에게 땅을 소작을 주고 소작료를 수취하는데, 이것을 국가가 대신해준 것이었다. 그래서 고산국에서 백성들에게 땅을 나눠준 것이나 기본 소득을 지급하는 것은 복지제도가 아니었다. 땅에서 나는 소득을 강제로 평생 그리고 대대로 유지시켜주는 것뿐이었다.
어느 나라든 건국 초기에 농민들에게 땅을 나눠준 다음 세월이 흐를수록 지극히 당연하게 토지 집중이 일어난다. 중국에서는 새 왕조가 들어선 다음 토지가 재분배되면서 국운이 융성하다가, 일정한 기간이 지나 토지를 잃은 농민의 수가 많아지면서 사회 불안이 싹튼다. 아무리 토지 재분배를 잘해도 세월이 흐르면서 집중되기 마련이라, 대충 250년이면 땅을 다 잃은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가 망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다시 땅을 재분배하면서 새로 시작하고, 영원히 반복한다.
============================ 작품 후기 ============================
더 이어져야 하는데 일단 끊겠습니다.
토지 면적, 상속 문제, 해방 후 토지개혁 사례, 앞으로 인구 계획 등이 나올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