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403화 (352/1,000)

00403  45. 1595년  =========================================================================

“전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말씀해보시오, 공주.”

주상아 공주가 집무실로 찾아온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이민호는 후궁들을 부려먹으려 했지만, 주상아는 아녀자가 정치에 간섭한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했다.

혜영과 함께 온 것도 이상했다. 주상아가 혜영에게 미리 이야기해서 동의를 얻은 것이 틀림없었다.

“저도 일을 해보고 싶어요.”

“어? 고산국 왕실에서 가장 부자이시면서 재물 욕심을 내시는 거요?”

농담이지만 자칫 주상아를 불쾌하게 만들 수 있는 말이라 이민호는 아차 싶었다. 다행히 주상아가 넘어가 주었다.

주상아가 시집 올 때 지참금으로 은 800만 냥을 가져와서 건국 초기의 국가재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 경제적인 기여도로 따지자면 주상아를 개국공신으로 책봉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이민호가 지참금의 절반인 400만 냥을 돌려주려다가 무역자금으로 쓰기로 하고, 이자로 5푼인 20만 냥을 매년 주상아 공주가 사용하는 별궁 운영비 명목으로 넘기고 있었다. 주상아가 별궁을 아늑하게 잘 꾸몄지만 대부분은 남겨서 저축하는 것 같았다. 그 외에 공주가 황제에게 직접 받은 돈이 최소 은 100만 냥은 넘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렇지 않아요. 저도 혜진님이나 아라 공주님처럼 백성들을 위한 사업을 해보고 싶어요. 이익이 나면 내탕고로 이전할게요.”

아라 공주가 하는 사업이란 국영사업인 무역 외에 의상 디자이너 아마를 통해 진행하는 의류 사업을 말했다. 맞춤옷인 의상실 체인점 외에 기성복 가게도 몇 개 운영하며 그 외에 여러 가지 옷을 백화점에 납품하고 있었다. 생산공장을 소유한 것은 없지만 주문생산 방식으로 생산해 수출액도 많았다. 의상 디자인은 비올레타와 이민호가 많이 도와주었다.

혜영은 대형 음식점과 빵집 전국 체인, 그리고 백화점 체인 사업을 운영 중이었다. 백성들에게 음식 맛과 조리법을 가르친다는 목적으로 시작한 음식점 체인은 전국적으로 아주 잘 운영됐다. 비슷한 음식점들이 우후죽순 생겨나 백성들의 입을 즐겁게 해줬고, 요즘도 여전히 새로운 음식을 개발해내고 있었다.

백화점은 장인들에게 생산품의 종류를 알려주고 백성들에게 소비의 기쁨을 느끼게 해준다는 홍보용 목적으로 운영 중이었는데 규모가 커지다 보니 혜영이 돈방석에 앉았다. 물론 왕실사업으로 벌어들인 이익은 기본적으로 내탕고에 들어가게 되어 있으나, 자금을 굴리다 보면 힘이 커지기 마련이었다.

“내탕고에서 자금을 빌리지 않으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소. 헌데 어떤 사업이오? 혹시 주상아 공주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여주고 돈을 받으려는 게요? 돈 내고 구경하겠다는 사람들이 저기 고남까지 줄을 설 것이오.”

“농담하지 말아주세요.”

주상아 공주가 얼굴을 붉혔고, 혜영이 이민호의 옆구리를 꼬집어 강력한 응징을 가했다. 이민호는 웃다가 갑작스런 고통에 숨을 못 쉬고 컥컥거렸다.

가끔 주상아 공주와 동반해서 나들이를 하면 소문을 듣고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구경꾼들 때문에 성이 무너질 뻔했다는 경성지색은 충분히 넘어섰다. 이민호보다는 주상아와 혜영이 백성들로부터 더 많은 충성심을 얻어내는 것 같았다.

“화장품을 만들어서 팔고, 얼굴에 화장을 예쁘게 하는 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요.”

“오오! 나라 전체가 밝아지겠구려. 하지만 여자로서는 손해 아니오? 물론 공주가 왕실 여자들에게 화장법을 가르쳐준 것은 알고 있소만.”

덕택에 이민호만 좋았지만, 여자들도 딱히 이민호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울을 보고 혼자서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여자들이 화장 전과 후가 거의 둔갑술 수준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은 파티마가 화장 후에 변한 것으로 알아봤다.

“고산국 백성들이 본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아주 좋은 생각이오. 그렇다면 화장품 판매원이 화장법을 교육받아 손님에게 가르쳐야겠구려. 그럼 단순한 화장품 가게가 아니라, 페이스...... 안면 가게라고 하면 이상하고. 으음.”

이민호는 페이스 샵이나 뷰티 샵의 개념을 떠올렸다.

“지압을 통한 안면 미용술은 밝히지 않을 것이오?”

“죄송하오나 그건 황실의 비기랍니다. 고산국 왕실 내명부에 속한 분들에게는 저와 시녀들이 따로 해드리고 있어요.”

주상아가 착하지만 그래도 가릴 것은 가렸다. 조선에서는 딸에게는 안 가르치고 며느리에게만 가르치는 비기인 종갓집 장 담그기나 요리법도 있다고 들었다.

“단지 화장품 판매만이라면 방물장수에 비해 부족해서 말이오. 혹시 머리 미용도 가능하겠소? 머리를 예쁘게 자른다던가, 머릿결을 부드럽게 다듬는다던가, 더욱 검게 혹은 연하게 색깔을 바꾸는 일 말이오.”

“머리를 만지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해요. 피부미용이라면 더욱 자신 있게 조언해줄 수 있어요.”

“좋소. 모든 백성들이, 시커먼 남자들 빼고, 아름다워지는 훌륭한 사업이오. 먼저 시녀들에게 화장법과 피부미용술, 모발 미용술을 충분히 가르치시오. 그 다음 도성에 크게 미용실을 차립시다. 도성의 미용실이 자리를 잡으면 지방 도시에 분점을 차려야겠소. 아니면 백성들이 미용실을 모방해서 마을마다 비슷한 작은 가게를 만들겠지요.”

단순한 동네 헤어샵이 아니라 뷰티 살롱인지 뭔지 하여튼 여자들 씻기는 일부터 시작해서 때 빼고 광내는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이민호가 서랍에서 종이를 하나 꺼냈다.

“화장품을 제조하는 일 중에서 특히 색깔을 다양하게 만드는 일은 내가 도와주겠소. 이건 256색 색상표라고 하오. 면직물이나 모직물 염색할 때 쓰고 있소. 화장품을 만들 때, 예를 들어 같은 입술연지라 해도 비슷하면서도 약간씩 다른 색이 있소. 그 색깔을 구분해주는 표요. 여기에 광택이라든지 다른 특징을 추가할 수도 있소.”

“허락해주시는 거여요?”

“내가 언제 공주가 하는 일을 말린 적이 있었소? 하고 싶은 일은 언제든 마음대로 하시오. 공주의 신변에 위험한 일만 아니면 괜찮소.”

“정말 고마워요.”

주상아 공주가 고개를 푹 숙이고 훌쩍거리며 울었다. 당황한 이민호가 멀뚱거리며 보고 있자 혜영이 손톱을 세우고 노려봤다. 이민호가 잽싸게 주상아 공주를 끌어안았다.

“공주 울지 마시오. 그대는 착하고 예쁘오.”

“고마워요, 전하.”

“혜영이 들어봐. 원래 이런 일은 민간에서 주도해야 하는데, 다들 워낙 바쁘니까 미처 손을 못 쓰고 있었던 것 같아. 하지만 이런 일들을 왕실에서 계속 주도하면 백성들의 창의성이 떨어질 것 같다. 아무리 건국 초기라지만 왕실에 너무 부담이 가는 것 아냐?”

지금이야 당장 필요한 사업을 왕실 주도로 해나간다지만 나중에는 왕실이 선점하는 바람에 민간 기업이 성장할 기회를 빼앗았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상황을 봐서 경쟁이 치열해질 경우 여차하면 왕실 사업을 접을 수도 있었다.

현재 국영기업은 철도와 통신, 상수도 등 독점 사업 위주였다. 전기도 조만간 국영기업으로 넘길 예정이었다. 술과 담배는 민간이 할 수도 있는 사업임에도 무료 의료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독점권을 부여한 공영사업이었다.

그러나 왕실에서 하는 사업은 민간과 경쟁할 수도 있는 사업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전복 양식이나 도자기 제조업, 비단 직조가 이익이 많이 나고 있지만 국가 독점 사업으로 유지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고산국에는 왕립 도요와 관련이 없는 작은 민간 도요와 소규모 비단 제조 시설이 조금씩 들어서고 있었다.

“사실 시장에 화장품을 파는 잡화점도 있고 방물장수들이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화장품과 세면수를 팔아요. 하지만 효과가 적고 제조과정이 의심스러워요.”

“그래서 혜영이는 이 기회에 안전하고 효과 좋은 화장품을 쓰고 싶다 이거지?”

“흥! 그런 건 여자가 말을 안 하더라도 주인님이 미리 챙겨줬어야 했어요.”

잠시 고민해보니 대자본 투자에 따른 경쟁의 공정성보다는 백성들의 건강과 안전이 더 중요했다. 그리고 화장품 분야를 내버려두면 원래 역사에서 조선이 그랬던 것처럼 발전이 무척 더딜 것으로 예상됐다. 생각나는 게 있어서 이민호가 다시 책상 서랍을 열었다.

“이건 아주 좋은 피부보습제야. 입술 튼 데 발라도 좋고, 상처 소독한 다음에 발라도 좋아. 의료용은 따로 줬으니까, 이건 혜영이 궁내부 소속 여자들에게 돌려.”

“어머? 이건 그 시커먼 원유를 증류하고 남은 그거 아닌가요? 피부에 위험한 거 아녀요?”

원유를 분별증류하고 남은 찌꺼기, 석유 젤리라고 하는 바셀린 맞았다. 시커먼 원유에서 나온 찌꺼기라고 하니까 정말 더럽고 위험해 보이긴 했다. 그러나 위생 면에서 나쁘지 않은 물질이며, 현대에서는 흔히 화장품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위험한 것을 어떻게 소중한 내 여자들의 피부에 바르게 하겠어? 그럼 얼굴에는 쓰지 말고 먼저 손등에 써서 효과를 확인해 봐. 그게 싫으면 이것을 써. 효과는 조금 떨어지더라도 보습효과는 좋은 편이야.”

“그건 녹말가루 아녀요? 이상한 싸구려 같은 것을 소중한 여자들 피부에 바르게 할래요?”

어렸을 때 실험실에서 이민호와 함께 살다시피 했던 혜영이 바로 알아봤다. 녹말을 가수분해해서 얻은 포도당 맞았다. 글루코스라 해서 화장품 피부보습제로 많이 사용했다.

“화장품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을 전혀 다른 용도에 사용하는 것으로 시작돼. 창포 가루라든가, 쌀뜨물도 화장수로 쓰잖아? 써보고 효과 없으면 쓰지 마.”

“누가 안 쓰겠대요? 하지만 앞으로는 좀 비싸고 귀한 것에서 재료를 구해 봐요. 진주 가루라든가 향신료 열매의 씨앗이나 껍질에서 뽑은 거라든가.”

혜영의 말을 듣고 보니 좋은 아이템이 떠올랐으니, 바디 스크럽이었다. 바디 스크럽은 피부 각질제거에 사용되며 팔꿈치와 무릎 등이 검게 착색되는 것을 막아준다. 남자는 별로 신경 쓰지 않겠지만 여자들은 목숨 걸고 구할 만한 제품이었다. 어느 제품은 재료가 최고급이었다.

“다이아몬드, 금강석 가루를 피부 각질 제거용으로 쓸 수도 있지. 천천히 만들어줄게. 종류는 많으니까. 수은과 납은 위험하니 절대 쓰지 마.”

“수은이나 납을 쓰지 말라는 이야기는 최소 천 번도 더 들었어요.”

근세에 들어서면서 수은 중독 문제가 심각해졌다. 중세 유럽에서는 미백 효과를 위해 수은이나 납을 먹거나 피부에 바르는 멍청한 짓을 했었다. 구한말에는 납 가루를 화장품으로 판매했다. 방사능 물질이 처음 알려졌을 때에는 만병통치약으로 팔린 적도 있었다.

이민호는 법원에 갈 때가 가장 짜증났다. 세상에는 별 이상한 사람들이 다 있었다. 고산국 백성들이 잘 산다 해서, 그리고 범죄에 대한 처벌이 가혹하다 해서 범죄율이 획기적으로 줄어든 것은 결코 아니었다. 기회가 생길 때마다 다른 사람을 물리적, 심리적, 경제적으로 공격하려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기상천외한 범죄 때문에 법률이 나날이 복잡해졌고, 태연히 거짓말하는 습성 때문에 진실을 밝히기 어려웠다. 증거를 없애거나 처벌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나쁜 짓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민호는 이제는 제법 논리를 따지는 법관들을 만났다. 국립대학이 생기고 유럽 법학자들이 고산국에 많이 들어오자 법관들이 자문을 얻을 기회가 크게 늘어났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이렇게 직접 왕림하시니 저희들은 몹시 황송합니다. 언제라도 저희들을 궁궐로 불러주시면 부담감이 덜하겠습니다.”

“여러 법관이 계시고 증거도 다 여기에 있으니 제가 오는 게 피차 편하지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삼권분립이 이뤄진 민주주의 국가도 아니니 법관들도 이민호의 신하가 맞았다. 법관들끼리 결론 내리기 어려운 사건들만 모아서 이민호에게 결재를 받았다. 예전처럼 법원 공판에 나가 범죄자들의 얼굴을 직접 마주칠 일은 없어져서 다행이었다.

“경범죄가 3심까지 올라오다니, 신기하군요.”

“사안은 경미하나 피해자가 많아서 그렇습니다.”

경찰에서 수사하고 검찰이 법적 검토를 마치고 기소한 내용을 읽었다. 식당에서 젊은 여자 손님이 문제를 일으켜봤자 얼마나 큰일인가 싶었다.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피해자들이 분개하는 정도가 달랐다.

============================ 작품 후기 ============================

이어질 내용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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