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05 45. 1595년 =========================================================================
“남성과 여성을 불문하고 성적 자기 결정권은 여전히 유효하오. 그러나 가해자와 피해자, 경찰과 법원도 고산국 형법을 못 받아들인다면 할 수 없지요. 그럼 법관이나 조선 출신 이민자들이 좋아하는 경국대전과 대명률에 의거하여 강간범들을 교수형에 처해야겠소.”
“그건 과도하다고 생각합니다.”
“왜요? 보수적인 법체계인 대명률이고 조선에서도 그대로 적용하는데요. 피고인과 그 가족들 빼고는 다들 좋아하지 않겠소?”
“강간죄에 교수형은 지나치게 비인간적인 형벌 남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잘못한 청년들이 잘못을 시인하고 반성하고 있으니 기회를 주십시오.”
청년들이 잘못했다고 빌긴 빌었다. 그러나 피해자가 아니라 법관들과 자기 부모에게만 제발 살려달라고 빌었을 뿐이었다. 독한 년 만나서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는 청년들을 이민호는 용서해줄 생각이 없었다. 이 사건은 미카가 정보원들을 풀어 아주 세밀하게 조사했다.
“법관들은 이럴 때만 인간적이고 진보적이오?”
“황송하옵니다.”
조선에서 강간범에 대한 처벌이 조선 전기까지는 비교적 평등하게 이뤄졌다. 지배층인 사족이 양인이나 천민 여자를 강간하는 경우에도 대명률에 의해 신분에 상관없이 교수형에 처해진 사례가 많았다. 피해자가 처녀인지 기녀인지 가리지 않았다. 가해자가 종친이거나 임금에게 사면을 받아 교수형을 면하더라도 유배를 가거나 전 가족이 변방으로 이주당하는 전가사변에 처해졌다.
그러나 후기에 가서는 신분에 따라 형벌이 차별적으로 적용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양반이 천민 처녀를 강제로 범했을 때는 죄가 감해지고, 천민이 양인 처녀를 강간했을 때는 법이 엄격하게 지켜지는 식이었다. 형법이 신분제도 강화에 봉사하는 격이었다. 그래서 피해자들도 현실적으로 법에 호소하지 못하고 유야무야 넘어가는 경우가 더 흔해졌다.
“법관이나 경찰,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가 문제요. 법은 만인에게 평등해야 하는데 지금 법관들은 마을 청년들이 범죄자라 해서 감싸고도는 것이 아니요? 강간범의 유일한 신분은 강간범이오.”
“황공하옵니다.”
“그리고 재판이 길어질수록 피해자는 평소에도 행실이 안 좋았다느니, 청년들에게 먼저 꼬리를 쳤다느니, 몸이 뜨거워 이웃 남자들은 물론 오빠나 아비까지 유혹했다느니 하는 식으로 이상한 여자로 만들어질 것이오. 지금도 그런 소문이 퍼지고 있지요?”
“그, 그렇사옵니다.”
성범죄에서 가해자 또는 가해자 부모가 피해자 탓을 하는 것은 항상 있던 일이었다. 그리고 성폭행 전까지 멀쩡했던 피해자가 재판 기간에 야설의 여주인공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현대 한국에서도 성폭행 가해자가 미성년일 경우 불기소나 극히 약한 처벌에 그치고 학교에 계속 다니는 반면 오히려 피해자가 전학을 가야하는 일이 흔했다. 이 정도로 그치지 않고, 피해자가 전학 간 학교까지 가해자 부모가 쫓아가 감형 탄원서에 서명해달라고 난리를 치며 요구해서 그 학교도 관둬야 했다.
“길게 끌수록 피해자만 괴롭히는 꼴이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소. 형법에 규정된 대로 양형을 하면 간단하오. 윤간 및 지속적인 강간죄로 17명 전원 무기징역!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모욕, 폭행을 가한 부모들은 조사를 더 진행하여 최소 5년 이상씩 징역을 집행하시오. 만약 출소 후에 피해자나 그 가족에게 보복을 가할 경우 가중 처벌하도록 호적에 명기하시오. 그리고 가해자들이 거주하던 마을은 해체하고 주민들은 멀리 다른 지방으로 분산 이주시키시오.”
“허억!”
“한 마을 성인 인구의 1할 이상이 징역 5년 이상의 선고를 받으면 풍습이 잘못 형성된 것으로 판단해 마을을 해체한다는 규정이 있소. 조선에서 반역자 고을의 등급을 낮추는 것과 비슷한 조항이오. 법적으로 문제가 없지요? 그렇다면 나를 따르시오.”
“어명을 따르겠사옵니다.”
강간범들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더라도 최소한 부끄러움이라도 알았다면 이민호도 이 정도까지 엄격하게 집행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가해자들 숫자가 많아 마을 전체가 똘똘 뭉쳐 피해자를 협박해 죄에서 빠져 나가려는 상황을 국법의 수호자인 국왕으로서 좌시할 수는 없었다.
며칠 안에 미성년자 두 명을 포함한 청년 17명이 탄광으로 끌려갔고 그 부모들도 조사를 마친 다음 범죄의 경중에 따라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나머지 입을 다물거나 피해자의 행실에 대한 헛소문이 퍼지는데 일조했던 마을 사람들은 멀리 다른 지방 여러 마을로 분산 배치됐다.
범죄가 일어났던 마을은 이번에 새로 개발한 건설 중장비를 동원해 깨끗이 밀어버렸다. 그리고 평지로 변한 마을 터 입구에 강간범들의 마을이라는 표지판을 세워 범죄 사실과 법 집행 내역을 세세히 적었다. 신문에도 자세히 기록해 발표했다.
성범죄 전담 여경들에 대한 교육이 다시 철저히 이루어졌고, 경찰이 피해자를 핍박해 합의를 유도할 경우 최소 징역 5년형을 받는다고 형법을 개정했다. 피해자 가족은 왕도로 이주시키고 정신과 치료 후 직업을 알선해주었다. 그리고 부랴부랴 의대에 정신과를 개설해 범죄 피해자 심리구제와 전쟁 참가자들의 심리상담 업무를 맡겼다.
비슷한 사건은 또 있었다. 가벼운 정신지체아 소녀가 할머니 슬하에서 살아가는데 마을 중년들이 돌아가며 건드린 것이다. 소문이 나면서 촌장이나 다른 마을 성년들은 모르는 척하거나 개별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
범죄는 할머니가 알게 되면서 경찰서에 고발함으로써 알려졌다. 피고인은 12명에 달했고, 2심까지는 징역 3년에서 5년 사이로 비교적 가볍게 선고됐다. 강제성이 없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피고인들은 창녀의 매춘일 뿐이라는 이유로 상고했다. 일을 마치고 소녀에게 준 떡이나 참외 서너 개가 화대였다는 주장이었다. 폭행을 동원한 강간은 아니었지만 피해자가 미성년자인 데다 정신지체아라서 법관들이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강제성이 거의 없었던 데다가 하필 피고인들이 집안의 가장이라는 것도 장기간의 징역형을 가로막는 요인입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오. 정신이 약간 나간 소녀가 마을 중년들 여러 명하고 동시에 정상적으로 사랑을 했다고 보시오? 개별적인 범죄라고 할 수도 없소. 첫 번째로 강간하고 주위에 떠벌인 자는 사형, 나머지는 미성년자 강간과 윤간, 반복되는 강간죄로 징역 15년.”
이민호는 2심보다 중형을 선고했다. 고산국은 삼심제를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당분간 상급심에서 하급심보다 더 높은 형량을 선고할 수 있었다. 하급심 판사들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면 법 적용 잘못을 이유로 파기 환송하는 외에 상급심에서 형을 가중하지 못하게 할 예정이었다.
형 집행 후 그 마을 사람들은 가장이 없는 동안 힘겹게 농사를 짓거나 다른 마을 사람들 보기 부끄러워 하나둘씩 멀리 이사 갔다. 11명이 탄광에서 징역형을 사는 동안 6명이 이혼했다. 피해자 가족은 왕도의 고급주택가로 이주시켰고, 가정부가 배정됐다.
“전하! 형벌이 과중한 것 같습니다.”
“항상 피해자의 심정을 먼저 헤아려보시오. 예를 들어 어떤 거한이 법관의 바지를 벗기고 엉덩이에 강제로 비역질을 했다고 생각해보란 말이오.”
“이런! 아! 죄송합니다.”
“바로 그거요. 범죄에 분노하시오. 법관은 아무 죄 없이 범죄 피해를 당한 피해자의 억울함을 가장 먼저 고려하시오. 고산국의 법은 가해자가 아닌 선량한 피해자 편이오.”
이민호도 현대 한국에 비해 형량이 과중하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그러나 이 시대 조선이나 명나라, 일본에 비해 형량이 훨씬 가벼운 편이었다. 이 시대 동아시아에서는 걸핏하면 참형이거나, 조선에서는 곤장 80대에서 100대였다. 맞다가 죽게 된다.
그런데도 평등하게 법 적용을 하면 과하다고 반발이 일어나는 경우가 잦았다. 백성들의 인기에 영합하자면 상황에 따라 가해자들에게 적당히 감형해주는 편이 낫겠지만, 피해자가 속으로 울고 있다고 생각하면 함부로 선의를 베풀 수가 없었다.
1월 중순이 되면서 춘절을 고향에서 보낸 복건과 광동의 임노동자들이 아리수 항을 통해 돌아왔다. 외지에서 힘겹게 벌어 은을 갖다 줘도 가족들 생활이 여전히 어렵고, 고향 마을이 예전보다 엉망이 됐다고 다들 걱정이 많은 얼굴들이었다.
명나라 관헌들이 각 지방 노동자들을 일괄적으로 데려왔다가 빈 배로 돌아갈 때 적당히 은자를 주고 노자랍시고 쌀도 잔뜩 실어주었다. 임노동자들의 임금 절반 정도를 관리들이 세금 명목으로 뜯는 것 같았지만 이민호는 모른 척 넘어갔다.
임노동자들이 복귀하면서 철도 공사가 다시 빠르게 진행됐고, 100리마다 세워진 역사가 아주 멋지게 다듬어졌다. 모든 지방도로의 기준이 역에 맞춰졌다. 역에서 마을, 또는 경치가 좋거나 온천이 있는 곳까지 마차가 왕복할 만한 넓이로 도로를 닦았다.
고산국 중부지방인 고중의 사탕수수 밭 일부를 건설 중장비와 경운차들이 투입돼 논으로 개간했다. 여기에도 많은 노동자들이 투입돼 농촌마을을 건설하기 전에 기초공사를 다졌다. 이민호가 좌승함을 타고 바다를 지나가면서 멀리서 건설현장을 살폈다.
“고중 평야가 말로 듣던 것보다 굉장히 넓다.”
“호주에 비하면 손바닥만 한데요 뭘.”
“민영이 너 시야가 많이 넓어졌구나. 역시 사람은 큰 곳에 가봐야 해.”
“정 총독님이 보낸 보고서에 한숨이 잔뜩 묻어 나오는 것 같았어요.”
“큭큭!”
정문부가 호주를 한 바퀴 돌아보고 나서 보낸 보고서가 엊그제 도착했다. 호주 전체를 개척하려면 최소 백만 명이 5백 년 동안 일해야 할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정문부가 호주 내륙지방의 사막과 황무지를 몰라서 과소평가한 것 같았다.
정문부는 호주 북단 장영실 항 주변을 돌아보고 기초적인 도시 설계를 마친 다음 봄에 왕도로 돌아오기로 했다. 입지가 훨씬 좋은 신부산이나 신여수에는 아직 개척민을 보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쌀이 넘치는데 왜 계속 논을 넓히세요?”
“응. 술은 쌀로 빚어야 제 맛이 난다고 해서.”
“농담 마시고요. 조선에 쌀을 풀어서 쌀값을 폭락시킨 다음 이민을 더 많이 받으려는 것은 아니죠?”
이런 위험한 이야기도 민영과 둘이 있을 때나 가능했다. 이민호가 조선의 백성을 노린다는 이야기는 건국 초부터 나왔었고, 조선에서도 항상 대비했다. 그래서 경작할 땅이 없는 소작농이나 유민들만 소수 보내는 정도에 그쳤다.
“조선에서는 작년부터 쌀 수입을 금하고 있잖아. 사실은 날씨가 점점 추워지는 것에 대비해서야. 고산국에서 언제까지 2기작이 되라는 법이 없거든.”
“힘은 들어도 농민들이 가장 많이 번다고 좋아했는데 장점이 사라지면 어떡해요?”
“그러게. 그래도 농민들은 먹고나 살 수 있지. 다른 나라 농민들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
농지를 넓히는 일에 신경을 쓴 것도, 필리핀 북부와 호주를 얻은 것도 소빙기에 대한 대비 차원이었다. 드넓은 두만강 북부와 송화강 유역, 그리고 아이누 섬을 농지로 개간하지 않은 것은 소빙기에 경작할 작물이 아직까지 못 찾았기 때문이었다.
추운 지역이라도 짧은 여름에 옥수수와 감자를 경작하는 것은 가능했다. 그러나 여진족이 좁쌀을 주식으로 삼은 것은 미각이 유별나서가 아니라 조 외에는 이 시기에 별다른 작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옥수수와 감자는 이민호가 원래 역사보다 훨씬 일찍 도입했지만 본격적인 소빙기의 추위에 버틸 수 있을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농업연구소 직원 몇을 조만간 사할린으로 보내 내한성 작물을 개발할 계획이었다.
상인 대표들이 단체로 건의할 것이 있다고 해서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비싼 옷을 입고 장신구를 단 상인들이 이민호에게 화려한 상자부터 바쳤다.
“상인들의 세금 제도에 관한 건의라. 그런데 이렇게 뇌물을 당당히 들고 와도 되는 거요?”
“선물이라고 억지를 부리지는 않겠습니다. 하오나 이런 문제는 당연히 서로가 주고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화려하게 조각된 작은 상자 안에는 작고 반짝이는 것들이 잔뜩 들어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이민호는 내용물이 궁금했지만, 궁금증에 그칠 뿐 욕심은 전혀 나지 않았다.
“선물은 놓고, 건의사항부터 말해보시오.”
“저희 상인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매년 재산 증가분의 절반을 세금으로 납부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직종과 비교해 과도한 세금으로 사료되는 바, 고산국의 경기를 활성화하기 위해 상인에 대한 세금을 줄여주셔야 할 줄로 아옵니다.”
“농민이 아닌 백성들이 세금을 안 내는 것처럼 보여도 농지세로 수확물 절반을 바치는 셈이오. 일 년에 평균 은 48냥을 내는 것과 같소. 상인보다 적게 내는 직종이 뭐가 있소?”
건국 초기부터 기본 소득을 나눠줬다면 몰라도 왕조를 창업하면서 백성들에게 농지를 나눠주고, 그 농지에서 세금을 받는 형식을 취했다. 그래서 명목상 고산국 백성들은 매달 평균 8냥이 생산되는 농지를 통해 국가에 세금 4냥을 내고 소작하는 농민으로부터 2냥을 받는 형식이었다.
국가도 아니고 형식상 농민에게서 땅 주인이 받는 돈의 두 배를 국가에 세금으로 내기 때문에 세제가 바뀐 다음에도 백성들은 아무도 나라에 고마워하지 않았다. 백성들에게 전혀 생색을 낼 수 없는 구조라서 이민호는 몹시 섭섭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가끔 고맙다고 상소를 올리는 노인이나 고아, 과부들이 있어서 힘이 났다.
============================ 작품 후기 ============================
다음 회 앞부분까지 국가 전체 세제에 대해 언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짜증나는 글을 읽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