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10 45. 1595년 =========================================================================
“그렇다면 예전부터 하던 대로 무역이나 하는 게 어떻겠소?”
“고산국에서 물건을 대주면 우리가 페르시아나 인도를 상대로 무역을 하라는 말씀입니까? 저희들이 원하는 것이긴 하나 포르투갈이 방해할 것입니다.”
“그것도 방법이겠소만, 동아시아에서 유구국이 하는 것처럼 무역을 하는 겸해서 고산국을 위해 해상운송을 맡아달라는 말이오. 유구국이나 고산국이 해양 강국이라 하나 동아시아에 국한돼 있소.”
오만 대표들이 관심 깊게 이민호의 발언에 주목했다. 포르투갈 때문에 상업은 위축되고 노예무역은 여러 나라로부터 욕을 먹고 해적질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포르투갈의 침략이 있기 전부터 오만은 나라가 기울어가고 있었다.
뭔가 탈출구를 찾던 시점일 때 고산국이 인도양에서 활발히 탐사활동을 하자 오만 사람들이 고산국에 먼저 접근하게 되었다.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고산국에 대한 조사를 마친 오만 상인들은 고산국의 능력을 충분히 인정하고 있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인도양에서 고산국과 협력할 나라를 찾고 있던 참이오. 오만을 다른 나라로부터 보호해줄 테니 고산국을 위해 일을 해주는 협력국이 되는 게 어떻겠소? 다만 해적들은 오만의 해군이 되거나 상선 선원으로 직업을 바꿔야 할 거요.”
“저희들이 원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처음부터 솔직히 말했으면 좋을 텐데, 꼭 이런 식으로 버팅기다가 좋은 소리를 못 들었다. 그리고 말로는 협력 국가라 했지만 심부름이나 해주는 부용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만 사신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딱히 국내 생산품도 없고 무역도 포르투갈에 의해 자꾸 방해를 받으니 고산국에 더 찰싹 달라붙으려 했다.
아부다비 인근의 토호들이 고산국 탐사대에 우호를 표시하는 것도 오만의 권력자들과 마찬가지 이유였다. 토호들은 오만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고산국을 이용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아부다비에 고산국의 무역항이 개설될 경우 상품을 아라비아 반도 내륙 지역에 파는 대상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얻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오만에서 생산해 팔 것이라곤 남서부 무역항인 살랄라 항 인근에서 생산되는 유향(乳香)밖에 없었다. 유향은 나무진을 굳혀 만든 향수의 원료로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에게 바쳤다는 황금과 유향, 몰약의 바로 그 유향이었다. 이민호는 유향을 수입해 치약에 가미할 생각을 했다.
“폐하! 고산국에서 아프리카를 도모한다고 들었습니다만. 혹시 오만도 이 기회에 아프리카에서 농사를 지을 만한 영토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는 흑인들이 주인인 대륙이오. 나는 아프리카 영토에는 관심이 없고, 노예로 왔던 병사들을 고향에 돌려 보내주는 일을 하려 하오. 유럽이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는 것을 막으려는 목적도 있소. 그러니 오만에서도 아프리카에 신경 쓰지 마시오. 마다가스카르의 예도 있으니 잔지바르는 현 상태 그대로 두겠소. 다만 노예무역은 올 6월을 마지막으로 금지하겠소.”
“그러시군요. 감사합니다.”
“흑인 병사들에게 흑인의 나라를 세워주기로 약속했으니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많은 물자지원을 해줘야 하오. 그 물자를 운반할 선박이 다수 필요할 텐데 바로 그게 오만의 해상 세력이오.”
“성심껏 일을 해서 유구국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겠습니다.”
포르투갈과 협의를 해서 인도양에서 고산국과 포르투갈, 오만이 협력을 다지기로 했다. 그래서 마카오와 말래카에서 포르투갈 책임자들을 급히 불러 오만 대표단과 함께 인도양에서의 분업체계를 설정했다.
“고산국과 포르투갈은 오만의 영토주권과 정치적 독립을 보장해주는 대신 오만은 포르투갈과 고산국 선박이 오만 영토에 기항할 경우 안전과 편의를 제공한다. 세 나라가 서로 무역을 증진하고, 한 나라가 만약 주변 다른 세력과 군사적 분쟁이 발생했을 때 각자의 판단에 따라 서로를 도울 수 있다. 동 두아르테는 어떻소?”
“좋습니다. 포르투갈 혼자서 인도양을 감당하기 벅찼는데 이렇게 협조적인 나라가 있으면 그것도 괜찮겠습니다. 물론 고아의 부왕에게 보고해야 합니다만, 이 정도라면 부왕도 기뻐할 것입니다.”
포르투갈은 오만의 해안 지방에서 약탈할 것은 이미 대부분 약탈했다. 이제는 오만 상인들을 부려먹는 일이 남았는데 거부감이 심해 제대로 일을 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오만이 고산국의 협력국이 된다면 포르투갈 입장에서도 항로의 안전을 보장받고 간접적인 협력자를 얻게 되니 손해 볼 일은 없었다.
“이 조약은 오만과 인도양에서만 적용될 것이오. 혹시 포르투갈이 무굴 제국하고 전쟁을 할 경우 고산국이나 오만을 끌어들이지는 마시오.”
“저희 포르투갈은 인도의 해안지방과 향신료 무역에만 관심이 있고, 무굴 제국에서도 그 사실을 잘 압니다. 지방 영주들하고 충돌하더라도 무굴 제국하고 직접적으로 전쟁을 할 일은 없습니다.”
두아르테가 포르투갈이 인도를 대하는 태도를 요약해서 설명했다. 물론 능력만 있다면 인도 전체를 잡아먹고 싶겠지만, 그럴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포르투갈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들어보니까 아랍 지역에서 포르투갈에 대한 평이 무척 안 좋소. 운하가 건설되면 무역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테니 이제 약탈은 그만 좀 하라고 하시오.”
“하하! 예. 인도 부왕이 몇 번이나 약탈 금지령을 내렸는데도 모험가를 빙자한 해적 놈들이 말을 안 들어먹어서 문제입니다.”
눈치 봐 가면서 상대가 약하면 잡아먹고 강하면 빌붙어서 용병을 하고 사는 사람들이 포르투갈 모험가들이었다. 버마에서 완전히 실패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시대 세계 제일의 루비 산지가 너무 아까워서 아직 포기를 못하고 있었다.
“자원은 그 나라 백성들의 것이오. 날로 먹을 생각을 하면 안 좋소.”
“옳으신 말씀입니다. 폐하께서는 브루나이에서 티크 원목을 제 값을 주고 수입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미래를 위해 벤 나무보다 심은 나무가 훨씬 더 많다고 들었습니다. 나무 값도 브루나이 술탄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더 많은 혜택이 가도록 하셨지요.”
“서로 이익이 되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군사적 위협으로 빼앗으면 당장은 큰 이익이겠지만 장기적으로 더 큰 비용을 지불하게 됩니다.”
“마카오에 있는 저희들은 항상 폐하의 말씀을 명심하고 있습니다. 하오나 포르투갈 본토에서 갓 벗어난 애송이들은 반대로 생각해서 문제입니다. 당장 이익을 챙기기 급급하지요.”
식민지 경영이 의외로 흑자가 나는 경우가 드물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개설 초반에는 흑자를 내고 최초의 주식회사로서 투자자들에게 배당도 했지만 나중에는 파산하고 국유화된다. 영국의 동인도회사도 식민지에서 온갖 패악을 저질렀으면서도 결국 손해를 감당 못하고 영국 정부에 흡수됐다.
한 나라를 군사적으로 억압하는 것이 단기적으로 이익이 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현대에 신제국주의라 해서 여러 나라를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 아래에 묶어두고 이익을 뽑아내는 방법이 있으나 초강대국 미국마저도 그 군사력을 유지하기 버거웠다.
고산국 왕궁에서 오만 대표단과 외교권을 위임받은 포르투갈 상인들, 그리고 고산국 대신들이 연회를 열었다. 각 나라에서 연주와 춤 공연을 선보였는데 마지막으로 오만의 무희들이 등장해 배꼽춤으로 다른 나라들의 기를 확 죽였다. 육감적인 오만 무희들의 과감한 복장과 선정적인 허리 움직임을 보면 과연 이슬람이 보수적인 문화인가 의문스러웠다.
“전하께서는 뭘 그리 맛나게 드십니까?”
“어서 오시오, 정 총독. 쥐치포 좀 드시오.”
“그 못 생긴 물고기 말씀이군요.”
이민호가 난로에 굽던 쥐치포 하나를 정문부에게 건넸다. 봄에 전기난로를 집무실에 둔 것은 이런 이유가 있었다. 전기난로를 개발할 때 주전자 데울 자리를 마련하라고 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뜨거울 때 드시는 편이 좋소.”
“전하께서는 바닷고기를 좋아하다 못해 집착하시는 듯합니다.”
“맛있으니까요.”
2020년 이전에는 물고기뿐만 아니라 해산물을 아예 못 먹게 됐다. 후쿠시마 원전에서 줄기차게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쏟아 부은 탓이었다. 그러고도 일본 정부는 해산물이 안전하다고 강변했다.
그러나 미국 서해안이 방사능에 오염되면서 미국 수산회사와 해변관광지 회사 등에게 소송을 당해 천문학적 배상금을 물어주었다. 물론 한국에는 한 푼도 배상하지 않았다.
이민호는 고산국이 섬나라라는 특성상 해산물 생산과 무역에 공을 많이 들인 편이었다. 그러나 해삼과 전복 같은 주력 수출 상품 외에 황태와 연어, 장어와 쥐치포처럼 해산물 생산에 개인적인 취향도 많이 반영됐다.
“호주에 대한 개발계획서는 다 읽어봤소. 자세히 조사하셨더구려. 무역 항구 개발 문제에서 결론도 훌륭했소.”
“감사합니다. 농지를 경작할 때뿐만 아니라 개간할 때도 경운차의 능력이 실로 대단하더군요. 브루나이에서 석유를 캔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두 사람은 먼저 호주에 대해 논의했다. 호주의 관문인 장영실 항 주변의 개발이 끝나면 농업은 남동쪽 신부산 위주로, 목축은 남서쪽 신여수 중심으로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남서쪽 신여수는 아프리카와 아랍, 인도 쪽과 교역하기 좋으나 고산국 본토에서 바로 가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신여수는 호주에서 아프리카 등으로 상품을 수출할 때 무역항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유럽으로 양모 등 상품을 보낼 경우 파나마에 운하가 건설된 다음에는 고산국에서 출발해 북태평양 항로를 이용하는 것보다 신부산에서 출발하는 남태평양 항로가 여러 모로 이득이었다. 이집트 나일 텔타가 4만 평방킬로미터에 불과한 반면 호주 남동쪽 경작 가능 면적은 그 몇 배나 되므로 고산국에 큰 힘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아직은 호주에 많은 인구를 보낼 수는 없소. 기계 영농에 적응한 농가만 적당한 수를 보낼 것이오.”
“북미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래요. 호주는 온전히 우리 것이지만 북미는 에스파냐에서 매입을 하더라도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 보낸 이주민들과 경쟁을 해야 하오. 인구에서 너무 많이 밀리면 불리해요. 나는 북미 서해안뿐만 아니라 동해안도 고산국이 차지하길 원하오.”
현대 미국과 캐나다 영토를 다 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민호는 한때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흥분했다. 그러나 지금은 차분히 북미를 차지할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벌어진 위그노 전쟁에 몰두하고 있는 에스파냐 국왕을 위해 은 천만 냥을 대여해주기도 했다.
“예. 경쟁자들 때문에 북미를 우선 개발한다고 하셨지요. 그럼 유럽 이주민들을 백성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종이 전혀 다른데 그들이 고분고분 고산국 백성이 되려 하겠습니까?”
“압도적인 군사력과 문화를 보여줘야지요. 그리고 유럽 여러 나라에서 이민을 받으면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특정 국가 소속이었다는 과거를 금방 잊게 될 것이오.”
“운하 두 개를 건설해야 하는데 건설기간은 어느 정도 들 것 같습니까?”
“글쎄요. 한 2년씩은 들지 않겠소? 파나마는 공사 구간이 짧고 말라리아가 위험하니 더 짧은 기간 안에 건설할 예정이오.”
“파나마는 짧아도 고도 차이 때문에 갑문을 건설해야 합니다. 그리 빠르게 건설될지 모르겠습니다.”
수에즈 운하는 영국의 집요한 방해를 받아가면서도, 기계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인력만으로도 예상보다 빠르게 10년이 걸렸다. 파나마 운하는 말라리아 때문에 몇 번 실패하다가 20세기 들어서 미국이 전쟁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단기간에 공사를 마쳤다.
“철도 건설하는 것을 보셨지 않소? 구간 별로 분업하면 빠르게 건설이 가능합니다.”
“건설 장비를 만드신 것도 운하 건설을 위한 준비였군요.”
“그런 점도 있지요. 고산국은 인구가 적으니 인력을 아끼기 위해서라도 기계를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얼마 전에 돌아간 오만 사신단이 구경 시켜준 배꼽춤에 대해 잡담을 나눴다. 남자들끼리 모여서 하는 이야기가 빤했다. 브루나이 공주들이 열심히 배꼽춤을 배운다는 이야기는 정문부에게 차마 하지 못했다.
“필리핀과 호주에 이어서 이번에는 아랍 지역이라니, 과연 고산국은 욱일승천하는 기세입니다.”
“정 총독은 뭘 걱정하기에 표정이 그러시오?”
“이번에는 저를 아랍에 보내실 것 아니십니까? 보고서 작성을 핑계로 자그마치 두 달이나 쉬었으니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어떤 일인지요? 아부다비라는 무인도를 개발하는 일입니까?”
정문부가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초기에 예부에서 일한 것 외에는 계속 외직만 맡겼으니 고생을 많이 한 편이었다. 그러나 정문부의 예상은 틀렸다.
“아니요. 당분간 국내에서 일을 좀 맡아주시오. 국가에서 운영하는 회사들을 맡아줬으면 싶소.”
“설마, 내수사 같은 일입니까? 그런 일은 가까운 환관이나 호위를 시키시지요. 아차! 고산국에는 환관이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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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내정 일부를 떠맡기고 주인공은 바깥으로 나돌게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