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13 46. 1596년 =========================================================================
코끼리새를 잡다가 새끼로 착각한 다른 종이 여럿 있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종류별로 두 쌍 이상씩 잡다 보니 어느덧 30마리가 넘었고, 수송선 한 척을 반쯤 채우게 됐다. 말들이 겁에 질려 날뛰는 바람에 다른 배에 태웠으나 코끼리새들은 초식이었다.
초식을 하는 육상 거북도 동물원에 기증하기 위해 한 마리 잡았다.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거의 유일한 파충류가 거북일 것 같았다.
메리나 족의 환송을 받으며 함대는 마다가스카르를 출항했다. 마다가스카르의 지정학적 위치는 유럽에서 출발해 희망봉을 돌아서 북상하는 배를 습격하기 좋았다. 그래서 코모로, 마요트 섬 등과 함께 17세기 초반 이후 각국 해적선들이 붐비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화승총을 충분히 공급했기 때문에 앞으로 유럽 해적들이 이 지역에 발붙일 기회는 없었다.
마다가스카르 동쪽 800km 거리의 섬에서 잠시 기항했다가 그 동쪽 모리셔스 섬에 도착했다. 인도양 항로 주변에 위치한 섬을 정확히 측량하고 주민들에 대한 조사를 하는 작업을 여기서도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주민들과 교역을 하며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사실 대함대를 이끌고 다니면서 위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해 앞으로 고산국 선박에 위해를 가하지 않도록 하려는 목적이었다.
모리셔스 서쪽 섬, 실제 역사에서 나중에 프랑스의 레위니옹이 되는 섬의 북쪽 항구에는 아랍인들이 살고 있었다. 적당한 물품을 교역한 다음 못 생기고 큼직한 새 몇 마리를 살아있는 채로 저녁 선물로 받았다.
이민호가 옛날에 그림으로 봤던 도도새 종류와 비슷해 큰 닭장을 만들어 그 안에 가두고 과일을 먹였다. 모리셔스에서도 비슷하게 생긴 도도새 몇 마리를 받았다. 한 마리에 25kg이나 되는 큰 새였다.
“주인님! 못 생긴 새들을 왜 살려서 가려고 하세요?”
“동물원에서 키우게.”
민영이 도도새에게 사과를 먹이면서 물었다. 정말 못 생긴 새였으나 마다가스카르에서 이상하게 생긴 원숭이들을 잔뜩 봤기 때문에 이 정도면 준수한 편이었다.
“이곳에서는 흔해빠진 새 아닌가요? 크고 뒤뚱거려서 잡기도 쉬울 것 같아요. 날개가 병아리 날개처럼 작아서 날지도 못해요.”
“지금은 흔하지만 혹시나 멸종될까봐. 사라져 없어지는 것보다는 있는 편이 낫겠지?”
“그럼요. 특이하게 생겨서 애들이 아주 좋아하겠어요. 필리핀과 브루나이에서는 예쁜 동물만 잡아서 동물원에 보내거든요.”
코끼리새나 도도새나 마찬가지로 원주민들이나 아랍인들이 사는 동안에는 멸종위기에 처하지 않았다. 그러나 섬에 도착한 유럽인들이 날개가 퇴화돼 잡기 쉬운 새들을 무차별로 잡고 돼지와 쥐가 퍼져 알을 먹어치움으로써 100년도 지나지 않아 멸종당했다. 고산국 입장에서는 이국적인 동물이니까 동물원에 전시할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모리셔스를 출항하고부터 넓은 바다를 밤낮 없이 빠르게 달렸다. 섬이 없는 지역으로 확인됐기에 해류의 힘을 더해 자연스럽게 호주 남서부로 향했다.
고산국 함대는 호주 남서부 신여수로 명명된 만에 잠깐 들렀다. 정문부가 조사하면서 세운 가건물 외에는 문명의 흔적이 없었다. 한때 원주민들이 살았을지도 모르지만 그 흔적은 오래 전에 사라졌다.
북상한 함대는 장영실 항에 필요한 물품을 내려놓고, 남아도는 곡식을 배에 실었다. 함대가 2, 3일 정박하는 사이 이민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강 주변에 개간된 논에는 벼가 고산국보다 훨씬 높이 자라고, 목초지에는 양이 흩어져 풀을 뜯고 있었다.
“원주민들과 사이좋게 지내서 다행이오.”
“그렇습니다, 전하. 원주민들이 멀리서도 교역하러 옵니다. 그러나 원주민들에게 농사를 가르쳐도 지으려 하지 않습니다.”
고산국 중앙기구 관리들 중에서 주로 차관급들이 필리핀 북부나 큐슈 등 해외 영토에서 총독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호주는 급히 개척할 곳이 아니기에 낮은 직급의 관리를 교대로 보내기로 했다.
이국 정랑은 매사에 신중한 사람으로서 장영실 항을 개척하는 중에도 원주민들과 친분을 다지는 일에 신경을 썼다. 원주민들은 교역보다는 개척지에 올 때마다 주는 술을 마시려고 자주 방문하는 것 같았다.
“식량이 풍부한 곳이니까 그렇겠지요. 억지로 가르칠 필요는 없소. 그리고 장영실 항 주변만 토질이 좋지, 나머지 북부 지방은 황무지에 가까워 농사를 지을 만한 땅이 별로 없소. 계속 사냥이나 하는 게 낫소.”
“그래도 곡식을 먹겠다고 열흘 거리를 걸어옵니다. 등에는 해삼과 전복을 잔뜩 지고 말입니다.”
해산물 값으로 곡식을 주려고 해도 원주민들이 다 들고 가지도 못했다. 원주민들이 자기들이 지고 갈 만큼만 가져간다고 했다. 그래서 선물로 철 냄비와 쇠도끼, 주머니칼 종류를 넘겼다.
“만약 싸움이 나면 우리가 팔았던 무기에 고스란히 맞는 것 아니요?”
“원주민들에게 총의 위력을 확실히 보여줬습니다. 캥거루 몇 마리가 아무 죄 없이 죽었습니다만.”
설마 원주민들과 싸움이 나랴 싶었다. 만약 전쟁이 나더라도 고산국 주둔 병력이 압도적인 군사적 우세를 점하고 있으니 인명피해가 많이 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호주 개척 시기에 원주민들과 전쟁이 났을 때 호주 개척민들이 3천 명이나 죽었다. 물론 원주민들은 그 이상으로 학살당했다.
호주 원주민들이 뉴질랜드 마오리 족이나 뉴기니의 파푸아 족처럼 농경 능력이 있었다면 남서부와 남동부에서 엄청나게 많은 인구로 불어났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고산국에는 다행스럽게도 호주 원주민들은 화전으로 기장밭을 일구는 정도에 그쳐 인구 증가에 한계가 있었다. 호주를 통틀어 세어 봐도 원주민 인구는 50만이 안 될 것으로 추산했다. 백만 이상이라는 태즈매니아 원주민보다 오히려 숫자가 적은 듯했다.
이민호는 함대를 이끌고 인도네시아 여러 항구를 들러 형식상의 교역을 했다. 50여 척에 달하는 거대한 함선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면서 이 지역에 대한 주도권을 확고하게 쥐었다. 함대가 입항하면 권력자들이 버선발로 항구로 뛰어나왔다.
이 지역 권력자들은 고산국이 약탈을 하거나 영토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는 인식이 확실히 박히면서 좀 더 충실한 무역 파트너가 되었다. 다만 자기들끼리 전쟁을 하다가도 걸핏하면 고산국을 끌어들이려 해서 조금 골치 아플 정도였다. 특히 자바 섬에서 전쟁이 잦았다.
한 달에 걸친 외정을 끝내고 이민호는 고산국 왕도로 돌아왔다. 원정 뒷정리를 마치니 이미 5월이 다가왔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는 중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돈 페드로! 어서 오시오. 봄 교역은 지난달에 마치지 않았소? 내가 자리에 없어서 미안하오.”
“폐하! 지난 가을 교역에 참가해서 멕시코에 가느라 봄 교역 때는 저도 없었습니다. 이번에 멕시코 부왕이 보낸 사신과 함께 왔습니다.”
“오! 어서 오시오.”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령의 영토는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 뉴멕시코 등을 비롯한 북중미대륙의 남부 일대와 카리브 해 연안의 서인도제도, 그리고 필리핀 등이 포함됐다. 남미에는 주로 안데스 산맥 서쪽을 영토로 삼는 페루 부왕령이 따로 있었다. 유럽에도 나폴리, 시실리 등에 한때 부왕령이 설치됐었다.
“저는 누에바 에스파냐의 가스파 유니가 아체베도 부왕전하를 대리하여 고산국을 방문한 전권대사 세바스티앙 비스카이노입니다. 에스파냐의 군주 펠리페 2세 국왕폐하의 말씀을 고산국 국왕폐하께 전하고자 합니다.”
“전임 루이스 벨라스코 부왕께서는 페루로 옮기신 모양이군요. 말씀해보시오.”
루이스 벨라스코(Luis de Velasco)는 1590년부터 1595년 11월까지 멕시코 부왕으로서 이민호와 편지도 자주 교환한 사이였다. 그 전에 멕시코시티 북서쪽 치치메카에 거주하는 반유목민 원주민인 나와즈(Nahuas) 부족들에 의한 반란이 잦았고, 쉽게 진압하지 못했다. 그래서 에스파냐 국왕에 의해 새로 임명된 루이스 벨라스코는 원주민들이 식량 공급을 요청하자, 그 요청을 수용함으로써 반란을 간단히 잠재웠다. 루이스 벨라스코 부왕은 5년 동아 성공적으로 임기를 마치고 페루 부왕으로 자리를 옮겼다.
누에바 에스파냐의 9대 부왕 가스파 유니가 아체베도(Gaspar de Zuniga y Acevedo)는 에스파냐 북서부에 위치한 몬테레이의 백작이었다. 그는 재임 기간 동안 북미 대륙에 지상과 해상으로 탐험대를 다수 보내 식민지를 개척했다. 사신으로 온 세바스티앙 비스카이노도 탐사선 3척을 이끌고 북미 서해안을 탐험하던 사람이었다.
“에스파냐의 우방인 고산국 국왕폐하께 부끄러운 소식을 전해드려서 몹시 유감입니다.”
“괜찮소. 말씀해보시오.”
펠리페 2세는 부왕 찰스 5세, 즉 카를로스 1세가 채무 3천 6백만 두캇과 매년 적자 백만 두캇을 남겨두고 승하한 탓에 1557, 1560, 1575년에 채무불이행을 선언한 적이 있었다. 신대륙에서 보낸 은 덕택에 한 동안 자금사정이 괜찮았다가 최근 잇따른 전쟁과 에스파냐 특유의 분리된 국가재산 관리제도 탓에 다시 빚에 쪼들리게 되었다.
종교적 열정이 펠리페 2세를 수시로 전쟁에 내몰았다. 그는 에스파냐의 최고 전성기를 이룬 국왕인 동시에, 그 이후 에스파냐를 쇠퇴하게 만든 결정적 실책을 저지른 국왕으로 남았다.
“고산국 국왕폐하께서 빌려주신 은 천만 냥을 갚을 수 없게 돼서 유감이라는 소식을 전합니다. 다른 나라에서 빌린 채무도 갚지 못했습니다.”
“음. 천만 냥이라. 한꺼번에 갚기엔 금액이 좀 크지요. 그렇다면 나눠서 갚아도 괜찮소.”
이민호는 에스파냐가 파산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 의뭉스럽게 한 번 떠봤다. 펠리페 2세가 지난 세월 세 번이나 채무불이행을 선언하고도 채권자들로부터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 이 시대에 감히 에스파냐 국왕에게 빚 독촉을 하거나 담보제공을 요구하는 간 큰 채권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고산국왕 이민호는 평범한 채권자가 아니었다. 가까운 필리핀과 마닐라는 둘째 문제로, 고산국은 신대륙 전체를 공략할 힘을 갖고 있었다. 필리핀 총독의 주요한 임무 중의 하나가 고산국의 해군력과 현재 진행되는 태평양 탐사 현황을 평가해 보고하는 것이었다.
“죄송하게도 나눠서 갚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에스파냐의 국왕폐하께서는 고산국 국왕폐하께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무엇이오?”
“부채의 담보로 제공했던 필리핀 영토 전체를 고산국에 양도하면 어떨지요. 물론 마닐라의 일부 지역을 에스파냐에 임대해주고 말입니다.”
“닥치시오.”
이민호가 나지막하게 말했으나 그 분노가 충분히 전달된 것 같았다. 세바스티앙 비스카이노가 고개를 숙이며 몸을 떨었다.
고산국이 에스파냐의 멕시코 부왕령을 점령하기에는 너무 멀어서 부담스럽다지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면 또 전혀 달랐다. 에스파냐는 유럽에서 프랑스 및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과 전쟁 중인 상황에서 고산국마저 적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고산국의 해군력은 에스파냐도 충분히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만약 은이 산출되는 신대륙 전체를 잃고 아시아 무역에서 지금까지 얻고 있던 이익을 앞으로 기대할 수 없게 된다면 에스파냐에 남은 것은 멸망밖에 없었다.
“폐하! 부디 진정해주십시오.”
“내가 오랜 친구인 돈 페드로의 체면을 봐서 참고 있는 것이오.”
그리고 이 시대에 마닐라를 제외한 필리핀은 그다지 매력적인 영토가 아니었다. 필리핀 전체에서 농경지로 개간된 지역이 아직은 그리 넓지 않은 편이었고, 이는 이 시대 필리핀 인구가 적은 것으로 알 수 있었다. 현대에야 필리핀이 1억 운운하는 인구대국이지만 이 시대에는 루손 섬과 민다나오 섬까지 다 통틀어서 백만이 넘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 때였다.
그리고 에스파냐가 필리핀 나머지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한 것도 아니었다. 고산국이 점유하고 있는 루손 섬 북부 지역은 마닐라 총독부가 탐사선을 딱 한 번 보내 해안을 측량한 정도였고, 바기오 남서쪽 다구판은 명나라 해적을 몰아낼 때 전투를 벌인 장소에 불과했다.
민다나오는 더욱 한심했다. 마닐라에서 원정단을 몇 번이나 보냈으나 정복에 실패했고, 심지어 원래 역사에서 20세까지 에스파냐가 실질적으로 민다나오를 지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필리핀 땅은 그저 천만 냥을 고산국으로부터 빌리면서 형식상 담보로 제공한 가상의 영토일 뿐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필리핀을 천만 냥에 넘긴다고 하면 코웃음 칠 것이오.”
“맞는 말씀입니다.”
현대 기준으로야 얼씨구나 하겠지만 이 시대에 필리핀은 전혀 돈이 되지 않는 열대우림 지역에 불과했다. 마닐라에 자리 잡은 필리핀 총독부에서도 무역 외에 필리핀 땅을 이용해 수익을 올린 사례가 지금까지 전혀 없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18세기 정도 돼서야 사탕수수 등 플랜테이션 농업을 시작한다.
미국 독립 직후인 1803년, 당시 미국 영토와 비슷한 면적인 광대한 루이지애나를 프랑스가 미국에 1500만 달러에 판매한 사례도 있었다. 1000만 냥이라면 그 두 배 이상의 가치였다.
“사신은 에스파냐 국왕폐하로부터 허락 받은 다른 대안을 갖고 왔을 터, 말씀해보시오.”
“예. 죄송합니다. 천만 냥에 걸맞은 영토가 필요하겠습니다.”
“사신도 알겠지만 고산국은 인구가 적어서 넓은 영토를 줘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오. 꼭 영토를 줘야 하겠소? 멕시코나 페루의 은광을 줘도 되는데 말이오. 포토시라고 하는 지역에 산 전체가 은광석으로 되어 있다는 소문을 들었소.”
이민호가 북미 대륙에 대한 영토적 야욕을 숨긴 채 페루의 포토시 은광에 노골적으로 침을 흘렸다. 역시나 사신이 기겁하면서 거절했다.
============================ 작품 후기 ============================
스페인이 파산했을 때 숟가락 얹기를 시전하고 있습니다.
이어질 예정입니다.
멕시코 부왕들 조사하다가 많이 늦었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