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28 47. 1597년 =========================================================================
“그 꼿꼿한 내암 선생이 줄행랑치리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게지요.”
실제 역사에서 정인홍은 세자 문제를 놓고 사약을 받을 각오를 하고 선조 임금에게 간언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유배 가기 직전에 선조 임금이 죽어서 풀려났다.
“일단 내암 선생이 진주성을 구원하지 않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전쟁이 끝나고도 의병을 가노로 두고 일을 부린 것도 사실입니다. 그 문제로 인해 다른 정파로부터 심하게 비판을 받았지요. 그러나 저 꼬장꼬장한 사람이 개인의 영달을 위해 군량을 횡령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원익이 이민호의 비판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민호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 문제에 있어서는 별다른 반론을 펼치지 않았다.
이 당시 의병과 정병은 신분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관군에 소집되어야 할 장정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의병부대에서 복무하는 바람에 관군을 편성하기 어렵다는 장수들의 불만 어린 기록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관군으로 복무하기 싫어 의병으로 복무하던 군사가 전쟁이 끝난 후 정인홍의 집에 가노로 투탁할 수도 있었다. 세수와 병역 자원의 근간인 양인이 줄어들므로 국가에서 금지하지만 무조건 내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군량의 경우는 셀 때마다 항상 부족했다. 그래서 누구든지 군량을 맡은 자는 상사가 작정하고 조사하면 목을 보존하기 어렵다. 정인홍은 절대로 군량을 횡령하지 않았다고 부정했으나, 이미 몇 년 지났으니 군량이 제대로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사실이든 아니든 횡령 혐의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이제 보니 조정 대신들 대부분이 전하께 적게나마 뇌물을 받은 적이 있을 겁니다. 전하도 무서운 분이로군요. 받기도 안 받기도 아주 애매한 액수로 주셨습니다.”
이항복이 여유 만만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코밑에 비볐다. 이덕형은 이민호의 노복에게 비단 몇 필을 받은 기억이 떠올라서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이원익은 이민호에게 뭔가를 받을 때마다 고스란히 부서 운영비로 정식 편입했기에 태연했다.
“감히 전하를 비난할 자는 거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나라를 뒤집어엎은 것도 아니고 다른 땅에 가서 새로운 새로운 나라를 세웠으니 비난받을 일이 전혀 아닙니다.”
“맞습니다. 전하께서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 전쟁에서 수없이 많은 왜적을 참수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식량을 대량으로 들여와 전쟁 와중에 양반과 상민 가리지 않고 수많은 백성들을 아사 위기에서 구해내셨습니다. 양반들이 전하께 입은 은혜를 잊고 욕한다면 배은망덕한 효경의 무리겠지요.”
“그렇게 이해해주면 고마운 일이지요.”
허균이 1612년에 집필한 <홍길동전>에서도 마지막에 활빈당 무리는 조선을 떠나 율도국을 세운다. 그 한글 소설을 읽고 율도국을 조선에 바치지 않았다고 비판한 자는 없었다.
이민호는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고산국을 자기 것 마냥 내놓으라는 임해군이나 순화군 같은 자들이 이상한 사람이었다. 2007년 도쿄도 참의원 선거에 입후보한 세계 경제 공동체당의 마타요시 미츠요는 TV를 통해 방송된 정견 방송에서, 고이즈미 수상은 중의원을 자진 해산하고 수상의 자리를 유일신인 마타요시 미츠요에게 넘기라고 호통을 쳤다.
관세 위주의 무역협상을 마치고 서소문 저택으로 돌아오니 웬 늙은 계집종이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민호가 몇 번 봤던 얼굴이었다.
“연천 현감 김 모의 따님이 전하를 뵙자고 합니다.”
“혹시 제자 남자 쓰는 분의 따님이신가?”
“그러하옵니다, 대인 나리.”
계집종이 이민호를 대인 나리라고 불러서 이상했지만 신분이 낮은 자들이 일부러 호칭을 겹쳐서 상전을 부르는 경우가 흔해서 넘어갔다. 예상대로 김제남의 딸이 보낸 여종이 맞았다.
“남쪽 회회교를 믿는 왕의 비 자리를 알아보고 있다고 전하여라.”
“감사하옵니다, 대인 나리.”
계집종이 나이에 비해 많이 늙었다. 어떤 주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노비의 팔자가 바뀌었다.
“회회교라뇨? 김 씨 아가씨를 어디로 시집보내시려고요?”
“민다나오로 보낼까 하는데.”
이민호에게 물었던 민영이 한참 동안 까르르 웃었다. 시암이나 묘족은 이슬람교를 믿지 않으니 제외하고, 민영은 브루나이와 자바의 마타람 왕국을 예상했으나 민다나오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이었다.
“저렇게 원하는데 취하시지 그러세요?”
“무서워서.”
꼬마 때부터 권력욕이 지독한 소녀라서 만약 왕궁에 들이면 무슨 짓을 할지 두려웠다. 명나라 만력제로부터 총애를 받던 정 귀비, 즉 공각 황귀비 정 씨는 아들 주상순을 황제로 즉위시키기 위해 홍환안, 이궁안을 일으킨 배후 인물로 꼽혔다. 홍환안은 태창제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 이궁안은 태창제의 총애를 받던 후궁의 살인미수 사건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인조반정 직후 인목대비가 악에 받쳐 날뛴 것을 생각해보면, 어딘가 조용히 있을 만한 곳이 좋았다. 서산대사가 외국에서는 아무 문제없을 거라고 했으니 믿기로 했다. 설마 민다나오의 이슬람 왕조가 왕비 하나 때문에 망하거나 흥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틀을 서소문 저택에서 쉬고 제주도로 향했다. 이제 겨우 음력으로 1월 중순이 다가오는데 제주도는 벌써 봄기운이 만연했다. 양지 바른 오름마다 파릇파릇 귤나무와 차나무가 자랐다. 귤은 남쪽 서귀포에서 더 잘 자랐다.
“여태껏 여러 항구를 들러봤지만 선착장 빈자리 찾기 어려운 곳은 제주항밖에 없었다.”
해동상단과 조선의 다른 상선들은 물론 고산국 무역선과 명나라 배들까지 제주항을 가득 메웠다. 말과 양, 귤과 찻잎을 채운 상자가 끊임없이 배에 실렸다. 이제는 제주도 백성들이 충분히 먹고 산다는 반증이었다.
이경록은 6년 동안 연속 제주 목사 직무를 수행하면서 제주도를 완전히 천국으로 바꿔놓았다. 초반에 이민호가 도와주긴 했지만 이 정도로 좋아질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통지, 어서 오시게! 제수씨 얼굴이 마치 하얀 목련이 활짝 핀 듯하오.”
“어머머! 고맙습니다.”
이경록의 인사에 이민호를 따르던 민영이 좋아 죽으려 했다. 이민호는 앞으로 몹시 피곤해질 것 같아 걱정이었다.
“도대체 형님은 한 곳에서 몇 년을 역임하십니까?”
“이제는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어도 제주도 백성들이 결코 놓아주지 않으려 해. 내가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소문만 돌면 백성들이 떼를 지어 관아로 몰려와 울고불고 난리를 친다네.”
“형님은 좋겠수.”
“다 자네 덕일세. 그 동안 주상전하께서 질투할까봐 자네 덕이라는 말도 못했다네.”
제주목에서 성산에 방호소를 짓고 있었으나 일본이 멸망하고 왜구가 사라지면서 성곽 축조 계획은 모두 취소됐다. 원래 역사에서 이경록은 부친상 이후 성산 방호소를 짓는 도중에 풍토병에 걸려 1599년에 사망한다. 그러나 아직 부친상도 겪지 않았고, 방호소를 짓느라 과로로 고생하다가 풍토병에 걸려 죽을 일도 없었다.
“이제 왜구는 안 오지요?”
“왜구는 완전히 없어진 것 같아. 그 대신 명나라 해적선이 가끔 왔었는데 저번에 여해가 절강성 앞바다 주산군도를 친 다음부터 바다가 아주 깨끗해졌어. 그래서 감사인사로 귤 백 상자를 고산국 해군에 보냈지.”
“아! 해군에서 웬 일로 제주 감귤을 궁성으로 보냈다 했더니 원래 형님이 보내신 거였군요.”
제주도는 비가 많이 오더라도 토양이 투과성이 높아 물을 가둘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제주목의 가용 예산이 많아지면서 이경록이 해결 방법을 연구했다. 바닥에 돌을 깔고 시멘트로 포장한 저수지를 여러 곳에 만든 뒤부터는 제주도에 물이 부족할 일이 없었다.
- 두두두두두~
함대에 동승했던 기병중대를 제주도에 풀어놨더니 여기저기서 제주 목부들과 경주를 하고 있었다. 제주도 목부들은 승마의 전문가들인데 고산국 기병들도 그 동안 기량이 많이 향상됐는지 크게 밀리지는 않았다.
“숙부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오! 서 아니냐? 많이 컸구나.”
홍안의 청년이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이민호에게 절을 했다. 겨우 세 살 차이인데 이민호는 이서에게 아저씨 노릇을 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이순신의 아들 이면과 이경록의 아들 이서는 세 살이나 차이 나는데도 이 시대 사람들이 그렇듯 가뿐히 친구 먹었다.
“얼마 전에 면이한테서 편지를 받았는데, 면이가 하늘을 날아다닌다면서요? 그게 말이 돼요?”
“어허! 군사기밀은 아니더라도 비밀은 함구하라고 일렀거늘!”
물론 이민호가 이면에게 비행에 대해 함구하라고 말한 기억은 전혀 없었다. 행글라이더나 낙하산 수준은 어느 나라든 한번쯤 시도해본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에도 임진왜란 때 비거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 시대로부터 100년 전에 낙하산과 헬리콥터, 그리고 자동차의 설계도를 스케치했다.
“하늘을 날도록 추진해주는 지속적인 힘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요? 고산국에 그런 기관 많잖아요?”
“천만에. 날틀을 떠받쳐주는 공기의 힘을 느끼고 바람의 방향을 읽어서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은 차원이 달라. 비행기를 만드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러나 나는 것은 모든 것이야.”
이민호가 오토 릴리엔탈의 격언을 인용했다. 릴리엔탈의 두 번째 격언, 희생은 반드시 치러야 한다는 말은 인용하지 않았다. 릴리엔탈도 행글라이더 추락 사고로 죽었다.
“그럴 듯한 말씀이군요. 저도 아무 것도 아니지만 비행기라는 것을 만들어봤습니다. 공기와 바람을 느끼면서 만들다 보니 이런 것이 만들어지더군요.”
이민호는 할 말을 잃었다. 이서가 양쪽으로 기다란 날개가 달린 커다란 행글라이더를 하늘에 띄웠기 때문이다. 행글라이더는 바람을 타고 서서히 떴다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 행글라이더는 방향을 바꿔가면서 100미터 정도 우아하게 날더니 풀밭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동체와 날개 밑에 작은 바퀴도 달려 있었다. 고산국 국방연구소에서 만든 것보다 훨씬 나았다.
“이거 어떻게 만들었어?”
“면이가 대충 그려준 그림을 보고, 편지에 동봉한 종이비행기를 참조해서 만들었습니다. 날틀이란 것은 그것을 탄 사람이 무게 중심을 잡는 방식이더라고요. 제가 만든 것은 동체를 중심으로 했습니다.”
방금 날린 것 말고도 이서가 만든 여러 가지 모델이 있었다. 이서는 종이비행기와 나무 비행기를 다양하게 만들면서 배우지도 않은 공기역학을 깨우친 것 같았다.
“너 고산국에 오지 않을래? 대학 다니면서 여러 가지 비행기를 만들어봐라. 세계 최초의 항공공학자. 어때?”
“비행기만 만들라고요? 에이! 저는 그냥 무과 공부나 할래요. 말 타고 뛰어다니는 게 좋아요.”
이경록의 둘째 아들 이서는 어렸을 때 우계 성혼에게 수학하다가 임진왜란 이후 무과로 진로를 바꿨다. 원래 역사에서 이서는 무과 급제 후 장단 부사로서 인조반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맡아서 일등공신이 된다.
“일본은 망했고 북방도 조용해. 네 인생에 큰 전쟁이 일어날 것 같아? 그러니까, 조선이 외적의 침입을 받아 장군으로서 크게 활약할 기회가 있겠어?”
“글쎄요. 흐음. 고산국이 조선에 쳐들어갈 일은 없겠죠?”
“농담 말고. 나 같으면 조선에서 고달픈 무관을 하느니 차라리 글공부나 하겠다.”
이민호는 이서에게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 인조반정 이야기는 쏙 빼고 앞으로 평화가 오래도록 이어질 것처럼 사기를 쳤다. 옆에서 이경록도 거들었다.
“숙부 말씀이 옳다. 제주도가 몇 년 사이에 어떻게 바뀌었는지 너도 잘 알지 않느냐? 무과 급제는 나중에 해도 된다. 젊었을 때 새로운 문물을 배우는 게 어떻겠느냐? 나중에 벼슬을 하더라도 이때 알아둔 지식으로 백성들을 살찌울 수 있을 게다.”
“저도 면이처럼 사관학교라는 곳엘 다니라고요? 그럼 고산국 군인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사관학교를 졸업했다 해서 반드시 고산국 군에 입대할 필요는 없어. 그리고 너는 사관학교보다는 대학교에서 공학을 배우는 게 좋겠다. 틈틈이 비행기를 만들다가 졸업한 다음 본격적으로 사람이 탈 만한 큰 비행기를 만들어봐라.”
사관학교에 입학한 외국인은 졸업 후에 대부분 귀국했다. 현재 사관생도들 중에 아이누와 동해국 여진족, 필리핀 총독부에서 추천한 에스파냐 귀족 청년들이 외국인이었다.
“좀 더 생각해보고요. 면이하고 편지로 의견을 나눠봐야겠어요. 내가 만든 비행기를 면이가 조종한다면 그것도 재미있겠군요.”
이민호가 비행기 제작에만 매달리면 몇 년 이내에 하늘을 날아다니게 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항상 바쁜 이민호가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가 없었다.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인재를 발견한 이민호는 이서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대학교에 다니는 동안 월봉으로 은 닷 냥을 주고, 졸업 후에 국방연구소 또는 신설될 항공연구소에서 은 열 냥, 그리고 책임 장인급 직책을 보장하겠다. 국적은 네 마음대로 해.”
“그래도 저는 장군이 되고 싶은데 말입니다.”
“그 정도면 애비보다 수입이 훨씬 낫네. 형은 음악에 미쳐 있으니 너라도 늙은 부모를 봉양해야 하지 않겠느냐? 할아버지도 계신데 말이다.”
이경록이 옆에서 열심히 지원해줘서 간신히 이서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 이서는 그 날부터 이면처럼 고산국 백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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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현대적인 문물도 항상 기존에 있는 것을 기반으로 만든다고 사기를 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