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432화 (381/1,000)

00432  47. 1597년  =========================================================================

“육지에 왜성이 있나 살펴보도록.”

이민호가 명령을 내리자 함교 요원들이 망원경을 들고 어촌 너머를 샅샅이 뒤졌다. 아직 거리 측정이 가능한 쌍안경을 만들지 못해서 승조원들이 기다란 망원경을 길게 빼서 수색했다.

“남쪽에 성이 살짝 보입니다.”

“바다에서 잘 안 보이는 언덕 뒤에 숨어 있습니다. 여름에는 나무에 가려 안 보였을 것 같습니다.”

왜인들이 조약을 무시하고 아이누 영토에 들어와서 자리 잡은 것이 확인됐다. 이민호는 이들을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짧은 시간에 저 정도 규모의 성을 쌓았다면 꽤 많은 인원이 동원됐다고 봐야 했다.

“함장! 함대 서쪽으로 이동해서 포격 준비하시오.”

“51번, 52번 포! 함교다. 현 위치에서 183도, 거리 16리, 석성. 포격 준비!”

함장이 함대에 서쪽으로 이동할 것을 명한 다음 수화기를 들고 함포에 포격 준비를 지시했다. 51번 포는 전방 5인치 함포, 52번 포는 후방 5인치 함포를 지칭했다.

그 사이에도 국왕좌승함 밑에서 왜인 전령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이민호가 함교 밖으로 나가서 고개를 내밀자 왜인 전령이 알아보고 무릎을 꿇었다.

“전하! 일본인들이 이곳 우토에 거주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대로 된 이유가 있겠냐마는, 어디 나를 한 번 납득시켜봐라.”

“전하께서 일본과 에조의 경계로 삼은 선에서 남쪽으로 가면 인세의 지옥입니다. 사람으로서 도저히 살 만한 곳이 못 됩니다.”

이민호는 정벌이 끝난 이후에도 일본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쏟고 있었다. 고산국에 패배하고 일왕의 대가 끊긴 이후 왜인들끼리 몇 년째 내란을 지속하고 걸핏하면 전염병이 퍼졌다. 이민호가 예상한 대로 패전국에서 흔히 발생하는 지극히 표준적인 상황이 일본에서 전개됐다.

1596년 하반기를 기준으로 미카가 이끄는 정보국에서 일본 혼슈의 인구를 추산했는데 어느덧 800만 이하로 떨어졌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지금도 혼슈의 인구는 급격한 감소추세였다. 내전 중에는 일반적으로 농업생산력도 함께 떨어지므로 인구 부양력 자체가 지속적으로 축소된다. 앞으로도 인구가 더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아이누의 땅에 내 허락도 없이 왜인들이 몰려와서 살았다고? 항의하는 아이누들을 죽여가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야만인들이 사는 땅이 넓으니 양해를 얻지 않더라도 이런 좁은 땅 정도에는 화인들이 살 수도 있지 않습니까? 빈 땅을 놀리는 것은 신불에게 죄를 짓는 아주 나쁜 일입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사살해.”

- 타타타탕!

국왕좌승함 갑판에 늘어선 해병들이 전령에게 총격을 가했다. 전령으로 온 사무라이가 피를 뿜으며 바다에 빠졌다. 피거품이 수면 밑에서 솟아올랐다.

이민호가 배를 몰고 온 어민들에게 돌아가라고 손짓을 하니 어민들이 황급히 항아리 몇 개를 바다에 버렸다. 그러고 나서야 노를 저어 달아났다.

“뭘 버린 건가요?”

“화약 항아리겠지.”

민영의 질문에 이민호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전령이 이민호가 아닌 배에 실린 다른 것에 꾸준히 신경을 쓰고 있어서 의심하던 차에, 불이 붙은 작은 화로에 전령의 손이 가는 것을 발견한 다음 사격 명령을 내렸다.

전령 무사는 이민호가 탄 좌승함에 자폭 공격을 하려는 목적으로 접근한 것이었다. 좌승함에 확실한 타격을 줄 자신이 없어서 이민호가 얼굴을 내밀었을 때 화약 항아리들을 한꺼번에 폭파시키려 했었다.

이민호에 대한 암살 시도를 했든 말든 상관없이 함대가 공격 절차를 진행했다. 함대가 서쪽으로 약간 이동하자 언덕 뒤에 숨은 왜성이 드러났다. 작은 천수각과 낮은 성벽 등 모든 것이 바다로부터의 관측을 피하고 함포 사격을 당하더라도 최소한의 피해만 입도록 지어진 성이었다.

- 쿠쿵! 쿵!

곧이어 포격이 시작됐다. 함대 15척 중에서 전선 12척에 탑재된 5인치 함포는 24문이었다. 당시 일본의 성곽 방어력의 한계를 넘어선 화력이 작은 성을 향해 쏟아졌다.

그 사이 3인치 함포 48문은 어촌과 주변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항구에 정박된 배들 중에서 조약에 의해 금지된 돛단배는 물론 노 젓는 어선도 모조리 수장시켰다. 일본 배가 아이누 영토에 있는 것이 잘못이었다.

- 콰쾅!

3인치 포탄이 폭발하면 제법 큰 목조 건물도 웬만하면 무너졌다. 여기에 불까지 붙어 시커먼 연기를 뿜어냈다.

어촌 마을의 오두막들이 하나씩 무너지는 가운데 왜인 민간인들이 해변으로 몰려나왔다. 그리고 함대를 향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빌었다. 그러나 전선에서는 왜인들에 대해서는 공격하지 않았다.

“왜인들은 안 죽이나요?”

“왜군과 왜인이 이용하는 시설물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기 때문이야.”

딱히 민간인에 대한 공격 금지를 명하지는 않았지만, 좌승함 함장 겸 전단장은 이민호가 내린 명령을 엄밀하게 해석해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비무장 민간인을 사살하고 싶어 하는 군인은 거의 없었다.

군인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뿐만 아니라, 적군을 죽이는 임무를 맡은 사람이다. 적군도 사람인 이상, 사람이 사람을 죽일 때 받는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받는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사람에게 시킬 만한 일이 결코 아니었다. 군인이 존경받아야 한다면 전장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임무를 수행할 뿐만 아니라 적을 죽이는 스트레스를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산국 해군이라 해서 사이코패스가 없으면 그것이 더 이상했다. 어떤 전선인지 모르겠지만 명령 수행을 핑계 삼아 왜인 오두막 앞에 무릎 꿇고 울고 있는 왜인 가족 다섯을 오두막과 함께 날려버린 포수가 있었다. 누구인 줄 알면 더 큰 사고를 치기 전에 군에서 제대시키겠지만 12척이나 되는 전선에서 포격 중이라 찾아내기 어려웠다. 이민호도 모른 척하고 넘어갔다.

“상륙!”

이민호가 지시하자 이미 아이누 전사들을 태운 단정들이 맹렬한 기세로 해안선을 향해 달렸다. 요즘에는 단정에도 작은 원동기를 탑재해 조작수 한두 명만 탑승했다. 단정에서 내린 아이누 전사들이 성을 향해 달렸다.

기병을 실은 수송선은 직접 해안선까지 접근해 기다란 널빤지를 내렸다. 말을 타고 무릎까지 잠기는 해변에 내린 기병중대가 빠른 속도로 남쪽으로 이동했다. 기병을 보호하기 위해 포수들이 기병중대의 진격로 주변을 함포로 조준했다.

“3인치도 아니고 5인치 포탄 수십 발을 맞고 성이 무너졌는데 살아남은 자가 얼마나 있겠어요? 포격에서 살아남은 자들도 무너진 돌더미에 다 깔려 죽었을 거여요.”

“생존자야 많지. 여기서 보기에는 성이 완전히 무너졌더라도 아마 반도 안 죽었을 거야.”

“설마 그 정돈가요?”

아이누 섬에서 왜인들을 몰아낼 때도 그런 적이 있었는데 민영은 기억도 못하는 모양이었다. 민영이 망원경으로 왜성 주변을 살피다가 깜짝 놀랐다.

“적 조총수들이 있어요!”

- 타타탕!

그러나 기병중대도 적의 매복을 파악하고 있었다. 총격전이라면 고산국 쪽이 훨씬 유리했고, 분대마다 유탄발사기까지 있어서 성벽 너머로 유탄을 투척해 얼마 남지 않은 방어병력을 날려버렸다.

세 방향으로 나뉘어 진격한 기병들이 성의 잔해를 넘어 돌입했다. 그리고 성 안에서 본격적으로 총성이 울렸다. 성 안에서 전투가 계속되는 사이 아이누 전사들도 성에 돌입했다.

잠시 후 전투가 끝났다. 기병중대가 주변 지역을 정찰하는 사이 아이누 전사들이 창끝에 왜병들 머리를 꽂고 돌아왔다. 피가 줄줄 흐르는 더러운 것으로 배를 더럽히고 싶지 않았으나, 아이누 전사들이 전선에 탈 때까지 이민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병들이 상륙해 어촌마을에 살던 왜인들을 남쪽의 일본 영토로 쫓아냈다. 그 사이 다른 것을 발견하지 못한 기병중대가 돌아왔다. 투구와 방탄복 덕택에 전사자는 없고 부상자가 몇 명 발생했다. 수송선에 기병들을 수용한 다음 함대는 다시 삿포로로 돌아왔다.

아이누 사람들이 항구로 몰려들어 대첩을 축하해줬다. 이민호는 승전 기념 연회를 베풀어 이번 전투에 참가한 아이누 전사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사실은 아이누 부족장들을 모아 매섭게 꾸짖는 자리였다. 수염을 길게 길렀지만 나이를 물어보면 기껏해야 30대 중반이었다.

“이봐! 왜적들이 성을 쌓았으면 총독에게 보고를 해야 할 것 아닌가?”

“가능하면 아이누 선에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사상자가 자꾸 늘어나면서 총독님께 보고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중에 왕께서 오신 겁니다.”

삿포로 지역에는 고산국에 유학 중인 사관학교 생도는 몇 명 있는데 졸업자가 아직 없었다. 그래서 전통방식 그대로 비효율적인 전투를 반복하는 사이 희생자가 몇몇 부족 단위에서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누적됐다. 왜군과 큰 전투 두 번, 작은 전투 열 몇 번을 치르는 사이 전사자가 600여 명이나 생기고 화승총 100여 정을 왜군에게 전리품으로 갖다 바쳤다.

“앞으로는 정 왜군과 전투를 하고 싶으면 총독부에 보고해서 고산국 병력하고 같이 싸워. 알겠나?”

“반성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고산국 군대와 함께 왜군과 싸워 승리했던 기억이 있어서 이제는 왜군과 단독으로 싸워도 이길 줄 알았단다. 그러나 왜군이 아무리 약화됐더라도 최소한 아이누 전사 집단에게 밀릴 정도는 아니었다.

이틀 사이에 중장비를 운전하는 장인들이 삿포로 평원에 바둑판처럼 정연하게 밭을 만들어주었다. 눈이 워낙 많이 내리는 지역이라 돌과 흙보다는 눈을 치우는데 더 많은 시간을 들였다.

측량을 해보니까 경작지로 개간 가능한 평원 넓이가 동서 최대 50km, 남북 최대 100km였고, 면적은 약 2500평방킬로미터 정도였다. 아이누 섬에는 이곳의 열 배 가까운 면적이 개간 가능했다.

“왕이시여! 저 거대한 수레는 삿포로에 놔두실 겁니까?”

“아니. 삿포로 주변에 사는 아이누들이 대충 먹고 살 만큼만 개간해준 다음 동부로 보내려고.”

이민호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삿포로는 거주 인구가 적은 곳이라 대충 개간한다는 것이 인구 열 배 이상을 부양 가능할 정도로 과도하게 넓은 밭을 만들어주었다. 퇴비 같은 것을 준비해줄 필요도 없이 목초지로 몇 년씩 사용하면서 어쩌다 한 번 농지로 사용했다.

고산국 농업연구소 아이누 분소는 드넓은 동부가 아닌 조금 더 따뜻한 삿포로에 개설했다. 여기서 쌀농사가 가능하다면 함경도 북부나 동해국, 연해주에서도 쌀 재배가 가능하므로 연구원들은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일했다.

연구원들은 명나라와 안남에서 종자를 구해 내한성 벼를 집중 연구했다. 자포니카와 인디카를 교배시킨 종자가 불임성을 보여서 또 다른 품종과 다시 교배시킨 삼원교잡으로 불임현상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공적으로 교배시킨 잡종은 돌림병에 취약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자포니카와 인디카를 교잡시킨 통일벼가 생산성이 높으나 맛도 없고 병충해에도 약해 얼마 지나지 못하고 사라진 전철을 고스란히 밟게 되었다.

결국은 재래종 벼를 재배하되 보온 못자리를 설치해 냉해를 줄이는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몇 년 지나 아이누 섬이나 동해국에서도 쌀 생산이 가능해졌지만 못자리를 위해 비닐하우스를 설치하면서 생산비가 두 배로 뛰어올랐다.

이민호가 이끄는 함대는 아이누 섬을 떠나 혼슈 서해안을 따라 남하했다. 중간 중간에 왜인이 탄 돛단배를 만나면 여지없이 함포를 쏘아 격침시키고 항구에 돛단배가 있으면 항구 전체를 불태워버렸다.

1월 하순에 함대가 사도(佐渡)에 닿았다. 사도 중간 평지에 농사짓는 왜인들이 보이기에 집과 논밭을 불태우고 왜인들은 강제로 혼슈로 이주시켰다. 다음에 또 농사짓다가 적발되면 참수하겠다고 경고판을 세웠다.

오키제도의 섬들에는 다 쓰러져 가는 집 외에는 사람 흔적이 없었다. 그러나 병력을 투입해 샅샅이 수색한 다음 사람이 살 만한 곳에는 불을 질러버렸다. 이런 식으로 몇 번 하면 왜인들이 감히 섬에 정착할 엄두를 못 낼 것으로 기대했다.

몇 번 들러서 이미 익숙해진 니마 항에 들러서 이와미 은광으로 정찰 병력을 보냈다. 한때는 배로 가득 찼던 항구였지만 지금은 해안에서 썩어가는 어선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산에서 왜인들을 몇 명 만났으나 황급히 숲으로 도망가는 바람에 대부분 놓치고 처녀 한 명만 그물을 던져 잡아왔다. 은광 정찰을 마친 기병 중대장은 갱도에 물이 가득 차서 채굴을 못한다고 보고했다. 이민호는 아주 조금 아쉬웠다. 그리고 왜인 처녀를 전선에 가뒀다간 전염병이 퍼질 것이 우려돼 즉시 석방했다.

2월 초순에 간몬 해협을 지나 벳푸 온천과 사쓰마 휴양지에서 며칠 쉬었다. 큐슈 총독을 휴양지로 불러서 업무 보고를 받았고, 다음 행선지는 유구국이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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