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41 47. 1597년 =========================================================================
술탄들은 고산국 해군도 무섭지만 좌승함에 타는 동안 그들을 안내한 해병도 무섭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고산국 전선이 60척이 넘어가면서 전선에 탑승하는 해병만 기본적으로 2만에 달했다.
해군은 3만 이상이었고 지상전 훈련도 충분히 받았다. 이 시대에 조선수군만 빼고 해군이나 수군이 지상전도 겸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해군 승조원들은 해상전은 물론 지상전도 감안해서 해군도 방탄복을 기본적으로 지급받아 유사시에 전력으로 충분히 써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고산국 육군이 수가 적고 흑인연대까지 해체돼 아프리카로 떠나는 바람에 줄어든 것처럼 보였지만 다만 통계의 마술일 뿐이었다. 유사시에는 큐슈와 동해국에서 만 단위로 징집할 수 있음은 물론, 가까운 시암에서도 병력을 빌릴 수 있었다.
“고산국 상선에 감히 손을 댈 미치광이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침략자 포르투갈 인들은 심심하면 다른 나라 배들을 상대로 해적질을 합니다. 상선의 화물을 빼앗고 선원들을 노예로 팔아버리는 악독한 자들이 포르투갈 해적들입니다!”
“그 해적선들은 말래카의 산티아고 요새 소속이 아니오. 내가 아는 바로는 버마인들이 운영하고 있소! 그 중에 포르투갈 모험가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고아 부왕으로부터 정식 명령이나 면허를 받은 자들은 아니란 말이오.”
“해적선에 포르투갈 항해사와 화승총 사수가 다수 있는 것을 부정할 셈이오? 포르투갈 인들도 우리와 같은 신을 믿으면서 어떻게 무신론자 같은 잔인한 짓을 할 수 있단 말이오!”
“아체 사람들이 부유하고 지적이긴 하지만 영적 어두움과 무지 속에서 살고 있소.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진정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당신들은 알아야 하오! 고아 부왕이 움직여준다면 조만간 아체 술탄국에서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배우게 될 것이오.”
“그만! 그만하시오.”
이민호는 이들에게 어떤 조건을 제시해도, 아무리 고산국이 해군력으로 억눌러도 조만간 다시 서로 싸우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해상안전만 보장받으면 된다는 생각에 이민호가 조약문을 제시했다.
“3개 국어로 됐으니 읽어보시오. 자위문자, 포르투갈어, 조선말이오. 말래카 해협 해상에서 선박끼리 어떠한 전투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오.”
자위문자는 자바 등 말레이 주민들이 사는 지역의 문자라는 뜻으로, 말레이어를 기록하기 위해 아랍문자를 빌려와 변형한 것이다. 아체 족은 말레이 족과 달리 베트남 남부의 참파 족과 비슷한 언어를 사용했지만 자위문자로 기록했다. 제러드 다이아몬드가 과시형 남자가 농사가 아닌 사냥을 하는 이유로 사례를 들었던 바로 그 아체 족이었다.
“지상도 마찬가지요. 현재 국경에서 앞으로 10년 동안 전투를 중지하시오. 10년 후에 조약을 다시 갱신할지 여부를 그 전에 협의합시다. 세 나라 모두에게 해당되는 내용이오.”
세 나라는 계속해서 싸웠지만 어느 정도 휴식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울고 싶은데 뺨 때리는 격으로 이민호가 적절한 시기에 휴전을 제의한 셈이라, 겉으로는 불만이 가득한 척 허세를 부렸어도 다들 쉽게 동의했다.
“폐하! 그럼 버마의 포르투갈 해적선은 어떻게 합니까? 최소 네 척이 안다만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나도 조약의 당사자요. 해적선들이 기항하는 항구 명단을 내게 제출하시오. 이번에 토벌해주겠소.”
“아아! 감사합니다. 해적선들이 양곤 강 깊숙이 숨어 있어서 토벌하기 어려웠습니다. 버마가 비록 지금은 분열됐다 해도 여전히 강대국입니다.”
산티아고 요새 사령관이 반대하고 싶었으나 해적을 퇴치한다는데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이민호는 포르투갈 인들이 섞였다 해서 그 해적선을 봐줄 생각이 없었다.
“버마에 포르투갈 용병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소.”
“필리페 드 브리투 등 용병대장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용병이라 하나 고아 부왕과 관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포르투갈이 해적을 감싸주지는 않겠지요. 나는 인도양의 해적을 물리치겠다고 했을 때, 포르투갈 해적을 예외로 두지 않았소. 만약 고산국 백성들이 해적으로 활동한다면 역시나 그들을 칠 것이오.”
“폐하 뜻대로 하소서.”
산티아고 요새 사령관이 고개를 숙였다. 이로써 말래카 해협을 두고 4개국 간에 평화조약이 체결됐다. 고산국 함대는 바로 다음 날 말래카 해협을 통과해 버마 남부 해안지방으로 향했다.
뭔가 부탁하려는지 포르투갈 요새 사령관이 탄 배가 헐레벌떡 뒤쫓아 왔다. 그러나 고산국 함대가 훨씬 빨라 금방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말래카의 모래사장 해안에 자리 잡은 산티아고 요새를 지났다. 고산국 함대를 아군으로 인식한 포르투갈 병사들이 환호를 내질렀다. 그러나 고산국 함대는 저들과 같은 나라 사람인 포르투갈 해적을 잡으러 가는 길이었다.
“전하. 멀리까지 와서 힘든 일을 자청하시는 이유가 뭔가요? 설마 고산국 상선의 통행 안전만을 위한 것은 아니죠?”
“오오! 그런 의문을 품다니. 아라 공주는 역시 특별한 사람이오.”
“놀리지 마시고 이유를 가르쳐주세요. 저들과 교역을 하고 있다지만 전하께서 굳이 신경을 안 써도 되는 나라들이에요. 전하께서 이렇게 베풀더라도 저들은 은혜를 갚을 힘도, 방법도 없어요. 굳이 저들의 청을 들어주시는 이유가 있나요?”
“힘과 시간을 낭비함으로써 남들보다 우위에 서 있음을 주장하기 위해서요.”
“예? 이해하기 어려워요.”
“살기 버거운 나라는 이런 일을 할 수가 없소. 나는 나라를 다스리는 시간을 줄여서 공동의 선을 추구하더라도 여유가 있다는 것을 다른 나라들에게 보여주고 있소. 그럼으로써 남들로부터 확실한 우위를 인정받아 다른 이익을 꾸준히 취할 것이오. 이해하겠소?”
“네. 고산국이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렇군요. 사실 잘 모르겠어요. 너무 어려운 말이에요.”
어리둥절한 아라 공주가 귀여워서 꼭 안아주었다. 현대 생태학에서 비롯된 지혜를 이 시대 사람에게 이해시킬 필요는 없었다.
“유구국 같은 작은 나라로서 교역을 하기 힘들지 않았소?”
“힘들었어요. 하지만 생존을 위해 교역을 해야 했어요.”
가게에서 진상 손님이 행패를 부리듯이, 물건을 사는 것이 큰 권력인양 과도한 요구를 하는 구매자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이민호도 예전에 전형적인 을의 입장에서 상사나 군 간부들에게 시달린 적도 많았다.
그래서 더욱 판매자 위주의 상품을 만들려고 노력했고, 오히려 구매자들이 설설 기게 만들었다. 이민호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다른 곳에서 구하기 어려운 상품을 팔 때 배짱을 튕기며 가격을 올리기도 했다. 돌이켜보니 서양 상인들이 이민호를 진상으로 봤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유구국은 영토가 워낙 작아서 교역이 아니라면 먹고 살기 힘들었을 것이오.”
“그게 아니에요. 교역을 해야 그 국가들과 친분을 다질 수 있어요. 교역을 계속하면 서로 신뢰를 주게 되거든요. 생존과 평화를 위해 교역을 해야 했어요.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여요.”
“흐음. 사실 나도 그렇소. 교역을 하는 국가에는 적대감이 들기 어렵소. 상대방도 조심하니 감정 상할 일도 줄어드는 것 같소. 고산국 군대가 강한 것도 이유겠지만, 교역을 하는 나라로부터 침공을 당할 가능성도 줄어드는 것 같소.”
오이라트가 명나라를 침공한 것도, 건주여진이 명나라를 침공한 것도 명나라가 교역을 중단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조선을 침공한 이유 중의 하나로 조선이 대일 교역을 중지시킨 것을 들었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유구국이 그렇게 대일 교역에 신경을 썼어도 일본은 결국 유구국을 점령해 속국으로 만들었다. 일본이 항상 예외였다.
“전하! 양곤 강입니다.”
“물빛이 누렇군요. 수심 측정은 했소? 아마 안 했을 테니 측정을 하면서 천천히 올라갑시다.”
폭이 넓은 양곤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강이 동서로 갈라지는 지역에 대도시 양곤이 있었다. 이 시기 버마의 수도는 양곤 북동쪽에 위치한 바고였고 양곤은 수도 외곽의 항구도시 역할이었다.
양곤 남동쪽 강 건너 시리암 즉 딴리엔은 포르투갈 용병대장 필리페 드 브리투에 의해 나중에 아주 재미있는 곳이 되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몇 년 더 기다려야 했다.
“안했습니다만, 배들이 지나다니는 것으로 미루어 수심은 충분합니다. 해적들이 알아채기 전에 어서 들이쳐야 합니다.”
“저렇게 모래톱이 드러나 있는데 안심할 수 있겠소? 탐사선을 앞으로 보내고 각 전선마다 단정 한 척씩을 내보내시오. 예전에 오사카를 치다가 기함이 좌초된 적이 있어서 말이오.”
함장이 전공에 너무 연연하다가 일을 크게 망칠 것 같아 불안했다. 이번이 마지막 군사작전일 테니 이민호 입장에서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천천히 상류로 올라가다 보니 어느덧 양곤이 시야에 들어왔다. 물길이 갈라지는 곳에서 동쪽으로 향하다 보니 저 멀리 바위섬이 있고, 황금빛 불교사원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항법사! 저기 상류에 반짝이는 곳은 뭔가?”
“위치상 짜욱단, 또는 예레페야라고 하는 사원입니다.”
“그럼 거의 다 왔군. 저기 있네.”
아체 술탄이 가진 정보가 정확했다. 그리고 서양식 범선은 마스트의 높이 때문에 어디서든 눈에 띄었다. 배 네 척이 강안 선착장에 계류돼 있고 갑판에 나와서 배를 지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해병은 범선들에 대한 선내 임검을 실시하라!”
미리 단정 열두 척에 나눠 탄 해병들이 일부러 기관을 끄고 노를 저어 범선에 다가갔다. 이민호의 생각이 맞다면 아직 오전이니 해적들이 술에 취해 자고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예상이 맞아서, 10분쯤 지나 해병 지휘관이 좌승함 함교로 돌아와서 보고했다. 전투 흔적은 전혀 없었다.
“범선에서 자고 있는 포르투갈 및 버마 선원 50명을 생포했습니다. 포르투갈 선원은 겨우 9명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선원들은?”
“심문해보니 선장들을 포함해 선원 200여 명이 어제 오후에 양곤에 술 마시러 가서 안 돌아왔답니다.”
세계 어디서든 상선 약탈에 성공한 다음 해적들이 하는 일은 거의 정해져 있었다. 술집에서 광란의 밤을 보낸 다음 지금쯤 여자 끼고 퍼 자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온 것을 알면 안 돌아오겠지.”
“그렇습니다. 선내 수색 중인데 현재까지 황금 3천 냥 정도, 은 2만 냥을 발견했습니다. 그 외에 면포와 쌀, 향신료, 아편 등 아마도 무역 상품이었다가 노획된 물품이 다수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힌두교와 불교 사원에서 약탈한 것으로 보이는 금붙이 위주의 문화재가 많습니다. 문이 바깥에서 잠긴 방에 여자 포로가 열 명 정도 갇혀 있었습니다.”
“다 옮기고 범선은 불태워. 아편은 그냥 태워. 여자들은 은화 스무 냥씩 쥐어주고 내보내.”
병원에서 필요한 아편은 따로 재배하고 있으니 해적이 약탈한 것을 가져갈 필요가 없었다. 해적에게 약탈당한 상선도 그리 좋은 배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해적은 어떻게 처리합니까?”
“버마에 넘기려고 했는데 분열돼서 엉망이라 해적하고 같은 편일지도 모르겠어. 묶어서 불타는 배 밑창에 던져 넣어.”
버인나웅 대왕이 죽고 시암으로부터 역습을 받아 현재는 버마가 몇 나라로 분열돼 있었다. 이민호가 몹시 존경하는 버인나웅 대왕은 자식을 97명이나 봤다고 한다.
“명령을 수행하겠습니다만, 산 채로 태워 죽인다면 지나치게 잔인한 처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불구덩이에 처넣기 전에 한 방씩 쏴.”
“넵!”
해병 대대장이 단정을 타고 다시 범선으로 돌아갔다. 총에 맞은 해적이 운이 좋으면 죽은 채로 불타고, 운 없으면 산 채로 불탈 것이다. 운명에 맡기기로 했다.
잠시 후 총소리가 연속 울린 직후 범선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해병들이 귀환한 다음, 오랜만에 함대 승조원 전원에게 은화 열 냥씩을 전리품으로 나눠주었다.
“전하! 해적들이 작은 배를 타고 돌아옵니다!”
“오호! 의외로 반응이 빠른 해적이었군.”
양곤 쪽에서 노 젓는 작은 배 수십 척이 몰려왔다. 시간상 함대가 양곤 강을 거슬러 올라올 때 급히 해적들을 소집한 것 같았다. 양곤에도 해적의 조력자들이 있을 테니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함포를 갖춘 함대를 상대로 작은 배로 몰려오는 것이 이상하다 했더니, 나머지 배들은 강 건너편에 남고 한 척만 좌승함으로 접근했다. 포르투갈 출신 해적선장인 모양인데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다.
“고산국 국왕폐하! 저희는 이슬람 해적선과 싸우는 사략선입니다. 어째서 저희 배들을 공격하십니까?”
“고아 부왕께 면허장을 받은 정식 사략선인가?”
“그건 아닙니다만, 멀어서 나중에 면허를 받기로 했습니다.”
“면허가 없으면 해적이야. 알지? 그리고 불교와 힌두교 성물이 꽤 많더군. 지상에서 약탈했지? 잘 가.”
“어? 어? 이교도의 성물 따위는 없어져야 마땅합니다!”
사략 면허가 있더라도 이 정도면 해적으로 충분히 기소와 사형 판결이 가능했다. 이미 명령을 받고 갑판에 늘어선 해병들이 총을 쏘아 해적선장이 탄 배를 벌집으로 만들었다.
- 쿠쿵! 쿵!
즉각 함포 사격이 시작됐다. 해적들은 작은 배 30여 척에 이 지역 노꾼 포함해서 열 몇 명 정도씩 타고 있었다. 해적들이 배에서 내릴 새도 없이 주변에 포탄이 낙하했다.
포탄이 배에 명중해 가루로 만들기도 했고, 약간 빗나가더라도 배를 전복시키기에 충분했다. 해적들은 단 한 명도 도망치지 못하고 몰살당했다.
“돌아갑시다.”
“전하! 버마는 우방국인 시암의 적국입니다. 시암을 위해 버마의 중요 도시인 양곤에 포격을 가하는 것이 옳을 줄 아뢰오.”
“버마하고 보석 교역을 해야 하니 싸우면 안 되오. 그냥 돌아갑시다.”
“예, 전하.”
지난번 함장이 훨씬 좋았다. 함대는 누런 물이 흐르는 양곤 강을 타고 내려갔다. 이제 여행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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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