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42 47. 1597년 =========================================================================
브루나이에서 전선과 수송선에 연료를 가득 채우고, 브루나이 공주들을 왕궁에서 엄마들과 함께 하룻밤 자게 해주었다. 공주가 여섯이고 브루나이 왕궁에 다섯이 왔는데 장인이 하나, 장모가 넷이나 돼서 선물도 많이 준비해야 했다.
다음 날 아침 브루나이 술탄 가족들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안남으로 출항했다. 캄보디아의 프레이 노코르, 몇 십 년 후에 베트남의 사이공이 되는 현대의 호치민 시를 보면서 이민호는 군침만 삼켰다. 여기서 서쪽과 남쪽 사방 100km 면적의 메콩 강 하류 지역을 가질 수 있다면 소빙기에도 든든할 것 같았다. 괜히 메콩 델타, 메콩 삼각주라 하지 않을 정도로 비옥한 농경 지대였다.
조만간 주인이 바뀔 땅이라서 더 욕심이 났지만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캄보디아가 앞으로 영원히 약소국으로 떨어진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필사적으로 지키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남과 시암 같은 주변 국가들, 심지어 에스파냐 필리핀 총독부에서도 눈여겨보는 곳이라 좋다고 날름 집어삼킬 수는 없었다.
북상해서 참파에 화승총과 흑색화약을 아주 비싸게 팔았다. 화승총과 화약은 나라를 지킬 필수적인 무기라면서 왕궁 지하 창고에서 수백 년 동안 보관했던 보물을 끄집어내는 참파 왕족들이 불쌍했다. 조만간 사라질 나라를 위해 고북에 참파 박물관을 세워주기로 마음먹었다.
중부 아이뜨에 자리 잡은 남쪽 응우옌 정권과 북쪽 하노이의 찐 정권에도 화승총을 팔았다. 두 정권에서 자체 제작한 화승총보다 정확도나 내구도가 높았으므로 두 배 가격을 불러도 아무 소리 안 하고 샀다. 중국이나 프랑스 상대로는 약소국, 주변 라오스나 캄보디아, 참파 상대로는 강대국이 안남인데 그나마 남북으로 나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해남도에 들렀다. 주애공부에 도착해서 보니 그 동안 옥남이 아주 하렘을 차려놓았다. 언제 꼬셔서 데려왔는지 고산국에서 조선 처녀 두 명, 일본 처녀 한 명, 마닐라에서 에스파냐 처녀 한 명, 과부 한 명, 그리고 해남도에서 한족과 려족, 묘족 등 종족별로 한두 명씩 해서 처첩이 열 명이 넘었다.
“아주 잠깐 안 본 사이에 확 늘렸구나. 대단해.”
“전하보다야 못하죠. 헤헤!”
고산국에는 중혼의 죄가 없기 때문에 배우자가 될 사람을 속이지만 않으면 능력 있는 남자는 얼마든지 여자를 늘릴 수 있었다. 여초 현상이 사라지면 일부일처제로 전환할 예정인데 전쟁의 여파로 아직도 젊은 여자가 남아돌았다. 조선과 여진, 일본 모두 현재는 여초지대였다.
그러나 관료가 처첩을 늘리는 것을 좋게 보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해남도 내에서도 불만이 많았으나 종족 간의 다툼을 멈추게 한 공을 세운 덕택에 그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다.
이민호는 옥남과 함께 진주양식장으로 향했다. 섬 뒤쪽에 전복 양식장처럼 나무틀을 바다에 띄워놓았으면서도 위에 천막을 쳐서 마치 수상가옥으로 이루어진 마을을 연상케 했다. 옥남이 3년차 백엽 조개에 익숙한 솜씨로 칼을 대서 진주를 캤다.
“오호! 진주알이 꽤나 굵직하군.”
“진주가 거의 완전한 구형이고 크기는 손가락 한 마디가 살짝 넘습니다. 경제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옥남이 능력은 좋아서 해남도 행정을 잘 꾸려나가면서도 진주 양식에 크게 성공했다. 옥남은 진주알만 수확한 것이 아니라 목걸이와 반지, 팔찌, 브로치 등 갖가지 장신구를 만들어두었다.
“문제는 기술유출을 철저히 막고 있어도 소문만 듣고 광서나 광동에서 진주조개 양식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진주 양식을 성공시킬 것 같습니다.”
“기술 인력이 유출이 안 되는데도 말인가?”
“송화강 진주도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까? 인공진주 양식이 특별한 기술은 아닙니다.”
“따라쟁이들 같으니라고!”
진주는 올해부터 대량 판매가 가능할 정도로 충분히 생산하고 있었다. 진주조개 양식보다는 인공 핵 삽입이 핵심 기술이므로 옥남은 이 기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옥남은 데리고 사는 여자들에게만 그 기술을 가르쳤고, 절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지 못하게 막았다.
“해남도의 농업과 축산업 발전에 대해서는 이미 보고를 받았다. 주민들이 굶지 않는다면 그걸로 충분해. 다른 건 어때?”
“오지산에서 주로 홍차를, 바이사에서 주로 녹차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와서 사 가는데 유럽에 절반 정도를 가져가고, 광저우에 절반 정도를 파는 것 같습니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여전히 중개무역을 하는군. 수정을 캔다며?”
“북동부 툰창에서 기존 광산 외에 대규모 수정 광산을 발견했습니다. 산악지역이라 묘족들을 광부로 고용해서 캐고 있습니다. 색깔이 다양해서 예쁩니다만 가공기술이 떨어지는 편입니다.”
“수정은 고북으로 보내. 유대인들이 잘하니까.”
수정은 지구 지각에서 흔히 발견되어 그리 비싼 광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열처리를 함으로써 색깔을 바꾸거나 불순물을 제거해 가격을 올릴 능력을 갖고 있었다.
보라색 자수정은 수정 중에서 유일하게 보석으로 취급됐고, 신라 안압지에서 발굴됐을 정도로 한반도에서 오래도록 캐왔다. 현재 울주 언양에서 캔 자수정 원석을 수입해 고산국 유대인들이 가공해서 유럽에 수출하고 있었다. 언양 자수정과 다양한 색깔의 해남도 수정을 함께 팔면 서로 상승작용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다시 주애공부로 돌아왔다. 이민호가 진주양식장에 다녀온 사이 브루나이 공주들은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며 놀고 있었다. 아라 공주와 민영이 항상 이민호 곁에 바짝 붙어있는 것과 달리, 말레이계는 모계사회의 전통이 강한 편이었다. 남자가 없어져도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묘족들은 어때? 뒤숭숭하지 않나?”
“해남도의 묘족들은 사천에서 일어난 양응룡의 반란에 참가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연초부터 황제의 칙서가 날아왔는데 반란 진압에 군대를 동원하라는 명령보다는 해남도에 거주하는 묘족이 반란에 참가하지 못하게 막으라는 내용이었다. 아직은 반란 초기라서 명나라 군대로 진압이 가능하다고 본 모양이었다.
“믿을 수 있어?”
“오히려 반란 진압에 힘을 보태줄 수 있다고 합니다. 다만 저나 고산국 장수의 명령만 따르겠답니다. 명나라 장수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민족반역자들이로군. 어느 쪽이든 믿을 수 없다. 입 닥치고 조용히 살라고 해.”
“그게 가장 나은 방법입니다. 저도 그렇게 묘족을 설득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옥남은 내륙의 묘족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민호가 시켜서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묘족을 상대로 은을 파는 것은 꽤나 많이 남는 장사였다. 요즘 은값이 폭락하면서 은과 교환하는 금으로 인해 더 큰 이득을 얻었다.
“금과 은 교환비율이 어느덧 1대 8에 달했습니다. 이 정도면 조만간 안정되지 않겠습니까? 잘못하면 손해 볼지도 모릅니다.”
“계속 교환해. 아마도 단기간이겠지만 국제적인 금은 교환 비율을 넘어설지도 몰라. 국제시세인 1대 12를 기준으로 잡고, 만약 1대 14까지 가면 교환을 멈추게.”
“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안심입니다. 앞으로도 적극적으로 교환하겠습니다.”
명나라 조정이나 시장에서는 은이 없어서 아우성인데 은값은 오히려 폭락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명나라의 전반적인 경제상황이 파국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시장에서는 팔 물건이 없고, 백성들은 물건을 살 은이 없었다. 불황과 정치적 혼란상이 계속되면서 상인이나 부자들이 시중에 돌던 은을 집안에 꼭꼭 숨긴 탓이 컸다. 그러면서도 부자들은 사치품 수입과 부의 과시에는 열심이었다. 제비집과 전복, 해삼 판매량이 고산국 건국 이래 기록적인 액수까지 올라갔다.
“잘하고 있어. 지겨우면 다른 데로 옮겨줄까? 중앙 조정으로 와도 좋아.”
“저야 권력에서 멀어질수록 좋습니다. 해남도에 몇 년 더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 인력 부족으로 고민이지만 자넨 특이한 경우니까.”
옥남이 지난 몇 년 동안 얼굴이 전혀 안 늙어서 아직도 알아볼 사람이 많을 것 같았기 때문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생각 같아서는 북미 서해안을 맡기고 싶었지만 괜히 조선과 문제를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다음 날 마카오에서 하루 정박했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차례로 입항하는 고산국 함선들을 열렬히 환영해주었다. 왕립대학이 고산국에 세워지고 교수들 다수가 옮긴 다음에도 포르투갈의 항구와 대학교는 여전히 번영했다.
“진주알이 굵고 광택이 아주 좋군요. 틀림없이 최상품에 해당합니다.”
“동 두아르테가 보석 상인들과 협의해서 가격과 물량을 제시하시오.”
“새로운 상품을 거래할 수 있어서 상인으로서 무척 기쁩니다. 하오나 요즘 주변에서 이상한 소문이 들려서 말입니다.”
두아르테와 진주를 돋보기로 관찰하던 포르투갈 상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이민호도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
“몇몇 명나라 상인들이 진주를 인공으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저도 그런 소문은 예전부터 들었지만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명나라 상인들이 제시한 이것이 바로 그 견본입니다.”
“콩알만 하군요.”
해남도 양식 진주 소문을 듣고 광동 해안에서 진주조개를 양식해서 생산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나 크기나 광택에서 해남도 산 진주를 따라갈 수 없었다.
“진주 양식에 대한 소문이 유럽에도 퍼져나갈 것입니다. 그럼 진주 가격이 지금처럼 유지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사지 않겠다면 다른 구매자를 찾는 수밖에 없겠소.”
“아아! 그건 절대 아닙니다.”
인공 진주이니 가격을 깎아달라는 노골적인 요구였다. 그러나 이민호는 현재 유통되는 진주 가격보다 오히려 더 받을 생각이었다. 현대에도 대부분 진주가 양식 진주인데도 가격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민호는 양식진주가 아닌, 조개껍질을 잘라 진주층을 여러 차례 덮어서 제조하는 진짜 인공진주를 만들 수도 있었다.
“보석이 희귀성을 바탕으로 높은 가격을 유지하는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동시에 유통 물량이 너무 적으면 보석으로서 가치를 유지하기도 어렵소. 유럽의 귀족부인들도 왕실 연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평생 구경하기도 힘든 것이 진주이기 때문이오.”
“그건 사실이지만 이것은 천연진주가 아닙니다.”
“물론 이것은 천연진주가 아닌 양식진주가 분명하오. 그러나 진주 유통 시장에서 혁명적인 상품이 될 것이오. 그 동안 물량이 적어서 다른 보석에 밀리던 진주가 보석 시장의 한 축을 당당히 차지할 수 있다는 말이오.”
“보석 시장의 한 축이라, 무척 매력적인 제안이십니다. 전에 제가 해달 모피 물량을 더 풀어달라고 요청했던 논리와 비슷하군요.”
단순히 희귀하기만 해서는 보석의 가격을 유지하기 어렵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가치 있게 여기는 공감대가 형성돼야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물량이 뒷받침돼야 한다.
이민호는 해남도 진주를 유대인 보석장인들에게 넘겼다. 이들이 진주를 금과 은으로 장식했고, 먼저 남경과 북경에 풀었다. 그 전까지는 돈 주고도 못 사는 것이 진주였기에 아주 잘 팔렸다. 명나라 전체가 심각한 불황 중이라 골동품처럼 투자 목적으로 구입하는 경우도 많아서 가격이 계속 뛰어올랐다.
두 달 후 고산국 왕성에서 열린 봄 교역 때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상인들에게는 진주반지 견본 열 개씩만 줘서 심하게 항의를 받았다. 그러나 이민호는 상품을 판매하면서 아쉬운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해남도 진주는 색깔과 광택, 크기에서 압도적인 품질이었기에 실금이 간 경우가 많은 천연진주보다 비싸게 팔려는 의도에서 올해에는 유럽 상인들에게 물량을 아예 배정하지 않았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가격을 낮추지 않을 테니 가을 교역 때는 물량을 달라고 했으나 그때 가서 생각해보자고 대꾸했다.
다음 날 왕도로 향하는 길에 동사군도에 잠시 들렀다. 섬이 달랑 3개로 이루어진 동그란 환초형 군도였고, 현재 고산국에서 비료로 쓰는 인광석, 즉 구아노 채취가 성행했다. 서쪽 섬에 외로이 서 있는 등대 밑에 선착장이 있어서 어업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고산국에서 가장 중요한 비료인데 인광석이 다 떨어지면 어떡해요?”
“새똥으로 만들어진 만큼 다른 지역에도 이런 곳이 있을 것이오.”
이민호는 아라 공주에게 공기 중의 질소를 비료로 만드는 암모니아 합성법, 즉 하버-보슈 법이 있으며 그 외에도 공업적 대량 생산법이 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나우루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으나 조만간 태평양 탐사대가 발견할 것 같았고, 페루의 태평양 연안에도 구아노가 수백 미터 단위로 쌓여 있었다. 그리고 함경도에서도 인 함량이 낮긴 하지만 인광석을 대량 채굴할 수 있으니 큰 걱정은 없었다.
구아노는 19세기 후반 페루와 칠레, 볼리비아가 국제전쟁에 말려드는 원인이 된다. 전쟁이 끝나면서 볼리비아는 해안 영토를 잃어 내륙국으로 전락했고 다른 나라들은 몇 년 후에 경제적으로 몰락해 채무불이행을 선언하게 된다.
“복건성에는 안 들르세요? 고원지대에 널린 차밭이 다 전하 소유잖아요. 이제는 복건성 전체가 전하의 영토나 다름없어요.”
“내 개인 소유의 땅일 뿐이오. 그리고 남의 나라 영토에 관심을 두면 전쟁이 날까 두렵소.”
“복건성이 남의 나라가 아닌 때에는 관심을 둘 수 있다는 말씀으로 들려요. 제 말이 맞죠?”
이민호는 아라 공주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위험한 발언을 막기 위해 입을 맞췄다. 아라 공주는 키스 중에도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이민호의 얼굴을 주시했다. 명나라가 예상보다 빨리 멸망의 길에 들어서고 있었고, 이민호가 한 축을 담당했다.
============================ 작품 후기 ============================
순행 정리까지 못 마쳤습니다. 다음 회에 정리를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