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445화 (394/1,000)

00445  48. 북미 개척  =========================================================================

“원래 5천 기 정도만 보내려고 했는데 점점 숫자가 늘어나서 거의 1만 기에 달하고 있어요. 가족까지 합하면 6~7만 명이나 돼요.”

건주 여진과 해서 여진이 벌인 오랜 전쟁 탓에 기반을 잃었던 여진 기병들 중에서 2만여 명이 고산국 그늘에 들어왔었다. 이들 중에 큐슈에 5천이 정착하고 동해국 영역에는 1만 5천이 거주했다. 가족이 흩어진 이들 홀아비 기병들이 새로 젊은 아내 한두 명과 혼인한 지 몇 년 지났다.

그래서 새로 태어난 어린 아이 한둘에 아내 쪽 어른인 노인 한 명 정도가 이들 여진 기병의 기본적인 가족 구성이었다. 아직 신혼이니 당연히 해가 갈수록 더 불어날 것이다. 이민호 덕택에 기반을 잃지 않고 살아남은 동해국 여진은 40대 가장 한 명에 젊은 사내 두셋, 여자들과 아이들 합해서 20여 명 정도가 한 가족이었다.

북미에 백인이 들어오기 전에 북미에 거주하던 원주민을 최대 1800만 정도로 현대 학자들이 추산했다. 그러나 백인이 가져온 전염병으로 인해 인구가 10분의 1로 줄어든 남미처럼 북미에서도 인구가 확 줄어들어 이 시기에는 최저점에 이르고 있었다.

평원에서 총기로 무장한 여진 기병 1만은 물론 2천을 상대할 만한 북미 원주민 부족도 없었다. 이민호는 여진족을 넷으로 나눠 배치해서 북미의 치안을 유지할 계획이었다. 북미 원주민들과는 기본적으로 우호적인 교역 위주로 관계를 형성하되, 고산국 개척촌을 약탈하려는 원주민 부족은 철저히 응징하기로 했다. 그러나 2천여 기병들이 몰려다니는 것을 알면서도 감히 도전할만한 원주민 부족은 없었다.

실제 역사처럼 전형적인 소규모 개척민 촌락을 만들어 분산시켰다가 원주민 부족들에게 습격을 받게 하는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아예 없었다. 그래서 여진 기병은 수백 단위로 바깥에서 활동하더라도 나머지 가족들은 요새화된 도시에 집중 거주시킬 예정이었다.

“단기간이겠지만 북미 인구 중에 원주민을 빼면 여진족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명나라 노무자, 그 다음이 유구국 사람들이에요. 고산국 군인과 아직 가지도 않은 농민은 가봤자 소수민족이라고요.”

“다른 족속들은 한계가 있으니까 계속 보낼 수는 없지. 우리는 50년 안에 200만 명 정도를 보내야 할 거야.”

기껏 북미를 개척해서 다른 민족들 좋은 일 시켜줄 수는 없었다. 유구국은 새 나하 하나만으로도 벅찰 것이며, 명나라 노무자들이 북미에 정착한다 해도 차이나타운을 형성하는데 그칠 것으로 예상했다. 여진족 기병은 조만간 고산국 주민으로 흡수될 운명이었다.

그리고 고산국의 주요 민족을 구성하는 조선인이 아니라면 장기적으로 북미를 지탱할 능력이 없었다. 그 능력은 결국 농업 생산력과 인구에서 판가름 난다. 오직 고산국 백성들만이 기존 원주민과 새로 이주할 유럽인들에게 밀리지 않을 정도로 충분한 인구를 북미에서 유지할 수 있었다.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시간을 두고 꾸준히 보낼 수 있을 거여요.”

“그래야지. 우리도 열심히 낳아야겠다.”

“민영이가 보고 있는데 왜 이래요?”

인구 300만 명이 갓 넘는 나라에서 한꺼번에 200만을 이민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백성들이 열심히 자식을 낳아 키우고 있으니 시간이 모두 해결해줄 것으로 믿었다.

다시 말하지만 고산국의 국시는 아기를 많이 낳는 것이었다. 이민호는 스스로 국시를 이행하기 위해 혜영을 끌어안았다. 그러나 혜영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밖으로 뛰쳐나갔다.

멀리 다른 방에서 유모와 함께 자던 아기가 우는 소리가 뒤늦게 들렸다. 혜영도 역시 아기에게 온 신경을 쏟는 엄마였다.

“민영이 침대로 올라와라.”

“싫어욧! 혜영님 곧 오신단 말이에요.”

이민호가 이불을 열어젖히고 민영을 불렀다. 그러나 민영이 거절해서 이민호는 낙심하고 말았다. 민영을 비롯한 여진족 호위들은 혜영을 여전히 무서워했다. 호위들은 혜영을 큰 언니나 심지어 엄마와 다름없이 떠받들었다. 어떻게 보면 혜영이 주인마님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민영이 임신한 줄 알았는데 산부인과의사에게 검진을 받아보니 결국 상상 임신이었다. 민영이 몹시 실망했으나 이민호와 같이 다니는 동안에는 기회가 많았다. 다른 여진족 호위들도 마찬가지였다.

“개척민들 군사훈련은 잘 돼가?”

“스스로 총을 들고 지켜야 한다니까 불안해하고 있어요. 이민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꽤 생겼어요.”

“백성들이 다들 약해빠졌어.”

“자기들이 약하다고 알고 있으니까 고산국에 온 거여요.”

현재 군에서 이민 희망자들에게 총기 사격훈련 등 기본적인 군사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어두운 숲에서 방향을 탐지하고 지도를 읽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특수전대대 요원들이 잘 가르쳤다. 개척민들에게 제식동작이나 가르치면서 시간 낭비할 틈이 없었다.

호주든 북미든 군대가 백성들을 일일이 다 지켜주기에는 땅이 너무 넓어서, 원주민이나 침입자들을 상대로 개척민 스스로 싸워야 했다. 여전히 고산국 군대가 징병제는 아니지만 최소한 북미에서는 유사시에 일반인을 징집해서 전선에 내몰아야 할 수도 있었다.

현대 한국과 달리 조선은 개인이 무기를 보유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국가가 아니었다. 지배계급 입장에서야 백성들이 무기를 보유하는 것을 당연히 싫어한다. 그러나 직업군인이 아닌 평범한 백성들을 군인으로 복무시켜야 하는 조선에서, 그것도 무기와 갑옷을 개인이 조달해야 하는 조선에서 무기소지를 금할 방법이 없었다.

고산국에서도 공터나 사정에서 활쏘기 연습을 하거나 길거리에서 허리에 칼을 차고 다니는 사람들을 흔히 만나볼 수 있었다. 무기소지의 유일한 장점으로는 폭력범죄 건수가 현대보다 약간 드물다는 것이었다. 대신에 살인사건이 조금 더 자주 발생했다.

“초반에 갈수록 더 많은 기회가 생길 텐데.”

“지금도 충분히 안전하고 배불리 먹고 살 수 있거든요.”

“이민 보내려고 일부러 불황을 겪게 할 수는 없지. 내버려 둬. 알아서 하겠지.”

사실 지금은 이민을 권유하는 고산국 정부보다 백성들이 훨씬 고민을 많이 하고 있었다. 지금은 고산국이 적은 인구에 비해 물산이 풍부해서 애를 많이 낳아 기를 수 있지만 한두 세대만 지나면 고산국 본토만으로는 인구를 부양할 수 없다는 사실은 웬만한 머리를 가진 사람은 다들 알고 있었다.

그러나 편안히 살 수 있는 본토를 떠나 잔혹한 야만인이나 알 수 없는 풍토병, 거친 황야가 기다리고 있을 북미나 호주로 가겠다고 선뜻 결정할 수는 없었다. 호주와 북미 소식은 탐사대를 통해 백성들이 꾸준히 듣고 있었지만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져있는 옥토와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 두 가지 인상이 혼선돼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사실 옥토든 황무지든 둘 다 있었고, 두 가지 다 무지막지하게 넓었는데 고산국 본토나 조선 기준으로는 상상하기 어렵다는 점이 혼선을 부채질했다.

그래서 이민호는 단계적으로 이민을 보내기로 했다. 개척단이 처음에는 고생하겠지만 기반만 제대로 닦을 수 있다면 이민 행렬이 이어질 것으로 기대했다. 개척민에게 안전은 물론 큰 이익을 줘야 하는 과제가 이민호에게 생겼다.

“앞으로 꾸준히 인구가 불어날 테니 사오십 년만 기다리면 이민을 많이 갈 거여요.”

“문제는 그 기간을 기다려줄 수 없다는 거야. 유럽에서도 군침을 흘리고 있으니까.”

유럽에서 이민을 끌어올 생각을 가진 이민호였지만, 북미를 유럽 국가의 영토로 만들어줄 이유는 없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판단해서 무리하게 이민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이민호는 이 시기를 놓치면 북미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는 조바심을 느끼고 있었다. 수백 년 후의 고산국 후손들이 소수민족으로 전락해 인종차별을 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

“개똥이가 잠이 깼는데 어두워서 울었나 봐요. 지금은 다시 자요.”

혜영이 침전으로 다시 돌아왔다. 20대에 접어든 혜영은 파릇파릇하던 시기가 가고 어느덧 성숙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세월 외에는 당연히 이민호가 범인이었다.

“아기들을 모아서 재우면 어떨까?”

“그럼 아무도 못 자요. 육아에도 신경 좀 쓰세요.”

이민호는 괜한 소리를 했다가 혜영에게 꼬집혔다. 혜영이 유모들의 도움을 받지 않았더라면 국정을 돌볼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7월 하순, 한성에서 결혼식을 마친 민다나오의 왕세자와 서소문 아가씨가 민다나오로 가는 길에 고산국 궁성에 들렀다. 둘 다 외국인인 주제에 아리수 항에 내려서 궁성 남문 주작대로를 꽃마차를 타고 지나 왕궁에 입성했다. 왕도의 백성들이 몰려나와 열렬히 환영해주었는데, 알고 보면 모처럼 구경거리가 생긴 탓이었다.

“흥! 궁벽한 섬에서 왕 노릇하니까 좋아요?”

“좋소. 아주 좋소. 민다나오에 가면 코란의 말씀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도록 하시오. 아랍어는 공부했소?”

“보내주신 책으로 아랍어는 대충 배웠어요. 따분한 경전을 다 외워야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니 어쩔 수 없이 외우고 있어요.”

“똑똑한 왕비로군요.”

이민호가 왕세자에게 여러 가지 당부를 하는 중에 서소문 아가씨가 계속해서 툴툴거렸다. 부친이 연천 현감을 하다가 병조 좌랑으로 옮겼다고 하는 서소문 아가씨는 신랑인 왕세자와 함께 왕도에서 하루를 보냈다. 고산국이 발전한 것을 눈으로 보면 알 텐데도 끝까지 촌동네라고 툴툴거리면서 배를 타고 떠났다.

민다나오의 왕세자가 훤칠하게 생기지 않았다면 국혼 자체가 취소됐을 거라며 예조 참의가 한숨을 내쉬었다. 참의가 이번에 고생 많이 했다. 어쨌든 이민호 입장에서는 커다란 걸림돌 하나가 사라진 셈이었다.

“혜영이는 왜 웃어?”

“주인님이 저 아가씨를 받아들일까봐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주인님도 표정이 해맑아지셨어요.”

“앞으로 가위 눌릴 일이 줄어들 것 같아.”

“아직 절반이 남았어요. 해서 여진의 그 아가씨는 아직 시집을 안 간 모양이에요.”

이민호가 화들짝 놀랐다. 자기 아버지를 죽인 누르하치를 죽이면 시집가 주겠다는 동가 공주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이민호는 경기 들린 듯이 놀라곤 했다.

그리고 혹시나 편지지에 독을 묻혔을까봐 동가 공주가 보낸 편지는 대서를 시켜서 읽고 원본은 불태워버렸다. 유목민이라 해서 순박할 이유가 없었고, 평원은 갖가지 음모가 판치는 곳이었다.

“그러게. 얼른 누르하치한테 시집갈 것이지 말이야.”

“여진족 분란의 핵심요소니까 누르하치가 아직 내버려두는 것 같아요.”

누르하치가 해서 여진의 동가 공주에게 진짜 욕심을 냈다면 진작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강제로 취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군대를 여러 번 동원했어도 끝내 동가 공주를 취하지 않았다. 동가 공주가 죽고 나서 누르하치는 명나라를 침공할 핑계꺼리로 삼았다.

8월 초에 파나마에서 드디어 운하가 완성됐다는 연락이 왔다. 공사 책임자인 공국 참의는 신중한 사람으로서 공기를 단축하기 위해 무리하게 공사를 강행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우기에는 천천히, 건기에도 꾸준히 공사를 진행해 수로와 운하 갑문을 완성했다. 사고와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는 500명 이하에 그쳐서 예상보다 훨씬 적었다.

철도는 이미 운하 건설 초기에 완성돼 전선이나 수송선이 파나마 지협 양쪽을 오가고 있었다. 고산국 기술자들은 에스파냐 사람들로 구성된 철도 기관사와 갑문 조작사, 예인선 선원들을 교육시키느라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철광석과 석탄, 석회석, 석유. 이 네 가지를 빨리 현지에서 구해야겠소. 운송 문제에서 아라 공주가 아주 잘해주었소.”

“예. 북미에서 자원 개발이 빠를수록 수송 부담이 덜어질 거여요.”

고산국과 유구국이 국력을 기울여 철근과 시멘트, 석유를 북미로 수송하고 있었다. 5천 톤 급 수송선이 개발되고 여러 척이 진수되면서 한 시름 놨다. 소형 선박일수록 수송 효율이 떨어져 하마터면 배를 태평양 항로에 투입하고도 돌아올 연료가 모자랄 뻔했다. 그러나 연료 수송선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끊임없이 북미 서해안과 브루나이를 왕복해야 했다.

북미 대륙에는 다양한 지하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돼 있었고, 바로 이것이 북미가 가진 대표적인 장점 중의 하나였다. 이민호도 석탄과 철광석, 석유가 나오는 곳 위치를 대충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갖가지 자원이 나오는 지역이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북동부에 석탄, 서부 로키산맥에 철광석, 텍사스에 석유, 이런 식이라 장거리 운송 수단인 철도를 먼저 건설하는 일에 조만간 힘을 쏟아야 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새벽에 더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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