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60 48. 북미 개척 =========================================================================
함대 전체에 연료를 확인해서 보고하도록 했다. 함대가 태평양을 건너면서 소모한 경유는 파나마 운하를 넘기 전에 유류저장소에서 보급했다. 수송선들이 수시로 태평양을 횡단하며 열심히 실어 나른 경유라서 운송비를 포함한 가격으로 따지면 몇 십 배나 뛰어오른 귀한 연료였다.
그래서 북미 지역에서 함대가 이동할 때는 주로 바이오디젤을 썼기에 경유는 거의 대부분이 남았다. 새인천에서 원유를 뽑아 정제한 뒤부터는 연료 사정이 한결 나아지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앞으로 계획을 전단장과 협의했다.
“전하! 허드슨 만이나 세인트로렌스 강에도 들어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프랑스와 네덜란드, 이탈리아와 에스파냐 등에서 수시로 탐험대를 보내 유럽인들이 우리 영토에 들락거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너무 춥소. 유빙이 떠돌고 있으니 항해하기 위험하겠소. 봄에 얼음이 녹은 다음 탐사대를 보내도록 합시다.”
생각 같아서야 그린란드도 가보고 싶었지만 겨울에 얼어붙은 땅에 가봤자 의미가 없었다. 10세기 전후에 그린란드에 정착했던 바이킹들은 기후변화로 인해 15세기에 이미 소멸했고 현재는 이누이트들이 전체 그린란드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따금 유럽인 탐험대나 어선이 방문하는 모양이지만 덴마크가 정착지를 세우는 18세기 전반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아이슬란드에 사는 바이킹들은 현재 노르웨이에 이어 덴마크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장기적으로 아이슬란드를 매입하거나 점령하면 좋겠지만 굳이 이 시기에 획득할 필요는 없었다. 대서양항로 역시 태평양항로처럼 바람과 해류에 따라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므로 항로에서 벗어나서 중간 기착지로서도 도움이 안 되는 지역이었다. 스코틀랜드에서 가깝다 해서 영국 선원들이 갈 일은 없었다.
“이제 돌아갑시다.”
전단장이나 함장이 보기에는 추워서 이민호가 그런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국왕이 직접 참가해 영토를 순행한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전하! 원주민 몇몇이 스페인어를 배웠습니다. 데려가서 통역으로 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으음.”
뉴펀들랜드 지역 원주민이 포우하탄과 같은 알곤킨 계열 언어를 사용한다 해도 포합어라는 의미에서 문법만 비슷할 뿐 말이 통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물론 북미 원주민들이 보통 몇 가지 언어를 구사한다 해도 그 지역 사람을 통역으로 선발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거리가 멀어서 말이 통할지 의문이오. 언어는 장기적으로 해결합시다.”
함대가 아침에 플라센티아를 출항할 때 환송해주는 에스파냐 포경선 선원들이 절반으로 줄었다. 나머지는 오랜만에 술에 취해 오전 늦게까지 뻗어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에 이곳에 어업기지를 제대로 건설해주기로 했으나 앞으로 에스파냐 선원들이 이용할 가능성은 적었다.
현대 핼리팩스 위치인 작은 마을을 들렀다가 서쪽으로 항해해 매사추세츠 보스턴 지역을 탐사했다. 만 바깥이 사주로 이어져 파도를 막을 수 있고 안쪽 깊이 배가 들어갈 수 있는 천연의 양항이었다. 그러나 커다란 강 여럿이 합쳐지는 곳이라 항구 도시로 개발하려면 거대한 다리를 여러 개 놔야할 것 같았다.
“이 지역도 항구로 괜찮겠습니다, 전하.”
“좋은 항구가 너무 많아서 오히려 걱정이오.”
“그저 인구가 적어서 문제입니다. 시간이 해결해주겠지만 언제 유럽인들이 몰려올지 모릅니다.”
“그러게 말이오.”
다시 남쪽과 서쪽으로 항해해서 현대 뉴욕의 허드슨 강인 히우 데 산 안토니우(Rio de San Antonio)로 들어가 맨해튼 섬에 도착했다. 며칠 전보다 많은 원주민들이 모피를 잔뜩 들고 몰려와서 철제 무기나 농기구로 교환하기를 원했다. 지난번에 비버와 다른 가죽을 구별해서 다른 가격에 거래했기에, 원주민들이 이번에는 주로 비버 모피를 가져왔다.
북미 원주민 입장에서도 모피 교역은 큰 이익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모피와 교환한 철제 도구를 직접 사용해도 좋았지만 다른 마을이나 부족에게 팔면 몇 배나 남길 수 있었다. 그리고 철제 무기는 부족의 생존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조만간 비버가 씨가 마르겠어.”
“해달하고 닮긴 했는데 어쩐지......”
민영이 의심스런 표정으로 비버 가죽을 살폈다. 해달은 식육목 족제비과에 속하고 비버는 설치류였다. 민영이 기겁할까봐 비버가 쥐하고 비슷하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민영이 말을 타고 큰 짐승은 잘도 사냥하면서도 쥐나 바퀴벌레를 보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여자였다.
모피는 처음 만나는 원주민들과 교역을 틀 때 아주 좋은 상품이었다. 원주민들은 남는 모피를 철제 무기나 농기구로 바꿀 수 있어서 좋고 고산국은 유럽에 팔아 많이 남겨서 좋았다.
원주민들과 진행하는 모피 교역은 러시아의 시베리아 확장을 늦추게 하는 효과도 있었다. 이민호는 에스파냐 상인들을 통해 유럽 모피 무역을 항상 주시하고 있었다. 특히 발트 해 모피 시장의 가격 동향을 살피다가 가격이 오를 징후만 보여도 대량으로 풀었다.
그래도 러시아에서 수출하는 검은담비는 유럽 귀족들이 선호하는 고급 모피로서 비싸게 거래됐다. 담비 털을 검은 색으로 염색해서 싸게 풀까 생각도 해봤지만 특유의 검은 광택은 흉내 내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곳 원주민들이 새강릉 북쪽 반도에서 카누를 타고 온 원주민과 복장이 비슷한 것 같아서 몇 명 불러서 물어봤다. 자기들을 레나페 족이라고 부르는데 남쪽에도 같은 종족이 산다고 했다. 레나페 족은 뉴욕과 뉴저지, 델라웨어에 거주하는 원주민이었다.
원주민들이 손짓 발짓으로 커다란 배를 타고 온 외부인의 도시가 남쪽에 있다면서, 함대가 그곳에서 온 것이 아닌지 오히려 이민호에게 물었다. 원주민들 부족 사이에서 고산국 도시와 함대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서 이들도 새강릉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포우하탄 말고 레나페 족과도 관계를 다져놔야겠어.”
“어디를 가든 술을 먹이는 게 최고인 것 같아요.”
레나페 족은 거주하는 곳이 새강릉 북쪽이든 맨해튼이든 고산국에 꽤나 우호적인 편이었고 교역에도 적극적이었다. 백성으로 받아들이기에 적격인 것 같아 교역 외에도 원주민들에게 선물 공세를 퍼부었다. 물론 선물은 식량과 술 위주였다.
그러나 북미 대륙 북동부의 사나운 종족들이 조만간 모피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서로 싸우게 될 수도 있었다. 17세기 중반에 벌어진 비버 전쟁에서 이로쿼이 연맹, 모호크, 모히칸, 휴런 등등 원주민 부족들이 치열하고 처절하게 싸웠다. 현재도 세인트로렌스 강 유역에서는 여러 부족들이 수십 년째 서로 싸우고 있었다.
“전하! 이 지역이 평평하고 도시 세우기에는 적격이니 원주민에게서 토지를 매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단장은 몇 번이나 말해야 이해하겠소? 원주민들에게 땅을 매매한다는 개념은 없소.”
지금이라도 원주민에게서 아주 싼 값에 이 지역 전체를 매입할 수 있었다. 맨해튼을 얼마에 싸게 샀다는 전설의 주인공이 이민호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원주민에게 토지 거래를 제의하면 역시나 이 지역 전체를 팔 수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토지거래를 통행권이나 이용권으로 생각하는 원주민들과의 토지거래는 의미가 없었다.
“아! 죄송합니다. 몇 번이나 들었는데도 자꾸 실수합니다.”
“이해하겠소. 나도 이곳 섬과 주변 지역이 마음에 드는 것은 사실이오. 개발 우선순위를 높여야겠소.”
북미 개척 초기인 지금 새강릉부터 맨해튼까지 해안에 도시 몇 곳을 집중 개발해서 상업과 공업 지역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작은 마을과 뉴펀들랜드는 어업, 플로리다는 농업이 적당했다. 새강릉 안쪽 내륙지방도 농업, 특히 식량 외에 담배농사를 짓기로 했다.
콜럼부스가 유럽에 담배를 전한 이후 담배는 천천히 유행했다. 에스파냐 일부 지방에서 담배농사를 짓고 있으며, 북미에서 처음으로 성공적인 정착지가 된 제임스타운은 담배 수출을 통해 유럽에서 이민자들을 불러 모아 확장할 수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 제임스타운은 새강릉에서 포우하탄 강을 타고 30km 상류에 위치하나, 고산국 때문에 그곳에 개척지가 생길 이유는 사라졌다.
다음 날 새강릉으로 돌아와 이조 참판을 비롯한 관리들과 함께 개척지 우선 개발 순위를 조정했다. 원래는 새강릉에서 체서피크 만을 타고 올라가는 북쪽, 현대의 워싱턴과 볼티모어를 개발하려 했으나 취소하고 맨해튼 쪽으로 급선회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진입이 얼마 남지 않은 탓이었다.
해안지대인 뉴욕을 새원산, 보스턴을 새함흥으로 명명했다. 임시 이름이긴 했으나 딱히 더 나은 이름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나중에 워싱턴을 민호 시로 지을까 했으나 그만 두었다. 워싱턴이 북미의 중심지가 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새강릉의 건설 진행 상황은 어느 정도인가요?”
“일단 기초적인 항만과 요새, 주거지는 완성됐습니다. 농지를 개간하는 것은 중장비 덕택에 쉽게 이루어지는 반면 물을 끌어들이는 관개사업에 시간이 걸리는 편입니다. 인구가 늘어나는 대로 주택도 꾸준히 건설하겠습니다.”
“이번에 아일랜드에서 이주민을 받기로 했소. 아마도 장기적으로는 수십 만 단위로 올 것 같소.”
이민호가 예상 이민자 숫자를 대폭 줄여서 선언했다. 이조 참판을 비롯해 관리들이 잠시 침묵에 빠졌다. 참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될 듯했다. 이조 참판이 지도를 보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일랜드라면 영국 서쪽의 섬이로군요. 영국에게 점령됐다고 들었습니다.”
“아일랜드의 비옥한 농토를 잉글랜드 지주들이 차지하면서 아일랜드인들은 서쪽 척박한 황무지로 밀려나고 있는 중이오. 그래서 영국이 아일랜드 사람들의 이주 자체를 막지는 않을 것이오.”
인구가 토지의 인구부양 능력을 초과하면서 생긴 인구압은 아일랜드에서 꽤 오래 전부터 발생했다. 잉글랜드가 점령하지 않더라도 아일랜드에서는 어떻게든 인구를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 구조였는데 잉글랜드 때문에 가속화된 셈이었다.
“아일랜드는 교육 수준이 낮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어차피 고산국이 요구하는 수준에 맞는 백성이란 그리 흔치 않지요.”
“그렇소. 이주민들을 적당히 배치해서 2년 동안 일과 조선말을 가르치시오. 배 삯 대신에 2년 동안 일을 시키겠다고 말해두었소.”
“그래도 생활을 보장해줘야지요. 가족들까지 먹이고 재우는 대신 임금은 한 달에 은 한 냥으로 정하겠습니다.”
임금은 새목포에서 일하는 북미 원주민과 같았지만 이 시대 유럽의 하층 계급은 몹시 비참하게 살았다. 가족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한 냥이라면 유럽 기준으로는 단번에 중산층으로 도약하는 셈이었다.
2년이라는 약정 기간이 끝나면 정식 고산국 백성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기본 소득 2냥이 추가된다면 무슨 일을 하던 정말 충분히 먹고 살만했다. 만약 관개시설이 완비된 농경지를 받아 정착한다면 수확량 절반을 세금으로 내야 했지만 유럽의 하급 귀족이 부럽지 않을 생활 수준을 보장했다.
“그 정도면 될 것이오. 아일랜드 이주민들은 재산이 없어 거의 몸만 빠져 나온다고 보면 될 테니 여기서 모든 것을 마련해줘야 할 것이오. 2년 후에 다른 직업을 선택하게 하거나, 농지를 줄 계획이오.”
“제화공이나 다른 기술자들은 미리 빼두겠습니다. 2년이라면 새원산 건설에 동원하기에는 무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화공이란 말을 듣고 이민호는 리버 댄스를 떠올렸다. 짧은 치마를 입고 뭉툭한 구두를 신은 아일랜드 처녀들이 줄을 맞춰 아이리시 탭댄스를 추는 장면이었다.
“건설 작업에 참가하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처음부터 일당을 주고 받아들이시오.”
“명나라 노동자들이 춘절만 가까워지면 뒤숭숭해져서 말입니다. 한 달에 은 석 냥을 받는 복건 노무자들에게 좋은 자극이 될 것입니다.”
5천 톤 급 수송선 두 척을 이민선으로 지정하고 새강릉 조선소에서 내부 개조에 착수했다. 새강릉에 정착한 선장과 선원들에게 선박 운영을 맡기기로 했다.
수천 명을 가족 단위로 싣고 와야 하므로 이민선 선실을 마치 현대 한국의 고시원처럼 잘게 나눠야 했다. 화재에 유의한다는 핑계로 얇은 철판으로 벽을 만들었다. 의무실과 식당, 냉장고와 냉동고는 다른 배에 비해 훨씬 크게 만들었다. 밀도로 따지면 아프리카와 남미를 왕복하는 노예선과 다름없었다.
이미 태평양 탐사선 몇 척이 파나마 운하를 통해 대서양으로 이동해 대서양 탐사대가 창설됐다. 지금은 경유가 부족하지만 대서양이 태평양보다 훨씬 작으므로 땅콩이나 사탕수수에서 짜낸 바이오디젤만으로도 왕복이 가능했다. 새인천에서 본격적으로 석유를 생산할 때까지 경유는 비상 연료로만 사용하도록 했다.
멕시코 만은 너무 깊어서 당장 유전을 찾기 곤란하고, 만만한 텍사스를 뒤지기로 했다. 새인천 유전에서 나온 석유로 고산국 수송선들이 태평양을 누비고, 텍사스 유전에서 나온 석유로 고산국 함대가 대서양을 활보한다면 멋질 것 같았다.
“이민선이 빈 배로 대서양을 건너갈 수는 없으니 뭔가 무역을 해봅시다. 이익을 최대화할 삼각무역도 아니고, 사실 이익이 나지 않아도 상관없소. 다른 나라와 교역한다는 데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소.”
============================ 작품 후기 ============================
늦게나마 올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