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61 48. 북미 개척 =========================================================================
“하오나 전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이익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해야 합니다.”
“물론이오.”
이제 고산국 본토에서 유럽으로 상품을 보낼 때 고산국이 직접 수송하는 편이 운송비가 훨씬 싸게 먹혔다. 그러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과 동맹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유럽 상인들의 노동에 응분의 대가를 치러주어야 했다. 예전에 파나마 운하와 수에즈 운하 이야기를 꺼내면서 기존에 두 나라와 교역했던 품목과 수량을 보장해준다고 이미 약속했으니 지켜주기로 했다.
삼각무역은 대서양 항로를 따라 유럽 범선이 서아프리카에 가서 노예를 사서 남미나 서인도제도에 넘기고, 사탕수수로 만든 럼주와 설탕을 잔뜩 사서 미국에 넘기고, 미국 남부에서 재배한 면화와 담배, 북부에서 산출된 목재와 모피를 유럽에 파는 식으로 운영됐다. 유럽에서는 철제 무기나 도구를 아프리카에 팔았다.
삼각무역은 이 중에서 세 개 지역 또는 그 이상이 포함됐다. 그러나 그 시대 범선이 대서양 항로를 돌아야 해서 억지로 품목을 끼워 넣은 면도 있었다. 그리고 고산국은 해류와 바람에 상관없이 직항할 수 있어서 구태여 삼각무역을 할 필요가 없었다. 흑인 노예무역은 더더욱 안 될 일이었다.
“일단 새동래에 소속된 수송선이 사탕수수 즙과 당밀을 쿠바에서 사거나 플로리다에서 생산해서 새강릉에 보내게 하시오. 새강릉에서 럼을 만듭시다. 숙성을 위해 참나무 술통을 대량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오.”
“새동래가 카리브 해를 겨냥한 군항이라지만 그곳에도 일이 생긴다면 좋은 일입니다. 해적에 협력했다가 새동래에 거주하는 노인이 포도밭을 만들어서 와인을 주조하겠답니다. 포도밭이 완성되면 와인도 유럽에 수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포도 묘목도 없지 않소? 수출하려 해도 유럽에서 만드는 포도주는 품종이 좀 다를 것이오. 에스파냐 상인에게 남프랑스의 포도 묘목을 구해달라고 부탁해야겠소.”
북미 서해안 새나하와 새인천에서 포도를 재배할 계획인데 새동래에서도 와인을 생산하면 자칫 남아돌게 된다. 남는 와인을 유럽으로 수출해야겠지만 프랑스 와인과 품질이 비교될 것 같았다. 그래서 일단 적게 만들어 국내용으로만 소비하기로 했다. 정 안 되면 건포도로 가공해도 되고 포도로 팔아도 상관없었다.
와인을 적게 만들어서 꾸준히 품질 향상에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유럽에서 당당히 팔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서 품질이 좋은 남미산 혹은 캘리포니아산 와인이 유럽 시장을 뚫으면서 제 값을 못 받은 것을 보면 와인은 지역적 특색을 많이 타는 상품이었다.
“계속 설명하겠소. 새강릉에서 럼과 식량, 모피를 실은 이민선이 대서양을 건너 북해에 연한 적당한 무역항에 입항해서 럼과 모피를 판매하게 하겠소. 에스파냐와 네덜란드가 전쟁 중이니 당분간은 네덜란드보다 한자동맹 소속 무역항이 좋겠소. 아일랜드에 가서 이주민을 싣고 해류를 따라 남쪽으로, 참! 우리 배가 아프리카까지 내려가서 북적도 해류를 타야 할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오.”
“어명을 내려주신다면 대서양 탐사대에게 직항로를 개척시켜보겠습니다. 에스파냐 선원들에게서 말로만 듣던 무풍지대를 지날 수도 있을 겁니다.”
“사르가소 무풍지대라. 인원 수송에서는 안전이 우선이니 안전한 항로개척이 끝나기 전에는 기존의 순환 항로를 이용합시다.”
북미에서 유럽, 북서 아프리카에서 서인도제도를 도는 대서양 항로 가운데에 바람도 없고 해류도 없는 무풍지대가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었다. 범선이 들어갔다가 옴짝달싹 못하게 되겠지만 기관을 추진력으로 이용하는 고산국 배는 크게 상관없었다. 그러나 무성한 해조류가 스크루에 감긴다면 꼼짝 없이 표류하게 될 수도 있었다.
“건축 쪽에 여유가 생긴다면 항구 거리에 12층 건물을 하나 세워보시오. 상업적 용도로 쓰기에는 낭비일 테고, 상징적인 건물이니 시청사로 쓰시오. 승강기도 달아야겠지요. 옥상은 감시 초소나 등대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오.”
“지진이 일어나면 무너질 위험이 있습니다. 고산국에도 5층 이상 건물이 없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새인천이나 새목포에서도 3층 이상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어명을 내리셨습니다.”
“북미도 지역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곳 원주민들이 지진을 모르는 것 같소. 원주민들에게 물어봐서 큰 지진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확인될 경우 건설을 진행하시오.”
이민호는 지진이나 화재 위험 때문에 고층건물에 딱히 호감은 없었다. 그러나 도시의 상징으로서, 또는 랜드 마크로서 고층건물 한두 개쯤은 필요할 거 같았다. 물론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캘리포니아 쪽에 고층 건물을 지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회의가 끝나고 나오는데 대추장 와훈수나콕이 알현실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스페인어 통역을 데리고 갔다. 포우하탄 부족연맹의 대추장은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이민호를 만나러 왔다. 이민호는 대추장의 부인은 물론 아들과 딸, 아기까지 일일이 인사했다.
며칠 전 북동쪽으로 함대가 출항하기 전에 새강릉 항구 거리에 위치한 2층 객사 건물 하나를 원주민들에게 내줬다. 교역을 위해 멀리서 찾아오는 원주민들이 많아 편하게 숙박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멀리서 온 손님을 융숭히 접대하는 문화는 세계 공통이라 원주민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민호가 며칠 만에 돌아와서 대추장과 여러 부족 추장들이 객사의 방을 하나씩 차지하고 들어앉은 꼴을 봐야 했다. 새강릉이 포우하탄 부족연맹의 새로운 수도가 된 것처럼 시내와 항구를 가리지 않고 원주민들로 바글거렸다.
“국왕! 반갑습니다.”
“어? 그 사이에 말을 배웠어?”
“몰라.”
딱 인사말만 배운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스페인어 통역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했다.
“고산국의 농가를 방문했다. 우리 포우하탄 200여 명이 일하던 넓은 밭을 고산국 농부 겨우 한 명이 경작하고 있었다. 여러 부족의 추장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
“관개수로와 경운차라는 기계 덕분이야.”
“아니. 내 말은 땅이 고통스러울지도 모르겠다는 뜻이야. 고산국 본토에서 농민이 많이 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땅이 필요할 것이다.”
북미 원주민 입장에서 전혀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조만간 고산국과 아일랜드에서 이주민들이 올 예정이었다. 그 전에 대추장을 설득할 논리가 필요했다.
“같은 면적에서 생산되는 농작물의 양을 비교해봐. 포우하탄보다 우리가 땅을 훨씬 잘 아니까 땅이 더 많은 농작물을 키워준다. 적은 땅으로도 더 많은 농작물을 키운다. 이해가 돼?”
“그렇겠군. 같은 농작물을 생산하는데 더 적은 땅이 든다면 땅을 위해서도 아주 좋은 일이다.”
“포우하탄 농지에도 관개용 수로를 만들어주고, 쟁기질이 필요할 때 경운차를 보내서 일을 도와주겠다. 지금보다 많은 곡식을 생산하게 해 주마”
“우리도 고산국 농민처럼 많은 곡식을 생산할 수 있나? 그럼 좋다. 고맙다.”
“그 대신 다른 이주민들이 더 들어와도 받아들여라. 너희들의 영토가 줄어들 수도 있다는 뜻이다. 물론 숲이나 산에서 지금처럼 마음껏 사냥하게 해주겠다. 다만 남의 농경지에 들어가면 안 된다.”
“끄응! 우리가 잘 살게 된다면 영토가 줄어들더라도 상관없다.”
대추장이 보리가 파릇파릇 자라는 넓은 농경지를 이미 봤기에 무척 전향적이었다. 덕택에 포우하탄 원주민들을 평화롭게 고산국 농민으로 안착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원주민들이 충분히 먹고 살게 된다면 토지에 대한 욕구가 줄어들어, 다른 이주민들을 평화롭게 정착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시녀가 탁자 위에 과일을 올려놨더니 대추장의 부인이 그걸 다 깎아서 쟁반에 내놨다. 대추장 부인의 품에서 빠져 나온 자그마한 아기가 꼬물거리는 손으로 바나나와 사과 조각을 잡고 아주 맛있게 먹었다.
“귀엽네. 대추장 딸 이름이 뭐야?”
“미녀를 알아보다니, 역시 국왕이군. 내 딸 마토아카에게 청혼을 하는 것인가?”
“아냐! 아냐! 그냥 귀엽다고.”
아기의 이름이 포카혼타스가 아니라서 이민호는 조금 실망했다.
“귀엽다니. 국왕이 집요하군. 그래도 아직 어려서 10년은 더 키워야 시집갈 수 있다.”
“됐다니까!”
“됐다고? 알았다. 10년 후에 예쁘게 꾸며서 국왕에게 보내주마. 마토아카! 이 작은 장난꾸러기야. 이 아비가 네 남편감을 구해놓았으니 안심하고 무럭무럭 자라라.”
“잠깐! 아기 이름이 뭐라고?”
“마토아카. 별명이 작은 장난꾸러기다. 여자로 태어났으면서 너무 활발해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
작은 장난꾸러기를 포카혼타스라고 발음했다. 대추장의 딸이니 저 아기가 포카혼타스가 맞았다. 그러나 두세 살짜리 아기가 10년 후에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이민호는 그냥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런데 왜 여기서 아예 사는 거야? 대추장이라면 다스릴 곳이 많잖아?”
“대부분 일은 부족끼리 알아서 하겠지. 나는 부족들이 모인 연맹체 대추장이잖아. 전쟁 때나 부족끼리 분쟁이 생길 때 말고는 일이 별로 없어.”
“대추장 집을 따로 하나 줄까? 객사는 여러 부족 사람들이 공동으로 이용해야 하니까 불편할 거야.”
“국왕의 별궁 같은 큰 집 말이야? 관리해줄 사람이 많이 필요해서 감당 못한다. 저번에 전사들을 천 명이나 데려와서 내 호위병이라고 한 것은 거짓말이었다.”
“그렇겠지.”
대추장에게 새강릉에 올 때마다 머물 적당히 큰 집을 하나 내주기로 했다. 항구 가까운 주택가에 새로 지은 빈 집이 많아 대추장에게 가장 큰 집 한 채, 다른 부족 추장들에게 적당히 큰 집 한 채씩 내줬다. 수도 요금과 전기 요금은 비싼 편이 아니라서 새강릉 시청에서 대신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추장들이 새 집이 아주 마음에 든 듯했다. 전등 사용하는 법은 금방 익혔고 특히 낮에는 겨울인데도 선풍기를 끼고 살았다. 추장 부인들은 냉장고와 수도 시설을 좋아했다.
며칠 후에 대추장이 다시 이민호에게 알현을 신청했다. 바쁜 일은 모두 마치고 이제는 출항 준비하는 중이라 이민호는 책이나 읽고 있었다.
“국왕! 부족 사람들이 불만이 많다.”
“왜? 풀밭에 풀어놓은 소를 못 잡아먹게 해서? 그건 주인이 있는 가축이다.”
“아니. 다들 고산국 사람처럼 크고 편리한 집에서 살고 싶어 한다.”
“포우하탄은 동맹 부족이긴 하나 아직 정식 고산국 백성이 아니다. 그래서 집을 줄 수 없다.”
“국왕에게 실망했다. 나는 포우하탄 전체가 국왕의 백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번에 국왕에게 처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국왕이 바다 건너 멀리 아일랜드라는 곳에서 사람들을 데려와 백성으로 삼을 예정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백성을 찾으려면 가까운 곳에서 찾아라.”
포우하탄은 떠돌아다니는 유목민도 아니고 농업 위주의 정주민족에 가까웠다. 실제 역사에서 굶어 죽어가는 제임스타운 정착민들에게 식량을 나눠주고 담배 재배법을 가르쳐 부자로 만들어준 사람들은 바로 이들 포우하탄 원주민이었다.
그러나 백인들이 나중에 숫자가 늘어나자 원주민들을 계속해서 밀어내고 땅을 차지하는 배은망덕한 짓을 저지른다. 여러 번에 걸쳐 전쟁이 일어난 다음 포우하탄 원주민들은 점점 줄어들어 결국 17세기 후반에 소멸하고 말았다.
이민호는 포우하탄 원주민들이 강력한 전사들이면서도 믿을 만하다고 평가했다. 그래서 동맹으로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데, 스스로 백성이 되겠다면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좋다. 포우하탄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고 농경지를 가뭄에도 메마르지 않게 해주겠다. 그러나 세금을 5할을 내야 한다.”
“5할이나 내야 하나? 국왕은 욕심쟁이다.”
“그러나 포우하탄이 지금 수확하는 양의 최소 열 배, 많게는 스무 배를 수확하게 해주겠다. 적당한 면적을 경작하면 꾸준히 그만큼 수확할 수 있다.”
“일을 더 많이 해야 한다는 사실만은 틀림없을 것 같다.”
“급한 건 아니니까 천천히 결정해도 된다. 고산국 농민들이 수확할 때 일을 도와주면 곡식이나 가축을 나눠줄 거다. 그렇게 이야기해 놓았으니 내년 봄부터 잘 도와줘라.”
지금은 겨울 보리를 심었다. 버지니아가 겨울에도 얼음이 얼지 않는 따뜻한 해양성 기후라지만 플로리다처럼 겨울에도 농업이 가능한 곳은 아니었다.
“닭튀김이 맛있다. 우리도 닭을 키우게 해 달라.”
“닭? 키우기 쉽지. 낮에는 풀어놓고 키워도 될 거야. 대신 밤에는 반드시 닭장에 몰아넣어라. 족제비나 여우 한 마리만 들어와도 다 죽는다. 쥐가 병아리를 물어갈지도 몰라. 그러니 닭장을 잘 만들어야 해.”
“집과 농지, 닭장이라. 앞으로 새로운 땅으로 이사 가기는 틀렸군.”
“정착하는 게 여러 모로 유리하다. 닭을 잘 키우게 되면 그 다음에는 염소나 소를 줄 테니 키워봐라.”
와훈수나콕 대추장이 여러 방면에서 고산국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정치지도자가 백성들을 위해 일을 하는데 미울 리가 없었다. 포우하탄 부족연맹체가 의외로 빨리 고산국에 동화될 것 같아 이민호는 몹시 기뻤다.
그러나 이로쿼이와 수우 등 만만치 않게 호전적인 부족들이 북미 대륙에 널려 있음을 이민호는 잘 알고 있었다. 아파치도 남서부에서는 무척 강한 원주민 집단이었다. 때로는 전쟁으로, 때로는 교섭을 통해 이들 모두를 고산국 백성으로 동화시켜야 인구 부족 문제로 시달리지 않을 것 같았다.
서부 평원에 풀어놓은 여진족 기병이 큰 힘이 되겠지만, 이민호가 가장 걱정하는 것도 바로 그 여진족 기병들이었다. 여진족 기병들의 가족이 항상 요새에 남는 것은 인질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 작품 후기 ============================
버지니아에서 할 일은 끝났습니다.
다음에는 플로리다에 잠시 들렀다가 텍사스로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