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63 48. 북미 개척 =========================================================================
“누구든 주인님 땅에 들어온 자들은 이미 주인님의 백성이에요. 백성이라면 누구에게든 공평하게 대해주시는 것이 조선 출신 백성들에게도 좋을 거여요.”
“알았어. 인종별로 적당히 교차해서 배치할게.”
조선 출신 백성들에게 특혜를 따로 베풀지 않더라도 고산국 본토에서든 어디서든 지금도 은근히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는 경제적 특권과 연결돼 나중에 조선 출신 또는 황인종이 백인들에게 인종차별을 받을 우려는커녕 오히려 북미 대륙의 주요 인종이 될 가능성을 높였다.
“춥고 넓은 지역 일부에 여진족 거주지를 나눠주세요. 여진족은 더운 곳을 싫어하잖아요.”
“그래. 여진 기병이 평원 북부 지역 치안도 담당해야 할 테니 신경 써서 도와줄게.”
여진족이 더운 곳을 싫어한다기보다는 추운 곳에 적응했다는 말이 정확했다. 농업은 아무래도 더운 곳이 유리했다. 인종별로 소득 차이가 크게 나지 않게 하려면 경지 면적이나 세금 등으로 조정해줘야 했다.
그런데 현대 미국에서 공업지대는 주로 북동부에 몰려 있었다. 춥고 척박한 북동부는 농업에 적당한 지역이 아니었고, 자원을 구하기 쉽거나 노동력이 풍부한 지역이었다. 미국이 독립하고 유럽에서 이민이 계속되면서 더 이상 새로운 땅을 얻기 어려워지자 나중에 이민 온 동유럽과 남유럽 사람들은 도시의 공장 노동자로 남았다. 그리고 도시민으로 남은 이들의 후손이 미국이 공업화되는 과정에서 중산층의 주류를 형성하게 됐다.
반대로 남들보다 일찍 북미에 이주해서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좋은 땅을 독차지했던 잉글랜드 출신 농부들은, 시간이 가면서 미국에 공업화가 진행되자 결국 남부 촌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현대 미국의 레드 넥, 즉 잉글랜드계 보수적인 백인 농촌 남성들이 남부 농촌 지역에 집중돼 있고 오대호 주변 미시간 등 농촌 지역에도 보수주의자들이 많은 것은 그들이 일찍 이민 와서 부유한 농민으로 정착한 탓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바뀌어 이제는 그들이 내세울 거라곤 과거의 영광과 백인이라는 인종밖에 없었다. 영국에서 건너와서 한때는 미국 건국의 주류가 됐고 20세기 초까지 부유한 농장주였던 앵글로색슨 신교도 와스프는 21세기에는 여지없이 무식한 시골사람으로 전락했다.
“장기적으로 농업보다 공업에 관계되는 편이 나아.”
“물론이죠. 지금도 고산국은 기술자들이 가장 우대받고 있잖아요?”
이민호가 여진족이 아니라 조선 출신 농민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지금은 소수 장인들 외에 농민들이 가장 큰 소득을 얻고 있었지만 농업에 안주하다간 언젠가는 사회의 주도권을 놓치고 만다.
이민호는 조선 출신자들이 장기적으로 소득과 신분이 하락하지 않도록 신경 써줄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인종들을 차별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신년이 다가와서 바로 북미 남부로 향했다. 겨울인데도 멕시코 만은 따뜻했다. 여기서 출발한 멕시코만류가 북대서양을 돌아서 영국과 프랑스에 따뜻한 기후를 선사했다. 해변을 지나다 보니 조수간만의 차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미시시피 강은 북미 내륙 깊숙이 연결하는 교통로라서 전략적으로 중요했지만 백성들을 미시시피 강 하구 뉴올리언스에 정착시킬 생각은 별로 없었다. 미시시피 강 하구는 온통 늪지대에 강의 굴곡이 심해서 걸핏하면 홍수 피해를 입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이! 이리 와봐!”
강 하구에서 촉토 족 원주민들과 대화를 시도했으나 말이 통하지 않았다. 선물을 교환하면서 일단 우호를 다지기 위해 노력했다. 작은 칼을 몇 개 주고 옥수수와 완두콩, 호박 외에 조잡한 토기를 받았다.
세 가지 작물을 세 자매라고 부르는 북미 원주민들 중에서 일부는 옥수수 씨앗을 뿌릴 땅이 척박하면 썩은 물고기나 뱀장어를 함께 파묻어 비료로 썼다. 뱀장어가 남아돌면 그럴 수도 있었다.
그 사이 체로키 족 전사들이 접근해서 괜히 시비를 걸었다. 그러나 서로 조심하느라 유혈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다 쏴버릴까?”
“풋! 농담 마세요.”
두 부족 원주민들을 앞에 두고 이민호와 민영이 웃고 떠들자 체로키 원주민들이 몹시 불쾌한 듯했다. 그러나 체로키는 섣불리 공격 태세를 갖추지는 못했다. 호위들이 치켜들고 있는 길쭉한 막대를 분명히 무기로 인식하고 있는 듯했다.
“여기도 유럽인들이 벌써 들렀나봐.”
“총을 아는 걸 보니 한바탕 싸웠겠죠.”
1539년 에스파냐의 에르난도 데 소토가 미시시피 강을 발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다른 시기에 다른 나라에서 출발한 또 다른 탐험가가 이 지역을 방문했을 수도 있었다.
함대는 계속 서쪽으로 향했다. 폭이 좁은 백사장을 따라가던 함대는 백사장이 끊기고 민물이 흘러내리는 곳을 발견했다. 그러나 강폭이 500미터 정도로 좁아서 나중에 탐사대에게 맡기기로 하고 그냥 지나쳤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다시 백사장이 끊긴 곳을 발견했다. 만을 양쪽에서 가로지르는 사주가 만나지 못하고 폭이 2km 정도로 넓게 끊긴 곳 안으로 들어갔다. 호주 새부산처럼 북쪽으로 수평선이 보였으나 계속 북상하니 곧 육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항법사! 여긴 도대체 어디냐.”
“전하. 지도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올해 초에 파나마 운하를 넘어간 탐사대는 멕시코 만 주변 해도를 작성하는 일을 아직 못 끝냈다. 육상에 탐험대를 보낼 시간 여유도 없었다. 이민호는 이곳이 텍사스 휴스턴이 아닐까 추측했다. 이민호의 기억에 휴스턴은 우주선을 쏘아 보내던 곳이었다.
“땅은 넓고 좋네.”
“엄청나게 넓어요. 동쪽, 서쪽, 북쪽 모두 비옥한 농토가 될 것 같아요.”
이민호는 비옥한 농토가 넘쳐나는 북미 전체를 소유하고 있으니 이곳까지 굳이 농사짓자고 온 것은 아니었지만, 옥토가 생긴다는데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휴스턴 근처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미국 석유회사 30개 이상이 이곳에 본사를 두었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석유는 언젠가 텍사스 곳곳에서 발견되겠지만 지금 당장 활용할 석유는 없었다.
“전하! 창과 활로 무장한 원주민들이 개들과 함께 몰려옵니다!”
“원주민들 키가 더럽게 크군. 싸우자는 건가?”
키가 2미터에 가까운 원주민들은 온몸에 문신을 하고 젖꼭지와 아랫입술에 뾰족한 것을 끼우고 있었다. 온몸에 기름을 발라 번들거렸는데 허리에 찬 세밀하게 장식한 조개껍데기가 이민호의 눈에 띄었다.
“아닙니다. 식량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원주민들이 무척 가난해 보입니다. 개는 여우나 코요테를 닮았습니다.”
“먼저 교역하자고 접근하는 건가? 예전에 에스파냐 사람들하고 접촉했던 것 같군. 잘 됐어.”
교역할 상품을 준비하고 이민호가 해병, 호위들과 함께 배에서 내렸다. 그러나 이민호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원주민들이 웬 일로 훌쩍거리며 울더니 이민호에게 다가왔다. 움찔하며 물러서려는 이민호에게 원주민이 잘 익힌 야생 감자와 과일 같은 것을 내밀었다. 농경을 하는 북미 원주민들이 세 자매라고 부르는 옥수수, 완두콩, 호박은 아예 기르지도 않는 가난한 수렵채집민들이었다.
“이건 불가사리 구운 것 아냐? 먹을 수 있는 거야?”
원주민들이 해산물도 먹는 모양이었다. 이민호는 불에 탄 불가사리를 차마 먹지 못했으나 원주민들이 자꾸 먹으라고 손짓으로 권했다.
그 사이 코요테처럼 생긴 개들이 월월 짖으며 주변을 산만하게 껑충껑충 뛰어다녔다. 꼬리를 맹렬하게 흔드는 것을 포함해 분명히 개가 사람을 반길 때 하는 행동이었다. 주인과 감정을 교감하는 개들의 행동으로 미루어 최소한 원주민들에게 악의는 없는 것 같았다.
이민호가 예의상 억지로 불가사리를 먹는 중에 원주민들이 가련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민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다른 원주민은 이민호의 머리를 강아지에게 하는 것처럼 뒤로 쓰다듬었다.
바로 앞에서 보니 다들 키가 엄청나게 컸다. 어쩌면 원주민 몇 명은 2미터가 넘을지도 몰랐다.
“우리도 선물을 줘야지? 준비한 걸 넘겨.”
값나가는 것을 받지 못했으나 처음 만난 날이니 원주민들에게 가장 유용한 손칼과 바늘, 실을 준비해 넘겨주려 했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선물을 받지도 않고 손을 흔들며 돌아가 버렸다. 개들이 아쉬운 듯 자꾸 뒤돌아봤다.
“뭐야! 교역하러 온 게 아니라 불쌍하다고 먹을 것을 주려고 온 거야? 왜 우릴 거지 취급하는 거야!”
다른 해병이나 호위들도 불에 구운 플로리다 돌게나 조개를 하나씩 들고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멀리서 원주민이 손짓 발짓하는 것을 본 민영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배고프면 먹을 것을 더 줄 테니까 자기들을 찾아오라고 하는 것 같아요. 배고파도 친구를 잡아먹지 말래요.”
“으윽! 우릴 이렇게 막 대한 원주민은 저놈들이 처음이야.”
그러나 원주민들의 행동에 호의가 가득했기에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그리고 원주민들은 가난하지만 전혀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원주민들이 무장한 예리한 돌창과 활, 화살을 보면 굶고 살 것 같지도 않았고, 다른 부족의 침략에 호락호락 당할 것 같지도 않았다.
“어째서 우리에게 그런 행동을 했을까요?”
“나도 모르지. 이것 먹고 떨어지라는 것은 아닌 것 같아.”
1527년 6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 겸 에스파냐 국왕 카를로스 1세의 명을 받고 플로리다에 식민지 마을을 건설하기 위해 판필로 데 나르바에스가 지휘하는 탐험대가 에스파냐를 출발했다. 에스파냐, 포르투갈, 이탈리아 남자만 600명이나 되는 규모였다. 100명 이상이 거주하는 마을 최소한 두 개와 요새를 해안을 따라 건설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쿠바 남부 시엔푸에고에서 아바나로 가려던 탐험대는 허리케인을 만나 플로리다 서부 해안에 상륙했다. 이들은 원주민들과 접촉했다가 금을 발견했다.
황금에 눈이 어두워진 탐험대는 금을 많이 갖고 있다는 플로리다 북부 아팔라치 원주민들을 공격하다가 오히려 포위당해 혼쭐이 났다. 식량이 떨어지고 부상과 전염병으로 고통 받던 탐험대는 멕시코로 귀환하는 도중에 허리케인을 만나 둘로 분산됐다. 탐험대장 나르바에스가 이끌던 한쪽은 전멸했다.
하급 귀족이자 탐험대 서열 2위인 재무관 알바르 누녜스 카베사 데 바카가 천신만고 끝에 현대 휴스턴 앞 갤버스톤에 표류했을 때 대원 80명이 살아남았다. 식량은 떨어진지 오래였고, 탐험대원들은 너무 배가 고파서 사망한 동료들의 시신을 뜯어먹으면서 버텼다.
그때 이 지역의 수렵채집민 부족인 코코 족이 나타나 식인행위를 저지르는 탐험대원들에게 너무나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이해하고는 식량과 약을 주는 등 탐험대원들에게 보살핌을 베풀었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가난하고 탐험대원들의 숫자는 너무 많았다. 대원들은 카포쿠 밴드라고도 분류되는 코코 족이나 이웃 코하니스 족 등 카랑카와 부족집단의 다른 원주민 마을에 분산됐졌다. 탐험대원들은 4년 동안 원주민들에게 얻어먹으며 살다가 질병과 굶주림 등으로 꾸준히 숫자가 줄어들었다.
1532년에 생존자가 에스파냐 탐험대 3명과 무어족 노예 1명으로 줄어들었을 때 멕시코로 가기 위해 이동을 시작했다. 무작정 서쪽과 남쪽으로 향하며 우연히 만난 원주민들에게 얻어먹어가면서 계속해서 걸었다. 이들은 다시 4년 만인 1536년에 멕시코 부왕령에서 노예 수집을 위해 북쪽으로 보낸 부대에 의해 구출될 수 있었다.
원주민들은 구전을 통해 과거 일을 후손에게 전한다. 이민호가 이곳을 방문하기 70년 전 사건이 카랑카와 부족민들에게 전승되고 있었다. 바다에서 온 자들이 배가 고파서 사람 고기를 뜯어 먹었더라는 이야기는 원주민들에게 충격적이었을 테니 꽤나 오래 전해질 수도 있었다.
이번 일 역시 후손들에게 구전을 통해 당연히 이어질 것이다. 이민호를 포함해 바다에서 온 거지 떼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줬던 자랑스러운 이야기는 카랑카와 부족들에게 앞으로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원주민들이 호전적이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러나 카랑카와 부족 집단이 무조건 순한 종족도 아니었다. 19세기 전반에 프랑스 해적 겸 노예상인 장 라피트의 부하에게 부족 여자 한 명이 잡혀갔을 때 3백 명의 전사가 모여서 장 라피트의 해적 요새를 공격했다. 물론 대포 2문의 화력에 패하고 물러섰지만 백인들의 범죄를 응징하고 부족 여자를 되찾기 위해 싸움에도 나설 줄 알았다.
“강과 숲이 많아서 농사도 잘 되겠어요.”
“그런데 민영이 왜 그리 힘이 없어?”
“아니에요. 항상 베풀어주기만 하다가 공짜로 얻어먹으니까 참 묘하네요.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에요.”
“앞으로는 받는 사람 기분도 생각해야겠어.”
============================ 작품 후기 ============================
영국만 식민지 개척에 실패한 것이 아니고, 스페인도 실패를 많이 겪었습니다. 최악의 실패이기도 한 사건입니다. 그전에 서인도제도에서 100여 명이 탈영했고 신규 인원을 모집하기도 했으니 출발했던 600명 전체가 죽은 것은 아닙니다. 사망자 중에 유부남 대원들의 부인도 몇 십 명 정도 있었습니다.
이야기는 조금 더 이어지고 넘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