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67 48. 북미 개척 =========================================================================
그 동안 풍향과 해류 조사 작업을 지휘한 전단장을 비롯해 전단 참모들도 이 섬을 중간 기착지로 쓰자는 의견에 동의했다. 범선이라면 서쪽으로 향할 때 목적지가 어디든 일단 북적도 해류를 이용하는 것이 편했다. 그러나 동력기관을 사용하는 고산국 선박은 하와이 제도를 지나는 항로를 잡는 것이 목적지에 따라 거리를 단축할 수도 있었다.
이 섬에 있을지도 모를 적당한 항구를 찾으러 함대를 출발시켰다. 이민호는 이미 진주만이라는 답을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이 섬 이름이 오아후인지 오하우인지 가물가물했다.
“저 모래섬 뒤에 제법 큰 항구를 만들 수 있겠습니다. 무역풍은 북동풍이므로 섬 남쪽이 파도가 훨씬 약합니다.”
“수심이 낮아서 자주 준설을 해줘야 할 것 같고, 태풍이 불면 풍랑에 배가 노출될지도 모르겠소. 섬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 파도가 잔잔한 만이 있을지도 모르니 좀 더 찾아봅시다.”
와이키키 해변에서 서쪽으로 머지않은 곳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모래섬 안쪽을 살펴본 다음 함대가 그냥 지나쳤다. 새 나하나 새강릉 같은 좋은 항구를 보면서 눈이 높아진 탓에 이 정도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곧 만 입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수로 동쪽에 넓은 평원이 있어서, 나중에 비행기 시대가 열리면 공항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와이 여행을 못 해본 이민호는 몰랐으나 현대에 호놀룰루 국제공항과 히컴 공군기지가 들어선 곳이었다.
“입구 수로가 좁은데 비해 만 안쪽은 굉장히 넓습니다.”
길고 좁은 수로를 지나 진주만으로 들어섰다. 전단장을 비롯해 승조원들이 이구동성으로 항구로 개발하면 좋겠다고 난리였다. 그러나 이민호가 보기에 지금은 아니지만 20세기 군함이 대형화된 시기에는 전함 한 척만 가라앉혀도 수로가 간단히 막혀버릴 우려가 있었다.
“만이 넓다고 할 수는 없으나 지형이 울퉁불퉁하고 섬도 있어서 자연스럽게 항구가 구획된 것 같소.”
“예, 전하. 단순한 해안선에 비해 배가 댈 수 있는 면적이 훨씬 넓습니다.”
“그런데 우리 함대가 아무래도 원주민들에게 포위된 것 같소.”
“예. 원주민들이 수로 앞뒤는 물론 육지까지 포위했습니다.”
바다에서는 작은 배에 탄 원주민들이 수로를 가득 메웠고, 육지에서는 원주민들이 순양함을 향해 돌창을 던지거나 돌화살을 발사했다. 그러나 사거리가 안 돼서 창과 화살은 모두 바다에 빠졌다. 인명피해가 날 리가 없었지만 승조원들에게 주의하도록 했다.
“이 작은 섬에서 동원한 원주민 전사가 1만 명이나 된다는 사실이 놀랍소.”
“과연 그렇습니다, 전하. 기후가 좋아서 그런지 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먹고 사는 모양입니다.”
이 시기에는 이곳보다 하와이 섬에 더 많은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19세기 초에 하와이 섬의 지배자 카메하메하 대왕은 1만여 병력을 동원해 오아후 섬을 점령했다. 카메하메하 1세는 스쿠너 두 척과 대포, 화승총을 동원해 오아후 원주민들과 치열하게 싸웠고, 이 섬의 전사들 대부분을 절벽에 떨어뜨려 죽였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전하?”
“이 섬의 주인은 저들 원주민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오. 대응을 자제하고 교섭단을 상륙시키시오.”
적대적인 분위기가 팽배했으나 이민호는 원주민들과 교섭부터 하라고 지시했다. 원주민이 주제를 모르고 감히 고산국 함대에 대든다고 성질내면 다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훨씬 편하겠지만 자기 영토를 지키는 것은 그 땅에 사는 자들의 당연한 권리이며 의무였다. 이민호는 언제나 고산국이 외부 침략자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통역장교가 새섬 마오리 족과 대화하면서 채록한 단어 몇 개가 적힌 공책을 들고 단정에서 내렸다. 모든 원주민들이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것은 경험이 많은 통역장교가 더 잘 알고 있어서 이민호가 따로 주의를 줄 필요도 없었다.
“원주민들이 몰린 곳에 단독으로 가다니, 용감하군요.”
“고정하시옵소서, 전하. 함께 상륙한 해병들이 통역장교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민호가 불안해하는 것을 전단장이 바로 알아봤다. 해병 10여 명이 조금 떨어져서 경계하는 사이 통역장교가 원주민 추장에게 가서 대화를 나눴다. 통역장교가 아는 단어는 몇 마디 안 되지만 손짓발짓을 최대한 동원해 추장을 안심시키려고 노력했다.
이 시기 하와이 제도의 원주민들은 식인을 하지 않더라도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인신공양을 했었다. 그리고 인종적, 언어적으로 유사한 새섬의 마오리 족처럼 하와이 원주민들도 마나를 흡수하기 위해 강한 자의 시체를 먹기도 했다. 카메하메하가 죽고 나서 무덤을 숨긴 이유였다.
상황에 따라 통역장교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제임스 쿡 선장이 죽고 나머지가 패퇴했을 때 사로잡힌 몇몇 유럽인 선원들은 카메하메하의 참모 내지는 고문관 역할을 수행했다. 원주민이라고 해서 무조건 야만적인 자들은 아니었다.
하와이 제도의 원주민 추장들은 부족 집단 내에서 다른 지역의 왕과 다름없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고, 부족민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북미에서도 서부와 동부의 추장들 권한이 다르듯이 시대에 따라, 섬에 따라 권력구조가 변할 수도 있었다. 하와이를 통일한 카메하메하 대왕은 전시에 전사가 비전투원에게 관대해야 한다는 ‘부서진 노의 법’을 제정해 전 세계 전시법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어! 위험한데!”
추장을 호위하던 원주민 전사들이 창을 내밀어 통역장교를 위협했다. 통역장교가 환도처럼 기다란 쇠붙이를 추장 앞에 내밀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이었다. 해병들이 원주민 전사들에게 소총을 겨누며 유혈사태에 대비했다.
그러나 통역장교는 쇠톱으로 통나무를 잘라내는 시범을 보인 다음 추장에게 그 톱을 건넸다. 이 간단한 행위가 추장을 비롯한 원주민들을 크게 감동시켰다.
통역장교는 다시 쇠도끼로 나무줄기를 내리쳤다.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 도끼질 겨우 서너 번 만에 사람 허벅지 굵기의 통나무를 부러뜨렸다. 통역장교는 쇠도끼도 추장에게 넘겼다. 추장이 몹시 흡족한 듯했다.
“도끼와 쇠톱, 괭이를 가져오랍니다!”
해변에서 대기하던 단정을 타고 온 해병이 국왕좌승함을 향해 외쳤다. 생활도구 중심으로 상품이 단정에 실리는 동안 이민호는 잠시 고민했다. 이 섬 원주민들이 도끼와 괭이를 무기로 전용해 다른 섬을 침략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100개 정도 되는 도끼가 1만 명 단위의 군대에게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 같지 않았기에 반출을 허가했다.
“철제 도구를 주고 겨우 통나무를 받아왔어?”
오아후 섬 원주민들이 대가로 준 것은 형편없었다. 철제 도구의 숫자에 맞춰 통나무 300개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이민호는 몹시 실망했으나 전단장이 나무를 자세히 살폈다.
“나무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전하?”
“똥냄새라도 난다는 거요?”
“틀림없이 단향, 그 중에서도 백단향입니다.”
“오호! 인도가 아닌 이곳에서 백단향이 자란다고요?”
백단향은 나무 자체에서 향기가 나는 것만으로 방향제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었고, 명나라와 조선에서 한약재로도 사용됐다. 백단유는 향수나 화장품의 원료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백단향의 원산지는 인도라고 하나, 남태평양 뉴칼레도니아에서 많이 자랐고, 청나라와의 무역에서 차와 교환된 비싼 상품이었다.
버마에서는 여자들이 백단향의 미백효과에 주목해 가루로 만들어 얼굴에 발랐다. 일본에서 백단향을 비롯한 향목은 향불로 불전에 사르거나, 벌레가 먹지 않는 특성을 이용해 각종 공예재료로 사용됐다.
철제 도구를 통나무와 바꿨다고 불만이었던 이민호의 입이 찢어졌다. 백단향의 가치는 철제 도구와 비교할 수 없었다. 마침 통역장교가 돌아왔다.
“박 중위, 수고했어. 어땠어?”
“휴우! 내일 오전까지 섬을 떠나겠다고 추장에게 약속했습니다.”
단어 몇 가지 아는 것만으로도 훌륭히 교섭을 진행시킨 통역장교의 능력이 놀라웠다. 그리고 그 약속을 어떻게 전달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혹시 다시 오면 싸우겠다고 저 추장이 선전포고했나? 그럼 이곳을 항구로 사용하지 못하겠네? 아무래도 화력 시범을 한 번 해야 할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곳에 항구를 만들어 이용하는 것을 추장이 허락했습니다. 대략 가로 세로 2km 되는 면적을 사용하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오! 잘 됐네. 의외로 순순히 받아들였군.”
전사를 1만여 명이나 동원할 정도로 권력이 강한 추장이 의외로 합리적인 판단을 했다고 이민호는 생각했다. 가로 세로 2km라면 중간기착지로서 항구 시설 외에 밭을 만들어 식량 공급도 가능했다. 물론 농사는 원주민에게 맡겨야 하겠지만, 새로운 작물이 들어온다면 원주민도 환영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오아후 섬 추장은 의외로 이재에 밝았다. 도저히 외딴 섬의 추장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다만 새로 항구에 들어오는 배마다 철제도구 100개를 입항세로 받겠답니다. 백단향도 다음에 올 때는 제값을 받겠답니다. 섬의 백단향은 모두 추장 소유이니 혹시 부족민이 백단향을 가져가더라도 사적으로 무역을 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원주민들이 백단향 가격을 알아? 혹시 다른 지역과 무역을 하나?”
이민호는 이곳에서 싸게 백단향을 잔뜩 구입해서 명나라와 조선에 판매할 흑심을 품고 있었는데 약삭빠른 추장 때문에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이 섬에서 나는 백단향의 품질은 꽤나 고급으로 평가됐다. 즉, 큰돈이 된다는 뜻이었다.
“그건 아닙니다만 백단향을 원주민들이 실생활에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 섬에서 교역이 가능할 정도로 가치가 있는 것은 백단향 외에는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일단 이것으로 시작하면 되겠어. 그리고 이곳의 가장 큰 가치는 항구와 물이야. 반드시 원주민들과 교역을 해야 할 이유는 없어. 다만 친선을 다지자는 목적으로 교역을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겠지.”
이민호는 백단향 통나무 하나를 집무실로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도끼질을 해서 껍질은 버리고 안쪽 심재를 추렸다. 다시 이것을 조각을 내고 나무젓가락 반 개 정도로 세밀히 잘라서 호위들에게 나눠주었다. 향목을 받아든 호위들이 어리둥절하면서도 향기는 마음에 든 듯했다.
“가루로 만들어서 세수할 때 비누하고 같이 써봐. 나중에 비누로 만들어봐야겠어.”
“혹시 목욕할 때 써도 되나요, 주인님?”
“물론이지. 민정이 너 밤에 보자.”
백단향으로 목욕할 경우 사람 몸에 향기가 남는지 궁금해서 한 마디 했다가 호위들 사이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나중에 맡아보니 은은한 향기가 몸에 배어 기분이 좋았다.
만의 이름은 이민호가 진주만으로 결정했다. 나중에 이곳에서 진주조개를 양식하겠다고 변명했으나, 이민호가 아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함대가 정박한 동안 야습을 받을까 몰라서 경계를 철저히 했다. 순양함이 크다 하나 여전히 목선이었고, 철선도 화공을 받는 마당에 순양함이 밤에 화공을 받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 다행히 밤새 별다른 일은 생기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에 일찍 출항해서 서쪽으로 향했다. 하와이에 갈 때처럼 함대를 옆으로 넓게 전개해서 항해하다가 다음 날 새벽 환초지대를 하나 발견했다. 현대 지명으로 존스턴 섬과 샌드 섬, 이스트 섬과 노스 섬이었으나 이민호는 태평양 정 가운데에 위치했다고 해서 산호섬 4개를 싸잡아서 중앙환초라는 이름을 붙였다.
“꽤 괜찮은 섬인데 사람이 살지 않습니다. 중간기착지로서 하와이 제도보다 이곳이 낫지 않겠습니까? 원주민들과의 관계를 신경 쓸 필요 없으니 훨씬 안전할 것 같습니다. 농사도 가능하겠습니다.”
“환초라서 그런지 섬이 너무 낮아요. 사람들이 여러 번 정착했다가 매번 태풍에 쓸려나갔을지도 모르지요.”
“사실이라면 무서운 일이군요.”
정오, 태양이 남중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정확한 경도를 측정해 해도에 기입했다. 그리고 섬마다 영토 표지판을 설치했다. 태평양을 횡단하는 배들이 중간에 태풍을 만나면 긴급피난지로 쓸 만했다.
함대는 계속 서쪽으로 항해했다. 웨이크 섬은 함대의 진행방향에서 북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 발견하지 못했다. 이민호도 주변에 섬이 없을 줄 알았다.
다음 목표는 괌과 사이판이었다. 필리핀에서 에스파냐 상인이나 탐험가들이 종종 들르는 곳이었기에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 시대 유럽인들은 탐험만 하고도 자국 영토로 선언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의외로 필리핀 총독부에서 이곳을 아직 자국 영토로 편입하지 않았다. 한 덩치를 자랑하는 차모로 원주민들이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민호는 추측했다.
함대를 나눠서 사이판과 티니안, 괌의 지형을 정확히 측량한 다음 고산국 왕도로 향했다. 배가 아리수 항에 들어서기 전부터 백성들이 항구에 몰려나와 함대를 열렬히 환영했다.
10월 초순에 떠났다가 정확히 양력으로 12월 31일 오후에 도착했다. 새해를 고산국에서 맞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왕실부터 설을 음력으로 쇠었다.
============================ 작품 후기 ============================
큰 사건은 없으나 미지의 지역을 탐험할 때 겪을 수 있는 일들을 서술했습니다.
이로써 북미개척 편이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금 자면 아마도 오늘은 한 회 더 못 올릴 것 같습니다.
혹시나 올라올까 기다리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