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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471화 (420/1,000)

00471  49. 1598년  =========================================================================

“양털이나 면화 같은 경우 판매를 갑자기 끊으면 대체 수입처를 못 찾아서 망할 수도 있어요.”

“필요할 때라면 끊어야지. 서로에게 부족한 것을 교환하는 무역은 좋은 것이지만, 필수 원료를 다른 나라에 의존하는 무역은 무척 위험한 일이야. 괜히 원수 만들 일은 없으니 그런 일은 사정 봐가면서 해야지.”

영국은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악평을 받는 인클로저를 할 정도로 양털 생산에 힘썼으나 양털 가격은 여전히 높은 편이었다. 농지를 초지로 바꿔서 목축을 하고 있으니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 면화가 품질이 가장 우수하다지만 나일 삼각주에서 인력을 많이 투입하는 일이라 역시 가격이 비쌌다. 고산국에서 싼값에 양털과 면화를 유럽에 수출하는 순간부터 기준 가격이 변동할 수밖에 없었다.

“양털은 잉글랜드 모직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원료여요. 수출을 차단하면 모직물 산업이 망하기 전에 잉글랜드가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어요.”

“쓸데없는 전쟁을 막기 위한 안전판이라고 생각해.”

현대에서 석유처럼 이 시기에는 양털이나 면화 같은 상품은 단순한 무역에 그치지 않고 전략적으로 이용될 수 있었다. 양털과 면화 수출을 통제함으로써 영국과 네덜란드, 그리고 이탈리아 여러 도시국가들의 경제를 쥐락펴락할 수단이 이민호에게 생긴 것이다.

이 시대에 양털 가격을 낮추면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은 바로 끝난다. 농지를 잃어 도시 빈민으로 전락했던 농민들이 다시 농민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럴 경우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야 하는 영국의 산업혁명이 처음부터 불가능해질 수도 있었다. 영국 왕실에서 수입 양털에 세금을 부과하는 식으로 막아도 실제 역사에서 그랬듯이 소용이 없었다.

이민호가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것인데 호주의 양털과 북미 남부의 면화로 조만간 가능하게 될 것 같았다. 아니면 완제품인 모직물과 면직물을 유럽 시장에 대량으로 들이미는 순간 유럽의 가내 수공업은 완전히 파탄난다. 유럽인들 대부분이 품질이 몇 배나 좋은데도 가격은 훨씬 싼 고산국 제품을 구매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제품 경쟁력을 논할 가치도 없었다.

“괜히 전쟁 일으키지는 마세요. 직접적인 전비뿐만 아니라 간접 전비도 엄청나게 들어가니까요.”

“알았어. 북미 개척하느라 병력이 부족한 판에 쓸데없이 전쟁을 일으킬 필요가 없지. 명나라는 어때?”

“금과 은 교환비율이 14.6에서 15.5배 사이에요. 변동 폭이 너무 크고 지역별 격차도 커요.”

“당장 망할 정도는 아니겠군. 상품 가격은 폭등하고 은 시세가 폭락하는데 시중에 은이 없어. 그런데 고관대작들과 부자들에게는 여전히 많지. 웃기는 일이야.”

명나라의 은 시세는 폭락을 거듭해 현재는 국제시세를 약간 넘어섰다. 현재 명나라에서 물가가 폭등해서 금에 비해 은의 가치는 15분의 1 정도였다. 고산국에서 명나라에 매년 일정한 규모로 판매하는 해삼과 전복, 홍삼을 통해 그 전보다 거의 세 배나 되는 은을 받아올 수 있었다. 대신 명나라 황제와 고관대작들에게 보내는 뇌물의 양도 세 배로 늘어났다.

고산국이 현재 은 본위제에 가깝고 은 한 냥에 쌀 2석 비율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명나라로 쌀과 면포 등 기초적인 상품이 대량으로 빠져 나가고 있었다. 평소라면 수출 잘 된다고 좋아하겠지만 현재 고산국 입장에서는 싼 값에 품질 좋은 고산국 상품이 대량으로 유출되는 셈이었다.

“유럽 상인들이 명나라 상품을 여전히 사고 있지만, 가격이 올라서 예전처럼 많이 사지는 않나 봐요.”

“그래. 명나라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물가가 폭등하는 중이야. 명나라나 유럽이나 은의 양은 똑같지만 전체적으로 구매력이 줄었어. 이 시기에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잘하면 크게 이익을 얻을 수 있지만 여차하면 은이고 금이고 다 해외로 유출될 수 있어.”

“주인님이 잘 판단해주세요. 이럴 때는 우리 상품을 꾸준히 구입해주는 동남아 도시국가들이 고맙네요.”

국제적인 시세 변동은 재정거래로 나라를 세운 것이나 다름없는 이민호가 가장 예민한 편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상인이었던 아라 공주도 급변하는 시장 상황에서 빠른 결정에 소질이 있었다. 상인 가문 출신인 왕명명도 가격 변동에 충분히 적응하고 오히려 기회를 만들었다.

이민호는 수에즈 운하 건설단이 탄 수송선들이 멀리 바다로 사라질 때까지 아리수 강 하구에 남아 있었다. 요새에 가까운 군항 쪽에서 민간 항구 쪽을 바라보니 동남아 각국에서 온 다양한 형태의 배들이 정박하고 있었다. 모두 무역을 하러 직접 고산국까지 온 배들이었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명나라와의 무역액은 매년 거의 비슷했다. 유럽 상인들이 사고 싶은 상품이 많더라도 자본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품 가격이 오른 시기에는 구입 양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동남아 여러 도시국가들과 교역을 트면서 금과 보석 위주로 거래해서 무역량이 매년 껑충껑충 뛰어올랐다. 동남아 국가들은 고산국에 보통 열대 과일이나 해산물을 가공한 제품이나 보석류를 팔고 공산품을 수입했다. 그 동안 향신료를 유럽이나 인도, 아랍 상인들에게 판매하면서 쌓인 은과 금이 많아서 손이 큰 편이었다.

그때 항구 통제소 쪽에서 통신원이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급전이오! 전화통지문이오! 전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여기다!”

통신원이 전화통지문을 이민호에게 바쳤다. 봉투를 열어보니 해중국 요새에서 보낸 전화통지문으로서, 외국 범선 세 척이 왕도 북동쪽 해중국 요새로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였다.

이민호는 급히 항구 통제소로 향했다. 해중국 요새 지휘관과 직접 전화통화를 하기 위해서였다.

“교환원. 아리수 항구에 나와 있는 국왕이다. 해중국 요새 지휘관과 연결 부탁한다.”

- 잠시 기다리십시오, 전하.

고산국 전역에 전화가 개설된 이후 급한 상황에서 전령이 오가고 할 필요가 없었다. 전화는 대표적인 문명의 이기였고, 시간과 거리를 줄여주어 인간의 수명을 늘려주는 효과가 있었다. 특히 위기 상황에서 이렇게 잘 써먹고 있었다. 통화는 금방 연결됐다.

“범선 세 척이라고? 무역선 아닌가?”

- 제가 통지문을 보낸 직후 범선 세 척에서 각각 작은 배 한 척씩을 내렸습니다. 작은 배에서 수심을 재는 사이 범선들이 천천히 접근하고 있습니다. 요새에 전투 준비 명령을 하달했고 현재 증원 병력이 요새로 이동 중입니다.

“어느 나라 배인지 몰라?”

- 배 세 척 모두 국기나 다른 깃발을 안 달고 있습니다.

“적대적인 접근이로군. 적이 공격하거나 대거 상륙할 기색이 보이면 선제공격을 해도 좋다.”

- 감사합니다, 전하!

“마침 군항에 있으니 순양함을 타고 바로 가겠다. 그 사이 무운을 빈다.”

이민호는 군용 선착장에서 언제든 출항할 준비가 되어 있는 2전단 순양함에 탑승했다. 국왕좌승함은 오늘 비번이라 수병들이 상륙해 있어서 출항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기에 대신 선택한 배였다.

출항 직전에 수병들이 빠르게 움직이는 사이 이민호는 호위들과 함께 함교에 올라섰다. 그 전에 대원수 계복에게 전화해서 해중국 요새로 증원 병력을 보내게 했다. 본토에 대한 공격일 가능성이 높았다.

- 쿠우웅~ 콰앙~

“시작됐군.”

멀리서 은은한 대포 소리가 울렸다. 드디어 해중국 요새와 외국 배들 사이에서 전투가 시작됐다. 포격전만 주고받는다면 요새가 유리하겠지만 혹시나 외국 배에서 선원들이 상륙해서 요새를 점령할 수도 있으므로 얼른 가보기로 했다.

아리수 항에서 해중국 요새까지 20km가 살짝 넘는 거리였다. 물론 배를 타면 육지를 빙 돌아가야 해서 시간이 더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 뿌우! 뿌우!

출항 신호인 기적이 울리고 홑줄을 다 걷은 순양함 세 척이 아리수 항구를 급히 떠났다. 그 사이 다른 배에서도 출항준비를 했지만 아직 인원이 충분치 않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아리수 항에서 출항해서 40분쯤 지나 해중국 요새 앞바다에 도착했다. 범선 세 척이라고 들었는데 바다에는 온통 만신창이가 된 범선 두 척만 떠 있었다. 순양함들이 도착하자 요새에서 포격이 그쳤다.

“적선에서 선원들이 포구를 본 함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선제공격해!”

함장이 전화를 들어 함포 사격 명령을 내리자마자 함수 함포 3문이 거의 동시에 발사됐다. 뒤따르던 순양함 두 척에서도 함포를 발사했다. 5인치 함포탄은 범선 측면에 드러낸 대포 주변에 명중했다. 화염이 순식간에 확장하면서 가까운 곳에서 움직이던 선원들이 일제히 나뒹굴었다. 아래층 함포 갑판에 시뻘건 피가 확 퍼졌다.

3인치 함포는 선수루와 선미루를 노렸다. 작은 대포와 머스킷을 들고 있던 선원들이 한꺼번에 날아갔다. 함수 함포 3문의 일제 포격 한 번에 범선 한 척이 단번에 무력화됐다. 거리가 가까우면 명중률이 급격히 올라가는 탓이었다.

다른 배는 순양함 두 척에게 공격받아 침몰하고 있었다. 물에 뛰어든 선원은 몇 명 되지 않았다.

“사격 중지. 나포한다.”

“적선을 나포하겠습니다. 해병 선상전투 준비! 적선에 접근.”

해병 1개 소대가 사거리가 긴 보병총을 들고 반쯤 불타고 있는 범선을 향해 겨눴다. 서양인들이 분명한 선원들이 상갑판에 수십 명이 쓰러져 있고 나머지는 부상을 입은 채 손을 들었다. 뒤늦게 돛대 위에 백기가 올랐다.

“더 이상 접근하지 마! 물러서!”

“기관 전속 후진! 정지!”

순양함이 적선을 100미터쯤 남기고 정지했다. 함장은 어리둥절했으나 일단 이민호의 명령을 수행했다.

“함장! 유럽 배는 항상 화선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명심하게.”

“적선에 백기가 올라왔습니다. 자폭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화재로 인해 폭발할 수도 있어.”

화선(火船)은 밀집한 적 함대를 분산시킬 목적으로 불을 지른 배를 들이밀거나, 화약을 가득 실은 배를 적선 대열에 넣어서 터뜨리는 용도로 유럽 해전에서 흔히 사용했다. 보통은 군함으로 쓰기 어려운 낡은 배, 또는 해전 중에 나포한 적함을 화선으로 동원했다.

“선원들이 화재 진압을 하고 있습니다. 불을 끌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무장해제를 시킨 다음 해병을 등선시키게.”

결국 범선 두 척이 침몰하고 한 척은 나포됐다. 범선의 국적은 이민호가 어렴풋이 예상한 대로 네덜란드였다. 범선은 해중국 항구에 예인하고 포로 50여 명을 잡았다. 부상자가 40명 정도로, 멀쩡한 자가 드물었다.

나포한 범선을 선착장에 계류한 다음 해중국 궁성에서 포로들을 심문했다. 네덜란드가 얼마 전까지 에스파냐 영토였기에 스페인어가 잘 통했다.

“저희들은 2년 전에 아시아에 무역하러 와서 대성공을 거둔 하우트만 형제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고산국에 무역을 하러 찾아왔습니다. 여기 고아 부왕이 발행한 면허장도 있습니다.”

“틀림없군.”

네덜란드 선장이 품에서 꺼낸 문서에는 분명히 고아 부왕의 사인이 되어 있었다. 아프리카 남단에 고산국 교역소를 세우지 못해 이민호는 인도의 고아 부왕에게 네덜란드 교역에 관련된 대리권을 맡겼다.

“이곳이 고산국 영토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국기도 다르지 않습니까? 고산국 영토인 줄 알았으면 저희가 미쳤다고 공격했겠습니까?”

“해중국이라고 건국 초부터 있었던 속국이야. 왼쪽 상단에 태극기 일부가 있잖아?”

“멀어서 못 봤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다짜고짜 요새에 포격부터 했어?”

보통 유럽에서는 전투 전에 양쪽 지휘관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고 대화하면서 공격할 수밖에 없는 명분을 쌓는 등의 절차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네덜란드 배에서 그런 절차 없이 바로 함포 사격부터 시작했다.

“자바 섬에 있는 것과 같은 요새인 줄 알았습니다. 요새 주변에 포탄이 몇 발만 떨어져도 겁에 질린 노란 원숭이 놈들이 죄다 도망가거든요.”

“너희들 해적이구나?”

“해적이라기보다는 정복자라고 해주십시오. 부디 아량을 베푸시어 동료 선원들을 치료해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치료는 해주지.”

고산국 의사들의 외과수술 실력도 어느덧 수준이 꽤 높아졌다. 이 시대에 유럽에서는 웬만하면 절단했을 총상 환자들의 팔다리를 붙어있게 해줄 수 있었다.

“고산국 국왕폐하께서는 과연 듣던 대로 신사이십니다.”

“너희들한테는 신사가 아닐걸?”

“요새를 공격한 것은 명백한 실수입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저희들을 석방해주시면 폐하께 금은보화를 바치겠습니다.”

“그건 전리품이야. 너희들에게는 권리가 없어.”

부상당한 40여 명이 치료를 마칠 때까지 군 병원에서 지내도록 했다. 부상을 당하지 않은 10명도 객관에서 잘 지내도록 보살펴줬다.

그리고 네덜란드 포로 50명이 건강을 회복했을 때, 재판을 거쳐 탄광으로 보냈다. 예외는 없었다. 네덜란드 죄수들은 다들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아서 기존에 탄광에 수용된 죄수들이 아주 좋아했다. 그렇다고 다른 죄수들의 작업량이 줄어들 리는 없었다.

“전쟁이 돈이 될 때가 많다니깐.”

이민호가 콧노래를 불렀다. 나포한 네덜란드 배에서 엄청난 보물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범선의 선장실에서 금은보화가 가득 실린 보물 상자 수십 개를 발견했다. 금은보화를 유럽에서 싣고 왔을 리는 없고, 아마도 네덜란드 배들이 자바 섬에서 도시국가 몇 곳을 털었던 모양이었다.

============================ 작품 후기 ============================

이어질 내용이 좀 더 남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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