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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473화 (422/1,000)

00473  49. 1598년  =========================================================================

“일단 다 때려잡고 나서 물어보면 안 됩니까?”

“일반 수병도 그런 소리는 안 하겠다. 아무나 공격했다간 나중에 외교 문제가 될 수도 있어. 지휘관이 잘 판단해봐.”

함장이 가장 먼저 돛을 살피고, 돛대 위에 걸린 깃발을 확인했다. 아무런 표시가 없는 쪽이 해적이라고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다른 한쪽은 마스트 끝에 위에서부터 주황색, 흰색, 파란색 순으로 띠가 합해진 이 시대 네덜란드 국기를 게양하고 있었다. 돛에는 회사 문장을 새겼는지 복잡한 문양인데 알아보기 어려웠다.

또한 양쪽 모두 원양 항해에 적합한 선형과 장비로 봐서 바다의 거지단, 제고이센은 아닐 것으로 판단했다. 네덜란드의 사략선단 제고이센은 에스파냐 선박을 노략질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해안 요새를 점령하기도 했다.

“양쪽 모두 네덜란드 선박인 것 같습니다. 한쪽은 확실히 해중국 요새를 공격했던 해적선들처럼 국적을 나타내는 어떤 표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네덜란드 깃발을 게양한 쪽이 해적선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도 없습니다.”

“신중해서 좋다. 만약 양쪽 모두 깃발이 없었다면?”

“그 동안 노략질을 많이 했으니 노획한 물품도 많을 것입니다. 배가 물에 깊이 잠긴 쪽이 해적선단입니다. 역시 깃발을 안 단 쪽입니다.”

“그것도 말이 되는군. 하지만 상선들이 무역 상품을 실었다면?”

“그런 식이라면 결론이 안 납니다. 일단 때려잡고 나서 물어봐야합니다.”

“좋아. 일단 한쪽만 잡고 나서 저쪽은 다시 판단해보자.”

남의 나라 영해를 지나면서 국기를 게양하지 않은 무장 선박은 다른 나라 군함에게 공격을 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고산국 함대는 자바 섬 무역도시들의 구원 요청을 받고 왔으니 해적이 확실시되는 배들을 공격할 자격을 갖고 있었다.

아무 표지도 없는 배들 네 척이 뒤늦게 고산국 함대를 발견하고 넓은 바다 쪽으로 도주하려했으나, 이 거리에서는 이미 늦었다. 고산국 순양함들이 추격하면서 3인치 함포를 발사해 포갑판과 선수루, 선미루를 정확히 공격했다.

순양함 12척이 포격을 가하자 해적선 네 척이 저항도 못해보고 단번에 무력화됐다. 나포에 중점을 둔 함포 사격이라 해적선들은 3인치 함포탄 열 발 이상을 맞고도 아슬아슬하게 침몰을 면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해적들은 머스킷을 장전하면서 응전 태세를 갖췄고, 고산국 해군은 해적이 적대적 태도를 취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순양함에는 적선의 침몰 가능성을 낮추면서 공격할 무기가 탑재돼 있었다.

- 따다다다닷! 따다다닷!

순양함들이 네덜란드 해적선의 상갑판에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 삭구나 물통 같은 것들이 부러지거나 퍽퍽 터져 나가고 총알이 머리 위로 씽씽 날아가자 네덜란드 해적들은 갑판에 바싹 엎드렸다. 해적들은 빗발치는 총알을 피해 간신히 백기를 달았다.

순양함 갑판에서 문이 열리며 해병들이 해적선 갑판으로 뛰어내렸다. 해병들이 간신히 사망을 면한 네덜란드 해적들에게 몽둥이세례를 퍼부으며 순양함 쪽으로 몰아붙였다. 정신없이 두들겨 맞다 보니 어느새 무장 해제된 해적들은 순양함 갑판에 내팽개쳐진 다음 밧줄로 꽁꽁 묶였다. 작전이 끝난 직후 해병 지휘관이 이민호에게 보고했다.

“해적선 4척을 모두 나포했습니다. 점령 과정에서 14명을 사살, 193명을 사로잡았습니다. 52명이 함포 사격으로 죽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나포된 해적선 네 척을 순양함 함미에 연결, 예인 준비 작업을 마쳤습니다. 약탈한 금과 은이 상자에 가득 담겨 있어서 운반 중입니다. 수백 상자가 넘으므로 최종 집계되는 대로 다시 보고하겠습니다.”

“해병 중대장이 수고가 많았다.”

그 사이 해적선들과 교전하던 네덜란드 배 네 척은 교전 해역에서 멀찌감치 물러서 있었다. 이들은 고산국 함선의 막강한 화력을 본 뒤에도 전투태세를 풀지 않았다.

“저놈들은 어떻게 합니까?”

“일단 불러서 물어봐야지.”

“해적이냐고 물으면 당연히 아니라고 할 겁니다.”

“해적들하고 대질심문 시키면 돼.”

네덜란드 배 한 척이 서서히 다가왔다. 순양함 12척 사이에서 네덜란드 상선은 조각배처럼 작게 보였다. 선수에 갑옷을 입은 자가 나타나서 소리를 질렀다.

“고산국 국왕폐하의 좌승함이 맞습니까?”

전선 때부터 그랬지만 순양함에서도 다른 배에 탄 자와 대화를 하려면 꽤나 귀찮았다. 이민호는 함교에서 계단을 타고 갑판에 내려왔다. 이 과정에서 호위들이 문 여러 개를 열고 닫아야 했다. 해병들이 총을 겨눈 사이에서 이민호가 상체를 내밀었다.

“그렇다. 신원을 밝혀라.”

“저는 네덜란드 2차 탐험선단 지휘관입니다. 동인도제도에 무역하러 왔다가 오늘 새벽부터 반탄 술탄국의 항구를 공격하는 네덜란드 해적들을 상대로 교전했습니다.”

바다에서 대화하기 어려워 자야카르타에 입항해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반탄 술탄국 영토인 자야카르타에 포르투갈 상관이 있어서 그곳에서 네덜란드 선단 대표와 선장들을 만났다. 대서양에서 만나면 서로 대포부터 쏘고 봤을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상인들이 이민호 앞에서는 얌전했다.

“존경하는 고산국 국왕폐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야콥 코르넬리우스 반 넥이라고 합니다. 네덜란드의 2차 인도 탐험선단 8척의 지휘관입니다.”

야콥 제독은 30대 중반으로서 암스테르담의 유력한 가문 출신이었고, 고급 교육을 받은 차분한 해군 지휘관이었다. 1차 탐험선단을 이끈 코넬리스 하우트만이 지나치게 과감한 성격임을 감안한 네덜란드는 2차 탐험선단 지휘관은 신중한 인물로 뽑았다.

코넬리스와 프레데릭 하우트만 형제는 배 한 척을 잃었지만 나머지 세 척에 향신료를 가득 채우고 네덜란드에 돌아가는 큰 성공을 거뒀다. 그래서 원래라면 망했어야 할 ‘먼 나라 무역회사’가 크게 확장해서 배 여러 척을 사들이고 유능한 선장들과 선원들도 다수 고용할 수 있었다. 하우트만 형제도 내년에 다시 자바 섬으로 올 예정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4척 말고 또 있소?”

“그렇습니다. 원래 여덟 척이 테설에서 함께 출항했습니다. 이 근처에서 구입할 향신료가 부족해서 유구국 상인의 조언에 따라 네 척을 브루나이로 보냈습니다.”

테설(Texel)은 암스테르담에서 70km 북쪽에 위치한 섬이었다. 자바 섬 전체가 네덜란드 해적선들로 인해 난리가 났고 브루나이 세리아의 유전 수비대도 비상경계 중일 텐데 싸움이라도 나지 않았을지 걱정됐다.

“2년 전에 코넬리스 하우트만 선장이 이곳에 왔었지요. 안전하게 고국으로 돌아갔다면 좋겠소.”

“그렇습니다. 코넬리스 하우트만은 큰 이익을 얻어 내년에 다시 동인도제도에 올 예정입니다. 하우트만 선장은 원래 성격이 몹시 급하고 거만한 사람이었는데 고산국 폐하 덕택에 겸손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응? 원래 겸손한 사람이 아니었소?”

“하하! 설마요.”

이민호는 허리를 숙이고 연신 굽실거리던 하우트만 형제를 떠올렸다. 건방진 사람이라는 평가는 절대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코넬리스 하우트만은 네덜란드 선단을 따뜻하게 환영해준 반탄 술탄에게 모욕을 줬다가 향신료 매입도 못하고 쫓겨났다. 그리고 수라바야 근처에서 자바 사람들에게 공격당해 선원 12명이 죽었다. 그 일 때문에 흥분한 하우트만은 선단을 환영하러 나온 마두라 왕족과 사제를 학살하고 여자들을 강간한 적이 있었다.

코넬리스 하우트만이 두 번째로 왔던 1599년에는 아체 술탄국에서 시건방을 떨면서 공격했다가 미망인 여제독 말라하야티에게 패하면서 코넬리스는 죽고 프레데릭 하우트만은 감옥에 갇혔다. 프레데릭은 2년 후에 몸값과 손해배상금을 지불하고 석방됐다. 나중에 영국 배들이 말래카 해협을 통과하기 전에 엘리자베스 여왕의 정중한 국서를 들고 아체 술탄국을 방문한 것은 여제독의 힘이었다.

“어때요. 향신료는 많이 구했소?”

“예. 생각보다 가격이 싸서 네 척에 꽉 채울 수 있었습니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향신료 가격을 갖고 장난치고 물 보급을 못하게 방해했습니다만 결국 극복해냈습니다. 이곳에 향신료가 부족해서 브루나이로 보낸 네 척도 곧 돌아올 것 같습니다. 친절한 유구국 상인들이 저희에게 전해준 소식에 따르면 네 척에 계피와 후추를 많이 선적하고 있답니다.”

이곳에서는 정향과 육두구 외에도 여러 가지 향신료를 배 네 척에 가득 채웠다. 모든 배가 안전하게 네덜란드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야말로 대박을 치게 된다. 실제 역사에서 2차 탐험선단이 귀환했을 때 암스테르담의 모든 교회 종탑에서 종이 끝없이 울리는 가운데 선원들이 시가행진을 하면서 시민들로부터 열화와 같은 환영을 받았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네덜란드 상선들의 입항을 용납해주기로 약속해놓고 감정은 그렇지 않은가 보군요.”

“하하! 그 동안 포르투갈이 향신료 무역을 거의 독점했었으니까요.”

대서양은 앞으로도 아비규환이겠지만 최소한 인도양과 동남아시아 해역에서는 유럽 상선들끼리 서로 공격하지 않는 관습이 정착될 것으로 이민호는 기대했다. 네덜란드 배가 인도의 고아에서 포르투갈 부왕에게 면허장을 받는다는 것은 2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저 해적들의 정체가 뭐요?”

“코넬리스 하우트만이 향신료 무역을 크게 성공시키면서 이곳 동인도제도를 목표로 하는 무역회사들이 네덜란드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났습니다. 인도 고아에 입항해서 면허장을 받는 도중에도 네덜란드의 여러 회사 소속 선박을 열 척 넘게 봤습니다. 그들 중에서 질 나쁜 자들이 해적행위를 한 것 같습니다.”

네덜란드 배들이 앞으로도 꾸준히 몰려올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실제 역사에서 코넬리스 하우트만이 귀환한 다음 1602년 연합 동인도회사로 통합되기 전 5년 사이에 네덜란드에 수많은 무역회사가 생겨나 상선 65척을 아시아로 보냈다. 이들끼리 과열 경쟁하느라 손해가 발생하자 그 반성으로 무역회사들이 통합하면서 생겨난 것이 연합 동인도회사, VOC였다.

원래 16세기 내내 네덜란드 상인들은 북해와 리스본을 연결시켜주는 중개무역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암스테르담은 포르투갈 선박들이 싣고 온 동인도제도의 향신료를 유럽 각국에 배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이 에스파냐와 동군연합이 되면서 네덜란드의 중개무역이 끊겼다. 네덜란드 상인들의 밥줄이 끊어진 것이다.

설상가상 포르투갈이 1591년 독일의 은행가 가문인 푸거 가문, 아우크스부르크의 상인 가문인 벨서 가문, 에스파냐와 이탈리아의 여러 회사들을 모아 국제적인 기업연합을 결성했다. 향신료 중개무역에서 완전히 배제된 네덜란드는 어떻게든 동인도제도로 진출해 향신료를 직접 구입하고 싶어 했다.

“지난 며칠 동안 자바 북해안 도시들이 네덜란드 해적선들에게 약탈을 당했소. 심지어 고산국 본토에도 해적선 세 척이 들어와서 속국의 요새를 공격하다가 몽땅 격침됐소.”

“감히 고산국 본토를 공격하다니, 제 정신이 아니었나 보군요. 고산국 함대의 화력은 유럽에서도 유명합니다. 혹시 다 죽이셨습니까?”

“속국이라서 몰랐다고 하지만 용서할 수 없소. 전투 중에 해적들 절반은 죽고 절반은 잡혔소.”

“향신료 무역만 해도 충분한 이득을 얻을 수 있는데 어째서 해적질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잡힌 자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야콥 제독은 이민호 듣기 좋으라고 말을 골라서 했다. 야콥 제독도 대서양을 항해하는 도중에 포르투갈 배를 발견했다면 그 즉시 공격했을 것이다.

“재판을 거쳐 탄광에 쳐 넣었지요.”

“잘하셨습니다. 같은 나라 사람들이지만 죄과를 치러야 합니다.”

씁쓸한 표정을 짓는 야콥 제독에게 이민호가 봉투를 건넸다.

“여기 생존자들 명단이오. 비록 해적질을 하다가 붙잡혔지만 가족들에게 이들이 생존한 사실을 알려주시오. 네덜란드에 돌아가서 신문에 생존자 명단을 실어달라고 하면 기사로 내줄 것이오.”

“해적이라도 저희 동포의 일이니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국왕폐하께서 인도주의를 실천하시는군요. 유럽의 국왕들도 배워야 할 점입니다.”

사실은 해적들의 몸값을 받아내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해적들이 속한 회사가 아직 망하지 않았다면 몸값을 낼 것이고, 못 낸다면 유족과 생존자 가족들의 등쌀에 회사 문을 닫게 될 것이다. 이민호는 네덜란드 선박들이 동남아시아에서 평화로운 교역에만 종사하도록 만들 셈이었다.

네덜란드 배들이 앞으로 매년 수십 척씩 몰려올 것이므로 오는 것 자체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해적 행위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도시국가들의 방비가 우선이겠지만, 고산국 함대도 앞으로 꾸준히 이 해역에서 활동해야 했다. 그러나 고산국 함대가 이 해역에 계속 묶여있을 수도 없고 공짜로 지켜줄 수도 없으니 이번에 약탈당한 무역도시들에게 연합함대 결성을 권할 생각이었다.

============================ 작품 후기 ============================

실제 역사와 다르게 하고 싶어도 야콥 제독의 캐릭터가 원래 이래서 싸움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우트만 형제, 야콥 제독, 아체 술탄국의 말라하야티 여제독 등은 실존인물입니다.

내용이 이어질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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