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475화 (424/1,000)

00475  49. 1598년  =========================================================================

사흘 후, 이 지역에서 항상 그렇듯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가운데 자야카르타 항구의 포르투갈 상관에 사람들이 모였다. 풍채가 좋고 머리에 큰 보석이 박힌 터번을 쓴 사람들이었다.

자바 섬의 무역도시 연합이라는 기존의 느슨했던 연맹체가 고산국 국왕, 네덜란드 제독, 마타람의 왕세자, 포르투갈 상인 대표가 참관한 중에 정식으로 재발족했다. 회원국 수장들이 연맹체의 결속과 함대의 건설에 관한 토의를 하는 중에 마타람 술탄국의 아궁 왕세자가 이민호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처음에는 마타람을 고립시키는 연맹인 줄 알고 놀랐습니다. 저를 왜 초청하나 했죠.”

“마타람은 자바 섬에서 가장 강한 나라인데 그럴 리가 있나. 연맹은 무역도시들의 공수동맹일 뿐이야. 걱정되면 마타람도 참가하지 그래?”

“마타람이 무역도시가 아니라서 참가하긴 좀 그렇습니다. 반탄 빼고는 다들 중소 국가들이라 제가 여기 온 것만으로도 불안해하더군요. 네덜란드 해적 때문에 다들 걱정이 많았는데 어쨌든 잘 됐습니다.”

마타람 술탄국 입장에서는 연맹에 참가하기도, 빠지기도 어려워 현재는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마타람의 국력이라면 다른 중소 국가들을 흡수할 능력이 충분했지만, 지금까지는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고산국과 네덜란드 때문에 자바 섬의 통일이 쉬운 일도 아니게 되었다.

“마타람이 참가해서 연맹의 수장이 되면 자연스럽게 자바 섬 전체를 통합할 수도 있어. 무력만이 능사는 아니야. 반탄과의 결혼동맹부터 시작해보게.”

“제 야망을 꿰뚫어보고 계시는군요. 육지에서 벌어지는 영토분쟁에 고산국이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셔서 사실 제가 많이 놀랐습니다. 고산국 입장에서는 자바 섬이 분열되는 게 낫지 않습니까?”

연맹 소속 여러 도시국가의 수장들이 고산국에서 보호해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했지만 이민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연맹 소속국들을 고산국의 속국으로 인정하지 않을 테니 영토 분쟁이 생기면 알아서 해결하라고 거절했다. 어떻게 보면 마타람 술탄국에 특혜를 준 것이나 다름없어서, 이렇게 마타람의 왕세자 아궁이 이민호에게 호의를 품게 되었다.

“자바 섬이 분열되면 나야 일단 편하겠지만 외세에 너무 약해지거든. 솔직히 말해서 고산국은 자바 섬을 장악할 의사도, 능력도 없어. 그러나 다른 세력에게 넘어가는 것도 바라지 않아. 그래서 자바 섬이 좀 더 강해지길 원하는 거야.”

“네덜란드가 강하긴 하더군요. 겨우 해적선 몇 척에 무역도시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했으니까요. 유럽의 침공에 대비할 생각을 해야겠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는 자바 섬이 분열된 와중에 네덜란드에게 차곡차곡 넘어갔다. 강국이었던 마타람도 예외는 아니어서 18세기 중반에 둘, 셋으로 분열됐다가 결국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잡아먹힌다.

“그 동안 우리 고산국이 마타람을 침공할까봐 걱정했지?”

“큭큭! 술탄은 요즘도 가끔 악몽을 꾸십니다. 고산국이 하늘로부터 마타람 왕궁을 공격한다고요. 고산국에서 용을 부린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물론 마타람을 비행기로 공격할 계획은 없었지만, 고산국에서는 비행기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고산국에서 전설이나 신화에 등장하는 기물을 만든다거나 용을 부린다는 소문이 이 지역에 돌고 있었다.

현재 풍동 실험이 잘 진행돼 글라이더 수준을 넘어 제대로 된 프로펠러 비행기의 동체와 주익 디자인이 거의 끝나갔다. 그러나 항공기는 경험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배나 건물이나 헬리콥터는 이론과 설계만으로는 성공을 확신하기 어렵다. 기존의 설계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개발할 경우, 완성한 다음 제대로 작동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분야였다. 다른 것들은 완성 후에도 얼마든지 고칠 수 있었으나 항공기는 일단 추락하면 끝장이라는 면에서 조금 특별했다.

“마타람이 중소국가들 위에 군림하려면 비용을 많이 지출해야 할 거야. 술탄들을 적당히 예우해주고 기존 도시국가 주민들의 기득권을 보장해주면서 통합하는 방법이 더 나아.”

“중소 국가 술탄들과 권력을 나누는 것이야 저도 별로 거부감이 없는데 종교 때문에 조금 걸립니다.”

“발리 왕국 때문에 그래? 다른 종교를 대충 인정해주지 그래?”

“힌두교를 믿는 거야 상관없지만 발리 왕국이 자바 섬 동부 지역을 장악하고 자꾸 서쪽으로 진출하려고 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힌두교와 이슬람이 섞이는 것도 마음에 안 듭니다.”

“이 지역 이슬람은 힌두교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백성들이 좋다면 지배자도 받아들이는 것이 편할 거야. 종교를 내세우는 것이 통치에 유리하겠지만 너무 지나친 교조주의는 국가를 분열시킨다는 사실을 명심해. 현재 유럽에서는 같은 종교인데도 분열돼서 수십 년 동안 서로 싸우고 있잖아.”

“명심하겠습니다. 앞으로 가급적 종교는 빼고 생각하겠습니다.”

고산국왕이 지켜보고 있다는 부담감 때문인지 연맹체의 구성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연합함대를 만들 때 비용갹출 비율도 정해졌다. 약간 반발도 있었지만 부기스라는 특이한 이름의 전투종족도 고용하기로 결정했다.

네덜란드 상선들이 지급할 배상금에 어느 정도 의존하긴 했어도, 도시국가들의 재력이 꽤나 큰 편이라서 이민호가 놀랄 정도였다. 여러 도시 국가들에서 고산국에서 제작한 요새포를 8문씩 구입하기로 했다.

그리고 고산국 함대가 나포한 네덜란드 범선도 구입을 결정했다. 범선 네 척을 고산국으로 예인해가서 개조와 무장 탑재를 마친 다음 연합 함대의 주력으로 삼기로 했다. 자금이 더 모이면 외륜선 형식의 전투용 함선도 고산국에서 구입하기로 약속했다. 군함 수출도 꽤 큰돈이 된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됐다.

“마두라의 왕녀였던 죄인을 고산국 국왕폐하께 노예로 바칩니다.”

마두라의 술탄이 처연한 표정으로 목줄 손잡이를 이민호에게 건넸다. 반쯤 벌거벗은 몸에 채찍 자국이 난 소녀가 개목걸이에 줄이 묶인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버지인 술탄이나, 죄인이 된 왕녀나 둘 다 가슴으로 울고 있었다.

“왕녀는 직분을 소홀히 하여 신의 피리를 불지 못했습니다. 결국 네덜란드 해적에게 마두라의 국보인 신의 피리를 빼앗겨서 도시를 황폐화시킨 죄를 지었습니다.”

“쯧쯧! 가련한 소녀여. 나를 따라오너라. 술탄은 걱정하지 마시오.”

이민호는 대충 이해가 갔다. 왕녀는 죄가 없었다. 처녀인 왕녀가 신의 피리를 불어 해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백성들의 믿음이 깨지면서 희생양으로 전락한 것뿐이었다.

마두라처럼 작은 나라에서 외국이나 해적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제대로 지킬 가능성은 적었다. 백성들에게 심리적 위안이 될 신화적인 무기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이렇게 어리고 예쁜 공주님을 노예로 넘기다니, 너무했어요. 주인님이 노예로 받아들인 거여요?”

“고산국에는 노예가 없다는 것을 잘 알잖아.”

“저도 처음에는 믿기 어려웠어요. 이 공주님도 지금은 안 믿고 있을 걸요?”

민영이 마두라 왕녀를 씻기고 새 옷을 입혔다. 눈물자국이 지워지니 제법 미인인 얼굴이 드러났다. 호위들이 신이 나서 왕녀를 데려갔다가 화사하게 치장시킨 다음 다시 이민호에게 데려왔다.

“예쁘네. 아라 공주한테 맡겨서 일을 가르쳐야겠다. 몇 살일까?”

“열네 살입니다, 주인님.”

“응? 조선말을 아네?”

“유구국 상인들이 왕궁에 방문할 때마다 열심히 배웠습니다, 주인님.”

억양이 어색하긴 하지만 마두라의 왕녀가 제대로 잘 배운 것 같았다. 요즘 자바 섬이나 향료제도의 지배자들은 조선말 몇 마디 정도는 구사할 줄 알았다.

“마두라 술탄이 널 보낸 것을 이해해야 할 거야. 지배자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겠지.”

“알고 있습니다, 주인님. 보통 피리에 불과한 것을 마치 신이 하사한 물건인 것처럼 백성들이 경배했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야 백성들이 조금이나마 안심하겠지요.”

“알고 있었군. 주인님 소리 그만하고, 숙소를 내줄 테니까 거기서 지내도록 해.”

“저는 아버지인 마두라 술탄의 명령에 따라 주인님의 노예가 됐습니다. 저를 어떤 일에든 부려주십시오.”

“고집은. 시간이 지나면서 적응될 거야.”

이민호는 마두라의 왕녀를 유구국 출신의 아라 공주 밑으로 배치했다. 이민호가 브루나이 공주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브루나이를 지배하듯이, 마두라의 왕녀에게도 자바 섬의 관리를 맡길 계획이었다. 고산국이 자바를 속령으로 삼지 않더라도 양쪽의 이익 증진을 위해 왕녀가 할 일이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왕녀가 고집이 세서 개목걸이를 하고 줄에 묶인 채 이민호의 침대 밑에서 지내려 했다. 당연히 불편을 느낀 이민호가 설득해도 왕녀는 그 자리를 떠나려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담요를 깔고 자는 것도 사양했다가 강아지에게도 이 정도는 해준다고 설득해서 간신히 담요 위에서 지내게 했다.

고산국에 돌아갈까 하다가 여기까지 온 김에 호주에 가보기로 했다. 함대는 발리 섬에 들렀다가 장영실 항에 도착했다.

북반구와 달리 호주는 여름이었고, 장영실 항은 적도에 가까워서 미친 듯이 더웠다. 마침 장영실 항에 머물고 있던 정문부가 마중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총독은 어찌 여기 계시오?”

“호주에 새로 이주한 백성들에게 적응 훈련을 시키는 중입니다. 여기서 교육을 받은 다음 새부산이나 새여수로 갑니다.”

중앙 부서로 돌아왔던 정문부에게 정식으로 호주 총독을 맡겼다. 정문부는 장영실과 새부산, 새여수 세 곳을 돌아다니면서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정문부부터 가족 전체를 새부산에 이주시켜 열정적으로 개척하는 중이었다.

“강가에 목책은 뭐하러 세웠소? 혹시 해적에 대비한 것이오?”

“바다악어가 가끔 땅에 올라와서 가축을 물어갑니다. 애를 물어갈 뻔했던 적도 있습니다. 보이는 대로 잡아 죽이고 있지만 행동반경이 넓어서 그런지 완전히 퇴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따금 마을에 나타나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목책을 설치했습니다.”

“뭐, 잘했소.”

사람이 물려 갈 수 있는데 무조건 야생동물을 보호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바다악어의 서식지가 이곳 말고도 널리 퍼져 있으니 희귀동물도 아니었다.

“가죽은 질긴데 의외로 고기 맛이 괜찮습니다. 닭고기와 비슷한 맛이 납니다. 캥거루 고기는 소고기와 비슷한 맛입니다.”

“악어와 캥거루를 먹다니, 참으로 대단하오. 호주에서 양과 소를 키우고 있지 않소?”

“양고기는 잘 처리해도 어쩐지 누린내가 나는 것 같고, 아직 소를 잡아먹을 단계는 아닙니다.”

정문부의 안내를 받아 악어가죽을 말리는 건조장에 도착했다. 4, 5미터가 기본이고 6, 7미터짜리도 있어서 이민호는 크기에 압도당했다.

“바다악어를 많이 잡았는데, 악어가죽을 쓸 데가 없을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안남이나 필리핀에서는 갑옷을 만들기도 한다더군요. 하지만 고산국에는 성능 좋은 방탄복이 있으니 악어 갑옷을 만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걸로 여자들 가방을 만들어보시오. 구두나 혁대, 지갑, 시곗줄도 괜찮을 것 같소.”

이 지역 바다악어를 포르수스라 해서 그 가죽은 가방을 만드는 악어가죽으로서 최고급품에 속했다.

“악어가죽 가방입니까? 흉측한 짐승의 가죽을 여자들이 좋아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장담하는데, 여자들이 아주 환장할 거요.”

물론 그 전에 악어가죽이 고급이라는 이미지를 부여하는 단계가 필요했다. 패션 쇼 한 번 열어서 알린 다음 후궁들이 들고 다니게 하면 될 것도 같았다. 어떤 상품이든 왕실에서 보유한 상표를 달아 판매하면 가격이 단번에 두세 배로 뛰었다.

“새부산에서는 개간이 잘 되고 있습니다. 이번에 수확을 해보니까 다른 지역은 건조한 편인데 새부산 주변은 의외로 비옥하더군요.”

“혹시 원주민들과 불화는 안 생겼소?”

호주 원주민들이라 해서 부족별로 뿔뿔이 흩어져 사는 것만은 아니었다. 부족끼리 끊임없이 의사소통을 해서 실제 역사에서는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그래서 이민호는 항상 원주민들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전하께서 하명하신 대로 원주민들에게 농지를 나눠주고 경작을 시키고 있습니다. 수확을 한 번 한 다음부터는 부족 전체가 이동을 멈추더군요. 멀리서 찾아와 농지를 달라고 요청한 부족들도 적당히 분산해 정착시켰습니다.”

“아주 잘 하셨소.”

“농사 외에도 다들 닭 키우는 재미에 쏙 빠져들었습니다. 닭이 많아진 다음부터는 다들 하루 세 끼 닭튀김만 먹고 살려고 합니다.”

“그러다 살찌면 불편할 텐데 말이오.”

“원주민들이 닭고기든 밥이든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먹어댑니다. 그래서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일을 제대로 하면서 먹고 싶은 만큼 먹는다면 문제가 없었다. 물어보니 원주민들이 농사일에 재미를 들여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밭을 돌본다고 했다.

그러나 낮에 햇빛이 강할 때는 오두막에 들어가서 낮잠을 즐겼다. 그래서 마치 흡혈귀처럼 햇빛이 약하거나 아예 들지 않는 시간 동안만 집중적으로 일했다. 일하는 시간은 고산국 농민들보다 적었으나, 경지면적이 훨씬 좁으니 밭을 내팽개치는 나쁜 농부는 아니었다.

“농경지를 더 달라고 하지 않던가요?”

“고산국 농민과 같은 면적을 경작하려면 수확량 절반을 세금으로 내야 한다니까 고민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원주민들이 더 이상 넓은 면적을 경작할 필요 없이 충분히 먹고 삽니다만, 우리 농민들 집에 초청받으면 선풍기 같은 것을 몹시 부러워합니다.”

“후후! 원주민들이 조만간 넘어오겠군요.”

“흐흐흐! 아! 실수했습니다. 이럴 때 음흉하게 웃어야 분위기를 맞출 것 같았습니다.”

“틀리지 않았소.”

진득하게 밭에 붙어서 일하는 것에 취미를 못 붙인 원주민들을 위해서도 일감을 마련했다. 초기 단계의 농업노동자와 건설노동자, 그리고 고용된 양치기가 점점 직업화되어갔다.

원주민들은 고산국 백성들이 사용하는 물건을 구하려면, 특히 술을 사서 마시려면 꾸준히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학교에 나가서 조선말이라도 배워야 먹을 게 생겼다. 원주민들이 고산국 백성들을 좋은 이웃으로 인정한 지는 이미 오래였다.

============================ 작품 후기 ============================

이렇게 남방을 안정시키고, 다음 회에서 몇 달 건너 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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