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79 49. 1598년 =========================================================================
꽤 차이가 있더라도 무선통신을 기존에 이용하고 있는 유선전화와 비슷하게 생각해도 상관없었다. 현대에 음성통화에 국한될 경우 유선전화와 무선 휴대전화를 구태여 구별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기술 기반이 어떻게 되든 사용자 입장에서는 통화만 되면 좋은 것이다.
무선통신 기술은 지금까지 실용화만 되지 않았다 뿐이지 꾸준히 연구해온 과제였다. 그래서 실용화되는 순간 함선들이 모스 부호 단계를 넘어 전화기처럼 평문으로 대화하는 단계로 시작했다. 무전기를 통해 함대 소속 함선들이 밤에도 간단히, 그리고 널리 통신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올 초에 방송국을 세우고 건물 지붕에 줄을 이은 거대한 풍선을 하늘 높이 올려 송신탑을 대신했다. 라디오 방송이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했으나 준비과정이 길어져서 아직 정식으로 방송을 개국하지 않았다.
이민호는 세계 최초의 방송을 대충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주파수가 아직 하나뿐인데 24시간 뉴스만 보낼 수도 없어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고민했다. 음악방송과 라디오 드라마를 준비하면서, 녹음장치가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음악 한 곡을 방송할 때마다 오케스트라를 불러올 수 없으니, 축음기가 개발될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려야 했다.
“고산국은 정말 무섭게 발전하는군요.”
“이 기술은 당분간 국외로 반출하지 않을 것이오, 총독.”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폐하.”
에스파냐 사람들이 고산국의 전화기를 뜯어보며 어떻게든 복제해보려고 발악했었다. 그러나 기술 격차가 워낙 커서 지금은 아예 포기하고 말았다. 전기를 사용한다는 사실 외에는 전화의 작동 원리를 파악하지도 못할 정도였으니 앞으로 몇 십 년 안에는 복제가 불가능했다.
물론 언젠가는 전화는 물론 무선통신도 외국에서 사용하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 기술이 복제된 후에는 현대인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발전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당분간, 최소 백년 이상 유무선 통신기술을 독점할 야망을 품고 있었다. 유선전화나 무선통신 체계가 다른 나라에 송두리째 넘어가더라도 과연 복제조차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과 자본을 들이면 언젠가 가능하겠지만, 이민호가 생각하는 효율적인 통신망 구성은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다.
11월 초에 인도 남동쪽 스리랑카를 지난 함대가 아라비아 해를 지나 아덴만에 들어섰다. 예전부터 무굴제국 황제와 고아의 포르투갈 부왕을 만나보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시간이 없어서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나중에 아부다비에 들를 때 시간을 내기로 했다.
오만 국적의 배들을 홍해로 들어서다가 만났는데, 선원들이 고산국 함대를 향해 환성을 내지르며 한참 동안 따라왔다. 인도양에서 활동하는 이슬람 해적의 대표였던 오만이 해운업으로 업종을 변경한 다음부터 다들 안심하고 먹고 살게 된 모양이라고 이민호가 좋게 평가했다.
오만 해적이 사라진 대신 지부티나 소말리아, 예멘 방면에서 작은 해적선들이 준동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오만의 크고 빠른 범선들은 원래 해적선들이었고, 뗏목이나 나룻배 수준에 불과한 해적선들을 들이받는 식으로 해로를 지켜냈다.
고산국이 인도양에 진출한 다음부터 포르투갈 배들도 정복과 약탈보다는 무역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고산국 눈치 보는 것도 있지만, 더 이상 정복과 약탈로는 수익이 안 나고 오히려 관리비만 더 들었기 때문이다. 계피와 후추는 인도에도 충분히 생산해서 굳이 해적질을 할 이유도 없었다. 덕택에 네덜란드 배들이 안전하게 자야카르타로 가는 혜택을 누렸다.
홍해에 들어선 다음 메카 서쪽 항구인 지다에 하루 정박하기 위해 입항했다. 젯다 또는 지다라 불리는 이 항구도시는 오래 전부터 무역도시였고 6세기부터는 향신료 무역의 중심이었다. 이슬람교가 생긴 이후부터는 또 다른 이유로 이 시대에도 여전히 대규모 도시였다.
매년 두알히자, 즉 순례의 달만 되면 지다는 메카로 향하는 순례자들로 넘쳐났다. 현대에는 지다에 국제공항이 생겨 여전히 메카의 출입문 역할을 맡았다.
지다 자체가 무역도시이기도 하지만, 홍해의 중심에 위치해서 수에즈를 통과하는 배들에게 좋은 안식처가 될 만한 곳이었다. 건설 장비나 자재를 가득 실은 고산국과 유구국, 혹은 오만의 배들이 들러 쉬었다 가기도 했다.
순양함들이 차례로 들어서는 지다 항구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고산국 함대를 환영했다. 이민호는 얼떨떨했으나 갑판에 올라가 군중의 환호에 응해줬다.
머리에 터번을 두른 무슬림 수만 명이 이교도 외국 국왕의 등장을 진심으로 반기며 환성을 질렀다. 이민호도 뜨거운 환영에 보답하고 싶어 군중 앞에서, 유일하게 아는 이슬람 구호를 크게 외쳤다.
“알라흐 아크바르!”
“우워어~ 알라흐으 아크바아르으~”
열광적으로 함성을 지르던 인파가 갑자기 쫙 갈라졌다. 마차 여러 대가 달려오더니 국왕좌승함 앞에 멈추고, 높은 사람들이 줄줄이 내렸다.
보석이 박힌 터번을 쓰고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통역장교의 안내를 받아 이민호에게 인사를 올렸다.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아미르를 보면서 이민호는 어리둥절했다. 예상치 못한 무슬림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은 이민호는 어쩔 줄을 몰랐다.
“지다의 아미르가 고산국 국왕폐하의 지다 항 방문을 환영합니다.”
“반갑소. 타국의 왕에게 과한 예는 필요 없소. 고결한 아미르가 지배하는 항구에서 하룻밤만 신세를 지겠소.”
“지다의 모든 무슬림들은 국왕폐하의 신분이 아니라 업적을 존경합니다. 메카와 지다의 숙원사업인 운하를 만들어주신 국왕폐하시라면 언제든 환영합니다.”
이민호는 지다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환영한 이유를 이제야 이해했다.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서 가장 큰 이익을 얻을 자들은 동서양의 무역업자들이 아니라 메카의 입구인 지다의 주민들이었다.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 후 메카로 향할 순례자들이 지다에 더 많이 올 것으로 예상돼 더 많은 수입을 얻을 기대에 찬 사람들은 이교도인 이민호를 진심으로 환영했다.
“수에즈 운하는 무슬림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 만든 것이오.”
“역시 고산국 국왕폐하는 존경스런 분이십니다. 알라께서는 인간들에게서 바로 그런 정신을 원하실 겁니다.”
이 시기 메카와 지다를 비롯해 아라비아 반도의 홍해 해안지방은 오스만제국의 영토였다. 물론 오스만제국에서 관리를 파견해 직접 지배한 것은 아니었고, 토후들에게 자치권을 맡기고 세금만 받는 식이었다.
지다의 아미르는 바로 동쪽 메카의 아미르처럼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손인 하심 가문의 일원이었다. 아미르는 지다를 지키면서 메카로 향하는 순례자들을 안내하고 보호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종교적, 정치적 임무였다. 그래서 고산국에서 수에즈 운하를 건설하겠다는 말이 나온 몇 년 전부터 계속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곧 수에즈 운하가 개통됩니다. 쉽게 도전하기 어려웠던 대공사를 단기간에 이루어내신 국왕폐하를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지다는 오랜 무역도시지요. 지다의 상인들도 수에즈 운하를 많이 이용해주시기 바라오.”
“물론입니다. 그보다는 폐하 덕택에 성지 순례를 하러 오는 사람들이 무척 편하게 됐습니다. 앞으로는 오스만 황제도 더 이상 핑계를 대지 못하고 메카에 순례를 하러 와야 할 것입니다.”
“하하하! 어쩐지 고소하구려.”
지금까지 오스만제국의 본토나 북아프리카에 거주하는 무슬림이 메카를 순례하려면 이집트나 팔레스타인에서 배를 내린 다음 천여 km나 되는 사막 길을 힘겹게 지나야 했다. 그러나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서 배를 타고 지다까지 바로 들어올 수 있게 됐다. 노인과 병자들도 성지 순례가 가능해진다는 뜻이었다.
성지 순례가 빠르고 안전해지면 더욱 많은 무슬림들이 메카를 찾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는 이슬람 세력을 공고히 하는데 도움이 되고, 현실적으로 지다의 수입을 늘리는 길이었다. 아미르는 수에즈 운하의 국제적 영향력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운하가 개통되면 홍해 주변 도시들뿐만 아니라 지중해, 더 나아가 대서양의 모든 무역도시들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근래 국제무역에서 지중해의 역할이 줄어들고 대서양의 비중이 커졌습니다만, 다시 지중해가 세계 무역의 중심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어느 국가들에서 반대가 많을까 내심 걱정했소.”
“공사 기간이 길어졌다면 어느 세력에서 방해하러 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 나라의 군주들이 운하 공사가 시작됐다는 보고를 받은 다음,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아주 잠깐 망설이는 사이에 공사가 거의 완공됐습니다.”
아미르가 호화로운 옛 궁전으로 초청했으나 이민호가 사양했다. 고산국 조문단 대부분이 무슬림이 아닌데 어쩌다 메카 가까운 곳에 접근했다가 괜한 오해를 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슬림이 아닌 자가 메카에 접근했다가 걸리면 무조건 사형이었다. 이민호는 메카든 지다든 이슬람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의 토착 세력과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함대에 동승한 자들도 지다에서 술을 마실 수 없고 다른 유흥시설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아예 배에서 내리지 않았다. 아리수 항에서 출발 전에 이슬람 지역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기에 즐거움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민호는 우호를 위해 병력 일부를 억지로 상륙시켜서 가게에서 먹을 거라도 사게 만들었다. 메카에서 가까워서 그런지 여자들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부르카를 뒤집어써서 이 항구도시에서는 구경할 것도 없었다.
“여행사를 만들어서 성지 순례를 상품으로 판매하면 크게 성공하겠어요. 무슬림이 많은 브루나이나 자바 섬에서 배가 출발하면 어떨까요?”
“파티마 너 무슬림 아니었나? 성지 순례를 이용해 돈을 벌 생각을 하다니, 불경한 것 아냐?”
“불경한 게 절대 아니에요. 무슬림의 다섯 기둥에서 하즈, 즉 메카 순례는 신체적, 경제적으로 능력이 있는 무슬림만 하는 거여요. 그러니 하지가 되려면 돈을 들이는 것이 당연해요. 메카에 가기 위해 평생 저축하는 사람들이 예상한 금액의 10분의 1만 들이고도 갈 길이 열리면 오히려 그 여행사를 축복할 걸요?”
“그래? 그럼 자금을 줄 테니 파티마가 추진해봐. 메카 외에도 예루살렘에 갈 수 있는지 물어봐서 가톨릭교도들도 성지 순례를 할 수 있게 해보자.”
파티마는 어렸을 때 노예로 팔려 왔고 히잡도 착용하지 않아 날라리 신자 같았다. 그러나 하루 다섯 번 기도하고 라마단 시기에 단식을 할 정도로 열렬한 신자이기도 했다. 매주 금요일마다 브루나이 공주들과 함께 모스크로 가는 걸로 봐서 확실한 무슬림이었다.
“갈라티아 궁녀 몇이 그리스 정교회 신자에요. 고산국에 와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동생들도 있어요. 몇이 모여서 같이 만들어볼게요.”
“그래. 신도들에게도 좋은 일일 것 같다. 메카와 예루살렘을 왕복할 여객선을 한 척 만들어주마.”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 서남아시아에서 시작된 종교가 많았다. 그래서 성지도 이 부근에 집중됐다. 이 지역을 장악한 이슬람교도들은 기독교와 유대교를 형제 종교로 인정하기 때문에 두 종교의 신자들이 순례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심지어 메카에는 유대인 두 종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성지 순례를 핑계로 여러 지역과 통교를 하는 것도 좋은 일이었다. 홍해와 수에즈만이 좁고 길기 때문에 주변 지역이 안정되지 않으면 운하 자체가 막힐 우려가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다. 수에즈 운하로 이어지는 지역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고산국이 군사적 개입을 할 각오도 하고 있었다. 물론 오스만제국과 협의를 통해야 하겠지만,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충돌할 가능성도 전혀 배제하지 않았다.
“저에게도 드디어 일이 생기는군요. 옷 입는 일 말고 사업이요.”
“부러웠어? 나는 너희들이 궁성과 후원에서 편하게 지내길 바랐는데.”
“그것도 좋지만 일하는 재미가 있어요. 특히 주인님 밑에서는요.”
혜영과 혜진에게는 일이 너무 많아서 문제였지만, 갈라티아 궁녀들에게는 일이 없어서 문제였다. 그래서 파티마에게 너무 열심히 하지 말고 적당히 일하라고 일러두었다. 요즘 들어서 브루나이 공주들의 몸이 점점 말라가서 옆에서 보기에 안타까울 정도였다.
다음 날 저녁 수에즈에 도착했다. 건설 중인 수에즈 운하 남단의 항구도시는 지금은 운하 공사 때문에 몰려온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한 회 더 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기다리지 마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