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81 49. 1598년 =========================================================================
그 사이 고운 모래에 바퀴 윗부분까지 잠긴 장갑차에 밧줄을 걸어 다른 장갑차가 끌어당겼다. 지형 적응이 안 된 상태로 투입했다가 장갑차의 첫 데뷔 무대를 완전히 망치고 말았다.
문제는 또 있었다. 미세한 모래가 장갑차 엔진에 들어가 두 대가 말썽을 일으켰다. 엔진을 다 뜯어서 세척해야 될 정도로 못 쓰게 된 장갑차도 한 대 있었다. 장갑차 수리 책임자로 따라온 장인이 이민호 앞에서 죄를 청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어때요. 잘 보셨소?”
“황공하옵니다, 전하. 전하께서 미리 경고하셨는데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저희 장인들이 그 동안 우물 안 개구리였습니다.”
물론 사막이라도 부드러운 모래만 쌓인 곳은 극히 드물었다. 사막에 일반적으로 분포한 돌밭이나 황무지, 또는 단단히 굳은 지반 위에 쌓인 모래밭이라면 장갑차들이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막에서 제대로 활약하려면 이런 모래사막에도 들어가야 하니 바퀴 두께를 넓히거나 무게를 줄이는 개조를 하는 등 노력이 필요했다. 진흙탕이나 극한의 혹한으로 윤활유가 얼어붙는 곳에서 전투를 수행해야 할 수도 있으니 그에 대한 대비도 필요했다.
“이 정도면 됐다고 안심하지 말고 앞으로 여러 곳에서 시험해보시오. 군인 목숨을 아끼기 위한 장비가 장갑차요. 장갑차가 못 움직이는 곳은 아까운 젊은 군인들이 몸으로 때워가면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오.”
“열사의 사막이나 눈보라가 몰아치는 북극에서도 활동할 수 있게 뜯어 고치겠습니다.”
“군용 장비가 투박하면서도 민수용보다 비싼 이유가 바로 그것이오. 여러 기후 조건에서 제대로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것은 결코 비효율이 아니오.”
그 동안 다른 나라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력한 무기를 만든다는 자부심에 넘치던 국방연구소 장인들에게 이민호가 오랜만에 잔소리 좀 해줬다. 사실 이 시대 기술 수준에서 저 정도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지만, 기후나 지형에 따라 쓸모없을 수도 있는 무기를 보유한다는 것은 자존심 상할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민호가 5인치 함포에 맞아도 끄떡없고 수륙양용도 되는 만능 무기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전하! 도적들의 근거지를 초토화시키고 돌아왔습니다.”
“수고했다. 어땠어?”
나머지 순양함들과 수송선들이 기차에 실려와 다시 수로에 내리는 동안 유목민 마적들의 근거지를 치러 갔던 기병 중대가 돌아왔다. 중대장은 유목민 마적 300여 명을 사살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적지라서 전과 확인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확실한 사살 전과만 보고했기에 마적 사상자를 두 배 이상으로 잡아도 무방했다. 이 정도면 향후 몇 십 년 동안 이 일대에서 마적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다른 부족 남자들이 수에즈 운하에서 일하는 동안 약해진 주변 마을들을 약탈하는 마적 집단이 된 것 같습니다. 포로로 잡혔던 여자와 아이들을 말과 낙타에 나눠 태워 고향 마을에 돌려보냈습니다. 전하의 허락도 없이 전리품 중에 일부를 그들에게 귀향비로 지급한 점을 이해해주십시오.”
“잘했어. 당연히 그래야지. 물어볼 것도 없어.”
전리품이랍시고 기병 중대가 가져온 것은 금화와 은화 외에도 황금 촛대, 순금 찻잔과 수저, 은쟁반, 은주전자 등 아랍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귀금속 제품들이었다. 기병 중대가 말에 싣고 온 것만으로 수십 상자나 돼서 기병들뿐만 아니라 함대의 모든 승조원에게 수당을 충분히 지급하고도 제법 많이 남았다. 나머지는 유럽에서 선물용으로 쓸 계획으로 남겨두었다.
“와! 사람 많다.”
이민호가 마치 놀이공원에 온 아이처럼 감탄했다. 다시 모인 함대는 수에즈 운하 북단에 도착해 나일 삼각주의 동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사이드 항구에 정박했다. 항구에 정박하거나 오가던 수많은 배에서 상인과 선원들이 나와서 잠시 넋을 잃고 구경했다. 그들이 생전 처음 보는 엄청난 크기였기 때문이다.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순양함들을 구경하러 몰려오는 사람들에게 이민호가 손을 흔들어주었다. 오늘 일이 역사의 한 장면을 장식하는 큰 사건이라는 사실을 아직은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수에즈 운하 북단 항구가 앞으로 얼마나 발전하게 될지 이들은 아직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국왕폐하!”
이민호가 국왕좌승함에서 내리면서 이집트 재정관과 이집트 주둔 예니체리 동부 군관구 사령관의 영접을 받았다. 이집트 재정관은 수에즈 운하 건설 사업에 고용된 현지인 노무자들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일을 대리하고 있었다. 재정관은 노무자들이 받을 임금에서 세금을 조금 떼고 지급했지만 수천 년 전부터 임금을 받고 피라미드를 만든 이집트인들에게서 임금을 아예 착복하는 일은 없었다.
빨간 옷을 입고 머스킷 개머리판을 땅에 짚은 예니체리 총병들과 사슬갑옷을 입은 나머지 병종의 병사들이 길 양쪽으로 도열한 가운데, 세계 최초의 군악대라는 메흐테르가 세 종류의 북을 치고 트럼펫 비슷한 보루를 불어 이민호의 이집트 방문을 환영했다. 사슬갑옷을 입은 예니체리 병사들이 모스크의 돔처럼 생긴 황금빛 투구를 쓰고 총병은 천으로 만든 뒤로 접힌 모자를 쓴 반면 사령관은 마치 싹이 자란 양파를 머리에 얹고 다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다들 콧수염을 비슷하게 길러 이민호가 보기에는 똑같이 생겼다.
그 동안 투자한 뇌물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투르크 족 재정관과 백인 예니체리 사령관은 자기네 황제보다 이민호를 더 높이 떠받들었다. 이들에게 뇌물을 조금만 더 쓰면 고산국이 이집트를 날로 먹을 수 있겠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착각이 아닐지도 몰랐다.
“이집트 동부 군관구의 모든 예니체리 형제들은 고산국 국왕폐하를 경애하고 있습니다. 국왕폐하께서 명령만 내려주시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습니다.”
“쿨럭! 친선과 우호도 좋지만 그대는 오스만제국 소속이오.”
“수에즈 운하 공사가 시작된 이후 이집트의 실질적인 지배자는 고산국 국왕폐하이십니다. 운하 공사장 경비에 동원된 예니체리 부대는 고산국 공조 참판께서 직접 지휘하셨습니다.”
“듣기 좋은 말이지만 과한 것 같소.”
이민호는 사령관이 괜히 아부하는 소리라고 치부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예니체리 군관구 사령관의 말이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민호는 한참 동안 고민하게 됐다.
예니체리가 명목상 오스만제국 황제의 노예이며 황제를 아버지처럼 존경하도록 교육 받았다지만, 그들을 예니체리로 선발한 황제는 이미 몇 년 전에 죽었다. 오스만제국 황제에 대한 예니체리의 불온한 사상은 오래 전부터 이미 태동되고 있었다.
“기마 수십 기가 접근합니다!”
“맘루크 거지 놈들입니다.”
재정관과 사령관이 새로 오는 자들을 노골적으로 경멸했다. 그들이 말한 것처럼 맘루크 기병들도 항구로 몰려들었다. 한때 맘루크가 몽골군과 십자군을 격파해 무슬림의 영웅으로 떠올랐다지만 화약무기를 앞세운 예니체리는 감당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예니체리는 황제가 보낸 주둔군에 불과했고, 맘루크는 이집트에서 실권을 쥔 지배층이었다. 만약 이집트에 정치적 상황 변화가 온다면 이집트에 동화된 맘루크는 남고 예니체리는 오스만제국 본토로 쫓겨나게 되기 쉬웠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맘루크는 이집트 독립 과정 중에 오스만제국에서 파견된 총독에 의해 철저히 숙청당했다.
“폐하! 전령을 카이로에 보냈으니 베이가 곧 도착할 것입니다. 불편하시더라도 며칠만 기다려주십시오.”
“이집트 총독을 만나고 싶지만 약속한 시간이 다가와서 안 될 것 같소. 안타깝지만 총독에게 인사나 전해주시오. 총독과 맘루크의 두 가문이 보내는 편지는 언제든 환영하겠소.”
“그러시다면 더 이상 붙잡지는 않겠습니다. 저희 맘루크 가문들은 항상 고산국 국왕폐하의 건승을 기원하며, 영원히 같은 편임을 알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공조 참판이 도대체 얼마나 뇌물을 뿌렸기에 이집트에서 예니체리와 맘루크가 이민호에게 충성 경쟁을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호위들도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날 밤을 웬만한 나라의 궁전과 비슷한 사령관의 관저에서 지내고 호화로운 연회에 초청받았다.
이민호는 나중에 뇌물 지급 목록을 보고 나서야 조금 이해하게 됐다. 단순히 고산국 생산 원가나 수출 가격으로 생각했다가 그 동안 평가를 잘못했다. 고산국에서 수출한 물건 값이 홍해와 이집트 지역에 와서는 최소 다섯 배 이상으로 뛰어올랐기 때문이다. 특히 고산국 남부에서 생산한 향신료는 수출하지 않고 국내용으로 사용하거나 이렇게 선물용으로 소비하는데, 이 지역의 시장 가격으로 따지면 엄청난 금액이었다.
“과분한 영접에 당황했는데 이제 보니 그 정도는 해야 마땅할 것 같소.”
“그렇습니다. 전하께서는 저들의 환대를 편히 즐기셔도 됩니다.”
“참판은 이대로 공사를 마친 다음 운하 운영자들을 확실히 교육시키시오.”
파나마 운하와 달리 수에즈 운하는 갑문이 필요 없어서 운영하기 훨씬 간단했다. 전기를 소모하는 가로등을 수로를 따라 세우지도 않았다. 수에즈 운하에 두고 가는 장비라고는 소형 예인선 달랑 네 척이 전부였다.
운하가 개통되면 기관차를 회수해가는 것은 물론 선로도 다 뜯어갈 예정이었다. 공사가 끝난 이후에는 운하 옆길 철로가 필요 없기도 했지만, 150km나 되는 복선의 철도에 사용된 선로를 북미 북동쪽에 가져가면 단선으로 300km나 깔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온대 아예 수에즈 운하를 고산국 영토로 매입했어도 괜찮지 않았나 싶습니다만. 사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모후 사피예 술탄이라면 충분히 황제를 설득해낼 것입니다.”
“나도 그 생각은 해봤소. 그러나 만약의 경우 고산국 영토가 외국군에게 침범 당하거나 한동안 점령되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소.”
운하 주변을 고산국 주권이 미치는 영토로 설정했다간 괜히 주변국들 싸움에 말려 들어가게 될 우려가 있었다. 그리고 2차 중동전 때 영국과 프랑스가 수에즈를 침공했던 것처럼 고산국은 명분이 있다고 생각할지라도 다른 나라들이 인정하기 어려웠다.
마치 포르투갈이 마카오를 조약에 규정된 반환시기 이전에 중국으로 넘기려 했듯이 영토주권은 서로가 인정해주는 편이 좋았다. 강하다고 약한 나라 영토에 욕심을 냈다간 다른 나라들이 경계하게 되니 좋을 것이 없었다.
“드디어 지중해다!”
다음 날 새벽 함대가 수에즈 운하 북쪽의 항구를 출항했다. 다음에 올 때는 운하를 통과하려는 무역선들이 항구를 가득 메우길 기대했다.
시간이 남으면 예루살렘이나 카이로를 구경하고 싶었지만 이민호는 하루에 은 만 냥짜리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이민호는 시간은 금이라는 말에 절실하게 공감했다.
“콘스탄티노플은 안 들르시나요? 황제가 언제든 들러달라고 요청했잖아요.”
“에게 해에 섬이 너무 많아서 자신이 없어. 나중에 측량을 마치면 한 번 가보려고.”
이민호가 파티마의 귓가에 흐른 머리칼을 뒤로 넘겨주었다.
“그때 저도 같이 가요. 예루살렘에도 가요.”
“물론이지. 여행사 사업할 준비하는 거야?”
“예. 헤헤!”
이민호도 뭔가 사업을 시작할 준비를 하는 기간이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일이 많아지면 도망가고 싶어진다. 이번에 에스파냐 국왕의 조문을 핑계로 유럽에 오긴 했지만 외교보다는 일종의 휴가에 방점이 찍혔다.
- 함내 총원 전투준비! 전하! 함교로 와주십시오. 해적선입니다! 이슬람 해적선 두 척이 베네치아 상선을 약탈하고 있습니다.
늦은 오후 시칠리아에 가까운 바다를 지나는 중에 함장이 함내 방송을 통해 이민호를 불렀다. 옛날 같으면 당연히 이슬람 해적을 물리치고 베네치아 배를 구출해줬겠지만, 현재는 오스만제국이 고산국의 우방이었고 베네치아는 전혀 상관없는 나라였다. 함장이 해적이라고 했어도 지중해의 이슬람 해적은 오스만제국의 사략선이 대부분이라서 함부로 공격할 수도 없었다.
“함대를 200미터까지 접근시키게.”
베네치아 상선은 요즘 들어서야 지중해에도 도입되고 있는 범선이었다. 이슬람 해적선들은 날렵한 갤리선 한 척과 베네치아 갈레아스 비슷하게 만든 포함 한 척이었다. 함수에 원형 포탑이 위치한 갈레아스는 베네치아가 먼저 만들었지만 레판토 해전 이후 오스만제국에서 대량으로 복제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베네치아 상선의 상갑판을 거의 점령한 이슬람 해적들이 고산국 함대의 접근을 알아차리고 놀랐다. 그러나 해적들은 순양함 마스트에 게양한 태극기를 발견하고 오히려 함성을 질렀다. 우방국 함선들이 자기들을 도와주러 왔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끙! 인도양만 됐어도 해적질을 이유로 혼쭐을 내겠지만, 지중해에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군.”
함대를 세워두고 이민호는 해적들이 상선을 약탈하는 것을 그저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저항하던 베네치아 병사들과 선원들 대부분이 살해되고 민간인들 중에서 남자들도 죽음을 당했다. 해적들이 화물과 여자들을 어깨에 짊어지고 해적선으로 운반하는 도중 찢어질 듯한 여자 비명소리를 듣고 이민호가 결단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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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일은 없고 대체로 여행기 같은 내용입니다.
당시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국제 상황이 주로 묘사됐습니다. 곧 스페인에 도착합니다.
감사합니다.